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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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현대인이 영성생활에서 부딪히는 공통된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소란에서 침묵으로 넘어가는 일이다.
유치한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으로,
줄줄이 이어진 성상과 성화(聖畵)에서
덤덤하고 소박한 성체로, 감미로운 신심에 도취하는
내심 낙원에서 사람들을 위하고 받드는 사랑으로,
위풍당당한 전례 행렬에서 대도시의 비참한 아스팔트 거리고 옮겨가는 일이다.
비신화화와 세속화라는 적나라한 현실 앞에서
놀라고 당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
성상을 어루만지고 성물에 입맞추기를 즐기던 사람들은
성상이 치워지고 교회 달력이 바뀌면 크게 실망한다.
하느님이 이제 어디 계신다는 말인가?
용과 싸우는 제오르지오 성인의 그 성스러운 그림을 창고에 처박을만큼
정신나간 보좌신부가 왔으니,
이러다간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러나 위기가 심한 곳은 뭐니뭐니 해도 기도이다.
아무런 감흥도 못 느낀다!
아무런 효험도 못 본다!
'느끼고' '보는' 데 길들여진 그리스도교, 감상주의와 기적 위에 세워진 신심...
우리가 흔히 보아온 모습이기는 하다.
그 많은 성지며 성소(聖所)들은 그런 신심을 환영하자고 세워졌다는 생각마저 든다.
현대세계와 기술공학과 사회 홍보수단이
신화를 무너뜨리고 종교에 감추인 유치한 면모를 들춰 보이고
자연의 법칙들을 밝혀낸 지금,
모든 것이 동요하고 모든 것이 붕괴되고 있다.
말 그대로 "나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하나 그것도 신앙이었을까?
신앙이라면 신앙이었겠지. 그러나 다분히 미신이 섞인 신앙이었지.
그대의 신앙에서 미신을 다 털어내고 나면
그것은 더는 지탱하지 못하는 절름발이 신앙이 아닐까?
참 신앙는 느낌이 꼭 필요치는 않다. 믿는 것이다.
성숙한 신앙은 침묵으로 자란다. 소란스러운 달변으로 커가는 것이 아니다.
관상과 기도로 자란다. 이상한 기적으로 커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란다. 미신으로 커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그 어른을 도저히 감지(感知)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 어둠에서 헤어나려면 묵시록의 깜빡거리는 등불만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가?
자, 그대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을 말해주겠다.
피조물을, 삼라만상을 보고 느끼도록 하라.
왜 그대는 천 위에 그려진 성모님의 눈썹에 이슬방울이 맺혔다고 소란을 피우면서
이른 봄의 아침 이슬은 볼 줄 모르는가?
왜 그대는 어느 성상이 몇 뼘 옮겨앉았다고 깜짝 놀라면서
저 천체들의 신비로운 운행에는 눈을 크게 뜨지 않는가?
왜 어느 수사, 수녀의 손바닥에 나타난 상흔을 보려고 수백 리 수천 리는 달려가면서
그대 눈앞에 내미는 가난뱅이의 손바닥은 들여다볼 줄 모르는가?
먼저 삼라만상에서 하느님을 감지하라.
그대의 하루를 비춰주려 동녘에 솟아오르는 태양의 아름다움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우심을 알아보라.
그대의 곁을 지나가면서 그대와 허물없이 사귀고 싶어하는 형제의 목소리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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