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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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동안은 그 어른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그 어른이 잠자코 계시면 소름이 끼치는 것이 우리 인간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떻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사물과 인간의 관계를 얘기해보자.
인간은 노동으로 사물을 제조하고, 선으로 그것을 완성시키며,
일상생활로 그것을발전시켜야 한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두 주인공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당신이 계시고 아버지가 계시다.
하느님이 계시고 인간이 있다.
두 인물이 다 일한다.
예수님의 삶에는 아버지의 현존이 한결같았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숨기지도 않으셨고 잊지도 않으셨다.
그분을 늘 뵙고 있으셨다.
아버지 앞을 피하지 않고 애써 찾아다니셨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요한 16,32).
"아버지,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주시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선 사람들을 생각해서... 이 말을 합니다"
(요한 11,41-42참조).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친밀과 끊임없는 만남,
희망과 대화와 사랑이 얽힌 생활의 놀라운 기록을 보려면
요한복음을 읽는 것으로 족하다.
그분은 인간을 위해,
우리 각 사람을 위해 별난 분이 되셔야 하지 않았을까?
예수님이야말로 완전한 인간, 유일무이한 모범, 맏이가 아니셨을까?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일은 우리 각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거나 장차 일어날 것이다.
그분은 맏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모든 이가 입양을 통해 맏아들의 본성을 이어받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가 뜻 그대로 형제간이며, 아버지께서 만드신 사랑의 설계를 이루고자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분의 피로 구속받은 거대한 무리이다.
그렇다. 예수님처럼 하는 것이 상책이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끊임없이 만나셨듯이 우리도 아버지와 친교를 맺어야 한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말씀을 나누셨듯이 우리도 아버지를 모시고 말씀을 나눠야 한다.
사랑에도 대화에도 두 개의 극이 있으며 또 있어야 마땅하다.
둘 중 하나가 배제되는 거기에 죄악이 성립한다.
현실에서 인간을 제외하고 만사가 하느님 손으로 된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그러나 인간 혼자서 한다는 생각에 하느님을 제외한다면 더 큰 잘못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막연한 추상적 존재들간의 얘기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인격체와 인격체간의 이야기다.
나도 인격체요 하느님도 인격체다.
성삼위에 비추어 본 그리스도교 인격주의는
신앙을 공허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환원시키지 못하게 한다.
하느님과의 친밀을 추구하면 할수록 하느님이 인격신이심을 체득하게 된다.
아버지는 예수님과 다른 위격이시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이 점을 매우 분명 하게 이야기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내게 정말 빛의 샘이 되어준다.
아브라함이 "네 고향... 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하는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한 인격체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을 벗어라."(출애 3,5)
하는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하느님의 현존을 한 인격체로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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