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번역 하섭내

제2장 내맡김과 수동적 상태에서, 그리고 그 상태에 이르기 전에 역사하시는 방식

은가루리나 2018. 8. 2. 11:42


p.27



제2장


내맡김과 수동적 상태* 에서, 

그리고 그 상태에 이르기 전에 역사하시는 방식 




   영혼이 하느님 안에 살 때가 있고,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사실 때가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시간 중 하나에 고유한 것은 다른 것에 반(反)합니다.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사실 때에는

영혼은 그분의 섭리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반면, 영혼이 하느님 안에 살 때에는, 

영혼은 하느님과의 합일을 이루기 위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을 

정성을 다해 매우 규칙적으로 준비합니다. 


그의 독서, 그의 자기 분석, 그의 자기반성과 같이 

그가 걸어 갈 모든 길에는 이미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그의 안내자는 늘 그의 곁에 있으며, 

심지어 말을 해야 하는 시간까지, 모든 것이 정해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사시면, 

영혼은 더 이상 그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영혼은 단지 자신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원리이신 하느님께서 

그때그때 자신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만을 소유할 뿐입니다. 


따라서 

미리 주어진 것도 전혀 없고, 나아갈 길도 전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영혼은 우리가 데려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갈 수 있고, 

우리가 그에게 보여주는 것들을 식별하기 위해 

단 하나의 감각능력만을 가진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이 영혼을 위한 지침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아주 빈번히 그는 정해진 영적 지도자 없이 지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영혼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떠한 것에도 기댈 수 없도록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암흑과 망각, 포기와 죽음 그리고 허무가 영혼의 거처입니다. 


영혼은 자신에게 언제 어디로부터 구원의 손길이 오리라는 것을 모른 채 

그저 자신에게 결핍된 것과 자신의 비참함만을 느낍니다. 


영혼은 걱정하지 않고 평온한 마음으로 

누군가 자신을 도우러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오로지 하늘만을 응시할 따름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만으로 존재하기 위해 

자기 존재의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하는 이 신부의 태도보다 

더 순수한 것은 없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적절한 때에 이 신부에게 책들, 생각들, 그녀 자신에 대한 자신의 시각, 

의견들, 충고들, 모범이 되는 현자들을 보내 주십니다. 


다른 이들은 온갖 정성을 기울여야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 영혼은 자신을 버림으로써 받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마음이 내킬 때 되찾아가기 위해서 주의 깊게 간직하는 것을 

영혼은 필요할 때에 받으며, 

하느님께서 그것을 통해 주시고자 하는 것만을 분명하게 받아들이면서, 

하느님만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것을 방치합니다. 


p.28


   다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무한히 많은 일들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 영혼은 사람들이 어디에도 쓸모없다고 여겨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깨진 항아리 조각처럼 

종종 한쪽 구석에 내동댕이쳐져 있습니다. 


거기에서, 피조물들로부터 버림받은, 

그러나 매우 실재적이고, 매우 참되며, 

휴면(休眠)중임에도 

매우 활동적인 그런 사랑으로 하느님을 향유하는 이 영혼은 

그 무엇 하나 자발적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가 아는 유일한 것은 

하느님께서 바라는 방식으로 그분을 섬기기 위해 

그분의 손안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그는 자신이 무엇에 소용되는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그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데, 

외양이 이러한 판단을 부채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혼이 숨겨진 능력과 미지의 경로를 통해, 

종종 자신들이 이 영혼으로부터 받게 될 은총에 대해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그리고 영혼 역시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은총을 널리 베풀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고독한 영혼들 안에서는 

모든 것이 효과적이고, 모든 것이 복음을 전하며, 모든 것이 사도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침묵과 휴식과 망각과 초연함, 그리고 그들의 말과 몸짓에 

다른 영혼들 안에서 작용하게 될 어떤 미덕을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피조물들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영혼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하느님의 은총이 이 수많은 피조물들의 우연한 행동들을 통해 그들을 이끌듯, 

영혼들도 마찬가지로 여러 영혼들의 지도를 지원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 일과 어떤 명시적인 연관도 없고 

또 그런 일을 하겠다는 어떤 약속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이 영혼들 안에서 자주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움직임을 통해 활동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 이 영혼들은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는 하느님의 비밀스런 능력을 보여주셨던 예수님을 

닮았습니다(루카 6.19, 8.46 참조.).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6,1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다. 나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나는 안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8,49)



이 영혼들과 예수님 간에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자주 이러한 능력이 자신들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고, 

더군다나 그런 일들에 대한 기여가 

전혀 그들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알지는 못하지만 느낄 수는 있는, 

그리고 그것 스스로는 자신의 효력을 알지 못하는 

숨겨진 연고(軟膏)와 같습니다. 



p.29    00000000000 임의의지


   제가 보기에 이 영혼들의 내맡김의 상태는 

예수님, 성모님, 성 요셉의 내맡김의 상태와 더 많이 닮았습니다.**


따라서 이 상태라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하느님의 원의(願意)에 따라 움직임으로써, 

존재하고 행동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원의에 의존하고 

지속적으로 수동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상태라 함은 

하느님의 원의(願意)에 의존하고, 

존재하고 행동함에 있어 지속적으로 수동적 태도를 유지하며, 

하느님의 원의(願意)에 의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알 수 없는 그분의 뜻, 

우연과 조우에 대한, 말하자면 모험에 대한 그분의 뜻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는 이것을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수행해야 하는 명백한 의무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뜻과 구별하기 위해, 

이 명시적이고 결정적인 확정적인(결정된) 하느님의 뜻과는 별도로, 

순수한 섭리로서의 하느님의 뜻이라 부르고자 합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이 영혼들은 

제가 순수한 섭리라고 명명한 하느님의 다른 뜻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들의 삶은, 비록 매우 남다르다 할지라도, 

그저 평범하고 매우 일상적인 면만을 보여줄 따름입니다. 


이들은 종교상의 의무와 자신들의 신분에 따른 의무를 수행하는데, 

다른 이들도 겉보기에는 이들과 별반 다름없는 그들의 의무를 이행합니다. 


그 외의 다른 것에 대해 이들을 관찰해보아도, 

뭔가 눈에 두드러지거나 특별한 것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이들은 전부 일상 사건들의 흐름 속에 놓여 있고, 

이들을 다른 이들과 구별시켜 줄 수 있는 뭔가 분명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느님의 지고한 뜻에 대한 이들의 이 끊임없는 의존이 

이들을 위한 모든 것을 마련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이들의 마음을 습관적으로 순종케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늘 극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들이 하느님의 뜻에 특별히 협력하든, 

그걸 알아채지 못한 채 이 뜻에 순종하든 간에 상관없이, 

이 뜻으로 말미암아 이들은 다른 영혼들을 위한 일에 쓰이게 됩니다.   //영광의 도구//


p.30     ============================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극도의 무미건조함과 무용(無用)함의 외양을 띤 일에는

명예도 소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외적 책무로부터 벗어난 상태에 있는 이 영혼들은 

세속적인 거래나 사업, 가식적인 배려, 교활한 사고나 처신에 

그다지 적합하지가 않습니다. 


이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으며, 

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약한 육체와 정신, 빈약한 상상력, 부족한 열정뿐입니다. 


이 영혼들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예상치 못하고, 아무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 영혼들은 천연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혼들에게서 문화, 학습, 사고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자질들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교육을 맡은 스승들의 손을 거치기 이전에 

자연이 이 아이들에게 베풀어준 모습을 이들에게서 봅니다. 


우리는 이들의 미미한 결점들을 알아차리는데, 

이 결점들로 인해 이들이 아이들보다 더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것들을 이 결점들을 

아이들에게서 발견하는 것보다 이들 안에서 보게 될 때 

한층 더 놀랍니다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이 영혼들로 하여금 당신 한 분만을 소유하도록 하기 위해, 

순진무구함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이들에게서 박탈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비를 전혀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단지 겉모습에 비추어서만 이들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들에게서 

자신들이 좋아하거나 높이 평가하는 것을 그 무엇 하나 발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배척하고 멸시합니다. 

심지어 영혼들은 모든 사람들의 표적처럼 되기도 합니다.  


이 영혼들을 좀 더 가까이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이들을 더욱더 낯설어하고, 이들에게 더욱더 반감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 뭐라 말해야 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들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본능적 직관을 따르거나, 

아니면 최소한 자신의 판단을 보류하는 대신, 

자신의 악의를 따르기를 선호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몰래 감시해서 

자기들 식으로 그들에 대해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바리사이파인들이 예수님의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 영혼들을 심히 편견에 찬 시선으로 주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들이 하는 모든 일이 어리석어 보이고 죄를 범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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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슬픈 일입니다! 

이 가엾은 영혼들 스스로도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나쁜 면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저 소박하게 믿음과 사랑만으로 하느님과 결합한 이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온갖 예민한 것을 마치 무질서 속에 있는 것인 양 바라보는데, 

이런 점은 이들이, 

성인으로 간주되는 사람들, 

게다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규율과 방침들을 따를 수 있는 까닭에 

자신들의 전 인성과 일련의 행위 안에서 이미 규칙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는 그런 사람들과 

자신들을 비교하게 될 때에 

한층 더 그들 자신에 대해 반감을 품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혼란스러워 하고 

그런 모습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들의 마음속을 온통 채우고 있는 엄청난 고통과 비탄의 표시인 

이 한숨과 탄식을 이들의 폐부로부터 끌어내는 요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었음을 기억합시다. 


그분은 인간으로서 멸망 당하셨지만, 

하느님으로서는 더없는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 영혼들은, 그분의 영광에는 참여하지 못한 채, 

다만 자신들 안에서 이 죽음과 멸망만을 느낄 뿐인데, 

이것이 이들 안에서 작용하여 이들의 슬프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만들어 냅니다. 


세상 사람들은 헤로데 왕과 그의 신하들이 자신들 앞에 서있는 예수를 바라보듯 

이들을 바라봅니다.  




p.31  --------------------


   저는 이 모든 점으로부터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긴 이 영혼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욕망이나 탐구, 배려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하는 결론을 

쉽게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도, 어떤 계획에 가담할 수도 없고, 

말과 행동과 독서에 있어 미리 계산된 

어떤 체계적인 방식을 갖거나 계획을 세울 수도 없다고 말입니다. 


만일 이들이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영혼들이 아직도 자기 마음대로 처신해도 될 만큼 자유롭다는 것을 

전제로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제는 이들이 처한 내맡김의 상태 그 자체에 의해 배제됩니다. 



이 내맡김의 상태란 자신의 모든 말들과 행위들, 

자신의 생각들과 방식들, 자신의 모든 시간들의 사용과 있을 법한 모든 관계들, 

한 마디로 말해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의 모든 권리 전체를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놓음으로써 

그분께 속한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완수해야 할 유일한 바람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인으로 섬기는 분께 항상 시선을 고정하고,

끊임없이 그분께 귀를 기울이는 것인데,

이는 그분의 뜻을 짐작하고 알아듣고 또 그 뜻을 당장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입니다. 


어느 순간이든 온전히 주인에게 헌신하기 위해 포기해야만 하는 자신의 일에 

자신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할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 순간 주인 곁에서 주인이 즐겨 그에게 내리는 명령에 

그저 복종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하인의 처지보다 

이 상태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영혼들은 이처럼 원래 고독하고 자유로우며, 

모든 것을 면제받았기에, 

그들을 소유하시는 하느님을 평온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결과와 원인 그리고 이유에 대한 어떠한 성찰**** 이나 반성, 검토를 함이 없이 

그분의 명시적인 뜻에 따라 현재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들에게는, 마치 이 세상에 하느님과 이 절박한 의무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순수한 의무를 향해 단순 소박하게 나아가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 순간은 사막과도 같으며, 

단순한 영혼은 거기에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하느님만을 향유하며,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는 일에만 전념합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방치되고 망각되고 섭리에 맡겨집니다. 


p.32----------------------------------------------------------------------------------여행


   도구로써의 이 영혼은 

하느님의 은밀한 작용이 그 안에서 그를 수동적으로 몰두케 하거나 

또는 그를 외적 활동에 전념케 하는 바로 그 만큼만 받아들이고 행동합니다. 


이러한 내적 전념에는 

그의 편에서의 자유롭고 능동적인, 

그러나 주입적(注入的)이고 신비주의적인 협력이 수반됩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에게 명령을 내릴 경우, 

그의 바람직한 태도에 만족하신 하느님께서는 

명령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찾으셔서 

그를 대신해 결실을 맺어주심으로써 

영혼의 수고를 덜어주십니다. 


만일 그분께서 그렇게 해주시지 않으신다면, 

영혼은 자신의 노력과 선의를 경주(傾注)함으로써 이 결실을 맺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 친구를 본 누군가가, 

친구를 도와주기 위해, 

바로 그 친구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 그 친구 모습을 하고, 

그러나 그 자신의 활동으로 길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 결과 이 친구에게 남겨진 일이라고는 걸으려는 의지를 갖는 것뿐이고, 

반면에 그는 친구를 대신해 이 낯선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이 여행은 자유로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친구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른 것이고, 

누군가가 이 친구를 대신해 여비를 치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행은 능동적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실제로 걷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행은 주입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친구 자신의 고유한 활동 없이 행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이 여행은 신비주의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여행의 원리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p.33


   그런데 이 가상의 여행을 통해 

우리가 설명하고 있는 은총의 성격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 협력이 일상적 책무에 대한 복종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책무들을 완수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은 

신비주의적이지도 주입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 자유롭고 능동적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원의(願意)에 순명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고 수동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바라면서 또한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습관적인 보편적 선의를 제외하고는, 

거기에 자신의 어떤 노력도 들이지 않습니다. 


마치 장인의 손에 들어간 순간부터 

자기 특유의 활동을 멈춘 도구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 도구는 자신의 본성과 자신의 자질이 미치는 모든 용도에 사용됩니다. 


반대로, 

명시적이고 확정적인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이를 눈에 띄게 도와주느냐 

아니면 일상적인 노력에 맡겨버리느냐에 따라서, 

경계하고, 배려하고, 관심을 갖고,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는 

평범한 상태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자신을 위해서는 

현재의 의무에 대한 사랑과 순종만을 간직하고 

- 이 점에서 영혼은 언제까지나 행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대로 내버려 둡니다. 


침묵 속에 녹아든 영혼의 이 사랑은 참다운 행위로써, 

그는 이것을 자신의 영원한 책무로 삼습니다. 


사실 영혼은 이 사랑을 끊임없이 간직해야 하고, 

이 사랑으로 인해 취하게 되는 태도를 계속 견지해야 하는데, 

이는 당연히 행동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현재의 의무에 대한 이러한 순종 역시 하나의 행위인데, 

영혼은 이를 통해 어떤 특별한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외적인 의지에 전적으로 자신을 바칩니다. 




   자, 이것이 바로 

이 영혼의 순수하고 단순하며 확실한 규칙이며 방법이고, 법이며 길입니다. 


이 불변의 법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상황에 적용됩니다. 


영혼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탈선하지 않고, 

그의 한계를 초과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용기와 신실함으로 이 곧은 선을 따라 걸어갑니다. 


이를 넘어서는 모든 것은 영혼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며 

영혼의 내맡김 속에서 행해집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영혼은 현재의 의무가 명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능동적이나, 

그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해서는 자신을 내맡기는 수동적 태도를 견지합니다. 


그리고 이 수동적 상태에서 

영혼은 평온한 마음으로 신의 움직임만을 기다릴 뿐 

그 외에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 단순한 길보다 더 확실한 길도 없고, 

이 길보다 더 분명하고, 더 용이하며, 더 감미로운 길도 없으며, 

이 길보다 과오와 환상으로 덜 이끄는 길도 없습니다. 


그 길에서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완수하며, 

성사를 자주 받고, 모든 이들에게 부과되는 외적인 종교 행위들을 하며, 

장상들에게 순종하고, 신분상의 의무를 완수하며, 

끊임없이 피와 살과 악마의 충동질에 저항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온갖 책무를 이행하는 데 있어 

그 누구도 이 길을 가는 영혼들보다 더 주의와 경계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p.34   ------------------------------------------------------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서 이 영혼들이 그리 자주 반대의 표적이 되는 것일까요? 


가장 일상적인 반대들 중 하나를 들자면, 

사람들은 이 영혼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처럼 

교회의 가장 엄격한 신학자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다 이행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이들로 하여금 

교회가 전혀 책무로 간주하고 있지 않은 

껄끄러운 신심 행위들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이들이 이에 동참하지 않으면, 이들을 환상에 빠져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대답해 보십시오. 


그저 하느님과 교회의 계명을 따르는 것에 만족할 뿐인 한 그리스도인이 

묵상이나 관상, 영적 독서를 하지 않고, 

또 영성지도를 특별히 추종함이 없이, 

세속적 거래와 시민적 삶에 필요한 여타 업무에 종사하는 것이 

잘못된 일입니까? 


우리는 이 사람을 이런 이유로 비난하거나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과 일치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방금 언급한 그리스도인은 가만히 두어야 합니다. 


최소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계명과 규정들을 완수하고, 

게다가 우리 자신은 알지조차 못하는 

(아니, 알았다 하더라도 무관심만을 보였을 뿐인) 

내적, 외적인 신심 행위까지 곁들여 행하는 이 영혼을 괴롭히지 않는 게 

공정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입견이라는 것은, 

교회가 명하는 모든 것에 순종하고 난 뒤, 

특별히 그를 강제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순간이면 

언제든 아무런 걸림돌 없이 하느님의 은밀한 역사(役事)에 자신을 내맡기고 

그분의 은총에 감도될 수 있도록 자유로운 상태를 견지한다는 이유로, 

이 영혼이 착각하고 있고 잘못하고 있다고 단언까지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유희와 덧없는 일을 하는데 쓰는 시간을 

이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쓴다는 이유로 그를 단죄합니다


이건 정말이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의가 아닙니까? 

이 점은 우리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 공동 대열이나 행렬에 끼어서, 일 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본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고, 그가 평화로이 살아가도록 놔둡니다. 


물론 기회가 닿을 경우 그에게 뭔가 좀 더 해보도록 권고는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에게 심한 압력을 가하거나 그에게 무엇을 의무로 과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공동 대열을 벗어나면서 변하기라도 하면, 

우리는 그를 규범, 행동지침, 방침들 따위를 가지고 못살게 굽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신앙의 기술이 정한 바에 매이지도 않고 책임도 지지 않는데다, 

이를 계속해서 따르지 않으면, 

결국은 우리가 그의 모든 것을 염려하고 

그의 모든 것에 의구심을 갖고 

그의 길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사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도대체 우리는 온전히 선하고 온전히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는 

이 신심행위들이 

결국은 하느님과의 합일로 인도하는 길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길의 끝에 도달했으면서도 여전히 길 위에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p.35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혼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가 환상에 빠지지나 않을까 우려하면서 말입니다. 


처음에 이 영혼은 다른 사람들처럼 길을 나섰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 신심행위들을 알았으며, 

이것들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는 

영혼으로 하여금 이런 행위들에 순종하도록 강요하려 들지만 

부질없는 일입니다. 


이 방법에 이 구원에 기대어 

당신께 나아가고자 하는 영혼의 노력에 감동을 받은 하느님께서 

그 앞에 친히 임하시어 

그를 이 복된 결합으로 인도하는 것을 당신의 일로 삼은 이후,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고자 하는 열망만이 존재하고 

사랑에 의해서만 비로소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는 이 아름다운 영역에 영혼이 도달한 이후, 

그리고 끝으로 

이 선하신 하느님께서 그의 근심과 노고를 대신하시면서 

당신 스스로를 그의 활동의 원리로 세우신 이후, 

이 방법들은 영혼에게 효용성을 상실했으며, 

영혼이 주파하고 난 뒤 

그의 뒤에 남겨진 하나의 길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영혼에게 이 방법들을 다시 취하거나 

이 방법들을 계속해서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그가 이미 도달한 목적지를 포기하고 

그를 그곳으로 인도했던 길로 다시 돌아가게 만들고자 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간 낭비를 하고 헛수고를 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이 영혼이 약간의 경험이 있다면, 

내적 혹은 외적으로 질타하는 소리들을 들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소음에 그다지 거의 충격을 받지도 않고, 

이 아우성에도 전혀 끄떡하지 않는 이 영혼은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이 너무나 유익하게 작용하는 이 내적 평화로움 속에 

어떠한 동요나 흔들림 없이 머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가 바로 그가 휴식을 취하게 될 중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몸소 내신 곧은길이고, 

그는 이 길을 계속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는 이 길을 한결같이 걸어갈 것이고, 

현 순간 그가 행해야 할 모든 의무들이 그 길에 나타날 것입니다. 


영혼은 이 의무들이 하나둘씩 나타남에 따라 

이 길이 명하는 바를 따르면서,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이 의무들을 완수할 것입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영혼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은총의 움직임이 감지되자마자 이에 순명하고 

섭리의 보살핌에 자신을 내맡길 준비가 늘 되어 있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p.36

    

   게다가 이 영혼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영성 지도를 덜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다른 사람들은 매우 훌륭하고 탁월한 영성 지도자들의 도움으로 

도움을 받아서만 거기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신들과 교류가 있는 사람들을 죽음이 앗아가거나 멀리 떠나보낼 때에도, 

단지 섭리에 의해서만 영혼들은 이 사람들의 부재를 절감합니다. 


설령 하느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내맡길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영혼들은 오로지 평온 속에서 섭리의 순간을 기다리며, 

그 다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따금 

영혼들은 잘 알지도 못하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은밀한 신뢰감을 느끼게 될 때가 있는데, 

이 감정은 

하느님께서 영혼들에게 무엇인가 결핍되었을 때에 불러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일시적인 방법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이들을 이용하여 

영혼들에게 몇 가지 깨달음을 전해주고자 한다는 표지입니다. 


그러면 영혼들은 이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이들의 조언을 아주 순순히 따릅니다. 


그러나 이런 도움이 없을 경우, 

영혼들은 그들의 첫 번째 영성 지도자가 전해준 규범을 충실히 이행합니다. 


이처럼 영혼들은, 

예전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구 원칙들에 의해서건 

또는 만남을 통해 얻은 이러한 조언들을 통해서건 간에, 

늘 매우 실제적으로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들은 자신들의 모든 속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주실 때까지 

만남을 통한 이런 조언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영혼들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위탁하여 인생길을 걷고 난 후 

이 세상에서 들어 올려집니다.





수동성 (passiveté) : 신비주의적 담화에서 “수동성”이라는 단어는 
하느님과 일체가 된 정화된 영혼의 순종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아레오 파고스의 디오니시오의 divina pati (“거룩한 일들을 체험하다”)에 대한 반향이다. 

이 단어는 17세기 동안, 통용어 속에서, 
점차적으로 무기력증, 의지 결핍증과 같은 경멸적인 의미가 내포된 현대적 의미를 취하게 되었다 
(신비주의적 관행에는 당연히 이런 의미는 내포되어 있지 있다). 

단어 형태 자체도 “passivité”로 변화되었다. 
이 원고에서 옛 형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와 같이 정의된 “상태 (l'état)”는, 개론서에서 종종 그렇게 나타나듯, 

그리고 베륄 (Bérulle)이 인정한 바와 같이, 

그것의 영적인 의미로서, 

예컨대 “내맡김의 상태”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상태”라는 이 단어는 

또한 매우 빈번히, “생활 형편”, “사회적 신분상의 의무”라는 표현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사회적 조건”, “직업”이라는 옛 뜻도 지니고 있다.   .




***하느님의 “원의에 따른” 혹은 “섭리에 따른 뜻”
이 뜻은 사건들 안에서 감추어진 형태로 나타난다)과 
하느님의 “명시적인 뜻” (이 뜻은 그분의 계명과 사회적 신분상의 의무를 통해 명백히 나타난다) 
사이의 이 중요한 구별은 성 프랑수아 드 살의 구분을 취한 것이다 
(신애론 Traité de l'amour de Dieu, 8권과 9권).



**** 영적 전통에 있어서, 

성찰 (réflexion)이라는 단어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원죄 이후 모든 인간적 활동에 결부된 자기반성, 자아와 자기 고유의 이해 추구

(amor sui, 자애심, “자기애”)를 가리킨다. 


성 베르나르 (Bernard)는 자기 자신을 향한 존재의 “휘어짐 (Incurvation)”이라고 말했다. 


“성찰”은 순수하고 사심 없는 사랑에 장애가 된다. 


그 상태 그대로의 성찰은

“내맡김”에 필요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탈출, 자발성, “단순함”에 반대된다. 


17세기 동안에 “성찰”이라는 단어는, 영성 문학 안에서, 점차적으로 

그 단어의 현대적, 심리적 의미의 영향을 받아 오염되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아이디어, 상황, 문제를 좀 더 심도 있게 검토할 목적으로 

생각을 생각 그 자체로 회귀시키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로베르 사전). 


현 개론서 안에서 발견되는 이 단어의 사용은, 

정신의 “세속화 (laïcisation)”에 전형적인, 이 점차적인 의미 변화를 보여준다. 


전통적인 신학적 의미는 여기에서처럼 통상, 배후에서, 지각(知覺) 가능하다. 


여하튼 저자는 생각하기를 멈추게 만들고자 하는 부조리로  생각하기를 멈추게 하는 쪽으로 비상식적으로 

여러분을 이끌지 않는다








p.27



제2장


내맡김과 수동적 상태* 에서, 

그리고 그 상태에 이르기 전에 역사하시는 방식 




   영혼이 하느님 안에 살 때가 있고,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사실 때가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시간 중 하나에 고유한 것은 다른 것에 반(反)합니다.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사실 때에는, 

영혼은 그분의 섭리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반면, 영혼이 하느님 안에 살 때에는, 

영혼은 하느님과의 합일을 이루기 위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을 

정성을 다해 매우 규칙적으로 준비합니다. 


그의 독서, 그의 자기 분석, 그의 자기반성과 같이 

그가 걸어 갈 모든 길에는 이미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그의 안내자는 늘 그의 곁에 있으며, 

심지어 말을 해야 하는 시간까지, 모든 것이 정해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사시면, 

영혼은 더 이상 그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영혼은 단지 자신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원리이신 하느님께서 

그때그때 자신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만을 소유할 뿐입니다. 


따라서 

미리 주어진 것도 전혀 없고, 나아갈 길도 전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영혼은 우리가 데려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갈 수 있고, 

우리가 그에게 보여주는 것들을 식별하기 위해 

단 하나의 감각능력만을 가진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이 영혼을 위한 지침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아주 빈번히 그는 정해진 영적 지도자 없이 지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영혼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떠한 것에도 기댈 수 없도록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암흑과 망각, 포기와 죽음 그리고 허무가 영혼의 거처입니다. 


영혼은 자신에게 언제 어디로부터 구원의 손길이 오리라는 것을 모른 채 

그저 자신에게 결핍된 것과 자신의 비참함만을 느낍니다. 


영혼은 걱정하지 않고 평온한 마음으로 

누군가 자신을 도우러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오로지 하늘만을 응시할 따름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만으로 존재하기 위해 

자기 존재의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하는 이 신부의  태도보다 

더 순수한 것은 없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적절한 때에 이 신부에게 책들, 생각들, 그녀 자신에 대한 자신의 시각, 

의견들, 충고들, 모범이 되는 현자들을 보내 주십니다. 


다른 이들은 온갖 정성을 기울여야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 영혼은 자신을 버림으로써 받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마음이 내킬 때 되찾아가기 위해서 주의 깊게 간직하는 것을 

영혼은 필요할 때에 받으며, 

하느님께서 그것을 통해 주시고자 하는 것만을 분명하게 받아들이면서, 

하느님만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것을 방치합니다. 


p.28


   다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무한히 많은 일들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 영혼은 사람들이 어디에도 쓸모없다고 여겨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깨진 항아리 조각처럼 

종종 한쪽 구석에 내동댕이쳐져 있습니다. 


거기에서, 피조물들로부터 버림받은, 

그러나 매우 실재적이고, 매우 참되며, 

휴면(休眠)중임에도 

매우 활동적인 그런 사랑으로 하느님을 향유하는 이 영혼은 

그 무엇 하나 자발적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가 아는 유일한 것은 

하느님께서 바라는 방식으로 그분을 섬기기 위해 

그분의 손안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그는 자신이 무엇에 소용되는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그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데, 

외양이 이러한 판단을 부채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혼이 숨겨진 능력과 미지의 경로를 통해, 

종종 자신들이 이 영혼으로부터 받게 될 은총에 대해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그리고 영혼 역시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은총을 널리 베풀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고독한 영혼들 안에서는 

모든 것이 효과적이고, 모든 것이 복음을 전하며, 모든 것이 사도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침묵과 휴식과 망각과 초연함, 그리고 그들의 말과 몸짓에 

다른 영혼들 안에서 작용하게 될 어떤 미덕을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피조물들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영혼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하느님의 은총이 이 수많은 피조물들의 우연한 행동들을 통해 그들을 이끌듯, 

영혼들도 마찬가지로 여러 영혼들의 지도를 지원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 일과 어떤 명시적인 연관도 없고 

또 그런 일을 하겠다는 어떤 약속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이 영혼들 안에서 자주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움직임을 통해 활동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 이 영혼들은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는 하느님의 비밀스런 능력을 보여주셨던 예수님을 

닮았습니다(루카 6.19, 8.46 참조.). 


이 영혼들과 예수님 간에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자주 이러한 능력이 자신들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고, 

더군다나 그런 일들에 대한 기여가 

전혀 그들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알지는 못하지만 느낄 수는 있는, 

그리고 그것 스스로는 자신의 효력을 알지 못하는 

숨겨진 연고(軟膏)와 같습니다.  



p.29


   제가 보기에 이 영혼들의 내맡김의 상태는 

예수님, 성모님, 성 요셉의 내맡김의 상태와 더 많이 닮았습니다.**


따라서 이 상태라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하느님의 원의(願意)에 따라 움직임으로써, 

존재하고 행동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원의에 의존하고 

지속적으로 수동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상태라 함은 하느님의 원의(願意)에 의존하고, 

존재하고 행동함에 있어 지속적으로 수동적 태도를 유지하며, 

하느님의 원의(願意)에 의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알 수 없는 그분의 뜻, 

우연과 조우에 대한, 말하자면 모험에 대한 그분의 뜻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는 이것을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수행해야 하는 명백한 의무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뜻과 구별하기 위해, 

이 명시적이고 결정적인 확정적인(결정된) 하느님의 뜻과는 별도로, 

순수한 섭리로서의 하느님의 뜻이라 부르고자 합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이 영혼들은 

제가 순수한 섭리라고 명명한 하느님의 다른 뜻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들의 삶은, 비록 매우 남다르다 할지라도, 

그저 평범하고 매우 일상적인 면만을 보여줄 따름입니다. 


이들은 종교상의 의무와 자신들의 신분에 따른 의무를 수행하는데, 

다른 이들도 겉보기에는 이들과 별반 다름없는 그들의 의무를 이행합니다. 


그 외의 다른 것에 대해 이들을 관찰해보아도, 

뭔가 눈에 두드러지거나 특별한 것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이들은 전부 일상 사건들의 흐름 속에 놓여 있고, 

이들을 다른 이들과 구별시켜 줄 수 있는 뭔가 분명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느님의 지고한 뜻에 대한 이들의 이 끊임없는 의존이 

이들을 위한 모든 것을 마련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이들의 마음을 습관적으로 순종케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늘 극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들이 하느님의 뜻에 특별히 협력하든, 

그걸 알아채지 못한 채 이 뜻에 순종하든 간에 상관없이, 

이 뜻으로 말미암아 이들은 다른 영혼들을 위한 일에 쓰이게 됩니다. 


p.30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극도의 무미건조함과 무용(無用)함의 외양을 띤 일에는

명예도 소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외적 책무로부터 벗어난 상태에 있는 이 영혼들은 

세속적인 거래나 사업, 가식적인 배려, 교활한 사고나 처신에 

그다지 적합하지가 않습니다. 


이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으며, 

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약한 육체와 정신, 빈약한 상상력, 부족한 열정뿐입니다. 


이 영혼들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예상치 못하고, 아무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 영혼들은 천연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혼들에게서 문화, 학습, 사고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자질들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교육을 맡은 스승들의 손을 거치기 이전에 

자연이 이 아이들에게 베풀어준 모습을 이들에게서 봅니다. 


우리는 이들의 미미한 결점들을 알아차리는데, 

이 결점들로 인해 이들이 아이들보다 더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것들을 이 결점들을 

아이들에게서 발견하는 것보다 이들 안에서 보게 될 때 

한층 더 놀랍니다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이 영혼들로 하여금 당신 한 분만을 소유하도록 하기 위해, 

순진무구함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이들에게서 박탈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비를 전혀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단지 겉모습에 비추어서만 이들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들에게서 

자신들이 좋아하거나 높이 평가하는 것을 그 무엇 하나 발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배척하고 멸시합니다. 

심지어 영혼들은 모든 사람들의 표적처럼 되기도 합니다.  


이 영혼들을 좀 더 가까이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이들을 더욱더 낯설어하고, 이들에게 더욱더 반감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 뭐라 말해야 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들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본능적 직관을 따르거나, 

아니면 최소한 자신의 판단을 보류하는 대신, 

자신의 악의를 따르기를 선호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몰래 감시해서 

자기들 식으로 그들에 대해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바리사이파인들이 예수님의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 영혼들을 심히 편견에 찬 시선으로 주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들이 하는 모든 일이 어리석어 보이고 죄를 범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아! 슬픈 일입니다! 

이 가엾은 영혼들 스스로도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나쁜 면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저 소박하게 믿음과 사랑만으로 하느님과 결합한 이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온갖 예민한 것을 마치 무질서 속에 있는 것인 양 바라보는데, 

이런 점은 이들이, 

성인으로 간주되는 사람들, 

게다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규율과 방침들을 따를 수 있는 까닭에 

자신들의 전 인성과 일련의 행위 안에서 이미 규칙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는 그런 사람들과 

자신들을 비교하게 될 때에 

한층 더 그들 자신에 대해 반감을 품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혼란스러워 하고 

그런 모습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들의 마음속을 온통 채우고 있는 엄청난 고통과 비탄의 표시인 

이 한숨과 탄식을 이들의 폐부로부터 끌어내는 요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었음을 기억합시다. 


그분은 인간으로서 멸망 당하셨지만, 

하느님으로서는 더없는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 영혼들은, 그분의 영광에는 참여하지 못한 채, 

다만 자신들 안에서 이 죽음과 멸망만을 느낄 뿐인데, 

이것이 이들 안에서 작용하여 이들의 슬프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만들어 냅니다. 


세상 사람들은 헤로데 왕과 그의 신하들이 자신들 앞에 서있는 예수를 바라보듯 

이들을 바라봅니다.  


p.31


   저는 이 모든 점으로부터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긴 이 영혼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욕망이나 탐구, 배려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하는 결론을 

쉽게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도, 어떤 계획에 가담할 수도 없고, 

말과 행동과 독서에 있어 미리 계산된 

어떤 체계적인 방식을 갖거나 계획을 세울 수도 없다고 말입니다. 


만일 이들이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영혼들이 아직도 자기 마음대로 처신해도 될 만큼 자유롭다는 것을 

전제로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제는 이들이 처한 내맡김의 상태 그 자체에 의해 배제됩니다. 



이 내맡김의 상태란 자신의 모든 말들과 행위들, 

자신의 생각들과 방식들, 자신의 모든 시간들의 사용과 있을 법한 모든 관계들, 

한 마디로 말해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의 모든 권리 전체를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놓음으로써 

그분께 속한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완수해야 할 유일한 바람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인으로 섬기는 분께 항상 시선을 고정하고, 

끊임없이 그분께 귀를 기울이는 것인데, 

이는 그분의 뜻을 짐작하고 알아듣고 또 그 뜻을 당장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입니다. 


어느 순간이든 온전히 주인에게 헌신하기 위해 포기해야만 하는 자신의 일에 

자신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할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 순간 주인 곁에서 주인이 즐겨 그에게 내리는 명령에 

그저 복종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하인의 처지보다 

이 상태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영혼들은 이처럼 원래 고독하고 자유로우며, 

모든 것을 면제받았기에, 

그들을 소유하시는 하느님을 평온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결과와 원인 그리고 이유에 대한 어떠한 성찰**** 이나 반성, 검토를 함이 없이 

그분의 명시적인 뜻에 따라 현재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들에게는, 마치 이 세상에 하느님과 이 절박한 의무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순수한 의무를 향해 단순 소박하게 나아가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 순간은 사막과도 같으며, 

단순한 영혼은 거기에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하느님만을 향유하며,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는 일에만 전념합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방치되고 망각되고 섭리에 맡겨집니다. 


p.32


   도구로써의 이 영혼은 

하느님의 은밀한 작용이 그 안에서 그를 수동적으로 몰두케 하거나 

또는 그를 외적 활동에 전념케 하는 바로 그 만큼만 받아들이고 행동합니다. 


이러한 내적 전념에는 

그의 편에서의 자유롭고 능동적인, 

그러나 주입적(注入的)이고 신비주의적인 협력이 수반됩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에게 명령을 내릴 경우, 

그의 바람직한 태도에 만족하신 하느님께서는 

명령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찾으셔서 

그를 대신해 결실을 맺어주심으로써 

영혼의 수고를 덜어주십니다. 


만일 그분께서 그렇게 해주시지 않으신다면, 

영혼은 자신의 노력과 선의를 경주(傾注)함으로써 이 결실을 맺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 친구를 본 누군가가, 

친구를 도와주기 위해, 

바로 그 친구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 그 친구 모습을 하고, 

그러나 그 자신의 활동으로 길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 결과 이 친구에게 남겨진 일이라고는 걸으려는 의지를 갖는 것뿐이고, 

반면에 그는 친구를 대신해 이 낯선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이 여행은 자유로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친구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른 것이고, 

누군가가 이 친구를 대신해 여비를 치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행은 능동적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실제로 걷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행은 주입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친구 자신의 고유한 활동 없이 행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이 여행은 신비주의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여행의 원리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p.33


   그런데 이 가상의 여행을 통해 

우리가 설명하고 있는 은총의 성격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 협력이 일상적 책무에 대한 복종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책무들을 완수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은 

신비주의적이지도 주입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 자유롭고 능동적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원의(願意)에 순명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고 수동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바라면서 또한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습관적인 보편적 선의를 제외하고는, 

거기에 자신의 어떤 노력도 들이지 않습니다. 


마치 장인의 손에 들어간 순간부터 

자기 특유의 활동을 멈춘 도구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 도구는 자신의 본성과 자신의 자질이 미치는 모든 용도에 사용됩니다. 


반대로, 

명시적이고 확정적인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이를 눈에 띄게 도와주느냐 

아니면 일상적인 노력에 맡겨버리느냐에 따라서, 

경계하고, 배려하고, 관심을 갖고,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는 

평범한 상태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자신을 위해서는 

현재의 의무에 대한 사랑과 순종만을 간직하고 

- 이 점에서 영혼은 언제까지나 행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대로 내버려 둡니다. 


침묵 속에 녹아든 영혼의 이 사랑은 참다운 행위로써, 

그는 이것을 자신의 영원한 책무로 삼습니다. 


사실 영혼은 이 사랑을 끊임없이 간직해야 하고, 

이 사랑으로 인해 취하게 되는 태도를 계속 견지해야 하는데, 

이는 당연히 행동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현재의 의무에 대한 이러한 순종 역시 하나의 행위인데, 

영혼은 이를 통해 어떤 특별한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외적인 의지에 전적으로 자신을 바칩니다. 




   자, 이것이 바로 

이 영혼의 순수하고 단순하며 확실한 규칙이며 방법이고, 법이며 길입니다. 


이 불변의 법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상황에 적용됩니다. 


영혼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탈선하지 않고, 

그의 한계를 초과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용기와 신실함으로 이 곧은 선을 따라 걸어갑니다. 


이를 넘어서는 모든 것은 영혼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며 

영혼의 내맡김 속에서 행해집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영혼은 현재의 의무가 명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능동적이나, 

그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해서는 자신을 내맡기는 수동적 태도를 견지합니다. 


그리고 이 수동적 상태에서 

영혼은 평온한 마음으로 신의 움직임만을 기다릴 뿐 

그 외에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 단순한 길보다 더 확실한 길도 없고, 

이 길보다 더 분명하고, 더 용이하며, 더 감미로운 길도 없으며, 

이 길보다 과오와 환상으로 덜 이끄는 길도 없습니다. 


그 길에서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완수하며, 

성사를 자주 받고, 모든 이들에게 부과되는 외적인 종교 행위들을 하며, 

장상들에게 순종하고, 신분상의 의무를 완수하며, 

끊임없이 피와 살과 악마의 충동질에 저항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온갖 책무를 이행하는 데 있어 

그 누구도 이 길을 가는 영혼들보다 더 주의와 경계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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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서 이 영혼들이 그리 자주 반대의 표적이 되는 것일까요? 


가장 일상적인 반대들 중 하나를 들자면, 

사람들은 이 영혼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처럼 

교회의 가장 엄격한 신학자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다 이행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이들로 하여금 

교회가 전혀 책무로 간주하고 있지 않은 

껄끄러운 신심 행위들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이들이 이에 동참하지 않으면, 이들을 환상에 빠져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대답해 보십시오. 


그저 하느님과 교회의 계명을 따르는 것에 만족할 뿐인 한 그리스도인이 

묵상이나 관상, 영적 독서를 하지 않고, 

또 영성지도를 특별히 추종함이 없이, 

세속적 거래와 시민적 삶에 필요한 여타 업무에 종사하는 것이 

잘못된 일입니까? 


우리는 이 사람을 이런 이유로 비난하거나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과 일치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방금 언급한 그리스도인은 가만히 두어야 합니다. 


최소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계명과 규정들을 완수하고, 

게다가 우리 자신은 알지조차 못하는 

(아니, 알았다 하더라도 무관심만을 보였을 뿐인) 

내적, 외적인 신심 행위까지 곁들여 행하는 이 영혼을 괴롭히지 않는 게 

공정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입견이라는 것은, 

교회가 명하는 모든 것에 순종하고 난 뒤, 

특별히 그를 강제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순간이면 

언제든 아무런 걸림돌 없이 하느님의 은밀한 역사(役事)에 자신을 내맡기고 

그분의 은총에 감도될 수 있도록 자유로운 상태를 견지한다는 이유로, 

이 영혼이 착각하고 있고 잘못하고 있다고 단언까지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유희와 덧없는 일을 하는데 쓰는 시간을 

이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쓴다는 이유로 그를 단죄합니다. 


이건 정말이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의가 아닙니까? 

이 점은 우리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 공동 대열이나 행렬에 끼어서, 일 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본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고, 그가 평화로이 살아가도록 놔둡니다. 


물론 기회가 닿을 경우 그에게 뭔가 좀 더 해보도록 권고는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에게 심한 압력을 가하거나 그에게 무엇을 의무로 과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공동 대열을 벗어나면서 변하기라도 하면, 

우리는 그를 규범, 행동지침, 방침들 따위를 가지고 못살게 굽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신앙의 기술이 정한 바에 매이지도 않고 책임도 지지 않는데다, 

이를 계속해서 따르지 않으면, 

결국은 우리가 그의 모든 것을 염려하고 

그의 모든 것에 의구심을 갖고 

그의 길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사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도대체 우리는 온전히 선하고 온전히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는 

이 신심행위들이 

결국은 하느님과의 합일로 인도하는 길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길의 끝에 도달했으면서도 여전히 길 위에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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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혼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가 환상에 빠지지나 않을까 우려하면서 말입니다. 


처음에 이 영혼은 다른 사람들처럼 길을 나섰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 신심행위들을 알았으며, 

이것들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는 

영혼으로 하여금 이런 행위들에 순종하도록 강요하려 들지만 

부질없는 일입니다. 


이 방법에 이 구원에 기대어 

당신께 나아가고자 하는 영혼의 노력에 감동을 받은 하느님께서 

그 앞에 친히 임하시어 

그를 이 복된 결합으로 인도하는 것을 당신의 일로 삼은 이후,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고자 하는 열망만이 존재하고 

사랑에 의해서만 비로소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는 이 아름다운 영역에 영혼이 도달한 이후, 

그리고 끝으로 

이 선하신 하느님께서 그의 근심과 노고를 대신하시면서 

당신 스스로를 그의 활동의 원리로 세우신 이후, 

이 방법들은 영혼에게 효용성을 상실했으며, 

영혼이 주파하고 난 뒤 

그의 뒤에 남겨진 하나의 길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영혼에게 이 방법들을 다시 취하거나 

이 방법들을 계속해서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그가 이미 도달한 목적지를 포기하고 

그를 그곳으로 인도했던 길로 다시 돌아가게 만들고자 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간 낭비를 하고 헛수고를 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이 영혼이 약간의 경험이 있다면, 

내적 혹은 외적으로 질타하는 소리들을 들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소음에 그다지 거의 충격을 받지도 않고, 

이 아우성에도 전혀 끄떡하지 않는 이 영혼은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이 너무나 유익하게 작용하는 이 내적 평화로움 속에 

어떠한 동요나 흔들림 없이 머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가 바로 그가 휴식을 취하게 될 중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몸소 내신 곧은길이고, 

그는 이 길을 계속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는 이 길을 한결같이 걸어갈 것이고, 

현 순간 그가 행해야 할 모든 의무들이 그 길에 나타날 것입니다. 


영혼은 이 의무들이 하나둘씩 나타남에 따라 

이 길이 명하는 바를 따르면서,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이 의무들을 완수할 것입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영혼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은총의 움직임이 감지되자마자 이에 순명하고 

섭리의 보살핌에 자신을 내맡길 준비가 늘 되어 있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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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이 영혼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영성 지도를 덜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다른 사람들은 매우 훌륭하고 탁월한 영성 지도자들의 도움으로 

도움을 받아서만 거기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신들과 교류가 있는 사람들을 죽음이 앗아가거나 멀리 떠나보낼 때에도, 

단지 섭리에 의해서만 영혼들은 이 사람들의 부재를 절감합니다. 


설령 하느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내맡길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영혼들은 오로지 평온 속에서 섭리의 순간을 기다리며, 

그 다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따금 

영혼들은 잘 알지도 못하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은밀한 신뢰감을 느끼게 될 때가 있는데, 

이 감정은 

하느님께서 영혼들에게 무엇인가 결핍되었을 때에 불러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일시적인 방법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이들을 이용하여 

영혼들에게 몇 가지 깨달음을 전해주고자 한다는 표지입니다. 


그러면 영혼들은 이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이들의 조언을 아주 순순히 따릅니다. 


그러나 이런 도움이 없을 경우, 

영혼들은 그들의 첫 번째 영성 지도자가 전해준 규범을 충실히 이행합니다. 


이처럼 영혼들은, 

예전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구 원칙들에 의해서건 

또는 만남을 통해 얻은 이러한 조언들을 통해서건 간에, 

늘 매우 실제적으로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들은 자신들의 모든 속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주실 때까지 

만남을 통한 이런 조언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영혼들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위탁하여 인생길을 걷고 난 후 

이 세상에서 들어 올려집니다.





수동성 (passiveté) : 신비주의적 담화에서 “수동성”이라는 단어는 
하느님과 일체가 된 정화된 영혼의 순종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의 divina pati (“거룩한 일들을 체험하다”)에 대한 반향이다. 

이 단어는 17세기 동안, 통용어 속에서, 
점차적으로 무기력증, 의지 결핍증과 같은 경멸적인 의미가 내포된 현대적 의미를 취하게 되었다 
(신비주의적 관행에는 당연히 이런 의미는 내포되어 있지 있다). 

단어 형태 자체도 “passivité”로 변화되었다. 
이 원고에서 옛 형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와 같이 정의된 “상태 (l'état)”는, 개론서에서 종종 그렇게 나타나듯, 

그리고 베륄 (Bérulle)이 인정한 바와 같이, 

그것의 영적인 의미로서, 

예컨대 “내맡김의 상태”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상태”라는 이 단어는 

또한 매우 빈번히, “생활 형편”, “사회적 신분상의 의무”라는 표현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사회적 조건”, “직업”이라는 옛 뜻도 지니고 있다.   .




***하느님의 “원의에 따른” 혹은 “섭리에 따른 뜻”
이 뜻은 사건들 안에서 감추어진 형태로 나타난다)과 
하느님의 “명시적인 뜻” (이 뜻은 그분의 계명과 사회적 신분상의 의무를 통해 명백히 나타난다) 
사이의 이 중요한 구별은 성 프랑수아 드 살의 구분을 취한 것이다 
(신애론 Traité de l'amour de Dieu, 8권과 9권).



**** 영적 전통에 있어서, 

성찰 (réflexion)이라는 단어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원죄 이후 모든 인간적 활동에 결부된 자기반성, 자아와 자기 고유의 이해 추구

(amor sui, 자애심, “자기애”)를 가리킨다. 


성 베르나르 (Bernard)는 자기 자신을 향한 존재의 “휘어짐 (Incurvation)”이라고 말했다. 


“성찰”은 순수하고 사심 없는 사랑에 장애가 된다. 


그 상태 그대로의 성찰은

“내맡김”에 필요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탈출, 자발성, “단순함”에 반대된다. 


17세기 동안에 “성찰”이라는 단어는, 영성 문학 안에서, 점차적으로 

그 단어의 현대적, 심리적 의미의 영향을 받아 오염되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아이디어, 상황, 문제를 좀 더 심도 있게 검토할 목적으로 

생각을 생각 그 자체로 회귀시키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로베르 사전). 


현 개론서 안에서 발견되는 이 단어의 사용은, 

정신의 “세속화 (laïcisation)”에 전형적인, 이 점차적인 의미 변화를 보여준다. 


전통적인 신학적 의미는 여기에서처럼 통상, 배후에서, 지각(知覺) 가능하다. 


여하튼 저자는 생각하기를 멈추게 만들고자 하는 부조리로  생각하기를 멈추게 하는 쪽으로 비상식적으로 

여러분을 이끌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