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번역 하섭내

새번역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제3장 내맡김의 상태가 요구하는 마음가짐, 그리고 내맡김의 다양한 효과들(원문)

은가루리나 2018. 8. 4. 13:07

p.37


제3장


내맡김의 상태가 요구하는 마음가짐, 

그리고 내맡김의 다양한 효과들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 현재의 의무만으로 살아가는 이 길을 걸어가려면 

우리는 우리가 느끼고 행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 이상의 모든 목적들은 쳐내야만 합니다. 


그리고 현 순간을 선행하거나 뒤이어 올 순간은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현 순간에 만족해야 합니다. 


저는 하느님의 법이 항시 잘 보호되고 있다고 추정하지만, 

그럼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대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도록 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이 사람, 이 책에 애착을 느끼고 있고, 

이러한 의견을 주거나 받고 싶으며, 이러저러한 불평을 토로하고 싶고, 

이 영혼에게 내 마음을 열어 보이거나 그의 감정을 받아주고 싶으며, 

어떤 것을 주거나 그것을 해보고 싶다.”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성찰이나 추론이나 노력에 의존해 스스로를 지탱하지 말고, 

은총의 인상(느낌)을 풍기며 타나는 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떤 상황에 결부시키는 당분간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거기에 개입해 들어가는 일 없이, 

온전히 그 상황에 열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 실행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이야기하는 내맡김의 상태에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에게 통상적으로 우리를 지지해주던 모든 것들의 역할을 

반드시 대신해주어야 합니다. 대신해줍니다.




   매 순간 우리는 어떤 덕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순간은 우리에게 일정한 덕을 행하도록 의무를 부여합니다

자신을 포기한 영혼은 이 덕의 실천에 무척 충실합니다. 


그는 자신이 읽거나 들은 것을 항시 염두에 두고 실천을 하는 까닭에 

가장 고행을 많이 한 수련자도 

이 덕에 따르는 의무를 그보다 더 잘 수행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영혼들은 어떤 때는 독서에, 또 어떤 때는 다른 것에,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떤 때는 아주 사소한 사건에 대해 

이런 지적을 하거나, 이런 숙고를 하도록 이끌림을 당합니다. (이끌려집니다.)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는 

이 영혼들에게 뭔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시는데, 

이 앎은 

이들이 덕을 실천하는 또 다른 순간에 이들을 돕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이 영혼들은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다만 그 일을 하고 싶다는 끌림을 느낄 뿐입니다. 


이들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나는 그것을 믿고, 읽고, 청하고, 바라보도록 인도됨을 느낍니다. 

나는 이 끌림을 따르며, 

내 안에 이런 끌림을 불러일으키시는 하느님께서는 

내 역량 안에 이 특별한 일들을 자산으로 쌓아 두고 저장해뒀다가 

후에 이것들을 다른 것들에 대한 이끌림의 도구가 되게 하시고, 

다른 것들에 대한 이끌림은 

나로 하여금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저장된 이것들을 사용하도록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영혼들로 하여금 단순하고, 온유하며, 유연하게, 

그리고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충동들이 일으킨 가장 가벼운 미풍에도 

유동성을 지니지 움직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들을 소유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이들을 온갖 일에 전념케 하실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노력과 노고를 통해 삶을 영위해나가는 영혼들의 상태에 적용되는 규칙에 의해서, 

만약 이들이 이러한 끌림에 저항한다면, 

이들은 미래의 순간에 주어질 의무들을 완수하는데 필요한 수많은 것들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리는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들을 판단하고, 이들의 단순함을 비난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고, 

모든 상태를 인정하며, 

이 상태들의 모든 단계와 발전을 아주 잘 나타낼 줄 아는 이 영혼들은 

섭리의 명령에 순종하는 이 감미롭고 다정한 맛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사이비 현인들로부터 경멸을 당합니다. 


p.38


   세상의 현인들은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었던 사도들의 이 끊임없이 불안정한 삶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까?


평범한 영성가들 역시  

이처럼 그들의 매 순간을 섭리에 의존하는 영혼들을 싫어합니다.


이들을 인정해주는 건 이들과 동일한 상태에 있는 몇몇 영혼들뿐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통해 사람을 가르치시는 하느님께서는 

단순하고 충실하게 자신을 내맡기는 이들에게 

반드시 이러한 성격의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그의 삶이 되고, 

당신을 통하여, 비밀스럽고도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영혼을 완덕으로 이끌고자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모든 자기 고유의 생각, 지식, 노고, 탐구, 추론은 착각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자기애 내지는 자기 고유의 감각에 이끌려 몇몇 터무니없는 경험을 하고 난 후, 

마침내 자신의 이 속성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영혼은 

하느님께서 자신으로 하여금 당신 안에서 생명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통로들을 숨기고 뒤엉키게 해놓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자신의 허망함을, 

자신의 자산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이 

자신에게 해롭다는 것을 깊이 확신하게 된 영혼은 

하느님만을, 그분으로부터 오는 것만을, 

그분을 통해서만 소유하기 위해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깁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영혼에게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그러나 이는 생각이나 앎 또는 성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은 영혼에게 있어 착각의 원천일 따름입니다), 

위장된 겉모습 아래 감추어진 은총의 효력과 실재성(實在性)에 의해 그러합니다. 



영혼은 신적 작용을 모르지만, 

자신의 파멸이라 생각되는 수많은 종류의 상황을 통해서 

그 작용의 위력과 실체와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이 어둠에는 치료약이 전혀 없기에, 

이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어둠속에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실 뿐만 아니라 

믿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맹인과 다를 바 없으며, 

이리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약의 효능을 모르는 병자와 같습니다. 


병자는 약의 쓴 맛만을 느끼고, 

대개의 경우 이 약들이 자신을 죽게 만들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왜냐하면 약의 복용으로 나타나는 발작과 허약함이 

그의 이런 두려움을 정당화시켜줄 죽음의 외양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 죽음의 외양 아래 건강을 부여받으며, 

이 약들을 자신에게 처방해주는 의사의 말에 따라 그것을 복용합니다.


p.39


   예전에 영혼은, 사상과 지식을 통하여, 

자신을 완덕에 이르게 해 줄 계획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현 상태에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완덕은 모든 생각, 모든 지식, 모든 감정에 (反)하여 그에게 주어집니다. 


완덕은 

섭리에 의해 주어지는 모든 십자가적 고난에 의해서, 

현재의 의무를 실천하는 활동에 의해서, 

전혀 죄로 이끌지 않는다는 점을 빼고는 좋은 것 하나 없는데다 

눈부신 숭고함이나 덕이 지닌 특별함과는 전적으로 거리가 멀어 보이는 

어떤 끌림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간혹 잇달아 닥쳐오는 이 십자가적 고난들 속에서, 

베일에 가린 듯 숨어 계신 하느님께서는 

매우 생소한 방식으로 당신을 내어주시며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에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자신의 책무에 대해서는 얼마나 혐오감을 갖는지만을 느낄 뿐이고, 

그를 끌어당기는 것들은 

그저 그를 매우 평범한 실천 행위로만 인도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상적인 성성(聖性)은 

그에게 있어 

그의 비천하고 경멸스러운 마음가짐에 대한 내적 질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인들의 생애를 기록한 모든 저서들은 그를 단죄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방어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는 광채를 발하는 성성을 보고 비탄에 잠기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성성에까지 자신을 들어 올리는데 필요한 힘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신의 명령이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비겁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덕의 광채나 사색의 탁월함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과 

친구들로부터 그가 받게 되는 모든 것은 

그를 멸시하듯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그들은 “무슨 성인이 이따위야 !”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을 수긍하는 영혼은, 

비천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가 기울인 그 숱한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게 

너무나 송구스러워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질리도록 치욕을 맛봅니다.


p.40


   그러나 영혼은 자신을 온통 하느님께 몰두하도록 만들고, 

부지불식간에 자신에게 하느님께서 하시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두고 

오로지 믿음으로 살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말해주는 

근본적인 힘을 감지합니다. 


야곱은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창세기 28.16)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영혼이여, 그대는 하느님을 찾지만, 

하느님께서는 도처에 계시며, 

모든 것이 그대에게 그분의 현존을 알려주고, 

모든 것이 그대에게 그분을 내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 곁을, 그대 주위를, 

그대 안으로, 그대를 관통하여 지나가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거기에 머물러 계시는데,

그대는 그분을 애써 찾고 있는 것입니까? 


아! 그대는 실체를 갖춘 하느님께 대한 관념을 찾고, 완덕을 구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그대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모든 것 안에 존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하여 

그대의 고난, 그대의 행위, 그대의 끌림이라는 

이 수수께끼 같은 외양 아래 당신을 그대에게 내어주시는데, 

그 동안 그대는 하느님께서 그대 안에 거처하는데 있어 

당신에게 덧입혀지기를 조금도 원치 않는 

하느님께 대한 고상한 관념들을 헛되이 추구합니다. 



마르타는 좋은 음식을 준비해서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 애씁니다(루카 10.40).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당신 모습을 나타내 보이신 것을 좋아하셨듯

(요한 20.14~16).예수님만으로 만족합니다. 


수님께서는 정원지기의 모습으로 나타나심으로써 

마리아로 하여금 착각까지 마리아까지 착각(마리아조차)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자신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낸 예수님의 외양에 비추어 그분을 찾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보고 그분을 유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온갖 종류의 수수께끼 같은 외양을 하고 있어도 

당신을 그 자체로 발견할 수 있는 순수한 믿음의 수준까지 영혼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 앞에서 당신을 위장하십니다. 


냐하면 

영혼이 하느님의 비밀을 알게 되면

하느님께서 아무리 위장을 해도 소용이 없고, 

영혼은 이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p.41


“보셔요, 

그가 담장 밖에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보고 있답니다.” (아가 2.8~9).



오 거룩한 사랑이여, 몸을 감추십시오, 

달려들고, 고통으로 펄쩍 뛰십시오,

책무에 끌리는 대로 집중하십시오, 


영혼의 모든 생각과 척도들을 실들처럼 조합하고, 

뒤섞어놓고, 혼란스럽게 하여 끊어버리십시오! 


영혼이 난바다로 나가기를, 

그래서 더 이상 길, 거리, 오솔길, 빛을 지각도 못하고 식별도 못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거처와 당신의 일상복 안에서, 고독한 휴식 안에서, 

기도 안에서, 이러저러한 신심 행위에 대한 순종에서, 

고통 안에서, 이웃에 대한 위로에서, 

대화와 일거리들을 회피하는 것에서 

당신을 발견하고 난 후에, 

그리고 당신 마음을 흡족케 하리라고 여겨지는 

모든 방편과 수단들을 다 시도해보고 난 후에, 

예전처럼 이 모든 것 그 어디에서도 더 이상 당신을 발견할 수 없게 된 영혼이 

어찌할 바를 몰라 말문이 막혀버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노력이 부질없음을 깨달은 영혼이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포기한 뒤로는 당신 자신 안에서, 

그 다음에는, 

구별도 숙고도 하지 않고, 

도처에서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 거룩한 사랑이여, 모든 좋은 것과 모든 피조물들 안에서 당신을 볼 수 없다니 

실제로 이런 잘못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기 위해 당신이 취하시고자 하시는 피조물이 아닌 

그 안에서 내어주려 하시는 것들이 아닌 다른 것들 안에서 

도대체 왜 당신을 찾는단 말입니까? 


거룩한 사랑이여, 뭐라고요? 

당신이 당신의 성사를 위해 선택하신 형상이 아닌 다른 형상 아래서 

우리가 당신을 찾고 있다고요? 


이들의 현실성이 결여된 변변치 않은 외양이 

순명과 믿음이라는 공덕(功德)에 쓸모가 있지 않느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