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번역 하섭내

새번역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제4장 동일한 주제의 연속 : 내맡김과 그것의 필요성 그리고 그것의 경이로움에 관하여

은가루리나 2018. 8. 4. 13:51

p.42


제4장


동일한 주제의 연속 : 

내맡김과 그것의 필요성 그리고 그것의 경이로움에 관하여




   이 상태 안에 참으로 대단한 진실들이 숨겨져 있구나! 

모든 십자가들, 모든 행위들, 그리고 하느님의 명령이 갖는 모든 매력이, 

성체 성사라는 가장 엄숙한 신비와의 비교를 통해서만 

더 잘 설명되어 질 수 있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다는 게 진정 사실이로다! 


따라서, 

가장 거룩한 삶이 표면적인 단순함과 비루함으로 인해 불가사의하다는 게 

정말이로다! 


오, 향연이여! 오, 영원한 축제여!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는 눈부시고 숭고하며 빛을 발하는 것 속에서가 아니라, 

허약하고 광적이며 허망한 것 속에서 늘 당신을 내어주시고 늘 받아 모셔지도다! 


하느님께서는 

자연스런 정신이 배척하고 인간적 섭리가 단념하는 모든 것을 선택하셔서 

그것으로 신비를 자아내고, 

영혼들이 거기에서 당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언제까지나 당신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붙들어주는

뭔가 거대하고, 견고하고, 단단한 바위와 같은 것들은 

가장 평범한 행위들과 십자가라는 베일 아래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 방대한 신의 뜻의 영역 안에만 존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평범한 행위들과 십자가의 그림자 아래 당신의 손을 감추신 채 

우리를 지탱하고 지지해 주십니다.


이러한 시각은 한 영혼을 이런 숭고한 내맡김으로 이끌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바로 그때부터 이 영혼은 언어의 모순으로부터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더 이상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일인 까닭에, 

그에 대한 해명을 다른 데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일의 효과와 결과가 그 일의 정당함을 충분히 증명해줄 것이므로, 

그 일이 그저 거기에서 전개되도록 그냥 내버려두기만 하면 됩니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Dies diei eructat. (시편 19.3))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때에는

더 이상 말로써 우리 자신을 변호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은 우리의 생각만을 나타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말도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 말들을 뭣에다 쓰겠습니까? 

우리가 한 일에 대한 동기를 해명하는 데 쓸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동기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동기는 우리를 행동하게 했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우리가 감지했던 그 근원 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p.43



그러므로 

이 순간이 또 다른 순간을 야기하는 원인을 이끌어내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이 신적 연쇄 작용 속에서 상호 지원하고, 

모든 것은 단단하고 견고합니다. 


그리고 앞서서 벌어지는 일의 이유는 

그 뒤에 오는 결과를 봄으로써 알게 됩니다. 


이것은 더 이상 

생각하는 삶, 상상력으로 채워진 삶, 말이 홍수를 이루는 삶이 아닙니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이런 모든 것들이 

영혼을 사로잡고, 영혼을 양육하고, 영혼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영혼은 더 이상 이 모든 것에 따라 처신하지도 않고 

자신을 지탱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어디로 걸어갈 것인지 더 이상 알지도, 예견하지도 못하며, 

피곤할 때 기력을 회복하고 길에서 겪는 불편을 참아내기 위해 

더 이상 생각의 도움을 받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절감하는 그의 가장 내밀한 감정 속에서 벌어집니다. 


그의 발아래 길이 열리면, 

그는 그 길로 들어서서 주저함 없이 그 길을 갑니다. 


그는 정결하고 거룩하고 단순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의 계명이라는 곧은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이것은 하느님 그분에 대한 순수한 애착으로써, 

그는 이 길의 모든 지점에서 바로 이 하느님을 끊임없이 발견합니다. 


영혼은 더 이상 책이나, 끝임 없는 질문(끝없는 질문)이나, 내적인 염려를 통해 

하느님 찾기를 즐기지 않으며, 

지면(紙面)을 통한 것들이나 헛된 논쟁들을 포기합니다.    //////////


그러면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고 그를 찾아오십니다. 


영혼은 더 이상 그분께로 인도하는 길이나 방도를 찾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그에게 그 길을 터주시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영혼은 그 길이 이미 나있고 또 완전히 다져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의 몫으로 남겨진 일이라고는, 

그가 지나치는 길에 보게 되는, 

또 끊임없이 연달아 그의 앞에 등장하는 다양한 대상들을 통해, 

매 순간 매 발자국마다 직접 그에게 당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을 붙잡을 수 있도록 

굳건히 버티고 서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시간 속에 출몰하는 그림자들의 흐름 속에서 

신적 영원성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 그림자들은 다양하지만, 

그것들이 감추고 있는 영원자는 항상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영혼은 더 이상 그 무엇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지만, 

필사적으로 섭리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 

십자가와 명시적 의무들과 전혀 의심할 바 없는 이끌림이라는 길을 통해 

한결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뒤따라가야 합니다.


p.44


   정말이지 이 길은 얼마나 밝고 빛나는가! 

저는 이 길을 수호하고 이 길을 명확히 가르쳐주는 게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압니다, 

제가 우리의 성화(聖化)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매 순간 각자의 처지에 맞게 주어지는 수고와 의무들을 

하느님을 감추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우리에게 내어주는 장막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할 때에 

모든 사람들이 저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요.




   내맡김에 있어서의 유일한 규칙은 현 순간입니다. 

현 순간 내맡긴 영혼은 

깃털처럼 가볍고, 물처럼 유동적이며, 아이처럼 단순합니다. 


현 순간 내맡긴 영혼은 

은총이 안겨주는 모든 인상들을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 공처럼 움직입니다. 


이 영혼들은 녹여진 금속과 마찬가지로 

조금도 딱딱하게 굳어있거나 뻣뻣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형 안에 부어 넣은 녹여진 금속이 주형에 따라 온갖 모양들을 만들어 내듯이, 

이 영혼들도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모든 형상에 

그처럼 쉽게 순종하고 순응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의 마음가짐은 모든 숨결에 자신을 맡기고 모든 것에 맞춰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공기(空氣)를 닮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중요한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내맡김의 상태에, 이런 신앙의 길에 있을 때, 

영혼이나 육체 안에서, 사업이나 일이나 다양한 사건들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것들이 

마치 죽음과 같은 외양을 띤다는 것이고, 

이로 인해 절대 놀라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야꼬)


뭘 바라는 것입니까? 

이게 바로 이러한 상태가 지닌 속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혼들에 대한 당신의 계획을 갖고 계시고, 

이 어두운 장막 아래서 이 계획들을 매우 잘 행하시고 계십니다. 


제가 이 장막이라는 말로써 의미하는 것은 

해로운 성공, 육체적 결함, 영적 나약함입니다.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는 

모든 것이 성공을 거두고, 모든 것이 선을 이룹니다. 


그분께서는 본성을 유린하는 바로 이러한 것들을 통해 

당신의 지극히 높으신 계획들이 실현될 수 있도록 배려하시고 준비하십니다. 


그분의 계획에 따라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 

Omnia cooperantur in bonum iis qui secundum propositum vocati sunt sancti 

(로마 8.28)


그분은 음지에서 생명이 생겨나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감각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모든 것을 좋게 해석하도록 하고 모든 것을 최상의 것으로 간주하도록 하는 

우리의 신앙은 

용기와 확신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신적 활동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을 인도하며, 

(죄를 제외한)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모든 것 안에서 이를 경배하고 사랑하며, 

두 팔 벌려 그 활동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적 의무입니다. 


우리는 만사에 있어, 

그 본성상 결국에는 믿음에게 승리만을 안겨주는 외양을 훌쩍 뛰어 넘어서, 

기쁨과 신뢰가 충만한 태도로 

이 신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을 공경하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서 대하는 이 방법, 

제가 여러분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p.45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따라서 행해야 하는 모든 것 안에서 

기쁨과 자신감과 확신과 신뢰심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매 순간 고난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이끄심 안에서 어떤 비밀이 드러나든지 간에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신앙적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 

이 삶을 유지시키기 위해 영혼을 끊임없이 떠돌아다니게 하고, 

그 많은 고통과, 혼란과, 곤경과, 무기력함과, 좌절감이라는 거센 파도가 

영혼을 휩쓸어 가도록 만드십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려면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 안에서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이 거룩한 삶은 

알 수 없는 그러나 매우 확실한 방식으로 매 순간 거기에 주어집니다. 


육체의 죽음, 영혼에 대한 영벌, 세상사에서의 급변과 같은 외양은 

믿음의 양식이며 지주(支柱)입니다. 


믿음은 이 모든 것을 뚫고 나가, 

명명백백한 죄가 조금도 눈에 띄지 않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그 믿음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자신을 의탁합니다. 


하느님의 좀 더 내밀한 현존이 

영혼의 제(諸) 기능들을 교란시키고 불안하게 하지만, 

신심 깊은 영혼이라면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장막이며 변장이라 여기고, 

안심하여 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장 치명적인 노동과 위험 속에서도 거룩한 생명만을 보는 

신앙심 깊은 마음보다 더 관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독을 삼켜야 할 때, 전선의 돌파구를 향해 나아갈 때, 

페스트 환자들의 노예가 되어 시중을 들 때, 

우리는 이 모든 것 안에서 거룩하고 충만한 생명을 발견합니다. 


이 생명은 그저 한 방울 한 방울씩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 생명은 단 한순간에 퍼붓듯 영혼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영혼을 삼켜 버립니다. 


이런 부류의 병사들로 구성된 군대는 가히 무적의 군대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적 본능은 마음을 고양시키는 것이고, 

우리 앞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것을 넘어선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적 삶 혹은 신앙적 본능은 하나의 동일한 것입니다.




   이 본능은 하느님의 선하심에서 오는 기쁨이며, 

모든 것을 마음에 들도록 만드시고 만사를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시는, 

그분의 보호하심에 대한 기대에 근거한 신뢰입니다. 


이 본능은 모든 장소, 모든 상태, 모든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이자 마음의 준비입니다. 


신앙은 절대로 불행하지 않으며, 

절대로 병들지 않으며, 

절대로 대죄(大罪)의 상태에 들지 않습니다. 


이 살아 있는 신앙은 우리의 감각을 흐리게 만드는 상반된 외양들을 넘어서서 

항상 하느님 안에, 늘 그분의 활동 안에 존재합니다. 


공포에 질린 감각은 갑자기 영혼에게 소리칩니다. 

“불쌍한 것, 봐라 넌 끝장났어, 더 이상 가망이 없어!” 


그러면 신앙은 그 즉시, 더 큰 목소리로, 영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굳건히 버티고 서있어, 걸어가, 그리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  


p.46


   병의 성격상 자리에 누워있어야 하고 

적절한 약을 복용해야만 하는 확실한 병들을 제외하고, 

내맡긴 영혼들이 겪는 쇠약함과 무기력함은 

이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용감히 맞서야 하는 환영이자 외양에 불과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런 증세를 허락하시거나 나타나게 하시어, 

이에 대한 진정한 치유제인 그들의 믿음과 그들의 내맡김을 단련시키십니다. 


그러니 영혼들은 그저 거기에 괘념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명하시는 활동들과 고난 속에서 

헌신적으로 그들의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닥치는 대로 노동하다 결국 죽도록 운명 지어진 삯말 부리듯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들의 몸을 그렇게 부리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정신의 활기를 해치는 온갖 종류의 예민함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 정신력은 

허약한 육체를 지탱시킬 수 있는 정체 모를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상하고 관대하게 일 년을 사는 것이 

근심과 두려움으로 한 세기를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우리는 늘 은총과 선의가 충만한 아이의 모습과 자세를 지니도록 힘써야 합니다. 

아니, 거룩한 행운의 신이 함께 하는데 무엇을 두려워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인도와 지지와 보호를 받는 그분의 자녀들은 

그들의 모든 외부 세계에서 영웅적인 면모만을 봉헌해야 합니다. 


그분이 그들의 통로를 막기 위해 세워 놓은 끔찍한 대상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그런 식으로 이것들을 불러들인 것은 

오로지 좀 더 영광스런 모험을 통해 

그들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이들을 온갖 종류의 곤경 속에 빠뜨리는데, 

거기에서 헤어나게 만들어 줄 어떤 방책을 

알아내지도 생각해내지도 못하는 인간적 지혜는 

자신의 나약함을 온전히 절감할 뿐만 아니라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합니다. 


바로 그때 이 행운의 신은 더할 나위 없는 찬란한 광채 속에서 

온전히 당신의 뜻에 맡겨진 이들에게 당신의 본모습을 시현(示現)합니다. 


그리고 기막힌 이야기꾼들이, 

서재에서 여유롭고 은밀하게 자신들의 상상력에 총력을 기울여, 

자신들이 상상해낸 영웅들이 처한 위험과 음모를 밝혀내 

이들이 항상 이야기의 끝까지 무사히 살아남도록 하는 재주보다 

더 놀라운 방식으로 

이 영혼들을 모든 곤경으로부터 구해냅니다. 


그분은 이 이야기꾼들보다 훨씬 더 놀라운 솜씨로 

이 영혼들을 

죽음과, 위험과, 괴물과, 지옥과, 악마와 그들이 쳐놓은 함정들을 헤치고 

더 행복한 결말을 향해 나아가도록 인도합니다. 


그분은 이 영혼들을 천상까지 들어 올립니다. 


그리고 이 모든 영혼들은 인간들의 빈약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그 어떤 이야기들보다도 더 아름답고 더 신기한 

신비주의적 이야기들의 소재가 됩니다. 


p.47--------------------------------------------------------


   그러니 자, 나의 영혼이여, 위험과 괴물들을 헤치고 나아갑시다! 


거룩한 섭리라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확실하며, 

무적에다 틀림없는 손에 인도되고 이끌리고 떠받쳐져, 

평화와 환희 속에서,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이 우리의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갑시다!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모든 것을 우리의 승리를 위한 재료로 삼읍시다! 

우리는 싸워 무찌르기 위해 그분의 깃발아래 행진합니다. 


그는 승리자로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Qui exiit vaincus est vinceret. (묵시록 6.2)


나의 영혼이여, 그분의 비호 아래 내딛는 발걸음만큼, 

바로 그만큼 우리는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손에 펜을 쥐고 있고, 

그리고 바로 여기에 책이 펼쳐져 있는데, 

성령은 거기에 아직 전혀 끝나지 않은 거룩한 역사, 

세상의 종말에야 비로소 그 소재가 소진될 그 역사를 계속 써내려갈 것입니다. 


이 역사는 단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이끄심과 계획에 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 역사 속에 등장하여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행위들을 그분의 이끄심에 일치시킴으로써 

그 이야기에 후속편을 제공하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든, 우리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든, 

우리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절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은 

그저 날마다 두께를 더해가는 이 성경에 소재를 제공해주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 그분의 거룩한 활동에 대한 순종

이것이 바로 영혼을 성화시키는 본질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에게 달려있는 모든 것이고, 

이것이 바로 

이 사랑과 순종에 변함없이 응답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영혼 안에서 행하는 일입니다.




거룩한 영혼이란 

은총의 도움을 받아 자유로이 신의 뜻에 순종하는 영혼을 말합니다. 


흠잡을 데 없는 동의를 순수한 복종을 선행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일이지, 

보편적인 내맡김과 무관심 속에서, 

맹목적으로 하느님을 받아 모셔야 하는 인간의 일이 전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자세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에 따라 결정하고 선택하시는데, 

이는 마치 건축가가 석재에 표시를 하고 용도를 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p.48


   그러므로 우리는 만사에 있어 

하느님과 그분의 명령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뭔가를 더 바람이 없이, 

그분이 당신 자신을 시현(示現)하시는 그 모습 그대로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러저러한 대상들이 주어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영혼이 신경 쓸 일이 전혀 아니고,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주시는 것은 늘 최상의 것입니다. 


이 원칙, 하느님의 명령에 대한 이 순수하고 완전한 내맡김은 

영성에 대한 대단한 요약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망각 속에서, 

자신의 구원과 자기 자신의 완덕에 대한 근심이 가져다주는 

이 모든 두려움과 성찰과 반성과 걱정 없이, 

언제나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명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서서 우리의 일들을 대신해 주시니, 

그 일들은 일단 그분께 맡겨드리고, 

우리는 하느님 그분 자신 그리고 그분과 관계된 일에만 몰두하도록 합시다. 



자, 나의 영혼이여, 

우리의 안팎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초월하여 결연히 일어서서, 

항상 하느님으로 만족하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고 또 우리에게 행하도록 하시는 일에 만족하며 

앞으로 나아갑시다! 


쓸데없는 지지물(支持物)들처럼, 

우리 머릿속에 떠올라 우리 정신을 혼비백산케 하고 

우리 정신으로 하여금 계속 헛걸음질 치게 만드는 

이 많은 걱정스런 성찰들 속으로 경솔하게 빠져 들어가지 않도록 

정말 조심합시다! 


이 미로와도 같은 우리 자신을, 

끝없이 계속되는 우회로들을 통해 주파하려 들지 말고, 

그 위로 훌쩍 뛰어넘어서 단숨에 건너가도록 합시다!




   자, 나의 영혼이여, 

무기력, 질병, 무미건조, 참혹한 기분, 나약한 정신, 

악마와 인간들이 파놓은 함정과 그들의 불신, 시기, 불길한 생각들과 선입견을 

헤치고 나아갑시다! 


우리의 시선을 항상 태양과, 태양 햇살과도 같은 우리의 의무에 고정시키고, 

독수리처럼 이 온갖 구름 위로 날아갑시다! 

이 모든 것을 느껴봅시다 

(거기에 무감각하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감각적 삶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이 늘 동일하고, 늘 균일하고, 

늘 변함없는 영원을 실현하는 장(場)인 

영혼의 고차원적 영역에서 살아갑시다! 


다름 아닌 바로 여기 완전히 영적인 이 거처에, 

창조된 원자(原子)들과 창조된 그림자들이 지닌 모든 특유성으로부터 

한없이 동떨어진 영혼이 

창조되지 않은 것, 불분명한 것, 느낄 수 없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잡아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제(諸) 기능들 속에서 

그것들의 동요, 그것들의 불안, 

그것들의 과거와 그것들의 숱한 변신을 감지합니다.   p.49


거기에서는 모든 일이 대기 중에서처럼 벌어지는데, 

대기 중에서는 

모든 것이 일관성도 질서도 없는 듯이 끝없는 부침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 상태에 있는 마음을 매료하고, 

영광의 상태 중에 참된 지복을 가져다줄 영원한 대상은 

하느님과 그분의 뜻입니다. 


그리고 이 영광스런 마음 상태는 

현재로서는 

그저 괴물들과 올빼미들과 잔인한 맹수들(이사야 13.21).의 먹이에 불과할 뿐인 

모든 물질적 혼합체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 종(種)들이 아무리 무시무시하다 할지라도, 

신적 활동은, 이것들의 외양 아래, 

그 물질적 혼합체에 완전한 천상의 기품을 부여하고, 

그것을 태양처럼 빛나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민한 영혼과 육체의 능력들은 

이 지상에서 금과 철과 아마포와 돌들처럼 준비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과 육체의 능력들은, 

이 다양한 사물들의 질료 재료처럼, 

오로지 많은 가공을 거치고, 

많이 부서지거나 많이 깎여나가는 시련을 겪은 뒤에라야 

비로소 그들 존재의 순수한 광채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능력들이, 

거룩한 장인(匠人)이시며 사랑이신 하느님의 손길 아래, 

이 지상에서 감수하는 모든 것은 

단지 앞으로 누리게 될 것에 대비해 이것들을 준비시키는데 소용될 뿐입니다. 


하느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신앙 깊은 영혼은 온전히 평화 속에 머물며,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그를 두려움에 떨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자신을 인도하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이 확신하고 있는 영혼은 

모든 것을 은총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일하시고 계신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은 채, 

정성을 기울이도록 보살피도록 자신에게 맡겨진 일만을, 

다시 말해서 

주어진 책무를 충실하고 정확하게 수행하라고 

끊임없이 그를 고무하는 그분의 사랑만을 생각합니다. 



자신을 내맡긴 영혼 안에서 식별되는 모든 것은 은총의 활동입니다. 


물론 그가 범하는 죄들은, 경미한 것이긴 하지만,경미할지라도

이 활동에서 제외됩니다. 


그러나 이 죄들조차도 이 활동 자체에 의해 선으로 바뀝니다. 


제가 식별되는 것이라 일컫는 것은 다름 아니라, 

감수성이 예민한 영혼이 대상들을 통하여 주어지는 

비통하거나 위안이 되는 인상들로부터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신의 뜻은 이 대상들에게 그런 특성을 끊임없이 적용하고 있고, 

그것도 오로지 영혼의 안위만을 위해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를 식별되는 것이라 칭하는 이유는, 

자기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 중에서 영혼이 가장 잘 식별해내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목표이며,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 수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