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번역 하섭내

새번역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제6장 동일한 주제의 연속 : 순수한 신앙 상태에 대하여 또는 신적 활동에 내맡김에 관하여

은가루리나 2018. 8. 26.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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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동일한 주제의 연속 : 

순수한 신앙 상태에 대하여

또는 신적 활동에 내맡김에 관하여 




   자, 그럼 계속해서 신적 활동에 대한 지식을 천착해보도록 

계속 전개해 나가기로 합시다. 


신적 활동은 얼핏 보기에 

그가 선의(善意)로부터 빼앗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말하자면, 

비밀리에 그것에 되돌려 줍니다. 


신적 활동은 늘 선의 안에 존재합니다. 


이것은 마치 공공연히 한 친구를 너그럽게 지원해주다가, 

다음 순간 이 같은 친구의 이익을 위해, 

더 이상 그를 돌봐주길 원치 않는 척 하면서도, 

눈치 채이지 않게 조심하면서 

여전히 전과 마찬가지로 그 친구를 도와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속임수와 이런 사랑의 신비에 대해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할 친구는 

속상할 것입니다. 


그는 은인의 행동거지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숙고와 얼마나 많은 사유를 추리를 거듭할까! 


그러나 곧이어 그 신비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영혼 안에 다양한 감정들이, 

즉 기쁨과 감동, 감사와 사랑, 당혹감과 경이로움이 

동시에 일어나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는 그것 때문에 

자기 친구에 대해 더 큰 열의와 열정을 품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시험은 

자기 친구에 대한 그의 애착을 더욱 강화시키고, 

차후 이와 유사한 충격적 일들에 부딪혔을 때 

그가 좀 더 잘 견뎌내도록 만들지 않겠습니까? 



이를 적용하는 일은 쉽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하면서 잃는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그만큼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서 자연적인 것들을 거두어가시면 가실수록, 

그분은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것들을 더 많이 주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은사들 때문에 그분을 조금 사랑했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사들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어서야 

비로소 그분을 단지 그분 자신만을 위해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서 당신의 은사들 자체를 눈에 띄게 빼앗아감으로써 

단지 그분만을 사랑하는 이 큰 은사, 

즉 다른 모든 은사들을 포함하고 있는 까닭에 

그분의 모든 은사들 중에서 가장 값지고 가장 폭넓은 이 은사에 대비해 

우리를 준비시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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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일단 그분의 활동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긴 영혼들은, 

설사 가장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을 잃게 된다 하더라도, 

설사 

사람들이 바라는 것보다 더 과하게 자신들의 몸을 바치는 모든 이들에 대해 

전반적인 불신감을 느끼게 된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을 항상 호의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실제로, 대개의 경우, 

본인들 스스로 영혼들의 뒤를 열심히 쫓아다니는 이런 부류의 안내자들은 

당연히 조금은 사람들로부터 불신을 살 만 합니다. 


정말로 하느님의 영에 의해 살아 움직이는 이들은 

보통 그렇게 열의를 보이거나 

그렇게 자기만족감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자발적으로 나서기보다는 

사람들이 그들을 부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늘 어느 정도의 불신감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 영혼들로 다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면, 

이들의 마음은 하느님의 명령을 대변한다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상황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대변하므로, 

마음이 말하는 바를 깊이 살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체를 위장한 신적 활동은 

당신의 계획들을 생각이 아니라, 본능을 통해 

영혼의 마음에 드러내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적 활동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음에게 당신의 계획들을 드러냅니다. 



이를테면, 

영혼으로 하여금 무턱대고 행동하게 함으로써 우연히, 

또는 영혼으로 하여금 앞에 보이는 방도 이외의 다른 것을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음으로써 부득이하게, 

또는, 예를 들어, 즉각적인 반응으로 

혹은 초자연적이거나 특별한 흥분상태에서 전달을 통하여(이끄심에 의하여)

어떤 일들을 말하거나 행해야 할 때, 

필요한 수단들을 웬만히 적용하게 함으로써적절히 적용함으로써

또는, 우리가 영향을 받느냐 마느냐에 따라,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거나 그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호감 내지는 반감을 적극적으로 적용함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외양만 물고 늘어진다면, 외양에만 집착한다면

이런 식으로 불확실한 일에 몸을 맡기는 것은 

확실히 덕이 크게 결여된 일일 것입니다. 


또 만일 이를 일반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한다면, 

이런 행동에는 

규칙적인 것도, 일정한 것도, 합의된 것도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숙고해보면, 

그런 상태에 다다른 것은 사실상 덕의 정점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게는 대개는 오랫동안 이를 연습한 후에라야만 

비로소 그런 경지에 도달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덕은 완전히 순수한 덕이며, 

그것은 완전함 자체입니다.




   우리는 음악에 대한 완벽한 지식과 오랜 연습을 결합시킬 줄 아는 

음악가와 같습니다. 

음악에 대한 완벽한 지식과 오랜 연습을 결합시킬 줄 아는 음악가를 

예로 들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예술로 너무나 충만한 상태라, 

그가 자신의 예술 영역 안에서, 무심코, 행하게 될 모든 것은 

완벽함을 보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가 한 작곡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의 작품들이 

음악적 규칙들이 권장하는 바에 완전히 부합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너무 양심적으로 세심하게 그것들을 하나하나 다 따를 경우 

그의 천재성을 가두어버릴 수 있는 그 규칙들로부터 해방되어 

거침없이 행동했을 때에야 

그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즉흥곡들은, 

걸작들만큼이나, 전문가들의 감탄을 자아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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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은총을 촉진하기 위해 사용된 이성적 추론과 방법의 영향 하에, 

구원에 대한 지식과 실천으로 오랫동안 단련된 영혼은 부지불식간에, 

모든 일에서 믿음과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천성과도 같은 자연스러운 습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기에 영혼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예전에 그가 필요로 했던 일련의 성찰 따위는 접어 두고, 

우선 눈앞에 나타나는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것 같아 보입니다


자신을 그릇된 길로 이끌 리 없는 은총의 영에게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는 영혼에게 남겨진 일이라곤 

닥치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영혼에게 남겨진 일이라곤 

무턱대고 행동하고 자신을 그릇된 길로 이끌 리 없는 은총의 영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뿐입니다. 


영혼이 이런 솔직담백한 상태에서 행하는 일은 

양식 있는 이들과 지적 정신의 소유자들에게 

그저 놀라움만을 안겨줄 따름입니다. 


규칙이 없는데도 이보다 더 잘 통제되는 것이 없고, 

척도가 없는데도 이보다 더 잘 계획된 것이 없으며, 

성찰하지 않아도 이보다 더 심오한 것이 없고, 

재간이 없는데도 이보다 더 잘 처리되어지는 것이 없으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이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고, 

선견지명이 없어도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에 

이보다 더 잘 적응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이런 상태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더 이상 의지할 데도 없고 더 이상 통찰력도 갖고 있지 않으며, 

자신의 활동들을 이끌고 인도하던 성찰의 도움도 더 이상 받지 못하고, 

은총의 작용도 더 이상 느끼질 못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상실 속에서 영혼은 모든 것을 되찾습니다. 


왜냐하면 

이 은총 자체와 

영혼 고유의 영을 새로운 형태로 대신하는 새로운 형태와 

고유의 영으로 대체된 이와 똑같은 은총이

그가 영혼에게서 박탈한 것을, 

감추어진 인상들의 순수함을 통해, 

그에게 영혼에게 그 백배로 되돌려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시야에서 신의 뜻을 놓치게 되는 것은 

확실히 영혼에게 대단한 치명타입니다. 


더 이상 영혼의 대상이 아니라 영혼의 원리가 된 신의 뜻은 

영혼의 눈앞에서 물러나, 그의 뒤편에 자리를 잡고서, 

그가 당신 앞에 서도록 밀어댑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겪는 이런 상실감처럼 

이 신의 뜻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지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 마음은 얼마나 처절하고 깊은 신음 소리를 내는가! 

거기에는 어떤 감각적인 위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는 마음으로부터 하느님을 빼앗아 가다니, 

이 무슨 사랑의 비밀이란 말입니까!    p.65


이 사랑의 비밀은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길을 통해, 아니 바로 이 길을 통해서만, 

순수한 믿음과 순수한 소망이 영혼 안에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을 믿고, 

감각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합니다. 


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대상이자 도구로 삼는 이 생소한 활동의 이끄심으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완전하게 되는지요! 


그 정도로 그런 만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순전한 우연과 타고난 성향만이 눈에 뜨입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영혼에게 모욕감을 안겨줍니다. 


영감을 받아 말을 하게 될 때에도, 

우리는 단지 천성적으로 그리 말할 뿐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영이 우리를 부추기는지 전혀 모릅니다. 

가장 거룩한 신의 입김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행하거나 느끼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경멸합니다. 

마치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결함을 지니거나 불완전한 것인 양 

말입니다. 


우리는 늘 다른 사람들을 찬미하고, 

그들보다 훨씬 아래에 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일을 추진하는 그들의 방식에 있어서 

무엇 하나 우리를 좌절시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지식을 불신하고, 

우리 자신의 어떤 생각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며, 

우리가 진실하다고 믿고 있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영혼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순종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리고 신적 활동은 

오로지 영혼을 극도의 겸손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그를 고결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혼에게는 이 겸손이 덕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엄연한 정의입니다. 

그가 덕으로 생각하는 것은 순수한 정의 뿐 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감탄스러운 것은, 

하느님께서 영혼으로부터 내적으로 분리시켜 놓은 이들의 눈에 

영혼은 이와 완전히 상반되는 감정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또한 영혼 자신이 보기에도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이 점에 있어서, 

그것은 전혀 치료할 도리가 없는 완고함, 불순종, 

불안, 경멸, 격분의 순전한 외양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자신의 모순과 혼란을 바로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들은 오히려 더욱더 커져만 갑니다. 


왜냐하면 

영혼을 난파시킬 수도 있는 암초들로부터 영혼을 우회하도록 하는 것이 

은총의 진정한 본능이기 때문이고, 

단순한 학습에 의해서, 

그 암초들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그의 모든 정신적 상태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 말을 건네는 사랑이 

실질적으로 그를 그곳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 하나 영혼에게 모욕감을 안겨주지 않는 것이라곤 없는 외양 아래 

영혼을 실제로 성화시키시니, 

이 얼마나 놀라운 신의 활동 방식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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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참으로 감탄할 만하고 숭고하며, 

그것은 오로지 겸손함을 더욱 키울 뿐인 매우 특별한 거룩함입니다! 


자, 이것이 바로 아주 확실한 은총의 호의이며, 어루만짐이며, 선물입니다! 

게다가 순수한 믿음의 열매는 전혀 썩지 않습니다. 


열매 껍질이 너무나 딱딱하고 그 안은 너무나 텅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잔뿌리와 같은 내 마음이여, 

하느님 품 안에 숨어 무명인(無名人)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분의 비밀스런 능력에 힘입어, 

그대는 볼 수 없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자양이 되고 기쁨의 원천이 될 가지와 잎, 꽃과 열매를 

밖으로 피워내고 맺으십시오! 


그대의 그늘 아래 휴식을 취하러 와서 

뭔가 시원한 음료를 찾을 모든 영혼들에게, 

그대의 입맛이 아닌 그들의 입맛에 따라 열매를 내어 주십시오! 


은총이 그대로부터 떼어낼 모든 접목들 하나하나에, 

바로 이 동일한 접목들이 영혼들에게 이식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명확하게 나타날, 

불분명한 인장(印章)이 하나씩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모든 접목들에게 모든 것이 되고 

그대 자신은 오로지 내맡김과 무관심 속에 머무르십시오! 




   보잘것없는 누에여, 

은총의 열기가 그대를 자라게 하고 그대를 부화시킬 때까지 

비좁고 어두운 지하 감옥 같은 그대의 비참한 고치 속에  

계속 머무르십시오! 


그리고 나서 은총이 그대 앞에 내놓는 모든 잎사귀들을 먹고, 

이 내맡김의 활동을 하는 동안 

그대가 상실한 평온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이 신적 본성이 그대를 멈춰 세우면 그때 비로소 멈추도록 하십시오! 


거듭되는 활동의 중지와 불가사의한 변모들을 통해, 

그대의 모든 옛 형태와 방법과 수단들을 잃어버리고, 

죽어 부활함으로써 

이 신적 본성 자체가 그대에게 가리켜 보일 모습을 띠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남모르게 그대의 명주실을 뽑아내어, 

그대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일을 하십시오! 


그대의 온 능력 안에서, 그대 자신 스스로가 못마땅하게 여길, 

은밀한 동요를 느끼십시오. 


그대는 물론, 죽어서 끔쩍도 하지 않는, 

그러나 아직도 그대가 다다른 종착지에 이르지 못한 

그대의 동료들을 은근히 부러워하면서, 

그 동료들을 능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에게 감탄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포기하고 부단히 움직여서 내맡김에 이끌려 

교회의 우두머리(지도자)들과 세상의 고관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영혼들이 영광스럽게 입고 다닐 

명주실을 뽑아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난 후, 보잘것없는 누에여, 

그대는 무엇이 될 것입니까, 어디로 빠져나갈 것입니까? 



오, 놀라운 은총이여! 

이것이 한 영혼으로 하여금 그렇게 많은 다양한 모습들을 달리 지니게 하는 

방법인 것입니까? 


은총이 영혼을 어디로 이끌고자 하는지 누가 압니까? 


만일 보지 않았다면 

자연이 누에를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누에에게는 그저 잎사귀만 보여주면 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 나머지는 자연이 다 알아서 합니다. 96

여기에서 나방이 되는 누에의 이미지 

(아빌라의 데레사, “내면의 성”, 다섯 번째 거처, 2~3장 참조)는 

신비주의적 “수동성”과 “상실”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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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영혼들이여, 

이와 같이 여러분은 여러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여러분이 어디로 가는지, 

여러분이 하느님께 대해 갖고 있는 생각으로부터 

거룩한 예지가 여러분을 어떻게 끌어내는지, 

어떤 종착지로 여러분을 인도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러분에게 남겨진 유일한 일은 완전한 수동적인 내맡김으로서,

이는 성찰하지 않고, 본보기도, 실례도, 방침도 없이,

자신을 되는대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행동해야 할 때에 행동하고, 

그만둬야 할 때에 그만두고, 잃어야 할 때에 잃으면서, 

그리고 이런 식으로, 

부지불식간에 끌림 혹은 포기로 내맡김으로 인해 행동하거나 그만두면서, 

우리는 책을 읽기도 하고, 

책과 사람을 잠시 버려두기도 하고, 

침묵하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고 멈추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 뒤따라올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 번의 변모를 거친 뒤 완성된 영혼은 날개를 부여받고 

천상으로 날아오릅니다. 


자신의 상태를 다른 영혼들 안에서 영속시키기 위해 

번식력이 강한 씨앗을 지상에 남겨두고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