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번역 하섭내

마음/제8장 영혼의 성화 작업 속에서 그에게 맡겨진 몫의 일과, 의무와 그 의무를 완수하는 충실성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

은가루리나 2018. 11. 23. 20:34


p.76


제8장


영혼의 성화 작업 속에서 그에게 맡겨진 몫의 일과, 

의무와 그 의무를 완수하는 충실성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 

그 밖의 일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신다 


p.76


   Sacrificate sacrificium jusitiae et sperate in Domino. 

예언자가 말했다 

“의로운 희생 제물을 봉헌하고 주님께 희망을 두어라”¹⁰ (시편 4.6.)




   다시 말해 이는 

영성 생활의 중대하고 견고한 토대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내외적인 모든 것에서 우리가 그분 원의(願意)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이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팔아넘겨진, 

그래서 더 이상 

자신에 대해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하는 사물인양 스스로를 바라보고, 

그 결과 모든 것이 하느님의 원의를 위한 것이 되도록 한다는 말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의 온전한 기쁨이 되어 주시고, 

그분의 행복과 영광, 그분의 존재가 우리의 유일한 선이 되도록 한다는 

입니다. 


이 토대가 놓이면, 영혼은 한평생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기뻐하며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하느님의 원의에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완전히 맡기고, 

하느님의 원의가 자신을 어떻게 사용하실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성찰도 함이 없이, 

그분의 원의가 자신을 처분하는 대로, 

이것 혹은 저것을 하거나, 아니면 그에 반대되는 것을 하는 것에 대해 

늘 동일한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하느님의 원의(願意)는 

우리 존재로 하여금 어떤 일들을 행하도록 하던가, 아니면 

우리 존재 안에서 그저 당신 자신이 일하시던가 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존재를 사용하십니다. 


첫 번째 방법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명백하거나 계시적인 원의에 충실히 전념할 것을, 

두 번째 방법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원의가 우리 안에서 행하는 작용에 

그저 단순하게 수동적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내맡김은, 

다름 아닌 현 순간의 성격에 따라 하느님의 명령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내포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내맡기도록 강요될지, 

현 순간의 특성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영혼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한 치의 유보도 없이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입니다.


p.77


   마음으로부터의 내맡김은 가능한 모든 방식들을 내포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고유 존재가 하느님의 원의에 맡겨졌고, 

순수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이 존재의 양도는 

그분의 원의가 작용하는 전 범위에 걸쳐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영혼은, 매 순간, 한없이 내맡기는 훈련을 하고, 

그의 미덕 가운데에는 

가능한 온갖 자질들과 온갖 방식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하느님께 바쳐야 할 순종을 어떤 대상에게 바칠 것인가 하는 결정은 

전혀 그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그저 단순히 모든 것에 순종하고, 

모든 일에 대해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맡김의 본질이며,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마음에게 요구하는 자유로운 선물은 

자발적 희생과 순종, 그리고 사랑입니다. 


그 밖의 나머지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자신의 사회적 처지가 강요하는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각별히 처신하든, 

영감에 의한 끌림을 얌전히 따르든, 

육체와 영혼을 위한 은총의 작용에 편안한 마음으로 복종하든, 

이 모든 것에 있어 영혼은 마음 깊은 곳에서 내맡김이라고 하는 

보편적이고 전반적인 동일한 행위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내맡김은 

목표 달성이나 목표가 달성된 바로 그 순간 나타나는 특별한 결과에 의해 

조금도 제한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맡김은, 

결과가 성실한 선의(善意)에 전혀 달려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 선의가 한결같이 지니고 있는 모든 장점과 효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면전에서는 성실한 선의가 행하고자 했던 일은 

이미 결과로서 간주됩니다. 



하느님의 원의는 

영혼의 개별적인 능력들이 실행되는 데에는 한계를 두지만, 

영혼의 의지가 실행되는 데에는 조금도 한계를 두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원의, 하느님의 존재와 본질은 의지(뜻)¹⁰¹ 의 대상이며,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행사(行使)를 통해 경계도, 격식도, 한도도 없이 

의지와 결합하십니다. 


만일 이 사랑이 영혼의 능력들 안에서 이것 혹은 저것으로만 끝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 자체가 거기에서 끝나기 때문이고그것은 끝나고, 

이어서 하느님의 뜻이, 

이를테면, 현 순간의 특질로 단축되고 요약되었다가, 

다시 영혼의 능력들로 옮겨 가고, 영혼의 능력들을 통과하여 

거기에서 순수하고, 한계가 없으며,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영혼의 마음에 임하기 때문입니다전달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순수한 사랑의 작용으로 무한한 능력을 지니게 된 마음에, 

모든 것으로 부터 깨끗이 비워져 하느님을 영접할 준비가 된 마음에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마음을 모든 것으로 부터 깨끗이 비우게 하여 

하느님을 영접할 수 있게 만든 순수한 사랑의 작용으로 

마음이 무한한 능력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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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⁰¹

(우선 의지(volonté)는 결심을 하고 자신의 결심을 이행하는 능력이라는 현대적 의미로 

이해하면 안 된다. 


전통적 인류학에서 의지는 지성과 기억력과 더불어 영혼을 구성하는 세 가지 능력 중 

하나이다. 


의지는 감정을 품는 능력, 즉 갈망하고 사랑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그것은 사랑의 중추이다. 


프란체스코회, 예수회, 살레시오회 전통에서는, 

인간은 우선 의지에 의해, 그 다음으로 지성에 의해 하느님과 결합할 수 있다.)




p.78


   오, 거룩한 비움이여!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은 바로 그대로다! 


오, 순수여! 

오, 모든 면에서의 정화여! 

오, 무조건적인 복종이여! 


바로 그대가 하느님을 마음 깊은 곳으로 끌어당기노라! 

능력들은 이것 다음으로 영혼들의 마음에 드는 것이기를 바라노라! 



주님, 당신은 저의 모든 선입니다.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이 보잘것없는 존재를 무엇에든지 쓰십시오. 


이 존재가 행동하든, 영감을 받든, 당신께 감도(感導)된 대상이 되든, 

모든 것은 만사에 있어 하나이며, 당신의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당신께 속하며, 당신으로부터 나오고, 당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저는 더 이상 그것과 아무런 관련도 없고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제 생의 단 한 순간도 저의 처방에 따르지 않으며,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저는 그 무엇도 덧붙이거나 빼지 말아야 하고, 

무엇을 구하지도 깊이 숙고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안배하실 분은 바로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성성(聖性), 완덕, 구원, 영적 지도, 고행, 

이것들 모두 당신께서 하실 일입니다. 


주님, 제가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으로 만족하고, 

어떠한 행동이나 열정을 제 것으로 삼지 않으며, 

모든 것을 당신 원의에 맡기는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에 대한 교리는 정신적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활동에 의해서만 주어집니다. 


하느님은 관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괴로움과 역경을 통해서 마음을 깨우치십니다. 


이렇게 얻은 지식은 실제적인 앎으로서 

우리는 이를 통해 하느님을 유일한 선으로써 누립니다. 


이 지식을 터득하려면 모든 사사로운 이익들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완전히 박탈당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계속되는 시련과 

온갖 종류의 개별적 성향과 

애착에 대한 일련의 기나긴 고행을 거쳐야만 

비로소 순수한 사랑 속에 자리 잡게 됩니다. 


창조된 모든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이 되는 수준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를 위해 

영혼의 사사로운 온갖 애착을 가로막아야만 합니다가로 막으시게 됩니다. 


따라서 영혼이 어떤 특별한 형태나, 

신앙심에 대한 어떤 생각이나, 완덕이라든가 

신앙 행위를 위한 어떤 수단들을 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이러저러한 계획이나 방도 내지는 길을 통하려 하며, 

게다가 또 그 길로 들어서기 위해 사람들과의 유대나, 

아니 결국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이런 것들로 향하자마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목적을 좌절시키시고, 

이 계획들이 성취되도록 하는 대신에,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 안에서 혼란, 동요, 공허, 광기만을 발견토록 하십니다.


영혼이 

“바로 저리로 가야 해, 이 사람에게 가야지, 

바로 이런 방식으로 행동해야 해”라고 말하자마자, 

하느님께서는 즉각 그에 정반대되는 것을 말씀하시고, 

영혼이 택한 방법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이처럼 모든 것에서 순전한 피조물만을, 

결과적으로 진정한 허무만을 발견하게 되는 영혼은 

어쩔 수 없이 하느님께만 도움을 청하게 되고 그분으로만 만족하게 됩니다.


p.79


   하느님의 선과 행복을 자신의 것으로 삼은 영혼은 

더 이상 사랑과 신뢰를 가지고 피조물들 속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으며, 

그것들을 단지 의무로써,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의 뜻이 특별히 적용된 대상으로서만 받아들입니다. 


영혼은 그의 변함없는 선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충만함 속에서 

이러한 풍요와 결핍을 초월하여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영혼이 자기 고유의 성향, 자기 고유의 운동, 자기 고유의 선택으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비웠음을 보십니다. 


즉, 영혼은 보편적인 무관심 상태에 노출된 죽은 주체인 것입니다.



신적 존재 전체는, 이처럼 마음 깊은 곳에 나타나, 

피조물들 표면 위로 허무의 표면을 확산시키고, 

이 허무로써 피조물들 간의 모든 차별성과 다양성을 흡수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이처럼 마음속에 자리한 피조물은 미덕도 효력도 지니지 못하게 되고, 

하느님의 위엄으로 자신의 모든 능력이 가득 채워진 마음은 

피조물에 대해 어떤 끌림이나 애정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으로 살아가는 마음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죽었으며, 

모든 것 또한 그 마음에게는 죽었습니다.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영혼에게, 영혼과의 관계에서 

피조물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일은 

만물에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느님께 속한 일입니다. 


이 생명은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따라 마음이 피조물에게로 향하고, 

이 명령에 따라 피조물이 영혼에게로 인도되고 받아들여집니다. 


하느님의 원의(願意)라는 이 성덕(聖德)이 없다면, 

영혼은 피조물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조금도 피조물에게로 향하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모든 피조물을 무(無)로 돌리고, 

뒤이어 하느님 명령의 거점이 되게 함으로써, 

매 순간은 영혼에게 하느님 자신이자 만물이 됩니다. 


왜냐하면 

매 순간 영혼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느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하느님의 명령 안에서 가능한 모든 피조물에,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하느님의 명령으로 창조되어진 것과 창조되어질 수 있는 모든 것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은 모든 것을 내포합니다. 




   이처럼 놀라운 신학의 실천은 매우 단순하고, 매우 용이하며, 

늘 현존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만일 이를 실천하고자 한다면 이를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p.80


이토록 순수하고 이토록 보편적인 이 해방, 이 사랑은 

능동성과 수동성, 영혼이 은총을 받아 해야 하는 것, 

은총이 영혼에게 오로지 내맡김과 수동적인 동의만을 요구하며 

영혼 안에서 행해야 하는 것, 

다시 말해, 하느님 자신이 손수 하시기를 바라시고 

신비주의 신학이 엄청나게 많은 미묘한 개념들을 빌어 설명하는 

이 모든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까닭에 

영혼 입장에서는 종종 아무 것도 모르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신학의 실천은 

순전한 망각과 순전한 내맡김만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에게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크시고 유일하신 전부로써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의 그분에 대해 만족하며, 

정성스럽고도 신중하게 자신의 책무적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영혼은, 이 유일한 훈련을 통해, 

너무나 곧고 너무나 밝으며 너무나 잘 보호된 길을 따라 

평온한 마음으로 안심하고 걸어갑니다. 


신비주의 신학이 

내외적(內外的)인 은혜와 십자가로 구성됐다고 설명하는 진정 경이로운 일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영혼도 모르는 사이에 행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영혼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께 복종할 생각만 하고 있는 동안, 

- 그분 홀로 기적을 일으키셨다 ¹⁰² 이 모든 일을 하시고, 

이를 행함에 있어서는 

영혼이 더욱더 자신을 버리고,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에 초연하고,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을수록, 

더욱더 이 일이 완전하게 되는 그러한 방법들을 사용하십니다. 



반면, 영혼의 성찰과 탐구와 노고는 

모든 것이 그의 선익(善益)이 되도록 하는 하느님의 활동 방식에 

그저 방해가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영혼의 성찰을 통해서 보면 

분명 당신이 계획하신 바와 정반대의 결과만을 낳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방식들과 수단들을 통해, 

영혼을 성화하고, 정화시키며, 

그를 인도하고, 계몽하며, 그를 양육하고, 확장시키며, 

그를 다른 이들에게 유익한 존재로 만들고, 

그를 사도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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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⁰² 

(foecit mirabilia magna solus (시편 136.4))




   현 순간 모든 것은 

영혼을 단순한 사랑과 순명의 오솔길로부터 끌어낼 수 있습니다. 


영혼이 단순하고 능동적인 충실함 안에 안정적으로 머무르면서 

자신이 맡은 파트를 자신 있게 노래하기 위해서는 

내맡김과 영웅적인 용기가 필요합니다. 


반면 은총은 영혼에게 

그야말로 넌 속았고 망했다는 것만을 들려주는 곡조와 음조를 가지고 

자신의 파트를 노래합니다. 


p.81


영혼의 귀에는 그것만이 들립니다. 


만일 영혼이 

천둥과 번개, 폭풍우와 벼락이 요란하게 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고, 

의무와 현재의 끌림에 대한 사랑과 순명의 오솔길로 당당히 걸어갈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가 예수님의 영혼과 닮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 상태를 겪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수난을 겪는 동안 거룩한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성부에 대한 사랑과 성부의 뜻에 대한 순종 가운데 

한결같은 발걸음으로 당신의 길을 걸어가셨고, 

성부께 당신을 온전히 맡겨 외양상 

당신처럼 거룩한 영혼이 지닌 위엄에 완전히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당신께 하시도록 맡겨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의 마음은 이토록 캄캄한 이 밤의 소음을 방치한 채, 

밤이 뚫고 들어오고, 폭풍우가 덮치도록 내버려 둡니다. 


그 외양만으로는 

하느님의 계획과 그분의 명령에 완전히 상반되는 것 같은 일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예수님과 마리아의 제 능력들을 망가뜨리지만, 

이분들은, 마음으로, 사랑과 순명의 오솔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갑니다. 


이분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자신들과 관계된 일들은 하느님께서 손수 처리하시도록 내버려 둡니다. 


이분들은 이 신적 활동의 온갖 무게를 느끼고, 그 중압감 아래 신음하지만, 

단 한순간도 비틀거리거나 멈추어 서지 않습니다. 


이분들은 마음을 하느님께 맡기고, 

마음으로 항상 그분의 길에 머물러 있다면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믿습니다. 


영혼이 잘 지내면, 만사가 잘 되어 갑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 즉 그분의 일과 그분의 활동은, 

말하자면 영혼이 지닌 충실함의 중심이면서 

또한 그 충실함에 대한 반향(反響)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활동은 영혼을 밀어내고, 

영혼은 반동적 움직임으로 이 활동을 향합니다. 


이것은 천의 뒷면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작업을 요하는 

아주 멋진 양탄자와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완성되는 

작품의 아름다운 측면입니다. 


이 일에 몰두하고 있는 직공은 

자신이 수놓는 바늘땀과 바늘만을 볼 뿐이지만, 

이 모든 한 땀 한 땀이 차례차례로 다 채워져 나가면서 

훌륭한 문양들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 문양들은, 양탄자 각 부분들에 대한 작업이 끝난 후, 

밝은 대낮에 이 아름다운 앞면을 전시했을 때에야 비로소 나타납니다. 


그러나 작업을 하는 동안, 

이 모든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은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자신을 내맡긴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하느님과 자신의 의무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 의무를 완수한다는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작품에 감지할 수 없는 바늘 한 땀을 더해가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바늘땀들을 가지고, 

우리가 이따금 시간 속에서 예감하던, 

그러나 환한 대낮같은 영원 속에서만 비로소 알아보게 될 

당신의 기적들을 일으키십니다. 


p.82


하느님의 인도하심은 얼마나 선함과 지혜로 충만한가! 


그분께서는 영혼의 완덕과 성덕을 위한 

모든 숭고하고, 고결하고,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오로지 당신의 은총과 활동을 위해 남겨 두셨고, 

은총의 도움을 받는 영혼들에게는 

보잘것없고, 분명하고, 쉬운 일들을 남겨 주셔서, 

세상사람 누구나 쉽게 최고의 완덕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육체 상태, 육체적인 의무, 육체적 자질들과 관계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닿는 범위 내에서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죄를 제외하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으로서 

이는 그의 능동적인 충실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의무들을 통해 명시된 당신의 뜻을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힘에 따라 달성하는 것이고, 

우리의 여타 다른 책무들을 

우리의 역량에 따라 어김없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쉽고 더 합리적인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도대체 어떤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영혼의 성화 작업 속에서 

그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대인들과 소인들, 강자들과 허약자들에게, 

한마디로 말해 

모든 이들에게,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이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니 그분이 우리에게 대단히 간단하고 쉬운 것만을 요구하신다는 게 

사실입니다. 


드높은 성성(聖性)에 도달하기 위해 

이토록 단순한 이 자산을 소유하는 것으로 충분하니 말입니다. 


p.82


   그런데 우리가 완수해야 하는, 

우리 완덕의 모든 본질을 이루는 이 의무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부과하는 보편적인 의무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서 각각의 인간에게 명하시는 개별적인 의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개별적인 의무들을 통해 

각각의 사람들을 서로 다른 조건 속으로 끌어 들이시고, 

그 조건 하에서 각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계명들이 명하는 의무들을 수행케 하시는데, 

이 의무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끌어당기는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만큼이나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사랑에 순종하고, 

우리로 하여금 복음적 조언들을 따르도록 인도합니다. 


그분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리 각자가 받은 능력에 따라서만 결정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분의 공정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 완덕을 지향하는, 

그러나 성인들의 생애에 관한 서적들을 읽으며 발견한 것들, 서적들에서 읽은 내용들, 

또 신앙서적들이 권고하는 내용들을 보면서 

심히 낙담할 우려가 있는 여러분! 


p.83


오, 완덕에 대해 여러분 자신이 만들어 낸 무시무시한 생각들로 

스스로를 못 살게 괴롭히는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바로 여러분 모두를 위로하기 위해 

제가 이 책을 쓰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이 아직 모르는 것 같은 일에 대해서 아시기 바랍니다.



이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자연적 질서 속에서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들, 

이를테면 공기, 물, 흙과 같은 것들을 사용하기 쉽게 만드셨습니다. 


예를 들어, 

숨쉬고, 자고, 먹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도 없고 

또 이보다 더 쉬운 것도 없습니다. 


이로부터 하느님께서 만드신 계명에 의하면, 

자연적 질서 속에서 필요한 것들 못지않게 

초자연적 질서 속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충실성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어려움들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커서는 안 됩니다. 

이들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인 만큼, 

우리가 갖추고자 함에 있어 부딪치는 어려움이 

그다지 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과 충실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다지 영향력 없는 하찮은 것들이긴 하지만아무리 하찮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영혼이 

자신의 완덕이라는 작품 속에서 맡아야만 하는 몫의 일과 

그 일 안에서 역할 몫 안에서 

영혼이 보여주는 이것들에 대해 흔쾌히 만족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몸소 이에 대해 의심할 여지없이 

너무나 분명하게 설명해주십니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것이 모든 인간이 지당히 해야 할 바이다 ¹⁰³. 



즉, 이것이 바로 인간 쪽에서 해야 하는 모든 일이며, 

이것이 바로 인간의 능동적인 충실성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몫의 일을 다한다면,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것이고, 

그 일의 수행은 은총에게 온전히 맡겨질 것입니다. 


은총이 행하는 놀라운 일들은 인간의 모든 이해력을 초월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생각 중에 구상하시고, 당신의 뜻 안에서 결정하시고, 

이 단순한 바탕과, 이토록 단일한 화폭과, 너무나 칠하기 쉬운 이 표층과,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잘 완성되고 잘 마무리된 

이런 특성들을 지닌 영혼들 안에서 

당신의 권능으로 행하시는 것을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고,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으며, 

어떠한 마음도 느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¹⁰(1코린토 2.9 참조.). 



오로지 거룩한 지혜의 손길만이, 

하느님께서 자신의 화폭 위에 무엇을 덧붙이실까를 알아내기 위해 

생각이나 탐구나 궁리를 함이 없이 

영혼이 내미는 사랑과 순종의 단순한 화폭 위에 작업을 함으로써, 

너무나 놀라운 이 인물들을 형상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영혼은 하느님을 신뢰하기에 자신을 그분께 내맡기며, 

자신의 의무에 온전히 몰두하는 까닭에 

자신도, 자신에게 필요한 것도, 

그리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할 방법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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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⁰³

Deum time et observa mandata est omnis homo. 잘못된 인용임 

(Deum time et mandata ejus observa ; hoc est enim omnis homo). (코헬 12.13)





   영혼이 아주 단순하고 잘 감추어졌으며, 

매우 비밀스러운 데다 외양상 꽤 멸시당할 만한 자신의 보잘것없는 일에 

전념을 하면 할수록, 

하느님께서는 거기에 자수와 색채를 곁들임으로써 

그 일을 더욱더 다양화하고 아름답게 하며 풍요롭게 만드십니다. 

당신의 거룩한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셨다 ¹⁰


p.84


아주 단순하게 맹목적으로 붓에 자신을 맡겨버린 화폭은 

매 순간 그저 붓질이 이루어지고 있음만을 느낀다는 게 사실입니다. 


눈먼 돌은 매번 망치가 정을 내리칠 때마다 

자신을 파괴하는 정의 잔인한 끝 부분만을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돌은, 이런 내리침을 반복하면서, 

석수가 자신 안에 만들어내는 형상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돌은 자신을 깎아내고, 긁어내고, 잘라내고, 

모양을 일그러뜨리는 정만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형편없는 돌 하나가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십자고상이나 조각상을 만들고자 하고, 

돌은 이를 모른다고 합시다. 


그때 우리가 이 돌에게 

“도대체 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니?”라고 물으면, 

이 돌은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내게 그걸 묻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나로 말하자면, 

나는 내 주인님의 손길 아래 굳건히 버티고 서있는 일, 

이 주인님을 사랑하는 일, 

내게 운명 지워진 작품이 되기 위해 그분의 행위를 견디는 일 외에 

따로 알아야 하거나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이를 실행할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나는 그분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분의 작업을 통해 내가 무엇이 될지 전혀 모릅니다. 


내가 아는 유일한 사실은 

그분이 하는 일이 가장 좋고 가장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매 번 내게 가해지는 정의 타격을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것으로서 받아들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매 번의 타격이 내 감정 안에 

폐허, 파괴, 흉한 몰골과 같은 생각만을 불러일으킴에도 불구하고 

그러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은 내버려두고, 

현 순간에 만족하면서, 내 의무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 능수능란한 대가를 잘 모르지만,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작업을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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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⁰

(Mirificavit Dominus sanctum (시편 4.4).)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영혼들, 단순한 영혼들이여, 

하느님께 속한 것은 그분께 맡기고, 

여러분은 평화로이 서두르지 말고 여러분의 실이나 자으십시오. 


그대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여러분들을 위한 최선의 것이라 여기십시오.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놔두고, 여러분은 그분께 온전히 내맡겨, 

정이나 바늘 끝이 움직이는 대로 내버려두십시오. 


이처럼 대단한 이 온갖 다양성에 대해서는, 

그대의 화폭을 더럽히는 데나 걸맞을 것 같은 색깔들이 

그저 단순히 덧붙여진 것으로 느끼십시오. 


p.85


이 모든 신적 작용들에 대해서는 

완전한 자기 포기, 자아 망각, 자신의 의무에 대한 전념이라는 

참으로 한결같고 참으로 단순한 방식으로만 부응하십시오. 


그대의 노선을 따라 똑바로 걸어가십시오. 

그리고 지도, 인접지와 도착지, 지명, 특성, 장소를 모르더라도 

무작정 그 길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수동적으로 그대에게 맞게끔 조정될 것입니다. 


순종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의 왕국과 그분의 정의만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그대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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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많은 영혼들이 근심하며 이렇게 묻는 것을 목격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거룩함, 완덕, 고행, 영성지도와 같은 것을 줄 수 있을까요?” 


그들이 말하도록 놔두십시오. 


그들이 이 경이로운 작품에 나오는 용어들과 이 작품의 특성들, 

이 작품의 본성과 작품의 구성 부분들을

서적들 속에서 찾도록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랑으로 하느님과의 합일 속에 평안히 머물고, 

여러분의 책무인 단단하고 곧은 오솔길을 무조건 걸어가십시오. 


천사들이 이 밤의 곁에 서서 

그들의 손으로 방벽(防壁) 역할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더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당신의 영감(靈感)을 통해 이를 알려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은 만물에 초자연적인 신적 질서를 부여합니다. 


그분의 손길이 닿은 모든 것, 그분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 

그분의 위력이 펼쳐지는 모든 사물들, 이 모두가 거룩하고 완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권능에는 전혀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만물을 신성시하면서 조금도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면, 

영혼이 믿는바 그대로, 확신하는 바와 같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영감이 

그를 그의 처지에 수반되는 의무들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합니다. 


이 경우, 다른 무엇보다 하느님의 명령을 선호해야 합니다. 

두려워하거나, 제외시키거나, 구별 지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혼에게 가장 소중하고 유익한 순간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그가 자기 하느님의 원의를 완수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인은 

그들 각자가 전념하도록 명령받은 이 동일한 임무들로 인해 거룩합니다. 


거룩함에 대한 평가는 

절대로 일들 그 자체, 그것들의 본성들, 그 고유의 특성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혼을 밝히고 정화시키고 고행케 함으로써 

영혼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영혼 안에 거룩함이 생겨나게 행해지게 하는 

이 명령의 준수에 의해서만 비추어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하다고 일컫는 것의 모든 미덕은 

이런 하느님의 명령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것도 구하지 말고, 아무것도 거부하지 말며, 

그분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취하고, 

그분이 없다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p.86


만일 하느님께서 

서적들, 현인들의 조언들, 염경 기도, 내적인 애착과 같은 것들을 명하신다면, 

이 모든 것은 영혼을 가르치고, 인도하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할 것입니다. 


정적주의는 이 모든 수단들과 모든 감성적인 것을 

전혀 따르고 싶어 하지 않지만 헛수고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어떤 영혼들의 경우 

이 길을 따라 걸어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고, 

또 이들의 처지와 끌림 역시 꽤나 뚜렷하게 이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모든 고유한 활동들이 배제된 내맡김의 방법들을 

마음속에 그려보고자 애쓰지만 이 또한 헛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력으로 어떠한 것들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명령이라면, 

내맡김은 바로 그렇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뭔가 결정을 내리는 것도 헛수고입니다. 

왜냐하면 최고의 완전함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에게 이 명령은 

그들의 사회적 신분상의 의무들과 이 의무들 중 가장 완전한 의무, 

즉 자신의 어떤 고유한 활동이 들어가지 않은 섭리에 따른 의무에 국한됩니다. 


다른 이들에게 이 명령은, 

자신의 고유한 활동이 들어가지 않은 섭리에 따른 의무 이외에, 

몇 가지 다른 개별적인 의무들과 사회적 신분상의 의무들을 넘어선 

여러 행위들을 나타냅니다. 



이때 이런 것들에 대한 끌림과 영감은 

이것이 하느님의 뜻에서 온 명령이라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이 영혼들에게 있어 최고의 완전함은 

영감을 통해 받은 모든 것들을, 

그 영감이 요구하는 신중성을 가지고, 

자신의 신분상의 의무들과 순수한 섭리에 따른 일들에 덧붙이는 것입니다. 


이 영혼들이 다소 완전하다고, 

더 정확히 말해서 이 영혼들이 전념하고 있는 여러 다양한 일들로 인해서 

이들이 다소 완전하다고 상상하려 드는 것은 

완덕을 하느님 명령에 대한 순종에 두지 않고 사물에 두는 발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좋으실 대로 당신의 성인들을 양성하십니다. 


이들 모두를 이렇게 양성하는 것은 그분의 명령이며, 

모두가 이 명령에 순종합니다. 


이러한 순종은 진정한 내맡김이며, 이것은 가장 완전한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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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분상의 의무들과 섭리에 따른 일은 모든 성인들에게 공통된 것으로, 

이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일반적으로 표시나 표징을 통해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어둠 속에 숨어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너무나 불행해서 세상의 암초를 피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이유로 성인이 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더욱더 하느님의 이 명령에 순종하면 할수록, 

이들은 또한 더욱더 자신들을 성화시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들의 특별하고 비범한 행위들을 통해서, 

당신의 말씀이기에 하나의 의무가 되는 당신의 명령에 대한 

전혀 의심할 바 없는 끌림과 영감을 통해서 

이들의 덕성들이 그 빛을 발하도록 해주십니다. 


p.87


그러나 이런 이유로 

이들이 내맡김의 길을 통한 덕의 추구를 덜 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이들이 하느님께로부터 특별한 활동을 명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신분상 의무들과 순수한 섭리에서 비롯된 일들에 만족한다면 

이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게 될 것이고, 않게 되는 것이고

그분의 뜻은 이들의 전 순간들에 대한 주인이 되지 못할 것이며, 

이들의 모든 순간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세우신 계획의 범위에 따라 자신들을 펼쳐나가고 

이끌림을 통해 걸어갈 것을 명받은 그 길로써 평가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감은 이들에게 의무가 되어야 하고, 

이들은 이 의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외법(外法)에 의해 자신의 모든 의무를 알아채고,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이 의무에 바짝 밀착되어 있을 것을 명하시기 때문에 

이 의무에 갇혀 있어야 하는 그런 영혼들이 있듯이, 

다른 영혼들은, 외적 의무를 넘어서서, 

성령이 그들 가슴 속에 새겨놓은 이 내법(內法)에 더욱 충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가장 거룩한 사람들입니까?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 애쓰는 것은 순전히 헛된 호기심입니다. 


각인(各人)은 자기 앞에 나있는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명령과 거기에서 발견되는 가장 완전한 것에 순명하는데 있습니다. 

나머지 지식들은 우리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명령받은 일들의 양이나 질에서 

거룩함을 추구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애(自己愛)가 우리를 움직이는 원칙이라면, 

또는 만약 자기애가 추구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을 때 

우리가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명령이 빠진 풍요 가운데 늘 빈곤할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뭔가 정의를 내려 보자면,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원의(願意)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부응하며, 

하느님의 명령과 뜻을 표현하는 것들의 성격이 어떻든 간에 

우리가 그분의 명령과 뜻을 더욱더 사랑하면 할수록 

거룩함 또한 더욱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예수님과 마리아 그리고 요셉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개별적인 삶 속에 

물질적인 것보다 더 큰 위대함과 더 나은 존재양식이 들어 있었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다지도 거룩한 이 사람들이 사물의 거룩함을 찾았다고 적지 않고, 

오로지 사물 안에서 거룩함을 찾았다고 적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가장 완전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특별하고 특이한 길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가장 완전한 것은 

각자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조건 하에서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p.88


   첫 번째 의무는 필요에 따른 것으로, 억지로라도 이 일을 해야 합니다. 

필수적인 것이며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구속력이 따릅니다. 


두 번째 의무는 내맡김의 의무로서 순전한 수동성을 말합니다. 


세 번째 의무는 

영혼의 단순성과, 영혼의 부드럽고 그윽한 성의(誠意)와, 

온갖 것을 행하도록 하는 은총의 숨결에 대한 영혼의 유동성을 

무척 많이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단지 우리가 받은 인상에만 몸을 맡기고 

그 인상이 명하는 바에 

단순하고 자유롭게 순종만 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거기에 어떤 실수도 없도록, 

영혼들에게 현명한 안내자들을 보내 주시는데, 

이 안내자들은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영감을 사용하기 위해 지니고 있어야 하는 자유 

혹은 신중함을 지시해 줍니다. 



그리고 

모든 법칙, 모든 형식, 정해진 모든 방식을 본질적으로 넘어서는 것이 

바로 이 세 번째 의무입니다. 


가장 거룩한 이들의 계획을 특수하고 비범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특수하고 비범한 계획을 세우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의무이고, 

그들의 염경기도와 그들의 내적 언어, 

그들의 능력에 대한 느낌과 그들 삶의 광채를 조절해 주는 것도 

바로 이 의무입니다. 


이 엄격함과 이 열의, 

그들 자신의 이웃에 대한 이 넉넉한 인심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의 내법(內法)에 속하기 때문에, 

거기에 관심을 기울여서도 안 되고,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과해서도 안 되며, 

그것을 갈망해서도 안 되고, 

우리로 하여금 이런 종류의 일반적이지 않은 덕행들을 시도케 하는 

이 은총들을 받지 못했다고 한탄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은총의 상황들은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만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만일 이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정신이 환영에 빠질 수도 있음을 우려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둠 속에 감추어두고 싶어 하는 영혼들이 있다는 점과, 

하느님께서는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그 영혼들 자신의 눈에도 

그들 스스로가 비천하고 보잘것없게 비쳐지기를 바란다는 점,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 영혼들에게 내리는 명령들은 분명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그와 정반대로 불분명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영혼들이 가르침을 잘 받았다면, 

이들은 이 길을 따라 가는 과오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의 길은 자신이 걸어가는 길을 충실히 가는 데 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비천함 속에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이들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사랑과 순명 안에서 

이를 얼마나 열심히 따르는가 하는 데서만 

이들이 걸어가는 길에 차이가 있다 하겠습니다. 


실제로 이들이 외적인 노동에 있어 

그들 자신보다 더 많이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영혼들을 능가한다면, 

이들의 성덕이 그런 영혼들보다 더 빼어나다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p.89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각 영혼이 자신의 신분상 의무와 순수한 섭리의 명령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영혼들에게 이것을 분명하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영혼이 받은 생생한 인상과 끌림에 관해 말하자면, 

영혼은 스스로 이에 대한 결단을 내려서도 안 되고, 

이 내적 느낌을 증가시켜서도 안 됩니다. 


이런 자연스런 노력은 은총의 주입에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것이고 

이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은총의 주입은 평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랑의 목소리가 신부를 잠에서 깨어나게 해야 하고, 

신부는 단지 성령의 숨결이 자신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만큼만 

나아가야 합니다. 


만일 신부가 자력(自力)으로 잠에서 깨어난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인들을 탄복할 경외할만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그 숱한 기적들에 경이로움들에 대해 

영혼이 어떤 끌림이나 은총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인들에게 이것을 원하셨지만 

내겐 이것을 원하지 않으셔.

” 저는 착한 영혼들이 이런 행동거지를 배워 준수한다면 

참으로 많은 수고를 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점을 세상 사람들과 섭리에 따르는 영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하는 바입니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매 순간 실행해야 하는 일로써 

자신들의 손안에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일상적인 의무들과 그들의 신분에 따른 활동들입니다, 


그리고 만일 섭리에 따르는 영혼들이 그들 자신이 완전히 무시하는 것들, 

거룩함에 전혀 쓸모가 없고 거룩함과는 무관하다고까지 

그들이 간주하는 것들, 

그들 자신을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그것들에 대한 하는 생각들을 

그들에게 품게 만드는 것들, 


그 생각들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눈부시고 경이로운 것이라고 하는 상상에 

그들을 가둬버리기 버리기 때문에 

결국 그들 자신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 생각들을 

그들에게 품게 만드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그리고 만일 이들 모두가 

그들의 사회적 신분상의 처지로 인해 매 순간 지게 되는 

모든 십자가의 섭리 안에 거룩함이 존재하며, 

특별한 신분상의 처지가 

최고의 완덕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그들의 모든 일거리들과 여타 다른 것들을 

신성한 황금으로 변화시켜주는 화금석(化金石)은 

하느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그들은 성인이 되기 위해 그들이 하는 것보다 더 일 할 필요가 없으며, 

그들이 고통 받는 것보다 더 고통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고도의 거룩함을 얻는데 

그들이 허비해 버리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p.90


   제가 얼마나 당신의 거룩한 뜻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 

모든 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지 모릅니다, 


성성(聖性)만큼 이렇게 쉽고, 이렇게 일반적이며, 

이렇듯 모든 이들의 손이 미치는 곳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회개한 강도와 회개하지 않은 강도가 거룩하게 되기 위해 

이행하고 견뎌내야 했던 일들이 다르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영혼과 내적이고 영적인 영혼 이 둘 사이에는 

누가 누구보다 더 많이 행하거나 더 많이 견뎌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은 

구원받는 다른 영혼이 당신의 뜻에 순명함으로써 행하는 일들을 

충동적으로 행함으로써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은 

다른 영혼이 체념하고 참아내는 것을 

한탄하고 불평하며 참아냄으로써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그러므로 다른 것은 바로 마음뿐이라는 것을! 



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랑하는 영혼들이여, 

이것이 여러분에게 더한 고통을 안겨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행하고, 

여러분이 견뎌내고 있는 것을 계속 견뎌내십시오. 


바뀌어야 할 것은 단지 여러분의 마음뿐입니다

우리가 마음이라는 말로서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의지(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의 변화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바라는 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의 거룩함은 하나의 단순한 전체이며,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뜻을 지니는 단순한 마음가짐입니다. 


이보다 더 쉬운 것이 있습니까? 


실제로 

누가 이토록 상냥하고 이토록 좋은 뜻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것은 오로지 이 사랑에 의해서만 거룩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