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46 pp.226-232 제 3편 제 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 에 있어서의 위탁 제4절 장소와 환경①

은가루리나 2018. 10. 12. 18:51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제8장 7장의 계속 - 실패와 과실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8장의 계속 - 내적시련의 일반


제10장 9장의 계속 - 유혹


제11장 10장의 계속 - 위안과 건조


제12장 11장의 계속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12장의 계속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13장의 계속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



p.226



제三편 위탁 (委託) 의 대상 (對象)


제  장 

외부적 선(善)과 악(惡) - 행(幸)과 불행(不幸)- 에 있어서의 위탁(委託)  



四절 장소(場所)와 환경(環境) ①




마치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수도자는 자기 수도원에 애착한다。


이 애착은 천주의 뜻에 합당한 한、

그것은 가장 올바르며、가장 존경할 만하다。


수도원은 그 안에서 천주께서 우리를 세속으로부터 비호(庇護)하시고

가장 감미로운 친밀성 안에 우리와 함께 거처하시는 「닫혀진 동산」이다。


물론 그것은 아직 천국이 아니다。

그렇지만、이미 「에집트」도 아니다。

거기는 젖과 꿀이 풍부히 흐르고 있는 「약속의 땅」이다。



수도자는 주와 같은 지붕 밑에 살며、

그 감실의 바로 가까이 

또는 미사성제의 숭엄(崇嚴)한 현의(玄義)를 축하하며、

또는 천주의 영광을 찬양하고、

또는 묵상과 경건한 독서의 양식으로써 영혼을 기르면서 

가장 감미롭고 거룩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우리가 수도생활의 초보적 가르침을 얻은 것도、

내적생활에 진보된 것도、

성덕에의 싸움에 훈련된 것도、

그 곳이다. 


우리를 지탱하는 회칙(會則)과 

장상(長上)의 견고한 지도와 

우리를 끌어당기는 동료 수도자들의 모범의 덕택으로 

우리들은 보다 신속하게 진보하고、

보다 높은 곳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은총의 샘물에 그렇게도 풍부하게 기름진 이 축복된 장소는 

우리의 최상의 기쁨과、

우리의 싸움과 우리의 시련의 복된 증인(證人)이다。


거기서 우리는 살고 또한 죽기를 약속하였다。


우리의 영혼은 

그 노고의 반려(伴侶)였던 육체가 영광스럽게 눈뜨기를 기다리면서 

선배들 곁에서 잠에 들어갈 때에、

거기에서 천국에 날아오를 것을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 수도원에 대한 그렇게도 정당한 애착은 

천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천주께서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운명의 최고의 지배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명의 길에 의해서 우리를 처리하시는 것도 

또한 박해가 그 악의를 자행(恣行)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도 

전연 자유시다。


p.227


우리는 물론、

약속한 거처를 확고히 지키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힘을 다하여야 한다。


그러나 만일 천주께서 

우리가 사랑하는 수도원을 떠나 다른 곳에 가는 것을 바라신다고 하드라도、

역시 무한히 현명하시고 무한히 인자하신 주가 아니시겠는가。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도 역시 다른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 위에 보아야 할 것은 천주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사랑에 충만된 신뢰로써 복종하는 대신、

지고의 천주의 의지에 감히 반항할 수 있겠는가。



이 지상은 일시적인 임시 거처에 불과하다。

우리의 영원한 도읍은 천국에 있다。


거기에 오르기에는 추방된 땅에서 출발하거나、

조국의 땅에서 출발하거나를 막론하고 

오직 중요한 것은 거기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천주께서 우리가 수도원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시는 동안은、

거기는 우리에게 있어 천국에의 비할데 없는 길이다。


그러나 만일 천주의 섭리가 우리를 다른 곳에 보내신다면、

그것이 어떤 곳이든、

그 후에는 우리에게 있어 구령의 희망이 거기에 있다。


왜냐 하면 우리를 천국에 끌어 들이는 것은 순명의 덕이기 때문이다

(마테오7 .31) 



p.228


그렇지만、수도원의 담장보다도 훨씬 탁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즉 수도원에서 보내는 수도생활이다。


그리고、만일 우리가 이 생활을 잃지 않기 위하여 

다른 곳에 가야 할 경우가 있드라도 

그러한 대가로써도 

우리에게 이처럼 커다란 보물을 간직토록 하시는 천주를 

찬미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과연 참으로 영웅적인 희생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타향의 땅에 있어서도  본 수도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수업(修業)、같은 동료 수도자、같은 장상(長上)을 가질 수만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다른 나라에서는 습성이 되어 있던 일상의 과업을 수행할 수 없고、

혹 특히 수도생활을 잃고 다시 세속 안에 던져지는 많은 수도자처럼 

우리는 결코 불행한 이는 아니다。


담장 안의 수도생활에만 수련(修練)된 우리 수도자에게 있어서는、

세속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최대의 불행이다。


그러한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최대한을 지불하여야 한다。



만일 수도자의 규칙에 따라서 순명에 의하여 

새로이 세워진 수도원 또는 피난소에 보내지는 경우에는、

열심한 수도자는 그러한 일 안에 천주와 자기 영혼만을 생각하여、

관대한 마음으로 천주의 뜻에 복종한다. 


그러한 명령을 받을 때에 

양심은 그것을 의무로 하지 않는 한、

장상에게 존경과 효애(孝愛)에 충만한 충고를 하는 것까지도 피한다。


천주께서 원장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자、

바로 신뢰의 마음으로 주저하지 않고、

참으로 순종하는 아들로서 복종하는 것、

또는 자신의 영적진보(靈的進步)룰 지향하여 

이 희생을 최대한으로 유용하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p.229


、우리는 수도원에 있어 

천만명 가운데서 선택된 정예(精錢)의 환경에 놓여져 있다。


수도 단체는 예수·그리스도에 있어 결합된 하나의 가족이다。


각자는 거기에서

세속에 대한 경멸에、거룩한 회칙(會則)에 대한 애착에、

또는 천주를 기쁘게 해드리고、자기를 성화시키려는 열심에 서로 경쟁한다。


그리고 우리는 형제로서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얼마나 좋은 것인지 날마다 경험하고 있다。


주께서 우리를 수도생활에 불으신 것을 충분히 감사할 수도、

또한 수도단체가 우리에게 주는 모든 은혜에 대하여 충분히 보답할 수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 주위의 사람이 모두 성인이라 하드라도、

인간 안에서는 인간적인 나약함이 얼마라도 남아 있음을 발견하는 것을 

대하여야 한다。


적어도 거기에는 성질과 성격과의 차이、감정과 의지와의 대립、

그 밖에 우리를 괴롭히는 사소한 일이 허다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정중한 대우를 받는 것에 습관이 돼있으므로、

조금이라도 섬세하지 못한 대우에 쉬이 느끼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주위로부터 무엇인가 인내해야 할 일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이 천주의 뜻이라고 확신하여야 한다。


참으로 우리가 같은 수도단체에 있어 같은 장상 밑에서 

항상 서로 접촉하며 생활하도록 우리를 사방으로부터 불러 모으신 것은, 

우연히 아니며、천주 자신이시다。


감정、의견、기호(嗜好)、그 밖에 무수한 일은 

모두 덕행에 의해서만 조화된다。


평화라고 하는 선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서로 허다한 희생을 지불할 필요가 있다。


천주께서는 그것을 알으시며、

그리고 바로 그것때문에 우리를 공동생활에 두시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한 안식(安息)과 승리 후의 평화를 맛보는 것은 

천국에 있어서이며、

지상에 있어서는 싸움의 때、

더구나 자신의 죄과를 보상하고、결점에 쳐 이기며、

덕에 나아가고 공로를 쌓기 위한 우리 자신에 대한 싸움의 때다。


그것에는 각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최선의 방법의 하나는、

항상 각가지 자기포기(自己抛棄)를 요구하는 공동생활(共同生活)이다。



p.230


「드·고사드」신부는 그가 지도하는 한 수녀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이 위대한 원리를 철저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대는 어떤 경우나 사건에 복종하는 것도、

따라서 또한 그러한 경우에 

천주의 의지 안에 확고하게 평온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악마는 항상 이것에 관하여 많은 미혹(迷惑)과 거짓 구실을 내세워 

그대를 유혹하고、불안하게 하며、그대의 마음을 산란케 하여 왔읍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의 구령과 안심을 위하여 

이러한 정신의 미혹(迷惑)에서 떠나기를 간절히 권고하고 싶읍니다。 


그것으로써 그대는 모든 언짢은 감정이나 마음의 모든 반역을 

끊게 되는 것입니다。」(「위탁」五장、「서간」六)



가정생활 및 수도생활에 수반하는 고통、감정이나 성격의 차이、등은 

우리의 영적 진보 (靈的進步)의 장애라기보다는、

오히려 천주의 섭리에 의한 매우 귀중한 수단이다


불쾌의 원인은 이것을 우리 자신 안에、

즉 신앙、겸손、자기포기의 부족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장해물은 단지 이 부족을 폭로하는 기회가 되는데 불과하다。


악은 우리 자신에게서 생기는 것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치료약은 우리 자신에게 투약하여야 한다。


천주께서 감정의 대립을 허용하시고 

항상 되풀이되는 십자가의 고통에 흡사한 시련에 우리를 부딪치게 하는 것은 

실로 이 까닭이다。



이것은 과거의 죄에 대하여 얼마나 탁월한 보속의 행위인가。


왜냐 하면、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주는」(베드루 전서 4. 8) 연고이며、

천주께서는 우리가 형제에게 하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또한 마찬가지로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용서하자。 

그러면 천주께서도 또한 우리를 용서하시리라. (마테오 6.14,  7.2) 


형제가 우리에게 가한 불의(不義)를 잊자、

그러면 천주께서도 또한 우리의 불의를 잊으시리라。


이웃에 대하여 인내와 애련과 유화를 다하자。

천주께서는 그 말씀에 충실하신만큼 

우리에게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분명히 행하시리라. 


항상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확실히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값어치를 지불해야만、

우리는 반드시 천주의 자비하심에 의지할 수 있으며、

그것은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고、얼마나 위안이 되겠는가!·


p.231


이것은 또한 얼마나 탁월한 성성(成聖)의 수업(修業)이랴! 

우리는 이 수업(修業)이 없이는、 많은 선덕을 잃을 것이다. 


만일 서로의 인내、자아포기 등의 덕을 획득하려고 바란다면、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

더구나 형편 여하에 구애되지 않고、

말하자면 무심코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언짢은 마음에 충동되어、

차없이 우리의 진상(眞相)을 폭로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믿어、

그래서 아마도 어디까지나 

자신에 관해서의 기묘한 미혹(迷惑)에서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 


겸손하게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굴욕(屈辱)이 필요하겠는가! 


우리는 적당한 굴욕、

즉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고 필요한 굴욕을 택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또한 병자가 엄격한 요양법에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러한 굴욕에 어디까지나 복종할 용기가 과연 있는가。


우리는 반역하는 대신、

자신의 곁에 이러저러한 사람을 두신 천주의 예지와 인자를 찬미하자。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한 수도회의 창립자인 성녀「마리아·막달레나· 뽀스뗄」은 

그 수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p.232


「사람에게는 모두 각기 다른 습성、성질、결점、나쁜 버릇이 있읍니다。

수도원에 그러한 다소 까다로운 성질을 가진 사람이 없다면, 

천국을 얻기 위하여 그러한 사람을 구해와야 할 것입니다」라고.

(「동 성녀전」二七장)


그런데 천주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수도원에 있게 하셨다。

자기에게 죽는、이와 같은 은총을 선용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1베드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