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번역 하섭내

새번역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제9장 하느님의 탁월하신 뜻과 현 순간에 대하여

은가루리나 2019. 8. 17. 15:47


p.91


제9장


하느님의 탁월하신 뜻과 현 순간에 대하여




   하느님의 뜻보다 더 합리적이고 더 완전하며 더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분 뜻이 지닌 무한한 가치가 

시간이나 장소 혹은 상황의 어떠한 변화로 인해 증가할 수 있을까요? 


만일 여러분이 

매 순간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비결을 알게 된다면, 

그렇다면 여러분은 가장 값지고 우리의 바람에 가장 합당한 것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영혼들이여,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십시오, 


여러분의 소원이 모든 척도와 모든 경계를 넘어서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무한히 확장시키고 팽창시키십시오, 

그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을 제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저는 여러분이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여러분으로 하여금 매 순간 늘 발견하도록 할 것입니다. 




   현 순간은 항상 무한한 보물로 가득 차있으며, 

여러분이 품을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더 많은 보물을 담고 있습니다. 


믿음이 척도이니, 

여러분은 여러분이 믿는 만큼 현 순간의 보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 역시 척도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더 사랑하면 할수록 마음은 더 바라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마음이 더 발견한다고 믿을수록 마음은 더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매 순간 

여러분의 마음이 결코 고갈시킬 수 없는 광대한 대양처럼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이 믿음과 신뢰와 사랑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그 만큼만 그 대양 안에 담겨 있는 보물을 받게 됩니다. 


그 밖의 나머지 피조물들은 

하느님을 제외한 그 무엇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닌 여러분의 마음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산들도 

마음속에서는 한낱 티끌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현 순간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 안에 감춰지고 

베일로 가려진 이 하느님의 뜻 속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채워 줄 것을 퍼 올려야 합니다. 


그러노라면 여러분은 

그분의 뜻이 여러분이 희구하는 것보다 늘 무한히 더 광대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아첨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그림자와 환영을 숭배하지 마십시오. 

이것들은 여러분에게 뭔가를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이 여러분을 충만케 할 것이며, 

그 충만함으로 인해 여러분 안에는 어떤 공허감도 자리 잡지 못 할 것입니다. 


p92


하느님의 뜻을 숭배하십시오. 

모든 외양을 깊이 통찰하고 내던져 버림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십시오. 


감각의 죽음, 감각의 헐벗음, 감각의 제거 혹은 파괴는 

믿음이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각은 피조물을 숭배하고, 믿음은 신의 뜻을 숭배합니다. 

감각으로부터 우상을 떼어내 버리십시오. 

그러면 감각은 절망에 찬 아이들처럼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승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부터 하느님의 뜻을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감각이 두려움에 떨고 허기지고 헐벗고 짓눌림을 당할 때, 

믿음은 자라나고 부유해지고 생기를 띱니다. 


믿음은, 마치 

난공불락의 장소에 자리 잡은 사령관이 쓸모없는 성채들을 우습게 여기듯, 

자기가 상실한 것들을 우습게 여깁니다.




   하느님의 뜻이 영혼에게 계시되고, 

그분의 뜻이 그에게 주어지고 있음을 영혼으로 하여금 느끼도록 할 때, 

마찬가지로 영혼 쪽에서도 그 모든 만남에서 강력한 구원을 느낍니다. 


그때 영혼은 

이 하느님의 강림(降臨)이 안겨주는 행복을 체험적으로 맛봅니다. 


영혼이 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참으로 경배할만한 그분의 뜻이 내리는 매 순간 

그가 취해야 할 태도인 내맡김을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때에 따라 사태들을 가늠할 뿐만 아니라 

이런 사태들이 포함하고 있는 더없이 귀중한 보물을 몰라보는 사람들처럼 

이 영혼도 이런 일들을 같은 식으로 판단하리라고 생각합니까? 


변장을 한 이가 사실은 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낯선 이가 왔을 때에, 

서민 행색을 하고 있는 인물을 보고 그의 겉모습에 따라 그를 대하는 이와는 

달리, 

이 사람에게 정중한 태도를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장 하찮고, 몹시 가슴 아프며, 죽을 만큼 극도로 견디기 어려운 일들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고 그 뜻으로 살아가는 영혼은 

동일한 기쁨과 환희, 동일한 공경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피해가고자 하는 것들을 영예로이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문들을 활짝 열어놓습니다. 



감각은 차림이 남루한 이 낯선 이를 업신여기지만, 

마음은 이 비천한 외양 아래 감추어진 왕의 위엄을 똑같이 존중합니다. 


그리고 이 낯선 이가 이렇게 작은 행렬로 비밀리에 오기 위해 

영혼이 이렇게 작은 행렬에 은밀히 다가오기 위해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마음속에는 더욱더 깊은 사랑이 파고듭니다.



저는 이토록 비하되고, 이토록 초라하고, 이토록 허물어져 버린 

신의 뜻을 받아들일 때 마음이 느끼는 바를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아! 구유에 자리를 잡고 누워, 

얼마 안 되는 짚 위에서 울고 떨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이 가난, 

이 극도의 굴욕이 얼마나 마리아의 아름다운 마음속으로 파고들 것인가! 

베들레헴 주민들에게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한 번 물어보십시오. 


만일 이 아이가 왕자들에게 어울리는 장식으로 치장을 하고 궁궐에 있다면, 

그들은 이 아이에게 온갖 아첨을 떨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요셉, 동방박사들과 목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이들은 이 극도의 초라함 속에서 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느님을 더 크고 더 자애롭게 만드는 무엇인가를 본다고 말할 것입니다. 


감각을 저버리는 것이 믿음을 고양시키고 성장시키며 풍요롭게 합니다. 

감각을 위한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영혼을 위한 것은 더욱더 많아집니다.



p.93


   타보르 산¹⁰ (예수님의 변모 암시 (마태 17.1 참조).) 위에 오르신 

예수님께 경배 드리고, 

놀라운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는 것은 

평범한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고, 

십자가상의 예수님께 경배 드리는 것만큼 

그렇게 강력하고 훌륭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피상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이 

믿음을 거스르고 믿음을 파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일 때에만 

비로소 믿음은 놀랍도록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감각들의 전쟁은 믿음에 더욱 영광스러운 승리를 안겨줍니다.


중요한 일들 가운데에서 뿐만 아니라 

가장 보잘것없고 흔한 일들 가운데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위대하고 특별한 믿음입니다. 



현 순간에 만족한다는 것은 

참아내고 행하기 위해 부딪쳐야 하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맛보고 경배하는 것에 만족한다는 뜻이며, 

이것들의 연속이 현 순간을 구성합니다. 


이 단순한 영혼들은 가장 굴욕적인 온갖 상황에서도 

똑같이 그들의 활력 넘치는 믿음으로 하느님께 경배 드리며, 

그 무엇도 이들의 믿음이 지닌 예리한 통찰력으로부터 

하느님을 숨기지 못합니다. 


“그건 정말이지 절대로 하느님이 아니야”라고 감각들이 말하면 말할수록, 

이 영혼들은 더욱더 몰약 다발¹⁰(아가 1.13) 참조.)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 무엇도 이들을 놀라게 하거나, 이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사도들이 도망가는 것을 볼 것이고, 

계속해서 십자가 아래에 머무를 것이며, 

당신의 아들을 알아볼 것입니다. 


사람들이 뱉은 침과 상처들로 인해 

당신 아들의 모습이 아무리 흉하게 변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이 다정한 어머니의 눈에는 

이 침과 상처가 당신의 아들을 더 경배할 만하게, 더 사랑스럽게 만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에게 불경한 말들을 쏟아내면 낼수록, 

그에 대한 그녀의 경외심은 더욱더 커질 것입니다. 


신앙의 삶은 

하느님을 변장시키고, 하느님의 모습을 훼손하며, 하느님을 파괴하고, 

다시 말해 하느님을 소멸시켜버리는 것을 꿰뚫고 나가 

오로지 하느님만을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입니다. 



p.94


   자, 다시 

외양간에서부터 갈바리아 산상에 이르기까지의 마리아를 보십시오. 


그녀는 거기에서 모든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내버리고, 박해하는

그런 하느님을 늘 발견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심 깊은 영혼들은, 

하느님의 뜻이 간파되지 않도록 전력투구하는 일련의 끊임없는 죽음과 장막, 

그림자와 겉모습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사랑합니다. 


영혼들은 그림자들을 그냥 그대로 내버려둔 채 

이 거룩한 태양을 뒤쫓아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태양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아무리 짙고 어두운 구름이 그것을 가린다 할지라도, 

그의 신비한 운행 궤도의 모든 점에서 

그를 찬미하고 찬양하고 관상하는 신실한 마음들을 비춰주고 덥혀주고 

불타오르게 합니다. 



그러니 만족하고 지칠 줄 모르는 충실한 영혼들이여, 

큰 걸음으로 하늘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걸어가는 이 사랑하는 신랑의 뒤를 

따라 달리십시오!¹⁰(시편 19.6~7 참조.)


그 무엇도 그분의 눈을 피해 달아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측백나무 숲 위를 걸어가듯 가장 작은 풀잎 위를 걸어갑니다. 

모래알들이 그분의 발아래 놓여 있듯 산들 또한 그러합니다. 


여러분의 발길이 닿을 수 있는 곳이 어디든, 그분은 이미 그곳을 지나갔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있게 될 곳 어디에서든 그분을 만나 뵈려면 

그분을 계속해서 뒤쫓아 가기만 하면 됩니다.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은 신비로 가득 차 있으며, 

세상 사건들 속에서 실현된 그분의 말씀 역시 그에 못지않게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두 권의 책은 정말로 봉인돼 있습니다. 

이 두 책 속에 있는 문자는 사람을 죽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의 중심이십니다. 


그것은 암흑의 심연이며, 그 심연은, 

그 밑바닥에서부터,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 위로 퍼져 나갑니다. 


그분의 모든 말씀과 그분의 모든 업적은 말하자면 

한층 더 어두컴컴한 태양으로부터 발산되어 나오는 흐릿한 빛살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육안을 뜨고 태양과 빛살을 바라보지만, 

하느님과 그분의 사업을 바라보는 우리의 영안은 감겨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암흑은 빛의 자리를 차지하고, 지식은 무지가 되며, 

우리는 보지 않음으로써 보지 않으면서 보게 됩니다. 



성경은 훨씬 더 난해하신 하느님의 난해한 말씀입니다. 


시대적 사건들은 

이 꼭꼭 숨어계신 미지의 동일하신 하느님의 난해한 말씀입니다.


그것들은 밤이슬¹⁰⁹ (시편 5.2 참조.

“내 머리는 이슬로, 내 머리채는 밤이슬로 흠뻑 젖었다오.”,) 

아니, 밤과 암흑의 바다로부터 온 이슬방울들입니다. 


p.95


모든 물방울과 모든 실개천은 

자신들이 유래한 발원지의 성격을 지닙니다. 


천사들과 아담의 타락, 

그리고 창조사와 자신들이 막 목격한 대홍수 후의 세상의 존속사를 

자기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성조들 살아생전에, 

대홍수를 전후하여 인간들이 저지른 불경과 우상숭배.

보십시오, 

바로 이것들이 성경에 나오는 참으로 난해한 말씀들입니다! 


구세주의 강림 때까지 모든 인간들의 전반적인 파멸 속에서도 

우상숭배와는 거리가 멀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늘 지배적이었고 늘 막강했던 불경한 무신앙, 

항상 박해받고 학대받는 소수의 진리 수호자들, 

예수 그리스도께 가해진 처사들, 묵시록의 재앙들...... 


아니 뭐라고요? 

이것들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계시하시고 구술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이 무시무시한 신비들의 결과들도 

그분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심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모든 신적 속성들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을 통해 이를 표현하고 있고, 

모든 사람들은 이를 전합니다. 


아아!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터키인들, 네덜란드인들, 신교도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찬란하게 선포하며,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한없는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파라오와 그를 추종했던 그리고 그를 추종할 

모든 불경한 신앙이 없는 이들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눈을 뜨면, 문자는 어김없이 이에 반대되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들 속에서 신적인 신비를 보려 한다면 맹목적이 되어야 하고 

이성적 추론을 멈추어야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주로 일반적인 사건들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혁명들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이성적 사유에 뇌우와 폭풍우를 불러일으키는

당신 섭리의 파도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특히 사람들에게 시시각각 발생하는 일을 통해서 

그들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것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 말씀의 난해함과 신비로움을 존중하기는커녕 

그저 물질적인 것과 우연성, 사람들의 기분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만사에 흠을 잡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뭔가를 덧붙이고 그것을 지배하며 변화시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완전한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과도한 처신을 일삼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도한 처신이 만일 성경 속 단 하나의 쉼표에라도 관계가 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테러 행위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모든 것은 거룩하고 참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p.96


만일 사람들이 성경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성경을 숭배하게 되고, 

하느님의 심오한 예지에 더욱 영광과 정의를 돌려드립니다. 


이것은 참으로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영혼들이여,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 

그분께서 시시각각 들려주시는 말씀들, 

먹물과 종이가 아니라 

여러분이 견뎌내야 하고 여러분이 매 순간 이행해야만 하는 일들이 

그 몸체를 구성하고 있는 그분의 말씀들이 

여러분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왜 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진실하심과 선하심을 존중하지 않으십니까? 


그 무엇 하나 여러분 비위에 거슬리지 않는 게 없어서 

모든 것을 검열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믿음으로써만 가늠되어질 수 있는 것을 

감각과 이성에 기대어 따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성경에 쓰여진 하느님의 말씀은 믿음의 눈으로 읽으면서,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일들 속에 쓰여진 그분의 말씀은 

믿음 아닌 다른 눈으로 읽는 크나큰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르는 것입니까?




   모든 신적인 것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쉼 없이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하느님과 통교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분과 마주하여 대화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을 전달하는데 공기가 필요한 것처럼, 

하느님의 생각과 말씀을 전달하는데 우리가 행해야 하고 참아내야 하는 

모든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이 모든 일은 단지 하느님 말씀의 몸체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믿음은 매사에 이를 밖으로 나타나게 할 것이며,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거룩하고 모든 것이 훌륭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이러한 상태를 조성하고, 

지상에서는 믿음이 이러한 상태를 조성할 것이며, 

이 둘 사이에는 단지 방식상의 차이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특별히 해주시는 말씀에 의해서만 

참으로 좋은 가르침을 받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책이나 역사에 대한 호기심어린 탐구를 통해 

신학에 박식하게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많은 것을 부풀리는 무용하고도 혼란스러운 지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은 시시각각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며,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얻으시고자 하셨던 

바로 그러한 실험적 지식을 우리 안에 형성시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예지로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실 사람들의 마음에 말을 건네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는 이 실험적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고통이나 행동과 같은 경험을 통해 배운 것만을 완전하게 압니다. 


p.97


생명의 말씀의 심장부에서 말을 건네는 것은 바로 성령의 날개이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모든 것은 

이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읽은 것, 우리가 본 것은 

경험에 의한 후천적 지식이 그것에 부여하는 이 풍요와 미덕과 

빛에 의해서만 비로소 신학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반죽일 뿐이므로 

거기에 누룩이 필요하고, 소금으로 그것의 맛을 내야 합니다. 


만일 이 소금 없이 그저 막연한 생각들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모든 마을길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집으로 가는 길은 잃어버린 선견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매우 실천적이고 실험적인 이 고결한 신학에 박식해지려면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건네어진 말에는 개의치 말고, 

그대를 위해 그리고 그대에게 건네어진 말에만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대의 믿음을 단련시키기에 필요한 말씀은 충분히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의 모호함을 통해 

모든 것이 그대의 신앙을 단련하고 정화하고 성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느님 말씀의 해명(解明)을 통해 하느님의 해석자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비참과 죽음만을 뜻하는 피조물들의 불명료한 언어만 듣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무엇보다 먼저 고난을 깊이 통찰하는 것이 지혜의 정수임을 가르쳐줍니다. 


그 다음으로 믿음은 자신의 암호 체계들을 개발해 나가고, 

우리들은 피조물들의 횡설수설하는 말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속에서 

신의 은총과 신의 완전함만을 봅니다. 



믿음은 온 땅에 천상의 모습을 부여합니다. 


또한 마음은 바로 이 믿음에 의해 하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에 

몹시 열광하고 기뻐합니다. 


매 순간은 하느님께서 믿음에게 보여주시는 계시입니다. 


우리가 성인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모든 놀라운 현상들, 

예를 들어 환시나 내적인 속삭임과 같은 것들도 

그저 믿음을 실천하는데 있어서의 

그들의 지속적이고 감추어진 탁월한 상태가 발현된 것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이 믿음은 만사에 이런 열정을 전달 작용을 느낍니다. 

삶이란 시시각각 벌어지는 그 모든 일들을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초자연적 현상이 눈에 띄게 발현될 때, 

그것은 믿음 안에 이미 이런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놀라운 현상들을 영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이들을 실천으로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타보르 산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분이 행하신 기적들이 

그분의 훌륭함에 보탬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이 기적과도 같은 일들은 

인간을 다른 인간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존재로 만들어주고자 

인류라고 하는 이 어두운 밀운(密雲)으로부터 시시때때로 뻗어 나오던 

섬광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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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8


   성인들에게서 발견되는 경이로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만사에 있어서의 그들의 부단한 신앙적 삶입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단지 그들의 거룩함을 약화시킬 뿐입니다. 


모든 일에서 하느님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랑 충만한 신앙 안에서, 

그들의 거룩함은 이런 놀라운 일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런 일이 유익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증언과 이러한 표징들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신앙적인 영혼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자신의 어둠에 만족하여 조금도 그런 것들에 기대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들이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내버려두어 

가까운 이가 이를 이용하도록 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가장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취합니다. 



이것은 바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숨기신 상태에서 그의 신앙을 단련시키는 하느님의 명령, 

하느님의 원의(願意)입니다. 


신앙은 조금도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증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신앙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증거를 증거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으로서 받아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은 순수한 신앙 상태와 조금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들어 올리시는 많은 성인들 안에, 

가장 연약한 이들을 밝혀 깨우쳐주는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그러했었고, 모든 성인들이 그러하였으며, 

하느님께서 이들을 영광의 자리에 앉히기로 선택하신다면 

이들은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인들이 늘 있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런 성인들은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숨겨진 성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오로지 천국에서만 빛나도록 되어있는 까닭에, 

이 생에서는 어떤 빛도 발산하지 않은 채 

깊은 어둠 속에서 살다가 죽어갑니다. 


시냇물은 갈증만 자극할 뿐, 샘만이 목마름을 해소해줄 수 있습니다. 


그대가 만일 예언자들, 사도들, 성인들처럼 

생각하고 글을 쓰고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그들처럼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그대 자신을 맡기십시오.




   오, 미지의 사랑이여! 

당신의 놀라운 일들은 이제 끝이 난 듯하고,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당신이 옛적에 행하신 업적들을 베끼고, 

당신이 과거에 하셨던 말씀을 인용하는 것 밖에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의 고갈되지 않는 활동이 

새로운 생각들, 새로운 고통들, 새로운 행위들, 새로운 성조들, 

새로운 예언자들, 새로운 사도들, 

그리고 서로 간에 다른 이의 삶이나 글들을 모방할 필요 없이 

당신의 은밀한 역사하심에 

자신들을 끊임없이 내맡겨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새로운 성인들의 무한한 원천임을 알지 못합니다. 


p.99


우리는 계속해서 “초세기(初世紀)! 성인들의 시대!”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무슨 말하는 방식이 이렇습니까! 


모든 시간은 매 순간들 위로 흐르고, 

그 순간들을 채우고, 그 순간들을 성화시키고, 

그 순간들을 초자연적으로 만드는 

신적 역사(役事)에서 비롯된 결과들의 연속이 아닙니까? 


시기적절하지 않게 때가 맞지 않게 이루어지는 신적 역사에 

자신을 내맡기는 옛날 방식이 

일찍이 존재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초세기의 성인들은 

이 신적 활동이 매 순간 그들에게 바랐던 그런 사람이 되는 것 외에 

다른 비결들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활동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는 영혼들에게 

당신의 은총을 베풀어주는 일을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과연 멈출까요?




   그렇습니다, 소중한 사랑이여! 

경배 받을 만하고, 영원하며, 한없이 풍요롭고 늘 경이로운 분이여! 


저의 하느님의 활동이여, 당신은 저의 책, 저의 교리, 저의 지식입니다! 

당신 안에 저의 생각, 저의 말, 저의 행위, 저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다른 업적들이 어떠했는지 헤아려 봄으로써가 아니라, 

제 선조들이 걸어갔던 이 옛길, 이 유일한 왕도를 통해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받아들임으로써 

당신께서 저를 가지고 빚으시고자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저는 제 선조들처럼 생각하고, 깨어있고, 말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저는 그분들 모두를 모방하고, 인용하고, 본뜰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신적 활동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모르는 까닭에 

너무나 많은 수단들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이 수단들의 다양성은 

우리가 원래의 단일성 안에서 발견하는 것을 줄 수 없습니다. 


이 단일성 안에서 각각의 도구는 

자신으로 하여금 그 무엇과도 비할 데 없이 행동하게 만드는 

독창적인 움직임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분의 스승을 보내주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충분히 귀 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그 스승은 모든 이들의 마음에 말을 건네고, 

그 마음 하나하나에 유일한 말씀, 즉 생명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다른 이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기를 원하지만, 

그분이 우리 자신에게 하는 말은 듣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적 활동이 만사에 부여하는 초자연적 존재 안에서 

이 온갖 일들을 충분히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초자연적 존재를 영접해야 하고 마음을 열어, 

신뢰와 너그러움이 충만한 태도로 이 존재의 공덕(功德)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초자연적 존재는 그를 이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해를 끼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p.100


   세상이 시작된 순간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 자체로서 항상 동일하신 하느님의 이 무한한 활동이 

모든 순간 위로 흐르듯 지나갑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활동은 자신의 무한성과 동일성 가운데 

당신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오로지 당신만을 향유하는 단순한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줍니다. 


그대는 하느님을 위해 죽을 기회가 생긴다면 매우 기쁘리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런 강력한 행동, 이런 방식의 삶이 그대의 마음에 들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는 것, 버림받은 채 죽는 것,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과 같은 이런 종류의 생각들이 

그대를 사로잡습니다. 



그런데 주님, 저는 당신이 하시는 일에 영광을, 모든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저는 당신의 활동 안에서 

순교와 고행과 이웃에 대한 봉사에서 맛볼 수 있는 온갖 행복을 발견합니다. 


제게는 당신의 이런 활동으로 충분하며, 

당신의 활동이 저를 어떤 방식으로 살거나 죽게 할지라도 저는 만족합니다. 


저는 

당신의 활동에 사용되는 도구들의 모든 장점들과 그것들의 효과를 넘어서서 

당신의 활동 그 자체가 그냥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 활동은 모든 것 위로 펼쳐지고, 모든 것을 성스럽게 만들며, 

모든 것을 그 자체로서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제게 모든 것은 천국이며, 

저의 모든 순간들은 온전히 순수한 신적 활동의 장(場)입니다. 


그리고 저는 살아서든 죽어서든 이런 하느님의 활동에 만족하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영혼들이여, 

저는 더 이상 여러분들에게 시간들이나 방식들을 표시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언제든지 환영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활동이여, 당신은 제게 당신의 무한성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의 한없는 배려 가운데에서만 일에 착수합니다. 


오늘 당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것은 어제도 흘러나왔습니다. 

당신의 기반은 은총들이 끊임없이 퍼져나가는 하상(河床)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 은총들을 지속시키고, 그 은총들을 동요시킵니다. 


따라서 저는 

더 이상 서적이나 성인들의 삶 혹은 고상한 관념과 같은 편협한 한계 안에서 

당신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모든 피조물들 위로 흘러넘치는 이 대양의 몇몇 물방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활동은 피조물 모두를 그 안에 잠기게 합니다. 


그리고 이 대양의 심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바로 미미한 존재들입니다. 


저는 더 이상 

영적인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찾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집집마다 돌며 제 빵을 구걸하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그들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p.101


   그렇습니다, 주님, 

저는 한없이 지혜롭고 선하며 전능하신 참된 아버지의 아이로서 

당신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모습으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믿는 바대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신적 활동이

매 순간 모든 것들을 통하여 저의 완덕을 위해 애쓰고 있으니, 

저는 이 대단하고 거대한 소득,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늘 존재하는 확실한 이 소득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활동에 필적할만한 활동을 펼치는 피조물들이 있습니까? 


그리고, 

창조되지 않은 당신의 손이 제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직접 다루시는데, 

무력하고 무지하며 정 없는 피조물들에게 제가 도움을 청하러 가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저는 목말라 죽게 될 것이고, 

이 샘에서 저 샘으로, 이 시냇물에서 저 시냇물로 뛰어다닐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손 하나가 홍수를 일으켰습니다! 


사방에서 물이 저를 에워싸고, 모든 것이 저를 먹여 살릴 빵이 되며, 

저를 희게 만들어 줄 비누가 되고, 저를 정화시킬 불이 되며, 

저에게 천상의 모습을 부여할 정이 됩니다. 


모든 것은 

제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기 위한 은총의 도구인 것입니다. 


제가 전혀 다른 것 안에서 찾을 수도 있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이 끊임없이 저를 찾을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 제게 자신을 내어줍니다.




   오, 사랑이여,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라야 하고, 

당신께서는 말하자면 당신의 모든 은혜와 함께 

이 모든 사람들 앞에 불쑥 나타나야 하며, 

우리는 당신을 발견할 수 없는 구석구석을 샅샅이 다 뒤져가며 

당신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까? 


대기 중에서 전혀 숨을 쉬지 않고, 

시골 한복판에서 발 내려놓을 곳을 찾으며, 

홍수 중에 마실 물을 찾지 못하고,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하며, 

그분을 맛보지 못하고, 모든 것들 안에서 그분의 기름부음을 받지 못하다니, 

이 무슨 미친 짓이란 말입니까! 



사랑하는 영혼들이여, 

여러분은 하느님께 속할 수 있는 비결을 찾고 있습니까? 


그런 건 전혀 없습니다.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이용한다는 그러한 비결 빼고는 말입니다. 


의무를 벗어난 것과 죄에 속한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그분과의 일치에 이르게 하고, 완전하게 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분이 하는 대로 맡기십시오. 


모든 것이 

여러분을 인도하고, 여러분을 다시 일으켜 세우며, 여러분을 지탱합니다.

모든 것이 깃발이고, 가마이며, 안락한 수레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길이고, 

모든 것이 신성한 흙이며, 공기이고, 물입니다. 


그분의 활동은 그 구성요소들보다 더 폭넓게 펼쳐져 있고, 

더 많이 존재합니다.


만일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만 감각들을 사용한다면, 

그분은 여러분들의 전 감각을 통하여 여러분들 안으로 들어갑니다. 


p.102


왜냐하면 그분의 뜻에 속하지 않은 모든 것에는 

온 감각을 닫고 저항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원자(原子)들이 여러분들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 

이 신적 활동이 여러분의 골수에까지 스며들도록 합니다. 


여러분의 혈관 속에 흐르는 이 모든 고귀한 체액들은 

신적 활동으로 부여받은 움직임에 의해서만 흘러갑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움직임들 안에 만들어내는 모든 차이, 곧 

강력함이나 나약함, 무기력함이나 활기, 삶이나 죽음과 같은 이런 것들은 

신적 활동을 수행하는 신의 도구들입니다. 



모든 육체적 상태는 은총의 작용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감정과 생각들은,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든지 간에, 

이 보이지 않는 손길로부터 출발합니다. 


어떠한 창조된 마음이나 정신도 

이 신적 활동이 여러분 안에서 행할 일을 가르쳐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만 연이은 경험에 의해서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최상의 것을 위해 현 순간에 존재하는 것을 항상 사랑해야만 하는, 

그것도 그 자체로서 선만을 행하실 수 있는 

이 신적 활동에 대한 완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사랑해야만 하는 이 미지의 심연 속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 갑니다.




   그렇습니다, 소중한 사랑이여, 

모든 영혼들이 당신이 하시는 활동에 만족한다면, 

이들 모두는 초자연적이고, 숭고하며, 경탄을 자아내고, 

상상을 초월하는 상태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거룩한 손이 일하는 대로 내버려둘 줄 안다면, 

우리는 최고의 완덕에 이를 것입니다


모든 영혼들에게 완덕이 그저 주어졌으니, 

모두가 이 완덕에 이를 것입니다. 


단지 입을 열고 있기만 하면, 

신의 손길이 절로 우리 안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¹¹⁰

(시편 81.11 참조. “네 입을 한껏 벌려라, 내가 채워 주리라.”)


왜냐하면 

경이로운 성성(聖性)의 독특한 특성을 단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영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모든 영혼은 기적처럼 살아가고 행동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들 간에 서로를 모방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거룩한 활동은 가장 평범한 것들을 통해 

이들 영혼 모두를 제각각 특별하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 저의 하느님, 제가 어떤 방법을 써야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제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것을 음미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아주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모든 이들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데도, 

사막의 식물들처럼 

영혼들이 말라비틀어지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까? 


신앙심에 대한 어떠한 피상적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고, 

아무런 재능도 없으며, 

교육의 가장 기본적 요소나 방법조차도 모르고, 

영적인 용어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며, 

박식한 이들의 달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데다 

그들을 우러러 마지않는 순박한 영혼들이여, 제게로 오십시오! 


p.103


제가 여러분에게 이 모든 박학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능가할 수 있는 

비밀 하나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완덕을 위해 

제가 여러분을 아주 넓고 완전한 곳으로 이끌어 낼 것이므로 

여러분은 그 완덕을 여러분의 발아래에서, 여러분의 머리 위에서, 

그리고 여러분 주변에서 늘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하느님과 결합시킬 것이며,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을 여러분들이 실천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분의 손을 잡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리로 오십시오! 


영성(靈性)의 나라의 지도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지도를 소유하고 

그곳에서 길을 잃고 헤맬 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편안히 돌아다니기 위해서 

말입니다. 


자, 우리에게로 오십시오! 


신적 활동의 역사(歷史)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활동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신적 활동이 모든 세기에 걸쳐 한 일과 

아직도 하고 있는 일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활동 작용의 단순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들을 알아내 

그것을 기가 막히게 암송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가장 적절한 말씀을 여러분 각자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가 

그 각각의 마음에 아주 특별한 생명을 주는 것은 바로 보편적인 성령입니다.


성령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그리고 사도들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들 모두는 서로 다른 이들의 글들을 연구하지 않고도, 

이 성령의 도구가 되어 세상에 항상 새로운 작품들을 제공합니다. 


만일 영혼들이 이 성령의 활동에 일치할 줄 안다면, 

그들의 삶은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이 활동을, 

먹물과 종이를 사용해서가 아니라, 

마음에 계속해서 써내려나가는 일련의 거룩한 책들이 될 것입니다¹¹¹



성경처럼 

그저 단 몇 세기에 걸친 신적 활동의 역사(歷史) 이야기는 되지 않을 

이 생명의 책은 이 모든 것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생명의 책에는 천지 창조부터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거룩한 영혼들의 모든 행위와 생각과 말과 고난이 기록될 것이고, 

그때 비로소 성경이 신적 활동의 완전한 역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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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¹¹

(2코린토 3.3 참조). 

“여러분은 분명히 우리의 봉사직을 위해 맡겨진 그리스도의 추천서입니다. 

그것은 먹물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의 영으로 새겨지고, 

돌판이 아니라 살로 된 마음이라는 판에 새겨졌습니다.”




   따라서 신약의 속편은 지금 행동과 고난에 의해 쓰여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영혼들이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뒤를 잇고 있는데, 

이는 정경(正經)을 써내려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 신적 활동의 역사(歷史)를 계속해나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들 삶의 매 순간은 이 역사의 각 음절과 문장을 구성하며, 

신적 활동은 바로 이 음절과 문장을 통해 생생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성령이 지금 구술하는 책들은 살아 있는 책들이며, 

각각의 거룩한 영혼은 한 권의 책입니다. 


그리고 이 천상의 작가는 누구의 마음속에서나 이해될 뿐만 아니라 

매 순간 발전해나가는 내적 작용의 참된 계시자입니다.


p.104


   신적 활동은 

하느님의 지혜가 세상만사에 대해 갖고 있는 이데아(想)를 

연속되는 시간 속에 실현합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서 자기 고유의 이데아를 갖고 있으며, 

이 유일한 지혜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그대가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닌 다른 모든 이데아를 알게 된다 할지라도, 

그대는 그 지식을 가지고 그 어디에도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신적 활동은 

그대를 형성하는데 토대가 되는 이데아를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발견하는데, 

그에게 제시되어지는 것은 바로 전형(典型)입니다. 



신적 활동은 

모든 거룩한 영혼들에게 가장 잘 들어맞는 것을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봅니다. 


성경은 그 말씀의 일부를 담고 있으며, 

성령이 각 영혼 안에 형성 중인 작품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그에게 제시하는 전형들에 기대어, 

그 나머지를 완성합니다. 



이 영원한 이데아의 특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그분의 손길 안에서 유순한 주체가 되는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까? 


정신적 사변이나 사색의 결과가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모릅니까? 


이 작품은 재간, 지능, 정신의 명민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거푸집 속의 주물이나 붓 아래 놓인 화폭, 

그리고 조각가의 손에 맡겨진 돌처럼, 

무엇인가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무엇인가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놓는 것과 같은 

수동적인 내맡김의 길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뜻이 모든 세기에 걸쳐 행하고 또 행하게 될 

이 모든 신적 신비에 대한 지식과, 이 동일한 하느님의 뜻에 의해, 

말씀이 우리에 대해 품고 있는 이미지에 

우리가 부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장임을, 

이 신비한 인장이 각인된 것임¹¹² 을 모르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 각인 작업은 이데아를 통해 정신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맡김을 통해 제(諸) 능력들 속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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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¹² 

자신을 내어놓은 영혼이 자신 안에 각인되도록 놔두는 성령의 “인장”. (에페소 1.13 참조)




   단순한 영혼이 지닌 지혜는 자신에게 고유한 것에 만족하고, 

자신이 걸어가는 오솔길의 양 경계선 안에 자신을 국한시키고, 

그 선을 조금도 넘어서지 않는데 있습니다. 


단순한 영혼은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방식을 조금도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p.105


그는 하느님의 뜻이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에 만족할 뿐, 

조금도 비교나 추측을 통해 그분의 뜻을 짐작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매 순간 자신에게 계시되는 그분의 뜻만을 알고 싶어 할 따름입니다. 


그 영혼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신랑이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신랑으로부터 알아내려 하지 않으며, 

자신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받은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결과, 때때로, 시시각각

아무리 미소하고 작고 또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든 간에 상관없이, 

모든 것이 그 영혼을 그도 모르는 새에 거룩하게 만듭니다. 


보십시오, 

자신이 견뎌내고 이행하는 일을 당연하다고만 생각하면서 

신랑이 무슨 일을 하는지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는 신부에게, 

신랑이 자신이 하는 활동의 매우 실제적인 효과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말을 건네는지를. 

이처럼 영혼의 영성은 거룩하고, 대단히 유익하며, 

그의 전 존재 안에 깊이 퍼져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생각과 말은, 

그것만으로는, 그저 사람을 거만하게 부풀리게 만들 뿐으로, 

영혼에게 뭔가를 하도록 결심시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신앙심을 위해 정신적 능력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필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로 해가 될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참아내며 행하도록 베풀어 주시는 것만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충실함으로 

그분의 작품인 역사상의 기적들을 믿는 대신, 

그 기적들이 우리의 정신을 차지하도록 

이 신적 본질을 방기(放棄)해 버립니다!




   우리의 독서에서 호기심을 채워주는 이 하느님 작품의 기적들은 

오로지 우리로 하여금 외양상 하찮아 보이는 것들에 

역겨움을 느끼도록 하는 데만 쓰일 뿐이지만, 

만일 우리가 이 하찮아 보이는 것들을 멸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활동은 그것들을 통해 우리 안에 기적을 이뤄낼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무분별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떠벌리듯 자랑하는 글들 속에서 

이런 신적 활동을 찬양하고 찬미합니다. 


그리고 이 활동이 우리의 마음에 먹물을 사용하지 않고 

이 이야기를 계속 써내려가기를 바랄 때에도, 

우리는 끊이지 않는 근심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라는 종이를 부여잡고 서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안팎에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싶은 호기심으로 

하느님의 활동을 막아버립니다.




   거룩한 사랑이여, 용서하십시오. 

저는 여기에 저의 결점들만을 적고 있으며, 

아직도 당신께서 하시는 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도 

저를 위해 마련된 거푸집에 제 자신이 던져 넣어지도록 

내버려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모든 작업장들을 돌아보았고, 

당신이 만든 모든 상(像)들에 형상들에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p.106


그러나 저는 당신의 화필(畫筆)이 

제게 가할 없어서는 안 될 윤곽선들을 받아들이는데 꼭 필요한 

제 자신에 대한 포기를 아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저는 당신을 찾았습니다, 


제 사랑하는 주인, 저의 의사, 저의 아버지, 저의 지극한 사랑이여! 

저는 당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오로지 당신의 학교에만 다닐 것입니다. 


저는 탕자처럼 

당신이 주시는 빵에 대한 굶주림으로 당신께 돌아옵니다. 


저는 관념들과 영적인 것들을 버리고, 모든 거래를 포기할 것이며, 

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 앞에 출현하는 모든 것들 안에서 당신께 순종하기 위해 

오로지 신적 활동에 의해서만 이 모든 것을 사용할 것입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저의 책무들을 이행하기 위해, 

그리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도록 내맡기기 위해서 

현 순간 주어지는 유일한 일에 저를 맞추어 가고자 합니다.




   영혼이 성령의 움직임을 느끼게 되면, 

그는 오로지 자기 완덕의 유일한 원칙이 되어버린 하느님과 

이 성령의 움직임의 인도 하에 홀로 남아있기 위해 

모든 업적, 모든 신앙적 실천행위들, 모든 수단과 방법들, 

모든 서적들, 모든 이념들과 모든 영적인 사람들을 떠납니다. 


모든 성인들이 늘 그러했듯이 

이 영혼도 이 성령의 손길 안에 놓여 있습니다.


영혼은 이 신적 활동만이 그 활동에 고유한 길을 알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만일 자신이 창조된 수단들을 구한다면,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 만들어내는 이 미지의 땅에서 

오로지 길을 잃고 헤매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미지의 신적 활동이 

자신만이 아는 길들을 통해 영혼들을 이끌고 안내합니다. 


이 영혼들의 상태와 대기의 상태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 순간을 통해서만 그것들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그 뒤를 이어 와야만 하는 것들의 원인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 뜻은 오로지 결과에 의해서만 설명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 영혼들 안에서 행하는 것들, 

그리고 의심할 바 없는 은밀한 본능에 의해서든 

사회적 신분상의 의무에 의해서든, 

하느님의 뜻이 영혼에게 행하도록 하는 것들, 

이것이 바로 영혼들이 영성에 대해 아는 전부입니다. 


그것들은 그들의 환시이고 계시이며, 

그들의 온전한 예지이자, 그들의 교훈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영혼들에게는 그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신앙은 영혼들에게 그들이 행하는 일들이 선하다는 확신을 심어줍니다. 


만일 

영혼들이 책을 읽거나, 말하거나, 글을 쓰거나, 상담을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단지 신적 활동의 탁월한 수단들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분의 명령이며, 영혼들은 나머지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존재와 비존재를 사용하여, 

즉 이 성령의 움직임 아래 존재하는 것들은 취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버리면서 

그분의 명령을 받아들입니다. 


p.107


신앙을 통해 

매 순간 확실하고, 공평하며, 변함없고, 늘 효과적인 이 활동에 

한결같이 의지하는 영혼들은 모든 것에서, 

즉 가장 위대한 것들뿐만 아니라 가장 보잘 것 없는 대상들 안에서도 

성령의 움직임을 보고 이를 향유합니다. 


매 순간 영혼들에게 이 성령의 움직임이 온전히 주어집니다. 


따라서 

영혼들은 사물 자체에 대한 신뢰 때문이 아니라, 

신적인 것들에 대한 순종과 전혀 반대되는 외양들 하에서도 

자신들이 아주 완벽하게 발견해낼 수 있다고 믿는 

이 성령의 내적 작용에 대한 순종으로 물들을 사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탐구와 욕망과 혐오와 탄식 속에서가 아니라, 

늘 가장 완전한 것을 소유한다는 끊임없는 확신 속에서 지나갑니다. 




   영혼들의 영육(靈肉)이 짊어지는 모든 상태, 

그들의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 그들에게 매 순간 계시되어지는 것, 

이것은 그들에게 충만한 신적 활동이며, 그들의 지복입니다. 


이보다 더하거나 덜한 것은 불행이며 결핍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활동이 행하는 것은 

참이며 중용(中庸)이기 정의로운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이 활동이 

생각, 말, 책, 양식, 사람, 건강, 심지어 생명까지 앗아간다고 하면,

그것은 그 반대의 것을 주겠다고 하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영혼은 

이 활동을 사랑하고 또한 이 활동에 성화시키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이 활동의 이끄심에 대해 전혀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지 않습니다. 


사물들이 이 활동으로부터 인정받으려면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무용지물 취급을 받으려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족합니다. 




   현 순간은 항상 하느님의 명령을 선포하는 사자(使者)와도 같으며, 

마음은 항상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영혼은

이 모든 것들을 통하여 자신의 중심과 자신의 목적지로 흘러갑니다. 


영혼은 결코 멈추지 않으며, 바람 부는 대로 어디든 갑니다. 


모든 길과 모든 방식 역시 

영혼을 광활하고 무한한 곳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영혼에게는 모든 것이, 유일하게 필요한 것을 위해 

늘 현재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을 구한다는 점 이외에는 점에서 보면 

전혀 어떤 차이도 없는, 수단이며 거룩함의 도구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기도 또는 침묵, 은둔 또는 대화, 읽기 또는 쓰기, 성찰 또는 생각의 중지, 

영적인 것들로부터의 도피 또는 영적인 것의 추구, 

풍요 또는 결핍, 무기력 또는 건강, 삶 또는 죽음에 대한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명령으로 야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물질적으로 실재(實在)하는 창조물이 아니라 

실제(實際)적인 창조 행위에 대한 박탈이고 금욕이며 단념이며 포기인데,¹¹

이는 자기 힘으로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의 경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위함이고, 

만사에 있어서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함이며, 

현 순간을 살아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다른 어떤 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것처럼, 

자신의 유일한 낙으로 삼음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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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¹⁵

역자 주 :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창조물이 아니라, 

우리가 매 순간 실제 행하는 창조 행위와 관련하여 

견지해야 하는 태도로서의 초연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p.108

 

   만일 

자신을 내맡긴 영혼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유일하게 필요한 것이라면,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영혼에게는 그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으며, 

영혼은 결코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만일 영혼이 불평을 한다면, 

영혼에게는 신앙이 결여돼 있고, 

영혼은 이 은총의 충분함을 전혀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이성이나 감각을 따라 살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한다는 것은, 

경에 나온 표현에 따라, 하느님의 거룩함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입으로부터 생겨난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행하도록 엄명을 내리는 모든 것들 안에는, 

그만큼의 이름과 그만큼의 말씀이 들어있으며, 

하느님께서는 이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보여주십니다. 



이 하느님의 뜻은 그 자체로서 오로지 하나뿐이며, 

미지의 지극히 숭고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이름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그 결과에 있어 무한히 증가하고, 

그 증가한 결과들만큼 많은 이름을 가집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한다는 것은 

그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이 숭고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름을 

알고, 사랑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매 순간 그 뜻이 낳은 모든 결과들 안에서 

그분의 경배하올 뜻을 알고,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은 이 영원히 거룩하신 분의 뜻을 가리는 장막이자, 

그림자이자, 이름들이라고 이름들로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은 그분의 모든 일들 안에서 거룩하며, 

그분의 모든 말씀 안에서 거룩하며, 

그 뜻이 나타나는 모든 방식들 안에서 거룩하며, 

그 뜻에 붙여진 모든 이름들 안에서 거룩합니다. 


바로 이처럼 욥이 하느님의 이름을 찬미했습니다. 


이 거룩한 사람은 자신에게 하느님의 뜻을 명백히 알려주었던 

이 전반적인 황폐를 찬미했습니다. 


욥은 이를 파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들 중 하나로 명명했으며, 

이를 찬미함으로써, 

가장 참혹한 외양 아래 전달되어진 이 거룩한 뜻이, 

어떤 형상 어떤 이름을 취하든 상관없이, 거룩하다고 단언했습니다. 

다윗이 늘 매 순간 이 뜻을 찬미하였듯이 말입니다¹¹³ 

(욥기 1.21, 시편 72.17~19 참조.)


p.109


그러므로 

만사에 있어서의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의 끊임없는 발견과 

현현(顯現)과 계시를 통해, 

하느님의 왕국이 우리 안에 있게 되고, 

그분께서 하늘에서 이루시는 일들을 땅에서도 이루시며, 

또한 그분께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양육하십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술한 

이 비할 데 없는 기도의 모든 본질을 포함,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하느님과 성교회의 명령에 따라, 

하루에 여러 번 소리 내어 암송합니다. 


그러나 이 경배하올 뜻이 명령한 것을 참아 내거나 행하고자 할 때에, 

우리는 언제나 마음속으로 이 기도를 읊조립니다. 


입으로 소리를 발할 때에는 

여러 개의 음절과 말을 써서 시간을 들여가며 해야만 하는 것을, 

마음은 실제로 이를 매 순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영혼들은 

이처럼 그들 내면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무력함과, 

하느님께 대한 찬미를 달리 어떻게 해볼 수 없음에 대해 깊이 한탄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이 신앙 깊은 영혼들에게 은총과 은혜가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러한 것을 통해 이것들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적 지혜의 비밀, 그것은 바로 감각을 빈곤케 함으로써 

마음을 부요케 부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쪽의 공허가 다른 쪽을 충만케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마음 깊은 곳에 거룩함이 더 많이 자리하면 할수록, 

그것은 밖으로 점점 덜 나타나게 됩니다.




   매 순간 일어나는 일에는 하느님의 뜻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 얼마나 거룩한 이름인가! 


그러니 

그분의 뜻이 가리켜 보이는 것은 무엇이나 거룩하게 만드는 것으로써 

이 이름을 대하고 찬미하는 것이 얼마나 합당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토록 존엄한 이름을 지닌 것에 무한한 존경을 표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과연 그것을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은총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늘에서 흘러나오는 거룩한 만나입니다. 


그것은 영혼 안에 임하는 거룩함의 왕국입니다. 


그것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먹게 되는 천사들의 양식입니다. 


모든 순간은 거룩함의 왕국과 천사의 양식을 담고 있는 까닭에, 

우리의 단 한 순간도 하찮지 않습니다. 


네, 주님, 이 왕국이 제 마음에 임하여 제 마음을 거룩하게 하고, 

제 마음을 양육하고, 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 마음이 제 원수들에 맞서 승리하게 하여주십시오! 


보배로운 순간이여, 

내 육신의 눈에 너는 얼마나 보잘것없어 보이는가! 

내 마음의 눈에 너는 얼마나 위대해 보이는가! 


그런데 하늘을 다스리시는 한 분이신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이 보잘것없는 것들을 받아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곳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은 참으로 훌륭하며, 

그곳에서 내려온 모든 것은 자기 근원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p.110


주님, 광명(光明)이신 아버지로부터 온 

현 순간의 거룩한 충만감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영혼이 

그 어떤 것에서도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벌을 받게 되는 것은 

너무나 지당한 일입니다. 


만일 서적들, 

성인들이 남기신 본보기들, 영적 담화들이 우리의 평화를 빼앗는다면, 

현 순간에 느끼는 신성한 만족감이 너무 지나치다면, 

이는 하느님의 활동에 

우리의 현 순간을 조금도 순수하게 내맡기고 있지 못하며, 

단지 소유욕에서 우리 자신을 이것들로 채우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이것들이 주는 충만함은 

하느님의 충만함으로 인도하는 입구를 봉쇄해버립니다. 


그러니 마치 장해물이라도 되는 양 이것을 비워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활동이 이것들을 명하면, 영혼은 

이것들을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처럼 하느님의 명령으로서 받아들입니다. 


영혼은 이것들을 있는 그대로 가만히 놔둔 채, 

명령에 충실하기 위해 그저 이것들을 단순하게 사용할 뿐입니다. 


그리고 머릿속에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떠오르는 순간이 지남과 동시에, 

영혼은 바로 이것들을 버리고 뒤이어 오는 현 순간에 만족합니다. 




   신적 활동에 의한 영적 독서는 

작가들이 전에 결코 가져본 적이 없는 예지를 자주 그들에게 부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이들의 말과 행동을 사용하여 

전혀 발견된 적이 없는 진리들에 대해 영감을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 깨우침을 주시고자 하시며, 

우리는 내맡김으로써만 이 방법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적 활동에 의해 적용된 모든 방법은 

눈에 띄게 드러나는 자연적인 미덕을 항상 능가하는 효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늘 신비스러운 삶을 영위하는 것과, 영위하며, 

평범하고 자연스럽고 뜻밖이며 우연적인 것들, 

다시 말해서 

세상사의 변화와 그 일상적 흐름만을 보여주는 것들을 사용하여 

하느님께로부터 특별한 기적적인 은사를 받는 것은 

내맡김의 특성입니다. 


이처럼 

가장 단순한 설교와 가장 흔한 대화와 가장 격이 떨어지는 서적들이, 

하느님의 명령에 의하여, 이 영혼들에게 슬기와 지혜의 원천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자유사상가들이 무시하며 짓밟아 놓은 빵 부스러기들을 

정성스럽게 쓸어 모읍니다.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소중하며, 

모든 것이 이들을 부유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p.111


이들은 모든 것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그것들 중 그 무엇도 경시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존중함과 동시에 그것들로부터 유용성을 이끌어 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계시면, 

우리가 그분의 명령에 따라 이것들을 사용하는 것은 

조금도 피조물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런 다양한 경로들을 통해 

당신의 은사를 전해주시는 신적 활동을 향유하는 것입니다. 


이 경로 역할을 하는 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전혀 우리를 성화시킬 수 없고 오로지, 

신적 활동이 정한 목표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통해 

단순한 영혼들에게 그분의 은총을 매우 빈번히 전달할 수 있고 

또 전달하는, 

그분 활동의 도구가 됨으로써만 우리를 성화시킬 수 있습니다.



신적 활동은 진흙을 가지고도 

마치 가장 미세한 물질을 가지고 그러하듯이 불을 밝힙니다. 


그리고 신적 활동이 사용하고자 하는 도구는 항상 유일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에게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항상 자신에게는 그 무엇도 결핍된 것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는 자신의 발전에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수단들이 결여되었다고 

전혀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수단들을 사용하시는 장인(匠人)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에 의해 그 결핍을 아주 효과적으로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뜻은 피조물들의 모든 미덕입니다. 




   정신과 그에 속한 모든 것은 

신적인 수단들 중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신은 위험천만한 노예처럼 제일 끝자리로 보내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마음이 정신을 제대로 부릴 줄 알면 

매우 커다란 유익을 이끌어낼 수 있지만, 

만일 정신을 단단히 예속시키지 못한다면, 

역시 매우 심각한 해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창조된 수단들을 갈망하며 한숨지으면, 

신적 활동은 그의 마음에 대고 ‘네게는 나로 족하다’고 말합니다. 


영혼이 정말로 그것들을 포기하려고 하면, 신적 활동은 그에게 말합니다. 


그것들은 취하지도 버리지도 말아야 하는 도구, 

그저 단순히 하느님의 명령에 잘 들어맞아야 하는 도구일 뿐이며, 

모든 것을 이용하면서도 아무것도 이용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것을 박탈당했으면서도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¹¹⁴(1코린토 7.31.)



신적 활동은 한(限)도 흠도 없이 충만한 반면, 

우리 자신의 고유 활동으로 유발된 공(空)은 비워짐은 

신적 활동을 배제하는 가장(假裝)된 충만함입니다. 


신적 활동이 창조된 수단을 적용하여 달성한 그 활동의 충만함은 

거룩함, 단순함, 순수함, 초연함이 진정으로 증대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왕자를 온전히 영접하고자 한다면 

그의 시종들까지 대접해야 합니다


단지 왕자를 독차지하겠다는 구실 하에 

그의 조신(朝臣)들에게 어떤 열의도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왕자를 모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를 적용해 보도록 합시다. 

이 모든 것은 그분의 존재로부터 비롯됩니다. 


p.112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과거에도 거룩했고,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거룩하며, 

앞으로 다가올 모든 시대에도 거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기를 통해 하느님의 한없는 거룩함으로 채워지지 않았던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손수 여러분들을 위해 특별히 선택하신 것이 

여러분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그분의 손길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여러분들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만일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손수 마련한 고기가 

여러분을 역겹게 한다면, 

어떤 음식이라야 그처럼 이상한 입맛에 맛있게 느껴지겠습니까? 


영혼은 현 순간에 맛보는 이 충만함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양육되고, 강화되고, 정화되고, 부요하게 부유하게 되고, 

거룩하게 될 수 있습니다. 



대체 여러분은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라십니까? 


여러분은 모든 재화를 다 발견했으면서, 

왜 그것들을 다른 데서 찾으십니까? 


여러분이 하느님보다 재화 찾는 일을 더 잘 안단 말입니까? 


하느님께서 그렇게 되기를 명하시는데, 

어떻게 여러분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그분의 지혜와 그분의 선하심이 틀릴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분이 당신 지혜와 선하심으로 뭔가를 행함과 동시에, 

여러분은 그 일이 훌륭하다고 전적으로 믿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하느님의 명령에서 비롯된 행위는 

그것이 그분의 뜻인 까닭에 훌륭하리라는 결론이 내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다른 데에서는, 그것이 그 자체로서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저의 성화(聖化)에 들어맞는 거룩함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무슨 이런 불충실함이 있는가! 


가장 하찮은 장인의 기술에 대해서도 감히 하지 못하는 비난을 

우리가 신적 활동에 대해 끊임없이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부당하게 하느님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영혼은 

우리의 빈약한 이성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와 규칙 안에서만 행동하는 처지로 전락하기를 바라고! 


우리는 신적 활동을 바로잡겠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단지 불평과 푸념일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했는가를 보며 놀라워합니다.



..... 아, 거룩한 사랑이여! 

경배하올 뜻이여! 

무류(無謬)의 무오류의 활동이여! 

우리가 도대체 당신을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신의 뜻이 시기적절하지 않을 때에 찾아올 수가 있는 것입니까? 

신의 뜻이 틀릴 수가 있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렇지만 내겐 그런 일이 있어. 

그런 게 내게 부족해. 

사람들이 내게 필요한 수단들을 뺏어가 버리고 있어! 


이 사람이 이처럼 신성한 일들에 있어서 나를 방해하고 있는데, 

이거 완전히 사리에 어긋나는 것 아냐? 


내게 절대적으로 건강이 필요할 때에 내가 이 병에 걸리고 말았어!” 


그런데 저는, 하느님의 뜻만이 유일하게 필요한 것이며, 

하느님의 뜻에 의해 주어지지 않은 모든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말합니다. 


p.113


사랑하는 영혼들이여, 

정말이지, 여러분에게는 그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불운이니, 뜻밖의 사태니, 시기적절하지 않다거나, 

까닭이 없다, 혹은 방해라고 일컫는 이 모든 것들이 

대체 무엇인지를 여러분들이 안다면, 

여러분들은 극심한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이것들은 한마디로 신성을 모독하는 불경한 언사들인데, 

여러분은 이 점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다름 아닌 바로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 의해 

신성모독을 당한 것입니다. 




   오, 저의 예수님, 당신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유대인들은

당신을 마술사로 취급하고, 당신을 사마리아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영원세세 살아계시며 항상 감사와 찬양을 받아 마땅하신 

당신의 숭배하올 뜻을 

우리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천지창조 때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그리고 지금부터 최후의 심판 날에 이르기까지,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이 찬미를 받으시기에 마땅치 않은 때가 

단 한 순간이라도 있었으며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시대를 메워주고 

모든 시대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꽉 채워주는 이 이름! 

모든 것들을 유익하게 만드는 이 이름! 


뭐라고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라 부르는 것이 저를 해칠 수도 있다고요? 

제가 하느님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이름을 피해 도망칠 것이라고요? 


제게 행해지는 신적 활동은 그분의 거룩한 뜻에서 온 결과인데, 

제가 그 활동을 두려워한다면, 

대체 저는 어디에 가서 이보다 더 좋은 것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매 순간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에 

어떻게 귀 기울여야 합니까? 


만일 우리의 감각이, 우리의 이성이 이 말씀을 듣지 못하고, 

이 말씀의 참됨과 선함을 깊이 통찰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의 감각과 

이성이 신적인 진리들에 대해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신비로 인해 이성에 혼란이 초래되는 것을 보고 

제가 놀라야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이것은 신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저의 감각과 저의 이성에게는 하나의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신비는 그 성격상 이것들을 제물로 바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신비는 오로지 신앙에 의해서만 마음속에 생명으로 존재하며,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그에 반대되는 것만이 존재할 따름입니다. 


신적 활동은 동일한 타격으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음을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는 신비로 인해 더욱더 생명을 받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신비가 더욱더 어둠에 가려져 있으면 있을수록,

그 신비는 더욱더 밝은 빛을 품고 있습니다. 


p.114


이것이 바로 단순한 영혼으로 하여금 

외양상 거룩함과는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에서 

최고의 거룩함을 발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신앙적 삶을 영위토록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