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번역 하섭내

제10장 영성의 모든 비밀은 앞으로 행해야 하고 참아내야 할 모든 일을 위해 하느님의 거룩한 뜻과 결합함으로써,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있다

은가루리나 2019. 9. 17.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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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영성의 모든 비밀은 

앞으로 행해야 하고 참아내야 할 모든 일을 위해 

하느님의 거룩한 뜻과 결합함으로써,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감각은 피조물의 활동만을 알아차릴 뿐이지만, 

신앙은 만물 안에 깃들어 있는 신적 활동을 믿습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 안에 살아계시며 

모든 세기에 걸쳐 역사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짧은 순간과 가장 미세한 원자 속에도 

이 감추어진 생명과 이 신비스러운 활동의 한 부분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의 활동은 신적 활동의 심오한 신비를 가리고 있는 장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그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모습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고,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자 그 즉시 사라지셨습니다. 


여전히 살아계시고, 여전히 역사하시는 이 동일하신 예수님께서는 

순수하고 예리한 믿음을 웬만큼 갖고 있지 못한 영혼들을 

아직도 놀라게 만들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고통이나 어떤 책무 또는 의무의 외양을 띠고 나타나지 않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거룩한 활동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 가리고 있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우리가 항상 놀라게 되는 것이고, 

그분의 작용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때에서야 비로소 

우리가 그분의 작용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장막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만일 우리가 늘 깨어서 주의를 기울인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당신을 드러내실 것이며,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안에서 

그분의 활동을 향유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매사에 “주님이시다¹¹(Dominus est.” (요한 21.7))!”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갖 상황 속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은사를 받고 있다는 것과,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데 사용되는 매우 미약한 도구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며 

하느님의 계속되는 배려로 

우리에게 어울리는 은사들이 우리 각자에게 적절히 배분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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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고, 

그것들을 어루만질 것이며, 

하느님의 손길이 작용하여, 

우리의 완덕에 소용이 되고 우리의 완덕에 너무나 큰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 

그것들에게 내심 감사할 것입니다. 


믿음은 온유와 신뢰와 기쁨의 모체입니다. 


믿음은 그들 자신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믿음을 대단히 부요하게 만들어 주는 원수들에 대해 

자애와 연민의 감정만을 지닐 수 있습니다. 



피조물의 활동이 가혹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활동은 이를 더욱더 영혼에게 유익하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영혼을 망칠 수 있는 것은 도구밖에 없고, 

이 초자연적 명공(名工)은 영혼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다 싶으면 

영혼으로부터 이것을 가차 없이 제거해 버립니다. 


하느님의 뜻은 

순종하는 영혼들을 위해 온유와 호의와 보화만을 간직하고 있는 까닭에, 

아무리 그분의 뜻을 신뢰하고 

아무리 그분의 뜻에 우리를 내맡긴다 하더라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항상 우리의 완덕에 가장 많이 공헌할 그런 일을 할 수 있고 

또 하기를 원하십니다. 

단 우리가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내맡기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믿음은 이를 의심치 않습니다. 


감각이 더욱더 불충실하고, 반항하고, 절망하고, 불확실하면 할수록, 

믿음은 더욱더 이렇게 말합니다. 


“저건 하느님이야! 모든 게 잘되고 있어!”




   믿음이 소화하지 못하거나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넘어서며, 

어두운 그림자들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인다 할지라도, 

이를 꿰뚫고 진리로 나아가, 

그 진리를 늘 꽉 감싸 안고, 그것으로부터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제 자신과 제 벗들이 하는 행위가 

제 적들이 저지르는 행위보다 더 두렵습니다. 


자신의 적들에 저항하지 않고 

오로지 단순한 내맡김으로 그들에게 맞서는 신중함에 비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순풍에 돛 단 격으로, 그저 편안히 있기만 하면 됩니다. 

갤리선의 노예들이 전속력으로 노를 저어 항구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肉)의 신중함에 대항하는데 

단순함보다 더 확실한 무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순함은 온갖 종류의 계략들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또 그것들에 대해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경탄스러우리만큼 교묘하게 이것들을 잘 피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신적 활동으로 영혼은 너무나 적절한 조치들을 취하게 되고 

그 결과 자신에게 기습을 감행하고자 했던 이들을 되레 기습하게 됩니다. 


영혼은 이들의 온갖 노력을 잘 활용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깎아 내리는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자신을 들어 올리고, 

온갖 역경은 그에게 유리하도록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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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혼은 자신의 적들이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둠으로써, 

그로부터 매우 지속적이고 충분한 도움을 이끌어냅니다. 


그 결과 그가 해야만 하는 모든 걱정은 

하느님께서 그 근원이 되시고자 하시는 작품에 

(그의 적들은 이 작품의 도구입니다) 참여하여 

그것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작품에서 영혼이 고작 할 일이라고는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것과, 

초자연적 신중함을 지닌 성령의 늘 너무나 다행스러운 감도(感導)에 

단순 소박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이 성령께서는 각각의 일의 핵심과 내밀한 상황에 어김없이 도달하시고, 

영혼 몰래, 그를 너무나 적절하게 사용하시는 까닭에 

영혼에 대적하는 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멸망하게 됩니다.




   신적 활동의 비할 바 없이 확실한 움직임은 

상 단순한 영혼으로 하여금 적절한 때에 무엇엔가 전념케 합니다. 


단순한 영혼은 

신적 활동의 내밀한 인도에 의해서 매우 현명하게 매사에 잘 부합합니다. 


영혼은 죄를 제외한 모든 것, 

즉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벌어지는 모든 사건, 

그가 느끼는 모든 것을 원합니다. 


가끔은 알게 가끔은 모르게 그런 일이 벌어지는데, 

이는 영혼이 막연한 본능에 이끌려 

별다른 이유 없이 말하고, 행하고, 사태를 방임해버리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그에게 뭔가를 하도록 결심시키는 기회나 이유는 

단지 자연적 질서에 따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순한 영혼은 거기에서 어떤 신비도 간파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저 순전한 우연에 지나지 않고, 

어떤 필요나 사정(事情)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고, 

게다가 그것은 그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눈에도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그의 벗들의 슬기와 지혜와 조언을 통해 나타나는 신적 활동은 

상황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도록 

너무나 단순한 이 온갖 것들을 사용합니다. 


신적 활동은 이것들을 자신의 도구로 삼고, 

단순한 영혼들에게 해를 끼치려고 계획을 짜는 모든 적들에 맞서 

너무나 절묘하게 이것들을 쓰는 까닭에 

그 적들이 자신들의 소기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단순한 영혼을 상대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측량할 길 없는 섭리의 주재자이신 전능하신 분께 대항하여 

어떤 조치를 취할 것입니까? 


하느님께서는 단순한 영혼의 송사를 맡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영혼은 여러분의 음모를 연구할 필요도 없고, 

여러분이 밟아 나가는 전 과정을 조심스럽게 탐색하면서 

걱정에 걱정을 거듭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의 신랑이 그에게서 이 모든 수고를 덜어줍니다. 

영혼은 여러분을 신랑과 맞서게 하고는, 

평온과 안도감에 가득 차 신랑의 품안에서 휴식을 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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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 활동은 영혼을 해방시키고, 

인간적인 신중함에 너무나 필요한 

이 모든 천박하고 우려스러운 방편들로부터 그를 보호합니다. 


인간적인 신중함은 헤로데 왕과 바리사이들에게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평화로이 그들의 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고, 

아기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팔 안에 자신을 맡기시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적들은 주님의 일을 망치기보다 오히려 그 일을 더 진척시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그분의 일을 더 방해하고 

간파하려 하면 기습하면 할수록, 

주님께서는 더욱더 태연하고 자유롭게 행동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전혀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들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비굴하게 그들에게 아첨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그들의 시기와 불신과 박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유다 땅에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단순한 영혼들 안에서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살고 계십니다. 


그 영혼들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관대하시고, 온유하시고, 자유로우시며, 평화로우시고, 두려움이 없으시며,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 아버지의 손 안에 놓여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서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망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범죄적 열정으로써,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의 거룩한 행위들을 통해,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항변으로써, 

저런 사람들은 그들의 순종과 복종을 통해서 말입니다. 



신적 활동은 이 모든 것을 놀랍도록 잘 조율합니다. 


부족한 것도 없고, 과도한 것도 없으며, 

딱 필요한 만큼의 선과 악만 있을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으로 매 순간 그에 알맞은 도구가 사용되고, 

믿음으로 고결해진 단순한 영혼은 

모든 것을 좋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도 덜도 바라지 않습니다. 


영혼은 너무나 좋은 당신의 구원수(救援水)를 

자신의 심저(心底)를 따라 이토록 감미롭게 흐르게 하시는 

이 신의 손길을 언제나 찬미하며, 

벗과 적들을 똑같이 친절하게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사람을 신의 도구로 여기시는 예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지만, 또한 모든 이들을 필요로 합니다. 

신적 활동은 모든 것을 필요한 것으로 만듭니다. 


성 바오로가 말했듯이¹¹ (1코린토 9.2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이들에게는 단순하게, 

무례한 이들에게는 친절하게 대함으로써 

몸소 더 잘 실천해 보이신 것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그것의 장점과 본성에 따라 취하고, 

그것이 어떠한가에 따라 그에 맞게 온유함과 겸허함으로 대응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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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람의 본성에 따라 특수성을 띠고 

그 본성에 놀랍도록 잘 들어맞는 이 초자연적 모습을 

영혼 안에 새겨 넣는 일은 오로지 은총에 속한 일입니다. 


이것은 절대 책을 통해 배울 수 없는 것으로, 

참된 예언적 정신이고 내적 계시의 결과이며, 성령의 교리입니다. 


이 은총을 이해하려면,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계획과 모든 이해타산으로부터 가장 완전하게 벗어난 

극도의 내맡김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신적 활동에 온전히 수동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것을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관심사로 삼아서 

자신의 처지에 따른 책무와 관계된 일에 전념해야 하며, 

성령이 역사하시는 일에 눈길을 주지 않고, 

그것을 모르는 것에 대해 오히려 편안함마저 느끼며, 

성령이 자신 안에서 활동하도록 내맡겨 드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대체로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영혼들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금, 청동, 쇠, 흙의 형상으로 나타납니다¹¹

(네부카드네자르 왕의 꿈 참조 (다니엘 2.32~33). 

그 뒤에 나오는 부분들은 묵시록 9~13장에서 영감을 받은 내용임.).


무법(無法) 신비는 

세상의 시작과 더불어 내적이고 영적인 인간과 싸우려고 

깊은 구렁에서 올라온 이 짐승, 

이 어둠의 자식들이 일으키는 내외적(內外的)인 온갖 활동들의 

온통 혼란스런 조합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들은 이 싸움의 연속일 뿐입니다.


괴물들은 계속 뒤를 이어 나타나고,

깊은 구렁은 이 괴물들을 삼켰다가 다시 내뱉으며, 

그 구렁으로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연기가 올라옵니다. 


사탄과 성 미카엘 간에 하늘에서 시작된 전투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오만하고 시기심 많은 천사의 마음은 

온갖 종류의 악을 낳는 고갈되지 않는 구렁이 되었습니다. 


사탄은 

하늘에서 천사들을 선동하여 천사들에 맞서 반역하게 만들었으며, 

천지 창조 이후 그의 전 관심사는 

그가 집어삼킨 자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인간들 중에서 

항상 새로운 악당들이 생겨나도록 충동질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의 선동에 기꺼이 순종하는 이들의 우두머리입니다. 



무법(無法)의 신비는 그저 하느님의 질서에 대한 반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니 그것은 악마의 질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악마의 무질서입니다. 


이 무질서는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름다운 외양 아래 치유할 수 없는 무한한 악을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인부터 시작해서 지금 세계를 유린하고 있는 자들에 이르기까지, 

이 불경한 이들 모두는 외양상 위대하고 막강한 우두머리들로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으며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겉모습은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질서를 전복시키기 위해 

깊은 구렁에서 차례로 올라오는 짐승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¹¹ 

(묵시록 17.7~14절을 환기시키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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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또 다른 신비라 할 수 있는 이 하느님의 질서는 

정말로 위대하고 막강한 이들을 내세워 

이 괴물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지옥이 새로운 괴물들을 토해냄에 따라, 

하늘 역시 영웅들을 탄생시켜 이 괴물들을 무찌르도록 했습니다. 



고대사는, 성사(聖史)이든 속사(俗史)이든 간에, 

이 전쟁의 역사일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질서는 언제나 승리를 거두었고, 

하느님 편에 선 이들 또한 그러하며, 

이들은 영원무궁토록 행복합니다. 


그러나 불의는 결코 변절자들을 보호해줄 수 없었고, 

그들에게 

단지 죽음, 그것도 영원한 죽음으로써만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머릿속에 불경함이 자리하면,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무적의 존재라고 굳게 믿습니다. 


오, 하느님! 이것이 당신께 저항하는 방법입니까? 


그러나 한 고독한 영혼이, 세상이 그에게 맞서는 까닭에, 

설령 지옥을 살게 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명령에 자신을 맡기기로 결심한 이상 

그가 두려워 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불경함과 그 막강한 힘으로 무장한 이 무시무시한 겉모습, 

순금으로 된 이 머리, 은과 청동과 쇠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 

이 모든 것은 번쩍거리는 먼지의 환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작은 돌 하나가 그것을 

바람결에 자취도 없이 흩어지는 장난감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¹¹

(다니엘 2.34~35 참조 (네부카드네자르가 꿈에서 본 큰 상의 붕괴).).




   모든 세기를 시현(示現)하시는 성령께서는 얼마나 감탄할 만하신가! 


인간들을 너무나 놀라게 만드는 수많은 혁명들, 

너무나 빛나는 모습으로 나타나 

다른 이들의 머리 위를 운행하는 그 숱한 별들처럼 살아가는 영웅들, 

그 믿을 수 없이 기이한 숱한 사건들, 

이 모든 것은 네부카드네자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기억 저편으로 빠져 달아나 버리는 꿈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그의 머릿속에 새겨지는 그 꿈의 인상이 무시무시하다 할지라도! 




   이 모든 괴물들이 이 세상에 오는 이유는 

오로지 하느님의 자녀들의 용기를 단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면, 

하느님께서는 이들에게 그들의 괴물을 죽여 없애는 기쁨을 선사하십니다. 


뒤이어 천국은 승리자들을 들어 올리고, 지옥은 패배자들을 집어삼킵니다. 


지옥은 또 다른 괴물을 재생산하고,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용사들을 전쟁터로 부르십니다. 


이 삶은, 지상의 성인들을 단련시키고 지옥을 혼돈스럽게 만듦으로써, 

하늘을 기쁨으로 넘치게 하는 부단한 쇼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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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하느님의 명령에 대적하는 모든 것은 

그분을 더욱 숭배 받아 마땅하신 분으로 만들 뿐입니다. 


공정(公正)의 모든 적들은 정의의 노예들이며, 

신적 활동은 낡고 부서진 조각들만으로 이루어진 바빌론의 도구들을 가지고 

천상의 예루살렘을 건설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최상의 숭고한 빛이나 거룩한 계시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탄은 그분의 명령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탄에게 강생의 신비를 밝히며 

그에게 드러내 보이신 신적 활동의 이끄심은 

그에게 질투심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믿음이라는 유일한 광명의 빛으로 계몽된 단순한 영혼은 

하느님의 명령을 찬양하고 찬미하고 사랑하는 일에, 

그리고 거룩한 피조물들에서 뿐만 아니라 

가장 타락한 피조물들의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조차 

하느님의 명령을 발견하는 일에 절대 지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그토록 고귀한 빛이 사탄을 밝혀 주었던 것보다 

한 알의 씨앗만한 순수한 믿음이 단순한 영혼을 더욱더 밝게 비쳐줍니다. 


자신의 책무에 충실하고 은총의 내적 명령에 조용히 순종하며 

모든 이들에게 다정하고 겸손한 영혼의 지혜가 

신비에 대한 가장 심오한 통찰보다 더 가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피조물들의 이 가혹한 행위와 이 모든 오만함 속에서 

신적 활동을 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저 온유하고 정중한 태도로 이 피조물들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피조물들의 무질서 때문에 

신적 질서를 이탈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들이 어떤 식으로 삶을 영위하든, 

이들이 자신 안에 지니고 있고 

또 온유와 겸손으로써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신적 활동과의 결합을 

결코 단념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이들이 택한 길을 바라보지 말고, 

늘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부드럽게 휘어짐으로써, 

우리는 백향목을 부러뜨리고 바위를 쓰러뜨립니다. 


실제로 피조물들 안에 있는 무엇이 

신실하고 온유하며 겸손한 영혼의 힘에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진정 우리의 모든 적들을 반드시 쳐부수고자 한다면, 

우리는 오로지 이 무기들만으로 적들에 대항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방어를 위하여 우리 손안에 이 무기들을 쥐어주셨으니, 

이 무기들을 사용할 줄만 안다면 그 무엇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비겁하게 굴지 말고 관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적 도구들의 활동은 오로지 그렇게 하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숭고하고 경이로운 일들을 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맞서 싸우는 피조물 자신의 고유한 활동은 온유와 겸손으로써 

신적 활동과 하나가 된 이에게 결코 대항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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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영들 중에서 가장 밝게 깨어있는 아름다운 영이지만, 

하느님과 그분의 명령에 불만을 품은 영입니다. 


무법의 신비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표출되는 이 불만이 그저 연장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탄은,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한, 그 무엇도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명령하신 그대로 내버려두길 원치 않았습니다. 


그가 침투해 들어가는 곳 어디에서나, 

하느님의 작품이 흉하게 일그러져 있음을 여러분은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좀 더 많은 빛과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만으로 만족한다는 신앙심의 토대가 

자신에게 결여돼 있지는 않은지 더욱더 우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진 마음을 통해서 신적 활동과 결합합니다. 


이 마음이 없다면 

모든 것은 그저 순수한 본성을 따를 뿐이고, 

보통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전히 반대할 따름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이들 이외에 다른 도구는 전혀 소유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교만한 이들은 그런 하느님을 늘 거역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될 수 있도록 

노예처럼 그분을 섬깁니다. 




   저는 하느님과 그분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자신의 전부로 삼는 영혼을 보게 되면, 

다른 모든 것이 그에게 결핍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하느님을 섬기는데 대단한 재주를 지닌 영혼이 여기에 있다.”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이 결여된 나머지는 저를 겁나게 하며, 

저는 거기에서 사탄의 활동을 보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저는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고 제 마음 깊은 곳을 공고히 다지는데, 

이는 오로지 이 마음을, 

이젠 그저 깨지기 쉬운 유리잔처럼만 보이는 

이 모든 감각적인 화려함에 맞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은 단순한 영혼이 모든 것의 방침으로 삼는 것입니다. 


단순한 영혼은 

교만한 자가 그를 타락시키기 위해 행하는 비정상적인 행위들 속에서도 

하느님의 명령을 존중합니다. 


이 교만한 자는 영혼을 업신여기지만, 영혼의 눈에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그와 그의 모든 행위들 안에서 보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혼의 겸손함을 자신에 대한 두려움의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교만한 자를 통해 

그에게 시현하시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에 대해 영혼이 갖는 

사랑어린 경외심의 몸짓입니다. 


아닙니다, 

가엾고 무분별한 자여, 단순한 영혼은 그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이 단순한 영혼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그대가 영혼이 그대에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영혼은 하느님께 응답하고 있는 것이고, 

하느님을 상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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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은 단지 그대를 하느님의 노예들 중 한 명으로서만,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을 감추기 위해 드리워진 그림자로서만 간주할 뿐입니다. 


이처럼 그대가 오만한 태도로 말을 하면 할수록, 

영혼 쪽에서는 더욱더 낮은 태도를 취하며, 

그대가 영혼을 기습한다고 믿을 때, 영혼 또한 바로 그대를 기습합니다. 


그대의 교활함과 폭력은 

신의 섭리가 영혼에게 베푸는 호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활한 자는 여전히 하나의 수수께끼라 할 수 있지만, 

믿음으로 각성된 단순한 영혼은 

이 수수께끼를 매우 이해하기 쉽게 풀어냅니다. 


매 순간 일어나는 모든 일 속에서 이런 신적 활동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이 삶 안에서 

하느님의 일들에 대해 획득할 수 있는 가장 예리한 예지입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계시이고, 부단히 갱신되는 하느님과의 통교이며, 

지하 술창고나 포도원에 숨어서, 몰래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피조물도 두려워함이 없이,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보여주는 신랑의 향유(享有)입니다. 


우리가 보고, 알고 있으며,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살아 계시고 또 매 순간 일어나는 모든 것 안에서 

늘 가장 완전하게 역사하신다고 믿고 있는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 사랑과 만족의 토대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지금 이 천국은 암흑으로 뒤덮인 채,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한 것들 속에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삶에서 당신의 활동이라는 이 끊임없이 풍요로운 현존을 통해 

은밀하게 그 무형의 사물들의 모든 조각들을 맞추어나가는 하느님의 영은 

죽음의 날에 “빛이 생겨라!”¹²⁰ (“fiat lux!” (창세기 1.3)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매 순간 참아내고 행해야만 하는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이 심연과도 같은 하느님의 평화와 만족 속에서 

신앙이 감추고 있는 보물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당신을 내어주실 때에, 

모든 평범한 것은 특별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아무것도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길이 그 자체로서 특별한 길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길에 어울리지 않는 놀라운 것들로 이 길을 장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 안에서의, 

사소한 잘못들을 제외한, 기적이고, 계시이며, 끊임없는 기쁨입니다. 


이 길의 특징은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놀라운 것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모든 평범하고 감각적인 것들을 경이로운 것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모 마리아께서 실천해 나가신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