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 니르비깔파(Nirvikalpa) 902, 903, 904

은가루리나 2019. 4. 6. 23:24




p.232 - 233



   902. 내 마음은 자꾸 니르비깔파의 상태로 올라가고 있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일단 이 니르비깔파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다시 내려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들을 위해서 니르비깔파의 상태로 올라가고 있는 내 마음을 억지로 끌어내려야만 했다.

잡아끌어내린다는 것은 낮은 욕망이 없이는 좀처럼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소한 욕망들을 능동적으로 만들어냈다.

___ 담배 피우고 싶은 욕망, 물 마시고 싶은 욕망, 특별한 음식을 먹고 싶은 욕망,

어떤 특정한 사람을 보고 싶은 욕망 등등을 의도적으로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마음은 천천히 육체 쪽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내려온 마음은 또다시 튀어올라가곤 했기 때문에 이런 사소한 욕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또다시 억지로 잡아끌어내리곤 했다.



   903. 나는 Tat(that)라는 단어를 발음함으로써

니르비깔파 삼마디의 높은 경지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Tat라는 말은 Om Tat Sat라는 주문의 한 음절이다.

sat(Existence)라는 말은

아마 이 말의 반대인 Asat의 희미한 암시를 불러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장 신성한 상징인 Om조차도

나의 마음으로 하여금 삼마디의 표적에 미치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Tat(that)라는 말을 발음했을 때

이 모든 관계에 대한 생각들은 모두 나의 의식으로부터 사라져 버렸다.

또한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모든 식별작용도 정지해 버렸다.

그래서 마침내 나는 이 모든 제한된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

하나(神)에의 깨달음 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904. [문]삼마디 속에 흡수되어 버릴 때 <나>라는 이 개인의식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었습니까?

[답]그랬었다. 언제나 약간의 에고는 남아있다. 객체에 대한 모든 의식은 사라졌다.

그러나 신은 약간의 에고를 그대로 남겨두어 나로 하여금 그(神)를 즐겨 감상하도록 했다.


 때때로 그(神)는 이 약간의 에고마저 몰아내 버렸다.

이것이 가장 높은 삼마디의 차원이다.

이 경지가 어떤 것이라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신 속으로 자기자신을 완전히 변형시킴이다.

바닷물의 깊이를 측정하기 위하여 소금으로 만든 장대를 바다에 넣었다고 하자.

소금 장대가 채 바다에 닿기도 전에 소금 장대는 바닷물에 용해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 바다의 깊이를 알려주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