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제4장] 6. 하느님은 표상에 매이는 것을 거부하신다

은가루리나 2019. 4. 23. 02:03

6. 하느님은 표상에 매이는 것을 거부하신다



하느님은 도구 없이, 표상 없이 일하신다.

표상들에게서 자유롭게 될수록 그대는 그분의 내적 작용을 잘 받아들이게 될것이다.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선이고 진리이고 존재이므로 표상이나 모상을 갖지 않으신다."
그대 안에서 형태를 취하는 피조물의 가장 작은 표상이라도 그것은 하느님만큼 크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이 하느님을 완전히 가로막기 때문이다.

이 표상이 나타나면 하느님과 모든 신성은 사라진다.

이 표상이 사라질 때 하느님께서 들어오신다.

세상의 표상은 거룩하지 않으며, 영혼에게 세 가지로 해를 끼친다.

첫째, 영성을 혼란시키고 둘째, 순수성을 흐리게 하며 셋째, 초탈을 방해한다.

...하느님은 내 정신에 무슨 일을 하시는가?

...그분은 그대 자신을 초월하고 피조물들을 사라지게 하신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그대의 정신에게 하시는 일이다.



이제 그대는 영혼이 내적으로나 수단과 표상에서 자유로우며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형상이나

이미지 없이 자유롭게 영혼과 결합하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영혼이 영원한 말씀을 낳을 때 표상으로 하는가, 표상 없이 하는가?

이것을 기억하라. 영혼이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고 그분과 일치되어 하느님이 영혼의 일을 떠맡게 될 때 영혼은 단지 받아들일 뿐이며 활동하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이때 영혼에는 형상이나 표상이 없다.

형상이나 표상으로 표현되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그리고 피조물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많이 활동하면 할수록 하느님은 적게 활동하게 된다.



영혼은 표상으로써가 아니라 표상 없이 말씀을 낳는다.

이 탄생은 자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영혼이 영원한 말씀을 가장 잘 낳으려면 어떤 표상을 통해야 하는지

물을 수 있다. 표상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영혼이 감각을 통하여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표상이다.

둘째는 영혼이 우리 주님의 어린 시절 또는 그분의 죽으심에 대하여 생각함으로써 내부에서

떠올리는 표상이다. 이렇게 얻어진 표상들도 모두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탄생을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세번째 표상은 하느님께서 직접 영혼에게 주는 표상이다.

이 마지막 표상을 통해서 영혼은 하느님의 탄생을 가장 잘 이룰 수 있다.



한 스승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이해, 즉 형식적이고 개념적인 지식에 도달한다.

그러나 학문과 이론을 넘어 더 나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정신이 개념과 형상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사람보다 하느님께 수만 배

더 가치가 있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끊임없이 상상을 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들 안에 들어가

당신의 일을 하실 수가 없다.

성 디오니시오가 말하듯이 표상에서 해방된다면 그들은 온갖 합리적 개념들을 넘어설 수 있으며

신앙의 초이성적 빛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바로 그곳에 머무시며 당신이 뜻하시는 대로 당신이 뜻하시는 때에 당신이 뜻하시는

것을 평화로이 행하신다.



표상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그것은 의지와 관계없이 자신이 표상하는 것에게서 직접 존재를 부여 받는다.

나무에서 줄기가 나오듯이 표상은 표상하는 것의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면 어쩔 수 없이 거울 위에 어떤 상(모양)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거울의 상에는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눈.코.입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상 안에 당신의 본성, 당신의 온 존재, 당신의 모든 능력, 당신의 의지를

보여주신다. 그분의 표상은 의지를 앞서고 의지는 표상을 뒤따른다.

하느님의 본성에서 먼저 표상이 나오고, 그안에 당신의 본성과 존재를 집약시킨다.

하느님의 본성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체에 머물면서, 동시에 그분의 표상에 본성 자체를 쏟아붓는다.



스승들은 그 표상을 성령이 아니라 둘째 위격, 곧 성자 안에 둔다.

왜냐하면 성자는 아버지의 본성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분이므로 성부의 드러난 표상을 성자라고

부르지, 성령이라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