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74 pp.385-390 제 3편 제9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내적시련의 일반 -③

은가루리나 2019. 6. 28. 20:43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136  추천 0 2013.05.2202:23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 

 ⑴

 ⑵

 ⑶

 ⑷ 


제8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실패와 과실 -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내적시련의 일반 -

 

 

 

 


제10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유혹 -


제11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위안과 건조


제12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제13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





p.385


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9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계속)



― 내적 시련(內的試鍊)의 일반  ③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사랑으로써 천주를 사랑해 드리는 나날이다.


그 때, 우리는 

자기를 희생하여 천주 자신을 위하여 천주를 섬기기 때문이다.


아, 즐거움 안에 있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어떤 헛된 만족에도 사로 잡히는 일 없이,

순수한 사랑으로써 천주를 사랑한다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그러나 내적 십자가와 고난을 당할 때, 

이것을 거룩히 받는다면,

이미 천주와의 친교(親交)에는 자애심이 혼입할 것을 두릴 필요는 없다.


왜냐 하면,

이 친교에 있어서는 자애심에 있어

고통의 원인이 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아, 순수한 사랑의 가치를 깨닫는 이에게 있어,

이 확신은 스스로 얼마나 위로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많은 성인들은 위로나 즐거움보다는 오히려 궁핍과 고통을 택하였고,

위로를 받는 것을 괴롭게 느꼈을 정도로,

고뇌를 열렬히 사랑하였다. (드.고사드 「위탁」2편 4.12)



p.386


그것은 천국을 위하여 풍성히 추수할 때다.


왜냐하면,

그 때야말로 영혼은 바로 순수하게 사욕(私慾)을 떠난

거룩한 업의 실천에 오르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위로의 상태에 있을 때, 사람은 관능적 즐거움을 포기하고,

치욕이나 역경을 인내하는데는 그토록 커다란 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혜택을 받은 영혼은 모든 것을 감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그 인내는 천주께 대한 사랑의 힘에 의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맛보고 있는 감미(甘味)에서 생기는 것이다」라고,

성「알퐁소」는 말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에의 사랑 13.2)



이에 반하여 

자신의 비참함, 나약함, 감정, 악습 

또한 그 밖에 우리를 시정하시기 위하여 

천주께서 사용하시는 모든 고통을 잘 인내한다는 것은,

평범한 덕으로는 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내적 정화(內的淨化)와 이탈을 겪은 후에,

우리는 비로소 쉽게 완전한 위탁에,

홀로 천주께 대한, 효애로 부터의 신뢰에 올라간다.


바꿔 말하면,

가장 탁월한 덕이 우리에게 있어 거의 자연적인 것이 된다.


그러기에 얼마나 이러한 비참과 이러한 시련이

성인들의 내적 투쟁, 그 승리, 은총의 개선의 기회가 되어,

그들에게 풍부한 수확을 얻게 했을 것인가.



한편으로,

우리가 천주만을 생각하고, 천주만을 맛보며, 천주께만 의뢰하고,

천주 안에서만 기뻐하게 되는 것은

자아(自我)로부터의 이 이탈이 완전히 성취된 후에 있어서다.


그것이야말로 

예수.그리스도에 있어서의 새로운 생명이며,

묵은 사람이 멸하고, 새로운 사람이 건설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 위를 기어다니는 대신에

누에의 번데기가 죽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나방이 되는 것처럼,

자신에게 죽는 것을 서둘지 않겠는가.

(드.고사드 「위탁」2편 4.22, 5.17, 6.3 참조)



p.387


그러나, 자애심은 짓궂게 오래 살며,

기나긴 무서운 죽음의 고통을 겪은 후가 아니면 숨을 걷우지 않는다.


아직 불완전한 영혼은 ,

타오르기 전에, 조르르 수분을 내놓으면서 신음하며,

휘어지는 생나무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또한 조각가의 끌 밑에 있는 소상(塑像),

쇠망치로써 쪼개지려는 돌과도 비슷하다.


유혹, 건조, 그밖의 고통은,

몸에 스며드는 그 타격의 아픔을 격심히 우리에게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것 없이는,

우리는 언제까지나 형태를 갖추지 못한 덩어리에 불과하며,

고난을 받으시고, 수치를 당하셨으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의 모습을 닮을 수는 없다.


몇 번이고 자기를 이탈한 후에 비로소,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기도의 길에, 사랑의 일치에, 참된 성덕에 깊이 나아가려는 소망이 클수록,

우리는 이탈한 자유스러운 이가 돼야 한다.


만일 우리가 가장 두려운 고독 안에 있어서도

천주를 섬기는 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위로주이신 천주보다도 오히려 천주의 위로를 찾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내적 고뇌는 완덕에 이끄는 길이며,

천주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편에는 아무런 과오가 없드라도, 

우리에게서 제거하신다.


아마 우리는 세속에 있었을 적보다도 

수도원에 있어 위로의 감미로움을 맛보는 일이 보다 적을지 모르겠다.


이것은 천주께서 보다 완전하게 당신께 우리를 일치시키시려고

보다 유효한 수단으로써 우리를 정화(淨化)하시기 위해서다.




참으로 잔은 쓰다.

그러나 지옥의 고뇌는 더욱 쓰라린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께서는 애련히 여기시는 성의에서,

후세에 있어 받아야 할 가혹한 고뇌를 대신하여,

이 경감(輕減)된 고뇌로써 우리를 정화하신다.


p.388


한편 이 구원의 잔을 부득이 마셔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을 덕을 실천하는 기회로 삼자.

그것은 잔의 쓴맛을 완화시키는 수단이다.


시련에 의해서 정화되고,

이탈이 진보함에 따라,

모든 것은 우리에게 있어 감미로운 것이 돼 갈 것이다.


그리고 천주께서 허락하시는 경우,

피로할 때, 또는 특히 치열한 시련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미 고통을 거의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혹심한 고통의 대부분은,

죽음도 사양도 바라지 않는 자애심의 강한 반항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천주께 대한 사랑은,

만일 우리의 마음에 저항하는 아무런 장애물도 발견하지 않는다면,

감미롭고, 즐거운 인상만을 주는 것이리라.


결국,

흠숭하올 주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일종의 고통에 잠기셨는데,

우리는 지상에 있어 천국의 즐거움을 맛보고,

장미의 향기로운 길만을 나아가려고 원해서 좋을 것인가.


천국은 모든 희생을 지불하여 획득하도록 돼 있다.


그리고 

고통은 오직 영적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의 독점물(獨占物)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의 고통은 사랑과 희망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


결국,

냉담한 이가 방종한 정욕의 멍에 밑에 지쳐 버리는데 비하여,

이런 사람에게 있어,

성덕을 향하여 달음질한다는 것은 훨씬 수월하다.

(「동서」2편4.12, 5.17)




그러므로,

우리는 천주의 은혜를 방해하는 것을 주의 깊이 피하도록 노력하자.


그러나 우리가 묵상 및 영성체에서 감각적인 위안을 맛보고,

지극히 사랑하올 분과의 일치가 

희열과 감미만을 초래한 

이런 맑은 날을 우리에게서 앗으시는 것이 천주의 뜻이라면,

이 유쾌한 위안에 미련을 가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왜냐 하면,

천주께서 우리로부터 위안을 앗아가시는 것은

우리의 과실 때문이 아니고, 

실은 그것이 임무를 마쳐,

이미 전과 같이 우리에게 있어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 현세에 있어서의 순교와 죽음의 고통은,

얼마나 귀중한 것이랴!


만일 우리가 

이 복된 내적 굴욕을 기꺼이 받아들여 중히 여기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항상 굴욕을 느끼며,

언제나 거기에 머무르기를 바랄 것이 틀림 없다.


왜냐 하면,그것으로써 

우리는 천주의 곁에 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p.389


많은 성인들은, 그 고난을 당할때,

특별한 영감(靈感)에 충만되어,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주여, 더욱 고통을!」이라고.

「드.고사드」신부에 의하면,

이 모범을 따르려는 것은 흔히 외람되고 미혹한 짓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바라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신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그런 소망을 간직하기에는,

우리는 너무나도 작은 이, 약한 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는 결코 스스로 어떤 고통이나 반대를 원하지 않았고,

더구나 그것을 간구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지도했던 한 여성을 훈계하여,

현재 보다 많게도 적게도 고통을 천주께 기도하기를 금하고 있었다.


그것은 천주께서 우리 이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의 올바른 정도를 알으시기 때문이다.


천주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시련만으로 충분하며,

스스로 그것을 기구하고, 또는 자초(自招)할 필요는 더구나 없다.


평소에 시련을 기대하고,

그것에 대비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닥쳤을 때, 이를 효과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더욱 힘과 용기를 주는 최선의 방법이다.(동서)



그리고, 우리는 인내와 겸손으로써 무장해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좋지 않은 성질이 있고 

천주께서 이를 제어하시기 위하여 더욱 많은 시련을 보내실 때,

결코 굽히지 않겠다는 굳은 용기로써 싸우는 영혼에게 있어서는,

전투의 격렬함도, 오랜 기간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


공격의 격심함은, 피로와 위험을 더하게 하겠지만,

그러나 천주의 도우심으로써,

결국 그것은 보다 큰 승리와 성덕과 공로와 보수를 얻는 기회가 될 것이다.



p.390


천상의 명의(名醫)가 「메스」를 가하여,

쓰디쓴 의약을 아낌 없이 베푸시는 동안은

우리는 자애심이라는 거짓 거울에가 아니라,

진리라는 충실한 거울에 비추어 자기를 바라보며,

자신의 비참함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자.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천주의 전능하신 손 밑에 몸을 낮추게 될 것이고,

또한 그 정의와 그 사랑을 비난하기는 커녕,

도리어 천주께서 우리를 관대하게 대하시고,

그 엄격함 안에서 까지, 극히 자비 깊으신 분이심을 깨달을 것이다.

(동서 2편 4.22, 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