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87 pp.449-452 제 3편 제12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계속) 제4절 영적 빈곤①

은가루리나 2019. 9. 20. 16:05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112 추천 0 2013.08.20. 21:14.20:13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

 제4절 장소와 환경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 

 ⑴

 ⑵

 ⑶

 ⑷ 


제8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실패와 과실 -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내적시련의 일반 -

 

 ②

 ③

 ④


제10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유혹 -①

 - 유혹 -② 

 - 유혹 -③


제11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위안과 건조-①

 - 위안과 건조-②

 - 위안과 건조-③

 - 위안과 건조-④


제12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①


제13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제2절 각가지 공포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제4절 양심상의 小心


제14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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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12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계속)



제 4 절 영적 빈곤 (靈的貧困) ①




신의 암흑, 마음의 무감각, 의지의 무력에서 

영적 빈곤(靈的貧困) 이외에는 무엇이 생길수 있으리라고, 

아마 시련 안에 있는 이는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견해다.


영혼의 상부(上部)가 천주의 의지에 일치하고, 의무에 충실한 이상, 

암흑, 무감각, 무력은 그 하부에만 한정돼 있는 것, 

따라서 영적빈곤은 외관상의 것에 불과하다.


실제, 이 쓰라린 시련은 순명과 겸손에 굳이 바탕을 두며, 

자애심의 황폐에 대하여 

수비(守備)의 견고한 하나의 풍부한 재보의 원천 밖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거기에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즉, 그것은 천주께서 우리를 당신의 방법에 의해서 다스리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릇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미혹의 이유가 있다.


따라서 이 오해를 제거하기에는 

천주의 계획을 보다 잘 통찰하고, 그것에 자기를 온전히 결합시켜야 한다.


나는 결코 관대한 영혼의 진로를 방해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비약하는 것만을 막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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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우리의 갈망은 지나치게 평범하다.


우리는 허다한 은총을 선용하지 않고, 

그래서 천주께서 우리에게 예정하신 영광의 높은 정도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진보(靈的進步)의 지극히 높은 소망을 간직하여야 한다.


더우기 이 소망은, 

오직 천주의 의지에 바탕을 두며, 그 뜻에 따르고, 

그리고 우리의 완덕을 천주께서 바라시는대로 바라며, 

더구나 천주께서 그것을 바라시는대로만 바라도록 힘써야 한다.


이런 소망은 아무리 거룩한 열렬함에 충만된 것이라도 

그것은 그 원천을 은총 안에 가지며,

천주의 의지 안에 그 규범을 두는 것이므로, 

항상 평온하고 복종하는 소망이다.



이에 반하여, 

전체로서 천주의 의지에 의지하지 않는 것 같은 완덕에의 소망도 있다.


그런 소망은 다소 자애심의 추구에 고취되고, 

얼마간 자의(自議)에 좌우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안, 혼란, 초조함 등이 야기됨으로써 이것을 분별할 수 있다.

전자가 신뢰에 맞갖는 것만큼 후자는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렬히 완덕에 향하여야 할 것임과 동시에 

자애심의 권유에 대하여 충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행히도 천주께서는 지금 말한 바 각가지 고통으로써 우리를 도우신다.

그것으로써 천주께서는 필요한 이중(二重)의 원조를 우리에게 주신다.


즉 그 보이지 않는 은총으로써 유력하게 지탱하시어, 

우리가 진보하려는 소망을 부여하시는 것, 

또한 영적 빈곤의 인상을 우리의 마음에 강하게 남기시어, 

자애심의 폭력의 손에서 피하게 함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께서 우리의 영적 재보를 증대하심과 동시에 

이 재보를 겸손의 보호 아래 두신다는 것을 찬미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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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안에 충만된 진리를 더욱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아래에 다소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우선, 

우리의 죄와 불완전에 관해서 말한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다음과 같이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나의 죄과와 비참함을 싫어하나이다.

당신의 은총의 도우심에 의하여 그것을 고치도록 전력을 다하리이다.」

라고.


그때 천주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기 위하여 급히 달려 오시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승리를 확보시키는 것이나, 

또한 우리를 자기비하(自己卑下)안에 간직케 하시기 위해서다.


만일 우리가 자신 안에 힘과 용기를 발견한다면 

아마 헛된 자기만족이 침입해 올 것임이 틀림 없으리라.


그러므로, 천주께서는 비천 안에서의 승리, 

즉 우리가 자신의 나약함을 느끼면서 

자부함이 없이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은혜를 거둘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사람은 오만에 도취되기는 고사하고 

자기가 비천한 허무에 불과하다고 생각될 것이다.



자기에 대한 이 불만족은 천주의 거룩한 마음의 만족이 되리라.


그것 뿐 아니라, 

우리가 천주를 즐겁게 하는 것을 유일한 기쁨으로 여겨, 

그것을 찾아 구하기에 이른다면 

이미 아무 것도 우리의 마음을 산란케 할 수 있는 것은 되지 못하리라.




「드.고사드」신부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생활하는 동안, 

우리는 지극히 불완전한, 지극히 비참한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만일 그대가 이 비참한 상태에서 치료되고 구원되기를 바란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 근원인 죄를 증오하고, 

동시에 그 결과, 

즉 거기에서 생기는 비하(卑下)와 자아경시(自我輕視)를 사랑하고, 

혹은 적어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을, 

마음을 산란시키지 말고, 

걱정하지 말며, 실망하지 말고 감수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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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께서는 죄 자체를 바라지 않으시지만, 

우리를 비하(卑下) 안에 머물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것을 지극히 유익한 연장으로 삼으신다는 것을 항상 상기하라.


자신의 허무함을 더욱 더 분명히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성인들의 겸손을 깊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천주께 기인하는 그런 겸손은 항상 기쁨과 평화를 동반하는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죄와 결점을 통절히 느낀다는 것은, 

천주께서 우리에게 근접하심에 따라 

또한 우리가 광명 안에 깊숙이 나아감에 따라서만 

생기는 것이다.


천주의 이 광명은 그 찬란한 빛을 발함에 따라, 

우리 안에 있는 비참과 부패의 심연(深淵)을 보다 명백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 인식이야말로 

천주께 대한 길에 있어서의 진보의 가장 확실한 증거의 하나다.」

(「위탁」2편 6장16, 20)



아마 이 광명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우리의 가난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우리를 당황케 하리라.


그러나 실제로는 이것 때문에, 

이 광명은 우리를 위로하고 감사를 바치게끔 한다.




덕의 진보에 관해서 말한다면,

우리는 천주께 다음과 같이 기도하여야 한다.


「나의 유일한 소원은 당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이다.

나는 묵상의 은혜, 제욕의 정신, 모든 선덕을 바라옵니다.


나는 이런 은혜를 간절히 기구하오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간단 없이 노력하겠나이다.


그러나 당신의 흠숭해야 할 의지는 

항상 나의 가장 정당하고도 거룩한 소망에 있어서도 그 규범이옵니다.


당신이 나에게 바라시는 성덕을 나도 또한 바라며,

그리고 거룩하신 배려에 맞갖는 정도와 방법과 때에 있어서만 

이를 바라나이다」라고.


무한한 예지시며,

또한 지선하신 분이신 천주께서 스스로 우리를 고취하시어,

우리 안에 일으키신 진보에의 소망을 

천주께서는 저버리시는 일이 결코 없으시며,

반드시 이것을 들어주실 것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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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의 진보, 인내, 겸손, 애덕, 위탁,

그 밖의 모든 은총의 과실이 교만의 손에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때로는 우리가 모든 덕의 결핍을 느껴 울지 않을 수 없을만큼,

그런 것을 우리의 눈에 감추신다.


우리는 오히려 이것을 천주께 감사하여야 한다.


왜냐 하면,

아무리 탁월한 은혜라도, 진보의 수단이 된 후에는 

영혼에게 있어 자기 만족과 애착과의 기회가 되어,

영혼을 더럽히고, 함정과 장애물이 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천주께서 전에 주신 은혜를 다시 우리에게서 빼앗으시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이처럼 빼앗으시는 것은 우리가 모르고,

부당하게도 이것을 의기양양하게 점유(占有)했다는 일에서

우리를 정화(淨化)시키신 후에,

이것을 백배로 하여 돌려주실 뜻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욕심으로써 선덕에 풍부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주께 다음과 같이 기도하여야 한다.




이러저러한 은총, 이러저러한 진보를 나에게 베푸시는 것이

뜻인지 아닌지 모를지라도 만족 하나이다.


대개 그렇게도 비참한 나는,

베푸신 은혜도 이것을 안다면, 즉시 독(毒)으로 화하고

자애심의 저주할 자기 만족은 거의 모르는 사이에,

또한 거의 의사(意思)에 반하여

나의 행위의 깨끗함을 더럽히기 때문이로소이다.


그러므로, 나의 천주여,

당신의 손을 묶고, 또한 자비하심으로써 나에게 베푸시는 은총을,

인자하신 마음에서 이를 나에게 감추게 하신 것은 나 자신이옵니다.

(「위탁」2편4.17)




성성(成聖)의 수단에 관해서 우리는 천주께 깊이 신뢰하여야 한다.


대개 천주께서는 

충실한 영혼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 같은 가장 화려한

가장 바랄 만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들의 진보를 가장 잘 확보하며,

특히 겸손과 이탈 안에 견고하게 하는 방법을 택하기를 잘 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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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이상으로 무엇을 바라겠는가.


천주를 섬긴다는 것은, 

악을 피하고 계명을 지키며,

힘에 응하여 그 의지를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대체 무엇이겠는가.


이런 의무를 수행한다면,


「천주께서 아직 우리에게 베푸시기를 바라지 않으신다는 것,

정신의 광명, 착한 감정, 내적 감미, 정신의 집중, 묵상의 용이성,

기타 천주의 어떠한 은혜라도 어찌 성급하게 열망하는가.


이렇게 하는 것은,

천주의 의지에 의하는 것이 아니고, 

자의(自意)에 의하여 그대의 완덕을 도모하며,

천주의 의향보다도 그대의 의향을 앞세우고,

한 마디로 그 성의에 응해서가 아니고,

제멋대로의 상상에 따라서 천주를 섬기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빈곤, 나약함, 비참함 안에서 일생을 체념하면서

고통을 겪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 만일 그것이 천주의 성의시라면.」....



그런 경우, 그것은 단지 외관상의 영적 궁핍에 불과하다.


실제는, 

바로 천주께서 바라시는대로 있는 것은 매우 풍부한 것이며」,

또한 천주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진심으로 기꺼이 받는 것이야말로,

높은 완덕이다.


우리는 자기의 비참함, 나약함, 내적 빈곤, 암흑, 무감각, 

정신의 산만, 어리석음, 정신과 상상과의 광분(狂奔)을 

최선을 다하여 끊임없이 깊은 인내로 견디는 것은,

영웅적 덕임을 깨닫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성「프란시꼬.살레시오」로 하여금,

완덕에 이르기를 절실히 바라는 이는 

남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대해서도 인내와 유화와의 덕이 필요하다고 말하게 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같은 경우에,

인인에게 인내할 것을 천주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와 같이

비참함과 불안전함과 결점이 있는 자기 자신도 참아 견디어야 한다.

(「위탁」2편 4의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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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참으로 선의만 가지고 있다면,

이 영적 빈곤의 느낌은,

현재의 일에 관해서 우리를 불안에 몰아넣는 것은 아니리라.



십자가의 성「요왕」은 말했다.


「그대는 안전한 길을 걷고 있읍니다.

인도되는대로 맡겨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는 지금처럼 겸손한, 지금처럼 온순한 이가 된 적은 없읍니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훌륭한 상태에 있었던 적도,

일찌기 자기 자신도, 세상의 모든 사물도 

지금처럼 하찮은 것으로 여긴 적은 없었읍니다.


지금처럼 그대가 자신을 나쁜 이로 생각한 적도 없었으며,

또한 주의 착하심을 이토록 깨닫고,

지금처럼 탁월한 무아(無我)와 순진한 의향으로써

주를 섬긴 적도 전에는 없었읍니다.


그대는 전에 

아마 자의(自意)와 개인적 이익을 만족시키려고 힘썼겠지만,

지금처럼 훌륭히 포기한 적은 없었읍니다. 」(「서간」13)


 


미래에 관해서는,

자기의 영적 빈곤을 통절히 느껴,

거기에서 생기는 

자기에 대한 거룩한 비하(卑下), 멸시, 혐오 등을 사랑하도록 

노력하는 일만 남아 있다.


우리가 만일 이런 영역에 도달했다면,

영적 진보를 위하여 보다 결정적인,

새로운 걸음거리를 내디딘 것이 되리라.


충분히 이해되고,

겸손되이 참아 견디는 이 외관상의 빈곤은,

영혼이 지상에 있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보물의 하나다.


왜냐 하면, 이 영적 빈곤의 느낌이야말로, 

영혼을 깊은 겸손에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위탁」2편 6의 20, 26)



이로써 천주께서는,

영혼이 자기에게 만족하고, 자기에게 의뢰하는 것,

또한 게으른 안일(安逸) 안에 잠들어버리는 것을 막아주신다.


이와 같이 하여 천주께서는,

영혼으로 하여금 전전긍긍하면서 구령을 완수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신다.


따라서,

영혼은 천주 안에만 신뢰를 두고, 자신에게 의뢰하지 않으며,

경계하고, 기도하며, 제욕하고, 자기의 영적 활동을 자극하며, 

거룩한 업을 더하게 한다.


p.456


그것은 간선된 이의 영복을 보다 확실히 얻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