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번역 하섭내

제11장 하느님께 온전히 내맡긴 상태에서, 어둠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신앙 행위이다

은가루리나 2019. 9. 21. 15:40


p.124


제11장 


하느님께 온전히 내맡긴 상태에서,  

어둠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신앙 행위이다 




   신의 모든 메시지가 빛처럼 환하고 분명한 그런 유형의 거룩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동적인 신앙의 길에서, 

하느님께서 전해주시는 모든 메시지는 그분의 본성을 닮았고, 

그분의 왕좌를 둘러싸고 있는 이 접근 불가능한 암흑의 성격을 지닙니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그저 혼란스럽고 어두운 감정들일 뿐입니다. 


그 길에 서있는 영혼은, 

예언자와도 같이, 이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면서 

암초를 향해 무모하게 달려드는 것은 아닐까 종종 두려워합니다. 



신실한 영혼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바로 그대의 길이고 그대에 대한 하느님의 이끄심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암흑상태보다 더 확실하고 더 틀림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그렇게 캄캄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어느 쪽으로 가야할까요? 

그대가 원하는 곳 아무데로나 가십시오. 


찾아야 할 길이 더 이상 없을 때에, 

어둠으로 인해 모든 것이 동일하게 되어버릴 때에, 

길을 잃어버리는 일 따위는 더 이상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종착지를 목표로 삼을 수도 없고, 

우리 눈앞에는 어떤 대상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저를 두렵게 합니다. 

저는 매 순간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만 같고, 

모든 것이 저를 힘겹게 합니다. 


저는 제가 내맡김으로써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잘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덕(德)으로써 행동하기를 멈출 때에라야만 비로소 

제가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저는 모든 덕들이 

제가 자신들을 멀리 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 불평의 소리들이 제게 더욱더 사랑스럽게 들리고 

저로 하여금 더욱더 이 덕들에 집착하게 하면 할수록, 

저를 밀어붙이는 이 막연한 인상은 

더욱더 저를 그 덕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덕을 사랑하지만, 

제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에 저를 맡깁니다


저는 이 끌림이 저를 잘 이끌고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신은 빛을 향해 달려가지만, 마음은 어둠만을 원합니다. 


제 정신은 빛을 발하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지성들을 좋아하지만, 

제 마음은 오로지 이해할 수 없는 대화와 이야기만을 즐깁니다. 


p.125


그리고 모든 것, 

즉 마음의 상태와 마음의 행로에는 정신의 대상이나 사상을 갖고 있지 않고

대상이나 사상이 담기지 않고, 

정신을 동요시키고 전율케 하고 휘청거리게 만드는 원칙들과 진리들과 

길들을 사랑하고 음미하게 만드는 믿음의 은사가 각인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제 마음 깊은 곳에는 담대함이 확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은사로부터 받은 좋은 인상에 설득당한 제 마음은, 

분명한 사실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신앙심에 의해, 떠밀리는 대로 나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그가 눈치 채지 못하면 못할수록 그만큼 더 대단한 그의 길이 얼마나 좋은지에 

그의 길이 얼마나 더 좋게 되는지에 대해 

그에게 확신을 심어주지 않은 채 그를 인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확신은 

모든 피조물들, 모든 두려움들, 모든 노력들, 

정신이 낳는 모든 생각들에 맞서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니 정신이 아무리 큰소리치고, 뭔가를 인용하고, 

더 나은 것을 찾아봐도 소용없습니다. 



신부는 신랑을 감각적으로 느끼지 않고도 그 현존을 감지합니다. 


왜냐하면 신부가 신랑에게 손을 대려 하는 순간 

신랑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신랑의 오른팔을 느낍니다¹²¹(아가 2.6.)


그리고 신부는 덕으로 포장된 길들을 애써 취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보다는 

까닭도 순서도 없이 자신을 이끄는 신랑의 인도에 자신을 내맡긴 채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니 나의 영혼이여, 자 가자, 내맡김으로써 하느님께로 나아가자! 


덕은 근면과 노력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니, 

우리를 친절히 당신 팔에 안고 가실 의향이 없으시다면 

우리를 걷을 수도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지는 않을 하느님께 

우리의 무기력함과 당신께 대한 우리의 신뢰심을 고백하도록 합시다. 


주님, 

우리가 스스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섭리의 품에 안겨 가고 있는데, 

보거나 느끼기 위한 빛과 확신과 생각과 성찰이 필요합니까? 


우리의 행로에 암흑, 심연, 암초, 죽음, 사막, 공포, 학대, 가뭄, 결핍, 

근심, 고뇌, 절망, 연옥, 지옥이 더 많이 존재하면 할수록, 

우리의 믿음과 신뢰는 더욱더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위험 속에서도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당신을 바라보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야 할 길들과 그 길들의 특성들을 망각할 것이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안내자의 지혜와 선의와 권능에 우리를 온전히 내맡긴 채, 

오로지 당신을 사랑하고, 

분명한 죄뿐만 아니라 가장 경미한 모든 죄악을 피하며, 

의무적인 책무를 완수하는 것만을 기억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님이여, 

이것이 바로 당신이 당신의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에게 남긴 

유일한 수고거리입니다. 


p.126


그 밖의 다른 모든 일은 당신이 맡아 주십시오. 

이 나머지 모든 일이 무시무시하면 할수록, 

당신의 자녀들은 더욱더 당신을 고대하고, 

더욱더 당신의 현존을 경험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랑하는 일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머니 품에 안겨있는 아기가, 

마치 이 세상에서 자신이 소유한 것이라곤 

자기 엄마와 자기 장난감뿐인 놀이감뿐인 것처럼, 

자신의 유일한 놀이에 몰두하듯이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의무들을 이행합니다. 



영혼은 자신에게 어두움을 드리우는 모든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밤은 행동해야 할 때가 아니라 

휴식을 취해야 할 때입니다. 


이성의 빛은 오로지 신앙의 어둠을 더 짙게 할 수 있을 뿐이기에, 

이 어둠을 꿰뚫고 들어올 빛줄기는 

그 어둠만큼이나 높은 곳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당신을 생명으로서 알려주시면, 

그분은 더 이상 영혼의 눈에 길과 진리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¹²² 


신랑은 밤에 신부를 찾습니다. 


신랑은 신부 뒤편에 서서 두 손으로 그녀를 잡고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밀어줍니다. 


그러나 신부는 신랑을 자기 앞쪽에서 찾으면서 

신랑을 피해가게 됩니다


신랑은 더 이상 대상이나 이념이 아니고 원리이자 근원입니다. 



신적 활동에는 

자기 자신의 고유 활동에 더 이상 신뢰를 갖지 못하는 영혼들의 모든 필요와 

곤경, 동요, 추락, 전복, 박해, 불확실성, 걱정, 의심을 극복하게 해 줄 

뜻밖의 비밀스럽고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방편이 숨겨져 있습니다. 


장면(場面)이 더 얽히면 얽힐수록, 

우리는 더욱더 매력적인 결말을 기대합니다. 

마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게 잘 될 거야! 이 작품을 연출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니까.” 



그러므로 그 무엇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두려움 자체, 불안, 비탄은 

어둠의 송가에 나오는 구절들입니다. 


우리는 이 송가의 한 음절도 빼먹지 않고 노래할 수 있음을 매우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영광송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¹²⁴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방황을 자신의 길로 삼습니다. 


어둠 자체가 안내자의 역할을 하고, 

의심이 확신을 심어주는 구실을 합니다. 


이사악이 희생 제물로 바칠 뭔가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으면 겪을수록, 

아브라함은 더욱더 신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립니다.


--------------------------------------------------------

¹²²한 14.6 참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¹²³ 아가 3.1 참조. 

여기서는 신랑과 신부의 역할이 바뀌었다. 

영혼을 찾는 것은 하느님이시고, 그분께서는 영혼 곁에 계신다. 

영혼은 하느님을 찾는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상 그분을 피해간다!


¹²⁴Gloria Patri : 

전례에서 불리는 찬가와 시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로 끝을 맺는다.




   빛 속을 걷는 영혼들은 빛의 송가를 부릅니다. 

어둠 속을 걷는 영혼들은 어둠의 송가를 부릅니다. 


p.127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부여한 성부(聲部)와 모데트¹² (modet)를 

영혼이 끝까지 부르도록 놔두어야 합니다. 


그가 완수하는 일에 있어서 그 무엇도 빠뜨려서는 안 되며, 

설사 그가 취(醉)하게 된다 할지라도, 

쓸개즙과 같이 쓰디쓴 이 거룩한 고통의 물방울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흘러내리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예레미아와 에제키엘도 이와 같았습니다. 


그들의 모든 말은 그저 탄식과 오열일 뿐이었고, 

그들의 위로는 

오로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그들의 통곡 속에만 존재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그들의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했더라면, 

그 사람은 

우리에게서 성경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들을 앗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를 비탄에 빠지게 만드는 영만이 

우리를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영입니다. 


왜냐하면 

이 다양한 수액(水液)들은 동일한 원천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원천이 영혼을 뒤흔들면, 영혼은 두려움에 떨어야 하고, 

원천이 영혼을 위협하면, 영혼은 소스라치게 놀라야 합니다. 


그저 신적 역사(役事)가 전개되도록 내버려두기만 하면 됩니다. 


신적 역사는 

자신의 전 영역 안에 병(病)과 약(藥)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영혼들이여, 흐느껴 우십시오, 

불안에 떠십시오, 

근심과 단말마의 고통 속에 머물러 계십시오! 


이 거룩한 공포와 이 천상의 신음 소리를 

다른 것으로 바꾸려 조금도 애쓰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한 영혼 속에 품고 계셨던 대양, 

그 대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작은 물줄기들을 

여러분 존재의 깊은 곳에 받아들이십시오! 


은총의 숨결이 눈물을 흐르게 하는 한 

그 눈물을 흩뿌리면서 계속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감지하지도 못하는 새에, 

그 동일한 숨결이 눈물을 마르게 할 것이고, 

구름은 걷힐 것이며, 

태양은 빛을 발할 것이고, 

봄은 여러분을 꽃으로 뒤덮을 것이며, 

여러분의 내맡김은 그 결과로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신적 활동의 전 영역 안에 들어 있는 

놀라운 다양성을 발견케 할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동요하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꿈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환영은 다른 환영을 피해 달아나거나 파괴하고, 

망상들은 잠자는 이들 안에서 계속 꼬리를 물고 나타납니다. 


어떤 망상들은 마음을 아프게 하고, 

또 어떤 망상들은 위로를 줍니다. 


영혼은 

서로 간에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는 이 외양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지만, 

꿈에서 깨어나면서 이 모든 외양들에게는 

영혼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꿈으로부터의 각성은 이 모든 인상들을 사라지게 하고, 

우리는 꿈속에서 겪었던 이런 위험들이나 이런 행복에 

더 이상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p.128


   주님, 제가 어떤 방향에서 의미에서 

당신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신앙의 밤 내내 당신 품에서 잠들게 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당신께서 그들의 영혼 속에, 

사실상 거룩하고 신비로운 몽상에 지나지 않는 

이 무한한 그리고 무한히 다양한 감정들을 즐겨 흘려보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밤과 잠으로 인해 당신의 자녀들이 처한 상태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밤과 잠에 처한 상태에서, 

이 몽상들은 

그들에게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두려움과 고뇌와 비통함을 야기하지만 

당신께서는 영광의 날에 이것들을 흩뜨려 사라지게 하시고 

이것들을 참되고도 견고한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날 즈음이나 꿈에서 깨어난 후, 

완전히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자유로운 판단력을 온전히 회복하게 된 거룩한 영혼들은 

신랑의 애정 충만한 지략, 계교, 술책, 속임수에 대해 

끊임없이 찬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길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분의 수수께끼를 풀고, 변장하신 그분을 간파하고, 

그분께서 공포와 두려움을 퍼뜨리고자 할 때 

어떠한 위로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 잠에서 깼을 때, 

예레미아와 다비드 같은 이들은 

하느님과 천사들에게는 기쁨거리였던 일들이 

그들을 위로받을 길 없는 비탄에 잠기게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독자적인 강한 정신이여, 자유로운 정신이여재간이여, 인간적 활동이여, 

신부를 절대 깨우지 마십시오! 


신부가 신음하고, 두려움에 떨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도록 내버려두십시오! 


신랑이 신부를 속이고 있고 변장하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다. 


신부는 꿈을 꾸고 있으며, 

꿈속에서의 그녀의 고통은 밤과 잠으로부터 생겨납니다. 


그러나 신부가 잠을 자도록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신랑이 이 사랑하는 영혼 안에서 일하도록, 

그 자신만이 홀로 그려내고 

표현할 줄 아는 것을 그녀 안에 나타내 보이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신랑으로 하여금 

이 겉모습에 뒤이어 나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때가 되면 신랑이 알아서 신부를 깨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벤야민을 울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요셉의 하인들이여, 

이 비밀을 이 막내아우에게 털어놓지 마십시오¹² (창세기 37~45장).!


요셉은 벤야민을 속이고, 

벤야민의 모든 통찰력과 재간이 이 속임수를 알아채지 못하자, 

그와 그의 형제들은 치유할 길 없는 고통 속에 잠기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셉의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엾은 형제들은 거기에서 

어찌할 도리 없는 재앙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요셉이 모든 것을 치유할 것입니다. 


그 자신이 직접 그들을 깨울 것이며, 

그들은, 그들이 세상에서 결코 맛본 적이 없는 

가장 현실적인 실재적인 기쁨거리 속에서 

그렇게 많은 해악과 절망을 보게 만드는 그의 지혜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p.129


   예수님과 마리아, 다비드 같은 이들, 

그리고 예언자들이나 사도들과 같은 상태에 있어보지 못한 신부에게 

평화와 무감각을 바라는 무지하고 경험 없는 정적주의자들이여, 

그대들은 신적 활동의 위력, 

즉 그 범위와 힘과 다양성에 대해, 

그리고 순수 신앙에 결부된 그림자들의 효력에 대해 

어찌 이리 아는 게 별로 없습니까! 


그대들은 어찌하여 이 깊은 밤 신부의 잠에 대해 이리도 모르십니까! 


성령에 의해 아가서에 기술된 놀라운 역사(役事)와 놀이들을 통해 

그대들의 교리가 틀렸다는 것이 얼마나 잘 입증되고 있습니까! 


성령의 모든 말씀이 그대들의 규범을 거짓이라 반박합니다. 



순수한 신앙의 상태는 순수한 십자가의 상태입니다. 


모든 것이 암울하고 모든 것이 고통스러운 그 상태는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어둡게 만들어버리는 밤입니다. 


영혼이 모든 것을 체념하고 하느님께서 맛보실 행복으로 만족한다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혼에게 그것은 

느끼고 깨닫게 되는 모든 것이 그야말로 오로지 고통일 뿐일 연옥으로서 

다가옵니다. 


그리고 모든 고통들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은 

자신 안에서 오로지 체념만을 발견한다는 것과, 

하느님의 평안 따윈 관심도 없고 

하느님의 평안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다고 여길 정도로 

자신의 평안만을 추구하는 매우 강한 경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상적 원칙, 모방 혹은 규범의 원칙과 같은 

객관적인 원칙들에 의해 행동하는 것과 

성령의 움직임이라는 원칙에 의해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영혼은 자기 눈앞에 이미 나있는 길을 보지 못한 채 떠밀려 갑니다. 

영혼은 자신이 보았던 길로도 자신이 책에서 읽었던 길로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고유 활동은 그런 식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고유 활동은 

달리 어떻게 나아갈 수도 없고, 어떤 위험도 무릅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적 활동은 늘 새롭고, 

절대로 자신의 옛 발자취를 따라 걷지 아니하며, 

항상 새로운 길을 개척합니다. 



신적 활동이 이끄는 영혼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오솔길은 책 속에도 그들의 사색 속에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적 활동이 계속해서 그들에게 그 길들을 열어주고,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충동에 따라 그 길로 들어섭니다. 


그 누구의 의견도 구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도 드러내기를 원치 않는 안내자가, 

자신의 천재성에 의해, 

한밤중에, 

길도 나있지 않은 들판을 가로 질러 우리를 미지의 나라로 인도할 때, 

그에게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것 이외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어떤 다른 방도가 있습니까? 


p.130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바라보고, 

행인들에게 묻고, 지도를 찾아보고, 여행자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리가 그를 신뢰하길 바라는 안내자의 계획과, 이른바 안내자의 변덕은 

이 모든 것에 반(反)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혼의 불안과 불신을 마구 뒤섞어 놓는 데에 기쁨을 느낄 것이고, 

영혼이 그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가 우리를 잘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앙도 내맡김도 아닐 것입니다. 



신적 활동은 본질적으로 선하며, 

변경되거나 통제되기를 전혀 원치 않습니다. 


이 활동은 천지 창조 때부터 시작되었고, 

바로 그 순간부터 새로운 증거들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신적 활동은 자신의 작용에 조금도 한계를 두지 않으며, 

그 풍요로움은 전혀 고갈되지 않습니다. 


그 활동은 어제 그러한 일을 했고, 오늘 이러한 일을 합니다. 


그것은 모든 순간에 적용되는 동일한 활동으로서 

늘 새로운 효과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이 활동은 또한 영원히 전개될 것입니다. 



신적 활동은 다양한 사상의 토대 위에 

아벨과 같은 사람들, 노아와 같은 사람들,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들을 

배출했습니다. 


이사악은 독창적인 존재가 될 것이고, 

야곱은 이사악을 본뜨지 않을 것이며, 

요셉 또한 야곱의 모방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조상들 중에서 자신과 닮은 사람을 전혀 보지 못했고, 

다윗과 예언자들 모두 이스라엘의 성조들과는 다른 인물들이었습니다. 


세례자 성 요한은 이들 모두를 능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맏아들이십니다. 


사도들은 그분의 업적을 모방함으로써 보다는 

그분이 보낸 성령의 작용에 의해 더 많은 활약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자신 스스로를 모방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가르침을 조금도 문자 그대로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은 항상 그분의 거룩한 영혼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영혼은 늘 성령의 숨결에 자신을 맡기고 있었으므로, 

뒤이어 올 순간에 어떤 형체를 부여하기 위해 지나가버린 순간을 

전혀 참고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은총의 숨결은 

성삼위일체가 자신의 정복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지혜 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영원한 진리들을 본보기로 삼아 

그분의 모든 순간을 만들어 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은 매 순간 명령들을 받고 

그 명령들을 바깥 세상에 알립니다. 


복음서는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이 진리들로부터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영원히 살아계시고 늘 역사하시는 동일하신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영혼들 안에 살아계시면서 여전히 새로운 일들을 행하고 계십니다. 


p.131  


   여러분은 복음서의 가르침대로 살기를 바라십니까?


하느님의 활동에 전적으로 순전히 내맡기는 삶을 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삶의 원천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여전히 살아 계시는데, 

이는 당신의 삶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삶을 여전히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 입니다. 


그분께서 하신 일은 끝났고, 

해야 할 남겨진 일은 매 순간 행해지고 있습니다. 


각 성인은 이 거룩한 삶의 한 부분을 부여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일하신 분이시지만, 

모든 사람들 안에서 다르게 나타나십니다. 



각 성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며, 그것은 새로운 복음입니다. 

신랑의 두 볼은 향기로운 꽃들로 뒤덮인 화단과 꽃밭에 비유됩니다¹² 

(아가 5.13.)


그리고 신적 활동은 꽃밭을 놀라우리만치 다채롭게 꾸미는 정원사입니다. 

이 꽃밭은 다른 어떤 꽃밭과도 닮지 않았습니다. 


이 꽃밭에 있는 모든 꽃들 중에는 

서로 닮아 보인다거나 같은 부류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꽃 두 개가 없습니다. 


그것들의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 모두 정원사가 하는 일에 자신들을 온전히 내맡겨, 

주인인 그가 자기 좋을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고, 

자신들은 자신의 본성과 처지에 알맞은 일을 행하는 데에 

만족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가만히 놔두고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를 수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고 그것이 바로 보편 성경이며 관습법입니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모든 신의 도구들의 쉽고도 분명한 고유 활동입니다. 


이것이 내맡김의 유일한 비밀입니다

그러나 비밀이 아닌 비밀이고, 기술(技術)이 아닌 기술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곧게 뻗은 길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내맡김을 요구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에 대해 분명히 설명해주셨으며, 

이것을 매우 이해하기 쉽고 매우 단순하게 만드셨습니다. 



순수한 신앙의 길에 내포된 어둠의 요소는, 

영혼이 그 길 위에서 실천해야 하는 일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하여 남겨두신 일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수행해야 하는 일보다 더 이해하기 쉬운 것도, 

더 광채를 발하는 것도 없습니다. 



신비로움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손수 행하시는 일에만 존재합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변화시키는데 필요한 것이 

너무나 분명하고 너무나 쉬워서 

아무리 교양 없는 자라 할지라도, 

성품성사를 성체를 받으면, 이 성사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비 중 신비로서,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숨겨져 있고 

너무 모호하며 너무 불가사의한 까닭에, 

우리가 더 깨어있고 더 영적일수록 

그것을 믿기 위해 더욱더 큰 신앙이 필요합니다. 


p.132


순수한 신앙의 길은 이와 유사한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의 효과는 

매 순간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게 바로 가장 고결하고, 가장 신비주의적이며, 가장 복된 일입니다. 


그것은 생각과 말과 글의 고갈되지 않는 자산이며, 

경이로운 일들의 조합(組合)이자 원천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놀라운 효과를 낳기 위해 무엇이 필요합니까?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두고 

하느님께서 당신 심사(心思)에 따라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든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영성 생활에서 이보다 더 용이한 일이 없고, 

또 이것처럼 모든 사람들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이 어두운 길은 참으로 경이로운 길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 영혼은 대단한 신앙을 필요로 합니다. 


“보지도 못하는 것을 믿어야만 하다니! 

우리가 읽고 봤던 모든 것은 전혀 그게 아니야, 

이건 완전 새로운 것들이야! 

예언자들은 성인이었는데, 이 예수는 마술사야¹² (마태오 27.63.)!”라고 

이성이 항시 되풀이해서 말할 것이기에 

그만큼 그 길에서의 모든 것은 더 의심스럽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그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아! 그들의 본(本)을 따라 분개하는 영혼이여, 

그대에게는 얼마나 신앙이 부족합니까!




   태초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우리 삶의 매 순간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십시다.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흘러갈 시간은 단 하루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에도 살아 계셨고 아직도 살아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결코 끝나지 않을 그러한 삶을 당신 자신 안에서 시작하셨고, 

당신의 성인들 안에서 계속 살아가고 계십니다. 


오, 모든 시대를 품음과 동시에 넘어서서, 

모든 순간 새롭게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삶이여! 


만일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께 대해 기록할 수도 있는 기록할 수 있는 모든 것, 

즉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 말씀하신 것, 

그리고 그분 자신의 삶 그 자체에 대해 기록한 기록할 모든 것을 

자신 안에 담을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만일 복음이 우리에게 그분 삶의 몇 가지 소소한 특성들만을 

그저 간략하게 묘사해보인 것일 뿐이라면, 

만일 그분의 유아기가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 반면 매우 풍요롭다면, 

그리고 모든 시대는, 엄밀히 말해서, 

오로지 신적 활동의 역사(歷史)에 지나지 않는 까닭에, 

한없이 경이로운 일들을 일으키시고 또 영원히 일으키실 

예수님의 이 신비주의적 삶의 모든 순간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복음서를 써야 하는 것입니까? 


성령께서는 이 장구한 시간 가운데 몇 순간들을 

이론의 여지없는 무류(無謬)무오류의 글자로 표시해 두도록 했고, 

성경 안에 이 대양의 몇몇 물방울을 그러모았으며, 주워 모았으며

어떤 비밀스럽고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나타나게 하셨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p.133


우리는 인류의 자손들이 마구 뒤섞여 있는 와중에, 

이 맏아들의 태생, 혈통, 가계를 구별지어주는 경로와 갈래들을 봅니다. 


구약성서 전체는 

이 거룩한 하느님 사업의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길들 중 

하나의 작은 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예수님께 다다르는데 필요한 것만 들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당신 지혜의 보고(寶庫) 속에 숨겨 두셨습니다. 


그리고 신적 활동이라는 이 거대한 전체 대양으로부터 

단지 하나의 가는 물줄기만 나타나게 하셨는데, 

이 물줄기는 예수님께 도달한 다음 사도들 안으로 흘러들어갔다가 

묵시록 안에 깊이 잠겨버렸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거룩한 영혼들 안에서 영위하는 

모든 신비적 삶으로 구성되는 이 신적 활동의 나머지 이야기는 

단지 우리 신앙의 대상으로 남을 뿐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거룩한 활동에 대해 쓰여진 모든 이야기는 

오로지 단지분명할 분명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성령께서는 

오로지 우리의 마음속에만 복음을 적어 내려가고 계십니다. 


성인들의 모든 행위들과 모든 순간들은 성령이 써내려가는 복음입니다. 


거룩한 영혼들은 종이이며, 

그들의 고통과 그들의 행위들은 먹물입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활동이라는 펜을 사용하여 

살아있는 복음을 써 내려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복음이 

이 삶이라는 인쇄기에서 빠져 나와 출판이 되는 영광의 날이 되어야만 

비로소 그것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 성령께서 현재 써내려가고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여! 

멋진 책이여! 


이 책은, 즉 거룩한 영혼들은, 아직 인쇄 중에 있습니다. 


단 하루도 그 책의 활자가 배열되지 않거나, 

거기에 먹물이 묻혀지지 않거나, 책장들이 인쇄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의 밤 상태에 있습니다. 


종이는 먹물보다 더 검고, 글자들은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세상의 언어이고, 

우리는 거기에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복음을 천국에 가서만 읽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생명을 볼 수 있다면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근원 안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만일 우리가 

신적 활동이 이와 정반대되는 결말을 향하여 사물들을 움직이게 하고, 

그것들을 뒤섞고, 그것들을 조합하고, 그것들을 대립시키고, 

그것들을 밀어 붙이고 있는 와중에도, 

모든 사물들 안에서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생명을 볼 수 있다면, 

왜냐하면 신적 활동이 

이와 정반대되는 결말을 향하여 사물들을 움직이게 하고, 

그것들을 뒤섞고, 그것들을 조합하고, 그것들을 대립시키고, 

그것들을 밀어 붙이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모든 것이 이 거룩한 사업 안에서 

자신의 이유와 자신의 척도와 자신의 중요성과 자신의 관련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p.134


그런데 책에 나온 글자들은 알지도 못하는 것이고, 

글자 수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으며, 

글자들이 뒤집혀 있는데다가, 

먹물이 또 그 글자들을 뒤덮고 있는 이런 책을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스물네 자의 알파벳만으로도 

충분히 다양한 책들을 무한히 써내려갈 수 있고, 

게다가 그 모든 책들이 각 장르에서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이 문자들의 조합이 불가사의하게 다가온다면, 

그 누가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주 안에서 행하시는 일을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각각의 모든 글자가 나름대로 자신만의 특별한 형상을 띠고 있고, 

자신의 작은 모양 안에 심오한 신비들을 담고 있는 그런 방대한 책을 

그 누가 읽을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비는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것으로, 

그것은 신앙의 대상입니다. 


신앙은 신비의 근원에 의해서만 신비의 진실함과 선함을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이 신비들의 온갖 외양은 

오로지 신비들을 숨기고 신비들을 봉해버리는 데에만, 

그리고 단지 이성만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데에만 

쓰일 만큼, 

신비들 그 자체가 너무나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령이여, 

제게 이 생명의 책 안에 있는 것을 읽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며, 

마치 단순한 아이처럼, 제가 볼 수 없는 것을 믿고 싶습니다. 


제게는 저의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분께서 그것을 말씀하시고, 강조하시고, 

이 글자를 이런 방식으로 배열하시고, 

당신 자신을 이렇게 이해시키는 것으로 족합니다. 


저는 그분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분이 하시는 말씀에서 

무슨 확실한 이유나 어김없는 진리 따위를 전혀 찾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 그분께서 믿는 모든 것이 진리입니다. 


그분께서는 문자들이 함께 모여 한 단어를 만들어내기를, 

또 이러저러한 수의 문자들이 모여 또 다른 단어를 만들어내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단어에 셋, 또는 여섯 개의 문자만 들어 있다면, 

이는 그것만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그 필요한 문자 수보다 적은 수로 만들어진 단어는 

잘못된 의미를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계시는 그분만이 

문자들을 조합하여 그 생각들을 적어나갈 수 있으십니다

적어 나가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뭔가를 뜻하고, 또 모든 것은 완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줄은 여기에서 끝이 나야 하기 때문에 바로 여기에서 끝이 나게 되며, 

문장에는 쉼표 하나 빠지지 않고, 마침표 하나 쓸데없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지금 저는 이렇게 믿고 있지만, 

영광의 날에 이르러 제게 그토록 많은 신비가 밝히 드러나게 되면, 

저는 제가 그저 어렴풋하게만 이해하고 있는 것을, 

그리고 제게 너무 얽히고설켜 섥혀 보이고, 너무 불분명하고, 

너무나 이치에도 맞지 않고 일관성도 없으며, 

너무나 상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마침내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p.135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제가 발견하게 될 아름다움과 

질서와 이성과 지혜와 이해할 수 없는 경이로움으로 

저를 언제까지나 매료하고 매혹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은 오로지 헛된 것이고 거짓입니다. 


인간사의 진리는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생각과 우리들의 환상 사이에 어찌 이리도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오로지 그림자이고 허울이며 신앙의 신비일 뿐이라고 

끊임없이 주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는 그저 수수께끼에 불과한 사태의 자연적 흐름에 따라 

늘 인간적으로 처신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눈을 들어 만물의 원리와, 근원과,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신 

미치광이처럼 늘 함정에 빠집니다. 


만물의 원리, 근원, 기원인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다른 이름과 다른 자질들을 지니고 있고, 

모든 것이 초자연적이고 숭고하고 성성을 띠며,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의 일부를 이루고, 

모든 것이 천상의 예루살렘¹² (묵시록 3.12 참조.)을 구성하는 돌이 되며, 

모든 것이 이 경이로운 건축물 안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가게 만드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느끼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겉모습을 무시하고 그 모습을 꿰뚫고 나아가, 

하느님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만을 보고 

늘 하느님만으로 살아가는 그런 믿음으로 제대로 걸어가지 못하는 까닭에, 

미치광이들처럼 길을 잃고 헤매게 되는 그 숱한 어둠과 이미지의 미로 속에서 

우리를 그토록 안전하게 인도해주었던 그 신앙의 빛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믿음은 시대의 빛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진리를 보지 않고도 진리에 도달하며, 

믿음만이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만지며, 

믿음만이 피상적인 것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을 봄으로써 

마치 이 세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온 세상을 바라봅니다. 


믿음은 바로 보고(寶庫)를 여는 열쇠이고, 

지하¹³ (묵시록 9.1, 20.1 참조.)와 

하느님의 지혜를 여는 열쇠¹³¹ (루카 11.52 참조.)입니다. 


믿음은 모든 피조물들로 하여금 거짓을 인정하게 합니다.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계시하시고, 

모든 것들 안에서 당신을 시현하시며, 

모든 것들을 신격화하십니다. 


p.136


믿음은 장막을 벗기고 영원한 진리를 드러냅니다. 


한 영혼이 믿음이라는 이 예지를 부여받으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우주만물은 하느님의 손가락이 

영혼의 눈앞에서 끊임없이 써내려가는 살아있는 글입니다. 


흘러가는 모든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룩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구술한 거룩한 책들은 

영혼에게 단지 신성한 가르침의 시작에 불과하며, 

지금 일어나고 있으나 아직 전혀 쓰여지지 않은 모든 일들은 

성경의 속편(續篇)입니다. 


그리고 이미 쓰여진 것은 아직 쓰여지지 않은 것에 대한 주석이며, 

믿음은 쓰여진 것을 가지고 아직 쓰여지지 않은 것을 판단합니다. 


이 개요서는 

성경에 응축된 형태로 나타나는 하느님의 충만하신 활동에 대한 서문입니다. 


영혼은 하느님의 광대무변한 전 활동 영역 안에 담겨진 신비들을 

통찰할 수 있게 해주는 비밀들을 바로 이 개요서에서 발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