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90 pp.461-464 제 3 편 제12 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계속 ) 제 4 절 평화 ②

은가루리나 2019. 10. 12. 14:47





제 3 편 제13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계속 ) 제 1 절 평화 ②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165 추천 0 2013.09.10. 06:32





제 1 절 평 화 ②




그러므로 평화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그 한가지는 감각적인, 평온한, 감미에 충만된 것이다.

그런 평화는 우리 자신에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필요하지도 않으며, 

아니, 오히려 때로는 은밀히 자애심을 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거의 아무런 느낌도 수반하지 않는 다른 평화가 있다.


p.461


그것은 영혼의 깊숙한 곳에 있어, 정신의 최첨단에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윤택함도 맛도 없으며,

사람은 가장 혹심한 고난 가운데 있어서도 이것을 가질 수 있다.


순수하게 영적인 것이므로,

이 평화는 자애심을 품을 위험이 보다 적으며,

은총에 보다 넓은 활동의 범위를 주는 것이다.



이 평화는,

천주께서 당신의 영역(領域)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에 머무르시고,

마음 안에 있어 

놀라운 그리고 지극히 은밀한 거의 느끼지 않는 일을 성취하신다.


이런 업은 결과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즉 그 결과는 이 평화에서 생기는 풍부한 은혜의 영향 밑에,

사람은 짓궂은 건조의 한복판에서도,

유혹, 심한 혼란, 전연 예기치 못했던 고뇌 안에서도,

확고부동하게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마음 안에 그 윤택이 없는 평화, 

시련에도 산란되지 않는 고요함을 발견한다면, 

오직 천주를 찬미해야 한다.


이 평화는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데 충분한 것,

영적 진보에 오직 필요한 것이므로 

귀중한 은혜로서 그것을 간직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서서히 이것을 깊게 함으로써,

후일 그것은 드디어 우리의 최대의 매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많은 싸움과 승리로써 이것을 얻을 수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위탁」2편 4장의 3, 10)




만일 천주께서 본심과 악마가 그 유혹으로써 우리를 피로시키고,

시련과 당황이 사방팔방에서 닥쳐오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결코 평화를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관대한 영혼을 혼란시키고 약화시키며,

낙담케 하는 생각이나 감정은 천주로부터의 것이 아니다.


승리를 위하여 필요한 평온함과 힘을 빼앗으려는 것은 악마다.


역경도, 정욕의 반역까지도 

이것을 천주에게서 멀어져 있는 증거라고 간주하는 것 같은

오류에 빠져서는 안된다.


p.462


의지만 천주께 충실하다면 

천주께서는 항상 우리의 곁에 계시며, 

우리를 고치시고, 보다 착한 이로 하시려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활동하신다.


우리를 이탈시키고, 낮추시는 동안에도 

천주께서는 그 보이지 않는 힘으로써 우리를 지탱하시고,

그리고 만일 우리가 기도하고 싸운다면, 

끝까지 우리를 도우신다.



이런 고통이나 이런 싸움의 유익함을 충분히 깨닫는 이는,

그것에 마음을 괴롭히기는 커녕 

끊임없이 천주께 감사를 바칠 것이다.


「사람은 치열한 시련을 겪은 뒤에 비로소 

천주의 자녀로서의 위안을 맛볼 수 있다.


평화는 전투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고, 

승리를 거둔 후에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위탁」2편 6장의 2,3)




그러므로 우선 자신에 대한 승리를 획득하여야 한다.


성녀 대「데레사」의 비유에 의하면,

유혹의 가장 과도하게 흥분한 정욕은 

성(城) 가운데 뜰을 교란시키는 더러운 짐승,

독이 있는 파충류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을 바라보려고 서 있어서는 안된다.


즉시 도피하여, 

보다 높은 곳, 천주께서 계시는 성소(聖所)에 오르자.


그리고 거기서 절실한 애원으로써, 

사랑과 신뢰에 가득 찬 마음을 천주께 피력하자.


이런 현명한 마음의 전향(轉向)은 

흔히 위에 말한 이런 괴물을 잊게 하여,

항상 은총을 내리게 하고, 승리를 학보케 한다.




그리고, 

유혹, 질병, 건조, 간난, 굴욕, 모욕, 박해와 같은 모든 시련 가운데 있어

평화를 간직하는 일대 비결은 

천주의 뜻에 겸손과 사랑으로써 순종하는 것이다.



「드.고사드」신부는 말하고 있다.


「아 나는 얼마나 그대가 보다 깊은 신뢰를 천주께 바쳐, 

그 현명하고도 거룩한 섭리에

더욱 더 깊이 자신을 맡기기를 바라고 있는지!


인생에 있어서의 극히 사소한 사건이라도, 

그것은 천주의 섭리애 의해서 안배되는 것이며,

섭리는 당신께 온전히 신뢰하고 

인자한 아버지로서의 배려에 남김 없이 자신을 맡기는 이를 위하여, 

그런 것을 항상 유익한 것으로 바꾸신다.


p.463


아, 천주여,

이 신뢰와 이 완전한 위탁은 

얼마나 마음 안에 깊은 평화를 초래하는 것이옵니까!


또한 얼마나 그것은

불안과 비애를 초래하는 끝없는 허다한 우려에서

우리를 구하는 것이옵니까!


그러나, 우리는 단번에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그리고 거의 느끼지 않을 정도의 진보를 거듭하여,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 효애에 충만된 위탁을 몹시 열망하고,


천주께 기도하며, 또한 실천하여야 한다.


실천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포착하여, 항상 다음과 같이 기도하도록 힘쓰자.



『천주여, 그렇도소이다.

당신은 그렇게 원하시고, 그렇게 허락하셨도다.


그러므로 나 또한 당신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것을 바라나이다.

바라건대, 나의 나약함을 도우소서』라고.


그리고 이것은 모두 

유순하게, 그리고 정신의 첨단에 있어 행하여야 한다.


비록 마음 안에 반역과 혐오를 느낄지라도 

그것을 조금도 개의(介意)치 않고, 

인내 깊이 견디며, 희생을 바칠 기회로 삼자.」(「독서」2편 5.15)




나아가 우리는 십자가를 사랑할 정도까지 도달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왜냐 하면, 십자가를 우리의 힘에 응하여 만드신 것은 천주시며,

지금도 아직 날마다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같이,


천주로부터의 십자가를 모두, 

어디까지라도 견고하게, 복종과 겸손으로써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드디어 천주께서 원하실 때, 영혼의 휴식을 발견하리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으심 이래,

십자가에 삼투하고 있는 

온전히 신적(神的)인 도유(塗油)를 느끼고 맛보기 위하여

은총에 대한 온순함에 의해서 맞갖는 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맛보기에 이르리라.(「동서」6.10)


p.464


결국,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음에도,

가장 겸손한 복종에 자신을 맡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윤택이 없는 평화, 허다한 시련 가운데 있는 평화 밖에 찾아낼 수 없드라도


그것에 관해서도 또한, 다른 모든 것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에 맡겨야 한다.




천주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도 잘 알으신다.


우리가 경계하고 두려워 해야 할 유일한 것,

그것은 천주의 의지보다도 자의(自意)를 앞세우는 것이다.



「이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천주께서 바라시는대로의 것을,

모든 때에 모든 일에 관해서, 조금도 어김 없이 바라야 한다.


이것이 완덕에 도달하는 가장 안전한, 가장 가까운 길이며, 

그리고 감히 말하자면, 유일한 완덕에의 길이다.


이것 이외의 모든 길에는 미혹과 오만, 자애심이 섞여 들어갈 염려가 있다.」

(「위탁」2편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