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제7장] 12.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은가루리나 2020. 2. 11. 21:11



12.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나는 이교 철학자들과 구약과 신약의 현자들이 쓴 책들을 많이 읽어보았고, 

인간이 하느님 안에 있었던 때, 

하느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시기 전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었던 때와 같이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결합되고 그분을 가장 잘 닮기 위해서는 

어떤 덕이 제일 좋은가를 부지런히, 열심히 찾아보았다. 


내 능력을 다하여 성서를 탐구한 결과, 

나는 모든 피조물에서의 절대적 초탈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 주님은 마르타에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평화롭고 순수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초탈뿐이라는 뜻이다.



나는 초탈을 사랑보다 더 높게 본다. 


(그 이유는) 첫째, 사랑은 기껏해야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게 할 뿐이다. 

그런데,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도록 하는 편이 더 낫다. 


나의 영원한 행복은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데 달려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더 쉽게 당신 자신을 나에게 결합시키며, 

내가 하느님과 통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쉽게 나와 통교하신다. 


초탈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나에게 오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자기 고유의 본래 상태에 있기를 원한다. 

하느님 고유의 본래의 상태는 하나 됨과 순수함이고, 이것은 초탈에서 온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초탈을 이룬 영혼에게 자신을 주시게 되어 있다.



둘째로 내가 초탈을 사랑보다 위에 두는 이유는 

사랑이 나로 하여금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고통을 받게 하는 반면 

초탈은 내가 하느님만을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을 위하여 모든 고통을 받는 것보다 하느님만을 받는 것이 훨씬 낫다.


고통을 받을 때는 그 고통의 근원인 피조물과 관계하게 되는 반면, 

초탈은 피조물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초탈은 하느님 말고는 어느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려면 어떤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초탈은 무에 가깝기 때문에, 

탈된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하느님 밖에 없다. 


그분은 단순하고 미묘하시기 때문에 고독한 영혼 안에 머무실 수 있다. 

그러므로 초탈은 하느님만을 받아들인다.



스승들은 겸손을 다른 모든 덕보다도 높이 칭송한다. 

그러나 나는 초탈을 겸손보다 위에 두는데, 그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초탈이 없는 겸손은 있을 수 있지만, 완전한 겸손 없이는 완전한 초탈이 불가능하다. 


완전한 겸손은 자신을 무로 만들지만, 

초탈은 무에 아주 가깝기 때문에 무와 절대적 초탈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겸손이 없이는 완전한 초탈도 없다. 

또한 두 가지 덕은 한 가지 덕보다 더 낫다.


내가 초탈을 겸손보다 더 높게 보는 둘째 이유는, 

겸손은 피조물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자신을 떠나 피조물들에게 가는 것인 데 비해 

초탈은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예언자가 말했듯이 왕의 딸의 온갖 영광은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완전한 초탈은 피조물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 않으며, 

높은 곳에 있는 것에도 낮은 곳에 있는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 


초탈은 아래에 있으려는 마음도 위에 있으려는 마음도 갖지 않고, 

오직 자신을 정복하여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며, 

어떤 피조물에 대해서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고, 

오직 그 자체로서 존재하기만을 바랄 뿐 이렇게도 저렇게도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다. 혹은 저런 사람이다'라고 불리길 원하는 사람은 어떤 무엇이 되지만, 

초탈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완전한 무다. 초탈은 사물들을 방해받지 않은 채 그대로 둔다.


초탈은 마치 큰 산이 부드러운 바람에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기쁨이나 슬픔, 영광이나 불명예에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움직임이 없는 초탈은 인간을 최고로 하느님과 같아지게 한다. 

하느님이 하느님이신 것은 그분이 움직임이 없이 초탈을 지녔기 때문이며, 

그분의 순수성과 단순성과 불변성은 이 초탈에서 비롯된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한껏 닮을 수 있는 만큼 인간이 하느님과 같아지고자 한다면 

이는 초탈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