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6회 머튼의 생애에서 영적인 변화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14. 16:43



+찬미예수님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입니다. 여러분들과 지금 토마스 머튼의 긴 인생이야기를 비록 짧지만 짧게 짧게 핵심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 어느덧 이제 생애 이야기에서의 마지막 부분 이야기를, 또 너무도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한 이 부분, 그리고 새로운 종교간 대화를 위한 씨앗이 되기도 했던 이 중요한 시기를 오늘 여러분들과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이 시간 후반부에는 토마스 머튼의 생애 전체를 한번 더 재조명해서 제가 나름대로 토마스 머튼이 어떻게 이 인생 여정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찾게 되었는지를 조금 더 핵심적인 부분, 또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서 전체적인 정리하는 시간들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지난 시간 M과의 사랑이야기를 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는데 그 이후의 1968년에 10월부터 토마스 머튼은 아시아로 여행을 하게 됩니다. 인도, 스리랑카, 이제 방콕에서 세상을 떠나는데, 방콕까지 여행을 하게 되는데 초기에는 토마스 머튼은 일본도 여행을 하기를 원했었습니다. 그리고 예전부터 아시아에 가고 싶은 열망이 1960년대 초부터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빠스님께서 토마스 머튼이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수도승이 그 먼 곳을 여행한다는 거에 대해서 반대를 했고 해서 자기 원의가 이루어지질 못했습니다.


근데 마침 1968년에 이제 아빠스님께서 사임을 하시고 새로운 신부님이 아빠스로 선출되었는데 그 아빠스님께서는 토마스 머튼이 1968년 10월부터 해서 두 달정도 아시아를 여행할 수 있도록 허락을 했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방콕이었습니다. 방콕에서 처음으로 아시아에 있는 베네딕도 시토회 수도승들이 종교간 대화를 위한 모임을 처음으로 개최를 했는데 여기에 토마스 머튼이 연설 해주는, 강의를 해주는 분으로 초대를 했고, 토마스 머튼은 여기에 부응을 해서 토마스 머튼이 막시즘(Marxism) 마르크스 주의와 수도생활에 대한 것을 강의를 하기로 약속을 했고 또 그 강의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해서 갔지만 기왕 간 김에 여러 인도, 스리랑카, 방콕을 둘러보면서 아시아 여러 종교들을 체험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인도였습니다. 인도에서 여러 티벳 불교 수도승들을 만났는데 그 당시에는 티벳 불교가 박해를 받아서 이제 인도로 망명을 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티벳 불교가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 티벳 불교의 여러 수도승님, 린포체, 라마들, 또 심지어 달라이라마도 세 차례 만나기도 하고 또 가장 인상깊었던 린포체와의 만남은 '샬트랄 린포체'(Chatral Rinpoche) 와의 만남을 가장 토마스 머튼은 인상깊었다고 합니다.


'린포체'라는 말은 티벳 불교에서 아주 고행을 하는 또 관상적으로 뛰어난 스승들을 가르키는 그런 명칭입니다. 그래서 이분들은 물론 결혼생활을 하기도 한다고 하지만 일생을 우리식으로 이야기하면 그 은둔처에서 피정하며 보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그분들의 삶의 그 공간을 직접 방문하고, 그곳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그곳 수도승들의 삶을, 또 그곳 수도자들의 영성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아시아를 떠날 때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표현이고 또 우리가 다른 종교를 만날 때 필요한 자세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시아로 여행을 떠날 때 어떤 자료나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은 깨달음을 얻은 수도승이 되기 위해서 저는 아시아에 왔습니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굉장히 겸손하고 또 굉장히, 보다 더 깊은 수도승이 되기 위해서 깨달음을 얻은 수도승이 되기 위해서 아시아로 간다. 정말 토마스 머튼다운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튼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아시아 여행을 시작하는데 이 아시아 여행중에 토마스 머튼이 많은 티벳 불자들 뿐만 아니라 소승 불교의 불자들, 그리고 또 무슬림들도 만나구요 또 여러 종교에 관계되는 분들을 만나는데 힌두교 교도들도 만나구요, 근데 이런 만남을 끝내고 난 다음에 토마스 머튼이 다르질링(Darjeeling)에서 피정을 했습니다. 다르질링이라는 곳에 피정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칸첸중가(Kanchenjunga)라는 높은 산에 피정의 집이 펼쳐져 있었던가 봅니다. 그 산은 제가 찾아보니까 굉장히 높은 산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세계에서 3번째로 가장 높은 산이라고 그렇게 나와 있었습니다.



근데 그 산을 바라보면서 토마스 머튼이 이렇게 일기에 기록합니다. 'There is another side to the montain' '그 산에는 다른 측면이 있다.' 무슨말인가 하면 우리 눈에 보이는 산이었지만, '아! 내가 깨달았다. 그 산에 뒷면도 있다는 거, 보이지 않는 곳이 있다는 것을 내가 깨닫게 되었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굉장히 토마스 머튼에게는 아시아를 바라보면서 또 우리에게는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또다른 깨달음을 얻게 해줍니다.


사실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 또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 그 너머에 또다른 영역이 있는겁니다. 나중에 제가 영적인 성장 부분에 대해서, 그 부분이 올 때 좀 더 설명을 자세하게 드리겠지만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거죠. 토마스 머튼이 보는 그 높은 산, 그게 전부가 아니라 그 산너머에 뭐가 있다는 것은 또다른 영역이 있다는거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시아 종교, 또 우리 종교를 바라보면서 또 새로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토마스 머튼이 깨달은 것 같습니다. 이것을 우리 신앙생활에 비유해보자면 지금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 내가 알고 있는 하느님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또다른 우리가 믿고 있는 그 하느님이라는 산 이면에 또다른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영적인 성장이 일어난다는 거겠죠.



또한 토마스 머튼은 이 피정에서 또다른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표현했는데, 그 표현중의 하나는 '세 개의 문'에 대한 체험이었습니다. 굉장히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감동을 많이 받았었는데 토마스 머튼이 발견한 세 개의 문은 세 개이지만 하나의 문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이 세 개의 문은 뭐였냐하면 첫 번째는 비움의 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은 표시가 없는 문, 세 번째는 원의(wish)가 없는 문, 그런 문을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비움의 문, 표시가 없는 문, 그리고 원의가 없는 문.


토마스 머튼은 이 문에 대해서 세세하게 설명하면서 결국 이 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십니다. 우리가 신약성서를 읽어보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런 부분도 있지만 또 '나는 문이다.' 라는 표현도 요한복음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해서 들어갔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일치하게 되고 온전히 일치한 그 상태에서 모든 것이 비워지고 더이상 어떤 표시를 찾아 갈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가 종착지이기 때문에.  그리고 아무런 바램도 더이상 필요 없습니다. 이제는 나의 바램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충족되었기 때문에, 충만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고독 속의 명상>이라는 책에서 보면 ' 저는 더이상 갈망이 없기를 갈망합니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더이상 갈망이 없기를 갈망합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표현인데 여기에서는 이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이상 갈망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충만해졌기 때문에 아무런 바램이 없는 그 문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그런 의미이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의 만남을 통해서 오히려 토마스 머튼은 더 깊이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이 문으로 들어감으로써 더이상 바램도 없고 더이상 어떤 곳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는 완성된 문으로 들어갔다고 토마스 머튼이 깨달았다는 것을 당신의 일기에서 적고 있습니다.



또한 이 문의 비유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은 플룬나누와에서의 결정적인 깨달음에서 더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토마스 머튼이 그 스리랑카에 있는 불교 성지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여러불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냥 조그만한 불상이 아니라 실제로 가면 엄청나게 큰 형태입니다. 누워있는 불상도 있고 또 앉아있는 불상, 서 있는 불상도 있습니다. 혹시 이제 사진을 보시면 더 실제로 와 닿을겁니다. 그런데 토마스 머튼이 이 불상 앞에 서 있을 때 뭔가 깨달음이 왔습니다.


어떤 깨달음인가하면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뭔가가 이 불상들 앞에 있을 때 나를 끌어당겨서 내가 온전히 소멸되는, 내가 사라지는 그런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강력하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압도하는 그런 체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내면이 깨끗해지고 명료해지고 더이상 어떤 신비로움이라는 것을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명료해졌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표현을 씁니다. 'Everything is compassion, Everything is emptiness.' '모든 것이 자비이고 모든 것이 비움입니다.' 굉장히 불교적인 느낌이 들죠. 물론 불상앞에서 이런 체험을 하셨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비움이죠. 'kenosis', 자기 자신의 뜻을 온전히 비우셨기 때문에 오히려 더 충만해지셨고 온전히 그 비움으로 인해서 스스로를 낮추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 자신을 비움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죠.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그 영원한 생명을 자비로 받게 되었다는 겁니다. 오히려 불상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비움과 또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움을 체험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겁니다.  또한 어떤 이교의 부처님상 앞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어떤 성령의 바람, 성령의 불을 체험했다고도 볼 수 있을겁니다. 모든 것이 명료해졌고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 체험이 얼마나 강렬했고 또 얼마나 머튼을 새롭게 해 주었는지를 다시금 볼 수 있을겁니다.


그래서 머튼은 이 체험이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 불교와의 만남을 통해가지고, 플룬나누와에서의 어떤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또 새롭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체험에 대해서는 다른 영적인 체험과 비교하면서 마지막에 한 번더 정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플룬나누와에서의 이런 영적인 체험이후로 이제 방콕으로 떠나게 됩니다. 방콕에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막시즘, 마르크스 주의와 수도승 생활에 대한 강의를 거기에 참석한 남녀 수도승들에게, 또 신부님들에게 강의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내용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떤 막시즘처럼, 마르크스 주의처럼 어떤 시스템을 제도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식을 변화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60년대에 사회정의를 위해서 일을 했을 때 그때처럼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켜야 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고 이런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 가톨릭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불교도 결국은 인간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그 깨달음을 얻은 그  변화된 사람으로서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고 세상을 개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같은 취지에서 우리 종교인들끼리 서로 힘을 합쳐서 세상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가 깨어나야 된다는 것을 이 강연을 통해서, 연설을 통해서 강조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연설 마지막 부분은 ' I will disappear' 나는 사라질거다, 물론 콜라 한 잔 할거다. 이런 표현도 쓰셨는데 결국 그 말이 마치 예언적인 말처럼 우리 곁을 사라지게 되었는데 돌아와서 샤워하던 중에 전기감전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1968년 12월 10일, 토마스 머튼이 1941년 12월 10일 입회하던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27년간의 수도생활이 마감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시신은 베트남전에서 희생된 미국인들과 함께 수송기로 겟세마니 수도원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 다른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묻히게 됩니다. 토마스 머튼이 살았던 겟세마니 수도원은 관도 사치라고 해서 관을 쓰지 않고 그냥 시신 그대로 땅에 묻혔습니다.


제가 겟세마니 수도원에 세 번 방문했는데  두 번째 갔을 때 비로소 토마스 머튼의 무덤이 어딘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함께 했던 노렌죠 수사님이 저에게 알려주셔서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다른 수사님들보다 특별한 그런 아무런 표시가 없었습니다. 단지 묵주만 몇 개 걸려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토마스 머튼은 죽어서도 다른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묻혔고 평범한 수도승으로서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삶의 여정은 다른 수도승들과 좀 더 달랐습니다.


예언자였고 또 신비가로서 그분의 삶은 솔직하고 담백한 삶의 기록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에게 그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어떤 모델이 되었고, 또 그들의 삶을 스스로를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머튼은 그 많은 시간동안 함께했던 사람들 안에서 당신 스스로가 보여줬던 그 그리스도의 사랑이 열매가 되어서 많은 이들에게 전파되었고, 결국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적인 성장을 해 나아가는 좋은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많은 책들이 오늘날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토마스 머튼의 책은 여전히 오늘날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고, 또 오늘날 사람들은 여전히 그 글을 읽으면서 감동하고 있고, 또 나 스스로가 그 책을 통해서, 또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통해서 다시금 하느님을 바라보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새로운 영적인 여정을 걸어갈 수 있고  어떤 걸 배울 수 있고,  토마스 머튼의 이 생애에 있어서의 영적인 여정이 어떤 변화를 거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지금 이 시간 조금 더 체계적으로 간추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토마스 머튼의 삶의 여정은 지속적인 회개의 여정이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스스로가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제가 세례 받은 날까지 저의 삶의 이야기는 저희 회심에 대한 이야기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의 회심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회심은 전 삶의 과정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정점들과 계곡들의 연속이며, 마지막 계곡보다 각각의 새로운 계곡들은 더 높다는 점에서 대개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습니다.' 조금 표현이 복잡한데 제가 이것을 그림으로 한 번 표현을 해서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정점에서 또 다른 정점으로 올라간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은 여러개의 계곡, 다르게 말해서 산을 넘고 넘고 넘어서 이렇게 간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겠죠. 그리고 뭐 우리 각자가 토마스 머튼이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그래서 머튼이 세례를 받던 시점, 또 뭐 루이빌에서의 어떤 체험들, 또 플룬나누와에서 어떤 하느님을 깊이 깨닫게 만들어주는 새로운 차원의 하느님을 만나게 해주는 그런 과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겁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의 어떤 삶의 여정은 산을 넘고 넘고 넘어가는 그런 여정이었다.


왜냐하면 처음에 세례받고 수도생활 하면서 또 갈등을 많이했죠. 어떤 갈등이었죠? 기억나세요?  네, 그렇죠. 토마스 머튼이 관상가가 될건가 아니면 작가가 될건가에 대한 갈등, 전통적인 수도승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점점 깊이있게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지금까지 내가 느껴왔던 만나왔던 하느님과 또다른 하느님, 토마스 머튼이 체험한 그때의 하느님이 요만한 모습이었다면 또 새로운 하느님이 머튼에게 다가온거죠. 새로운 하느님의 모습이...



그래서 머튼은 당혹스러웠습니다. 이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십자가의 성요한은 이것을 어둔밤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해 나갑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하느님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생활해 나가고 믿고 있죠.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또다른 하느님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마치 벽에 부딪힌 것처럼 아무것도 안보이는 것처럼 어둔밤의 그런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벽에 부딪힌거죠. 그래도 토마스 머튼은 묵묵히 수도생활을 해 나갔고  또 계속해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회개의 삶을 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비체험을 통해서 혹은 하느님 은총의 선물로 그 다음단계로 껑충 뛰어올랐죠. 그래서 새로운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겁니다.


그리고 또 토마스 머튼은 또다른 어둠의 밤을 체험합니다. 부딪혔는데 아, 이런 하느님은 없었는데...예를 들면 플룬나누와에서의 그 불상앞에서 하느님의 영을 체험했다. 이것은 사실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죠? 지금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토마스 머튼은 이 어두운 밤과 같은 또 새로운 받아들이기 힘든 새로운 하느님을 받아들였고 또 새롭게 껑충 뛰어올라서  새로운 하느님을 또 체험하게 된거죠. 이런 지속적인 여정의 삶이 바로 토마스 머튼의 하느님 체험의 여정이었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그런데 이거는 우리의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을 때, 혹은 영적인 체험을 했을 때, 하느님이 저 멀리, 더 가까이에 보입니다. 하느님의 빛이 느껴지는거죠. 그렇지만 그 다음 단계로 오르기 위해서는 골짜기가 필요합니다 골짜기가. 그래서 이 골짜기에서 산에 가리워서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거죠. 하느님이 마치 안 계신것 같고, 왜 우리 집안에 이런 어려움이, 왜 우리 삶에 이런 고통이 다가오는지 왜 이런 시련이 다가오는지,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 없을텐데. 뭐 그런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을 하기도 하고 또 불행한 현실에 대해서 하느님께 기도하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는 그런 모습들에 대해서 또 하느님께 원망을 하기도 하고,  뭐 그런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묵묵히 또 하느님을 믿고 따랐을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업고 이 정상에 올랐음을 다시금 체험하는, 하느님의 깊은 체험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또 새롭게 하느님을 더 충만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요때 느꼈던 하느님하고는 다른 더 충만한 하느님을 맛보게 되고 또 느끼게 됩니다. 아, 하느님이 더 큰 섭리를 가지고 우리를 돌봐주고 계셨구나, 이 고통 너머에 또다른 축복을 가지고 계셨구나를 깨닫게 되는거죠. 그때 이제 나보다 우리 하느님이, 우리 인간보다 하느님이 더 크신 분이시라는 것을, 이사야 예언자가 58장에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보다 하느님의 생각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거죠.


그렇지만 또 그 다음의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또다른 골짜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골짜기를 통해서 우리는 또 어두움의 밤이라는 체험을 하겠지만, 하지마는 그분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묵묵히 우리의 길을, 우리의 여정을 걸어갔을 때 우리는 또 그다음 단계의 산에 오르게 되고 그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또 새로운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는겁니다.


이 여정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또 끝이 있는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마지막까지 알 수 있는 분이 아니고 또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해서 마지막까지 알 수는 없지만 계속해서 우리가 이 여정을 걸어갈 때 더 깊이있게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고 또 이 길위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스스로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쟎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 길위에 있으면서 하느님을 자주 맛들이고 자주 체험하고 맛보고 나아갈 때 이미 이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거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도 끊임없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안에 계십니다.

이미 기도나 관상생활 그리고 영적인 여정은 이미 계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와 계신 그분을 알아뵙지 못합니다 아직은 우리가 영적인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아직 마음을 비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비워내고 하느님의 뜻을 하나 둘 실천해 나갈때 이 골짜기는 더 깊어지지 않고 이렇게 순탄하게 흘러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욕심에 사로잡히고 우리가 또 우리자신에게 집착할 때, 이 골짜기는 끊임없이, 재물에 집착할 때, 또 사람에 집착할 때 끊임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지막까지 나락에 머물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라든지 여러방법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또 이런 여러가지 교육을 통해서 배움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를 일깨워 주십니다. 그럴때  내가 깨어있을 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거죠. 그래서 여러분들도 여러가지 방법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귀기울여 듣는 습관 그리고 또 그분의 소리에 '예'라고 응답할 수 있는 그런 자세도 필요합니다.


또 이 그림을 그린 김에 또 한가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뭐 예를 들면 본당의 신부님이나 수녀님 혹은 영적으로 이제 많이 진보한 분이 계시다고 칩시다. 뭐 신부님이 계시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 신부님은 막 골짜기에서 지금 허덕이고 계세요, 너무 이제 힘든 영적인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 사막의 기간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간을 보내셨던 것처럼 마찬가지고 누구나 다 영적인 여정의 광야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제 이 첫 번째 산에 올랐다고 칩시다. 그리고 이제 너무 행복해요. 영적으로 너무 충만해요. 그런데 이 신부님을 바라보니까 아니 신부님이 왜 저렇게 오랫동안 사제로 살아가면서 왜 저렇게 행동할까, 왜 저렇게 말할까 심판하고 판단합니다. 하느님이 이렇게 좋으신데 왜 하느님을 몰라볼까 판단하고 또 비판합니다. 근데 그건 우리가 알 수 없는 겁니다. 이 신부님은 이미 우리가 겪었던 이 첫 번째 산, 두 번째 산, 세 번째 산을 이미 겪고 그 다음 산에 오르기 위해서 방황하고 또 갈등하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는거, 그것은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겁니다.


나는 겨우 첫 번째 산에 올랐다고 저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표현을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심판은 판단은 하느님만이 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사랑만 할 뿐입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이분을 위해서 더 기도할 수 있게 되고, 또 이분이 하루속히 그 다음 산에 오를 수 있도록 또 기도할 수 있고, 또 이분은 그 다음산에 올라서 또 이 골짜기에서 허덕이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또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주실겁니다.


래서 이 모든 여정에서 우리는 하느님께로 인도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완성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 역시 이런 여러개의 산을 넘고 넘고 또 넘어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또 새로운 말씀드리고 싶은 것중에 하나는 자기변형의 여정이었다. 'self-transformation' 어릴때는 무신론자였죠, 그래서 하느님을 믿지도 않았고 오히려 하느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토마스 머튼의 정체성(identity)은 변화됩니다.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영적인 체험도 이때 도움을 주게 되었구요 그 다음에 또 그리스도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토마스 머튼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죠? 네, 사제가 되고 싶어 했었고 그 다음에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로 프란치스코회가 아니라 겟세마니 수도원의 수도승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관상수도원 수도자로서 엄격한 그런 전통적인 수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그런데 후기에 접어들어서는 전통적인 어떤 수도승으로서의 정체성(identity)을 뛰어넘어서 보편적인 관상적인 수도승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수도원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영적인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그런 수도승이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토마스 머튼의 의식의 과정 역시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되는데 첫 번째는 자기중심적이었죠. 그래서 자기가 온전히 중심(Self-centered Conscuousness)이 되어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세례를 받고 가톨릭 교인이 되면서 가톨릭(Exculusive Consciousness) 토마스 머튼의 중심이 되었던거죠. 그래서 칠층산을 읽어보면 가톨릭이 가장 최고의 종교다 라는 이런 표현도 많이 드러나기 보이기도 하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 비판하는 부분도 생겨납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이제 토마스 머튼은 다른 종교(Inclusive Consciousness)를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를 넘어서 이제는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초문화적인 그런 의식속으로 들어가면서 이제는 '나와 너를 넘어서'(Trans-cultural Consciousness) , 우주를 생각하고 보편적인 그런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나에서 너에서 우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느님 안에서(Universal or Cosmic Consciousness)의 온전한 그런 의식속으로 토마스 머튼이 변화되어 갔습니다.



지금 내가 어느정도 수준에 있는지 판가름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내 신앙이 지금 나 자신만을 위한 겁니까, 아니면 하느님 중심으로 이끌어지는 것입니까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토마스 머튼이 체험한 이 세 번의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잠깐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토마스 머튼이 하바나에서 체험한 하느님은 교회안에서 체험했었죠. 그때 제가 설명드렸죠, '천국이 바로 여기다'(heaven is in front of me)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저는 이때를 토마스 머튼이 성당안에서 다시말해 교회안에서 구약의 하느님을 만난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1958년 루이빌에서의 체험은 신약의 하느님, 왜냐하면 길거리에 있는 육화된 예수 그리스도, 사람들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났기 때문에 신약의 하느님을 만난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플룬나누와에서의 토마스 머튼의 부처님상 앞에서의 체험은 성령의 하느님을 만난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점점 더 성령은 불고싶은대로 불어가는 분이신데 그 불상앞에서 토마스 머튼에게 더 큰 의식을 심어주신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름대로 판단하기에는 토마스 머튼은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에 구약의 하느님을 만났다면은 수도원에서의 삶을 통해서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신약의 하느님, 루이빌에서 만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성령의 하느님을 불상앞에서 체험한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을 온전히 체험한 머튼의 삶의 여정은 결코 우리자신의 삶과 분리된 게 아닙니다. 우리역시 교회안에서, 또 성당의 여러가지 활동을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양한 봉사를 통해서 사람들안에 있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다른 종교들, 우리 종교를 뛰어넘어서 모든 사람들안에서 불고 있는 그 성령의 하느님을 만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느 한 사람에게, 어느 한 종교에 국한된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사랑의 영을 부어주고 계시고, 우리 역시 그 하느님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닮아갈 때, 그 하늘마음이 하늘의 삶이 지금 우리의 삶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토마스 머튼의 생애를 쭈욱 훑어보면서 우리 역시 자기변형의 삶을 살아야 하고 우리 역시 지속적인 회개의 삶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우리 역시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을 우리 삶의 여정속에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또 다가오시는 그분을 기쁜마음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제 토마스 머튼을 통해서, 또 여러분들이 배운 이 영성을 통해서 또다시 이제 우리 삶 가운데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묵상해보는 시간들 가져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생애와 변화를 마치고 다음시간에는 우리가 좀 더 어떻게 하면 기도와 관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토마스 머튼의 여러 책들을 통해서 또 영성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