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7회 대담 : 머튼의 생애에서 영적인 변화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15. 13:43



김남희 교수 : 안녕하세요. 김남희 율리아 교수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번에 두 번째 대담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대담에서는 저희들에게는 위대해 보였던 토마스 머튼의 영성이 결국 우리들에게도 가질수가 있고 또 토마스 머튼이 우리와 같은 한 사람, 그리고 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대담에서는 토마스 머튼의 생애와 영적변화의 여정에 대해서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2주 만에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박재찬 신부 : 안녕하세요, 네 반갑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김남희 교수 : 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사실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저도 제의를 받고 얼만큼 내가 알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요, 하나씩 하나씩 읽어가면서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고 있어서 이번 시간도 기대하고 왔습니다. 신부님과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지지난주에 아주 예민한 문제를 다루셨더라구요. 어떤 주제인지 신부님께서도 잘 아시죠?


박재찬 신부 : 네, M과의 어떤 사랑이야기, 그리고 뭐 여러가지 종교간 대화 이야기가 나왔었죠.



김남희 교수 : 네 맞습니다. 사실 일주일만에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랬거든요, 지난번에 사랑이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게 한다. 이 해석을 들으면서 제가 떠올랐던 시가 있는데 아마 토마스 머튼도 굉장히 좋아했었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였었거든요. 이 시가 뭐였나하면 "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  알고 계신 시인가요? 워낙 유명한 시여서요.


박재찬 신부 : 그럼요, 토마스 머튼이 윌리엄 블레이크를 통해서 석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김남희 교수 : 네~ 맞습니다. 사실 이 시를 제가 초등학교 때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1학년 때 저에게 엽서를 그림을 그려서 보내주셨는데 이 시를 보내주셨어요 초등학교 1학년때요. 그래서 이 시가 도대체 뭘 뜻하지 했는데 2주 전에 하셨던 M과의 만남, 그리고 사랑, 그리고 영적인 성장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이 시가 저희가 얘기하는 단순히 자연에 대한 것, 그리고 초월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결국 이 땅에서의 그 만남이, 아주 작은 만남도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겠구나 라는 것으로 다시 한 번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좀 잘난 척을 해서 죄송합니다~ 신부님!


우선 여러가지 중에 제가 먼저 궁금했었던 점이 바로 이 공간에 관한 문제였었거든요. 왜냐하면 영적 성장에 대한 변화과정 안에는 토마스 머튼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공간성이 중요하다고 봤는데요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시간>에서 보면 그 뭐라고 표현이 되어있냐하면 '머튼의 전기에서 나타나는 사소해 보이지만 색다른 주제를 보여준다. 전형적인 예로 그의 일기에서 방이 차지하고 있는 역할이다.'


그래서 처음 이제 이 책에서는 맨해튼 거리 35번지에서 시작을 해서 뉴욕주에 있는 외할머니 집, 그 다음 그 외할머니의 방, 그 다음에 여행을 하면서 떠돌게 되는 다양한 호텔들, 그 다음에 이제 프란치스코회 입회를 거절당하면서 친구들과 뉴욕에 있는 오두막에 거처를 마련한거요, 그리고 나중에 보나벤투라 대학에 있는 자신의 방, 그곳에서 사실은 트라피스트 수도회 입회를 결심하게 되구요, 이제 1년 반동안 지내다가 1941년 12월 10일 겟세마니 수도원에 이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는 그 작은 방, 그 다음 이제 혼자 머물렀던 병실, 혼자 머물면서 글을 쓸 수 있게 해 준 둥근 천장이 있는 방, 그 다음에 은수자의 오두막, 그 다음에 나중에 은수자의 집, 간호실습생을 만났던 그 병실, 그 다음에 삶의 마지막이 된 방콕의 그 방갈로, 그 다음에 마지막 방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 방이 벨라르민 대학에 있는 토마스 머튼의 방이 있는데~ 이 방은 혹시 신부님께서 가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박재찬 신부 : 벨라르민 대학이 지금 토마스 머튼의 센터가 되어 있습니다. 그 방은 가 본 적은 없습니다. 사진으로만 봤는데 거기 가면 토마스 머튼이 유품으로 남긴 청자켓이랑 뭐 그런것들이 전시되어 있죠. 그리고 또 거기 벨라르민 대학에는 거기서 머물러서 컴퍼런스(conference)를 했었는데 거기에 토마스 머튼 센타가 있구요 그 다음에 토마스 머튼에 관한 자료가 거기 다 모여져 있습니다.


김남희 교수 : 아, 네 알겠습니다. 저는 거쳐 온 방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영적변화의 체험, 이런 것들이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박재찬 신부 : 이 질문을 통해서 아까 윌리엄 블레이크의 '한 알의 모래알 수'라는 그 이야기를 통해서도 다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토마스 머튼이 처음에 가졌던 공간의 개념하고 나중에 후기에 가졌던 공간의 개념, 처음에 가졌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그런 개념하고 후기에 가졌던 개념이 점점 확장되어 갑니다.


그리고 우선 공간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토마스 머튼이 처음에는 집이 없다는거에 대해서 굉장히 그리워하고 안정된 공간, 또 안정된 집, 또 안정된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마음이 안정된 트라피스트 수도원이라는 그런 공간으로 들어가게 했다는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토마스 머튼의 글을 읽어보면 토마스 머튼이 '집'(Home)이라는 '가정'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많이 씁니다. '여기가 제 집입니다.' 했다가 또 딱 읽어보면 '여긴 제 집이 아닙니다.' 뭐 심지어 처음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와서는 여기가 내 집이라고 했지만 나중에는 '이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나의 집이 아닙니다.' 뭐 이렇게 표현을 하고 또 아시아를 여행할 때도 '지금 나는 집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뭐 이런식으로 그런 표현을 씁니다.


근데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이 '집'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포괄적이면서도 함축적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제 집이 사라지는, 그러니까 집을 갈망했다가 그 집이 사라지고 또 집을 갈망했다가 또 그 집이 사라지고 

마치 이제 방에서 방으로 이동되지만 

단순한 공간적인 방이 아니라 어떤 영적인 의미에서의 그런 방으로 확장되어가는 것 같애요. 

예를 들면 집이 없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수도원이 내 집이 되었쟎아요. 

그런데 나중에는 '수도원은 내 집이 아닙니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왜 그랬을까요?  

토마스 머튼이 생각하는 이 '집'은 하느님관하고 연결이 되어 있다고 봅니다

처음에는 수도원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생각했죠. 

근데 수도원에 살다보니까 하느님은 수도원에만 계신게 아니었던 거죠. 

다른 곳에도 계신거예요. 

그래서 '아, 수도원은 나의 집이 아닙니다.' 라고 표현을 해요.


그리고 처음에 또 아시아에 가면서 또 새로운 하느님을 만날거라는 그런 기대에 부풀어 있었죠. 나중에는 또 아시아라는 공간을 넘어서서 또다른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이 공간이라는 이 집이라는 개념이 점점점 더 확대되었다가 사라지고 

그래서 나중에 '짐 포레스트'(Jim Forest)라는 토마스 머튼의 제자였죠, 


그러다가 수도원에서 살다가 환속하셔서 토마스 머튼의 아주 대가가 되신 분이신데 이분이 쓴 책 중에 'Thomas Merton's path to the place of Nowhere''토마스 머튼이 있는 곳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표현을 쓰는데 이 표현은 뭐냐면 

토마스 머튼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느님은 이곳에 계신다고 생각하지만 또 그곳에 없기도 해요.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 이 공간을 초월해 계시기 때문에.  

토마스 머튼의 이 삶의 여정을 통해서 이 공간의 개념은 점점점  확대되어 가면서  

하느님의 공간으로 이제 확장되어 가는거겠죠.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도 내가 알고 있는 하느님, 또 내가 안정적으로 생각했던 그것을 넘어서 

또다른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지난 시간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광야의 시간처럼 또 하느님이 안계시는

듯한, 집이 없는 듯한, 그런 공간을 이동해야 되잖아요 그죠.  


사막을 거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약속된 땅에 들어간 것처럼 

그 집이 없는 상태가 또다른 집을 향한 어떤 과정이라는 것이 토마스 머튼의 삶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여정이 집으로 표현되었던거죠. 


앞서 이야기 했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모래알 이야기에서처럼 토마스 머튼은 우리에게 어떤, 

그 토마스 머튼이 오두막에서 은둔처에서 살던 그 작은 삶, 

이 삶이 우주의 삶과 연결된다는 표현을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아요. 

그 모래알 속에 있는 하느님을 본 거잖아요. 하늘을~!


그런데 이게 이제 

 'Macro Cosmic'(대우주)과  'Micro Cosmic'(소우주) 이 구분을 통해서 설명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소우주가 있고 대우주가 있어요. 

그러니까 대우주는 전체 하느님이 관장하는 우주라고 볼 수가 있지만 또 하느님께서는 이 전 우주를 관장하기도 하지만 또 한 명 한 명의 소우주도 관장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밥먹고 일어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이 사람들 사이에서의 관계는 너무나 사소하고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우리가 느낄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라는거죠. 

그래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할 때 

이 대우주의 하느님의 사랑과 연결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자그만한 모래알 속에 있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는 것처럼 일상의 작은 일들, 내가 양보하고 배려하고 하느님 때문에 한 번 더 인내하고 참고하는 그런 모든 것들이 하늘의 큰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위대한 성인들, 뭐 그런 분들만 기억하시는게 아니라 우리 한 명, 한 명이 정말 당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아주시고 이끌어주신다는 것을 토마스 머튼의 이 삶의 여정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거죠. 이분도 오두막이라는 작은 곳에서 큰 우주의 하느님을 만나고  그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었던 것처럼 

우리도 역시 우리 삶안에서 일상의 작은 것들에 충실할 때 

큰 우주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김남희 교수 : 네, 사실 그런 점에서 토마스 머튼은 굉장히 감각적인 사람이었다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지금 감각이라고 하는 주제어와 그 다음에 제가 지금 말씀드렸던 공간이라는게 연결이 되는 것 같애요. 저는 토마스 머튼의 삶에 이동하는 과정들, 그 방이라는 주제어를 보면서 느꼈던 점이  Place(장소)와  space( 공간)의 차이인 것 같거든요.


그니까 우리는 모든 현대인들은 다 물리적 공간(space)안에서는 살고 있죠,  space라고 하는 공간에서 살고 있는데 그 안에서 우선 첫 번째는 현대인들이라고 한다면 실존적으로, 그 다음에 신앙인들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의 체험 안에서 그 공간이 space가 아니라 place로 이제 넘어와야만 하는데 그 place는 결국 자기 삶안에서의 place를 만들어내는 거쟎아요, 그러니까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문제가 되는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사실 공간성이 중요하다라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서 공간성안에서 우리의 감각이 우선은 예민해 질 필요가 있다


아까 신부님께서 눈도 멀고 귀도 멀고 한다고 하는데 

그 1960년에 은수자의 집이 막 완성이 되었을 때 토마스 머튼이 묘사한 부분이 있는데요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머리 위 하늘에는 구름들이 현란하게 춤을 추고, 

화덕에는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다. 

방 안까지 소나무 타는 냄새가 난다. 침묵만이 흐른다." 



저는 이 글귀가 굉장히 많이 와 닿았어요.

그러니까 저희가 은둔하고 침묵한다 라고 한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감각들도 사실은 무디어지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생각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하느님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 space라고 하는 공간안에 나의 감각을 열어서 place로 만들어가는 그 여정에서 

첫 번째가 감각이어서 이 소리내는 것과 소나무 타는 냄새와 구름이라는 이 시각, 청각, 후각들을 다 활용을 하는데, 본인은 그 가운데 침묵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사실 저희가 토마스 머튼처럼 1일 피정이라고 하는 것도 있고  사실 수도원에 가서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일상안에서 이 하느님을 찾아야 되는데 신부님 보시기에 지금 현대인들이 특히 그리스도교 신자분들이 잘 찾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박재찬 신부 : 우선 이제 앞에 했던 이야기를 좀, 공간이라는 개념하고 이제 거기에 관계되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영성에서 어떤 핵심은 복음의 어떤 진리와 벗어나지 않습니다.


'지금여기'. 항상 이제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에서 지금여기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지금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지금 여기에서 깨어있어야 되잖아요. 


말씀하시는 어떤 오감에 깨어있음, 

그 다음에 영적인 깨어있음, 

실제 지금 삶안에서 그분을 추구하는 것, 


그런데 그런 영적인 의미에서 하느님을 찾는것은 

단순히 내가 주님, 주님 한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냥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것안에 계신 하느님을 우리는 찾아야 하는데 

그 가운데 아까 읽으신 대목은 자연안에서 숲속에서 들려오는 그 하느님의 소리, 

그걸 듣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될까. 

침묵해야 한다 이거죠.


내가 그분의 소리를 듣기위해서 침묵하고 

그분의 소리는 뭐 어떤 신비로운 음성을 통해서만 들리는게 아니라 

아름다운 새소리, 물소리, 또 나무들, 공기 이 모든 것들 안에 있는 그 하느님의 숨결을 느낀다~

그래서 그 오두막에서의 삶이 평화롭고 또 하느님을 만나는 공간이다 라는 

이런 표현을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이런 고요속에서 만나는 하느님, 자연 소리보다는 자동차 소리, 기차소리, 뭐 비행기 소리 그 다음에 컴퓨터 하는 소리, 그리고 하루종일 거의 모니터 앞에서 지내게 되잖아요. 근데 실제로 이런 외적인 그런 것들을 초월해서 우리가 일상에서 하느님을 만나십시오 라고 한다면 이러면 현대인들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장 눈앞에 있는 일을 해야 되고, 당장 쉽게 말해서 먹고살기 바쁜데 언제 하느님을 찾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진정으로 우릴 먹고 살게 하는건지, 

그리고 진정으로 우리가 하느님안에 있는 그 삶의 궁극적인, 

우리 하느님을 찾아가는 삶의 목적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목적은 

결국은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를 향한 그 지향하는 삶입니다.


래서 내가 지금 주어져 있는 이 삶속에서, 그 모래알 같은 그 삶 속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제 침묵하는 시간, 끊임없이 듣는 시간, 고요히 머무는 시간, 그것이 따로 이제 필요합니다. 실제로도. 뭐 하루에 10분, 20분이라도 좀 더 조용이 머무는 시간들을 먼저 갖고 또 컴퓨터를 좀 끄고, TV를 끄고, 평화방송은 끄지 마십시오. 하하하하. 아무튼 이렇게 조용히 좀 머무는 시간들을 가지는 것, 이런 시간들을 가질 때 그게 하나, 둘 쌓이고 쌓여서 내 내면에 어느날 문득 준비된 영혼에게 하느님이 다가올 때 우리는 또 새로운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김남희 교수 : 그러면 여기서 간단 퀴즈인데요 그렇다라고 한다면 이 침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토마스 머튼안에서 찾는다면 뭐가 있을까요?



박재찬 신부 : 우선 토마스 머튼은 초기에는 끊임없이 어떤 물리적인 공간의 떠남을 생각했어요.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어떤 침묵, 고독을 굉장히 추구를 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했죠.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떠나갖고 또 여행도 많이 다니고 뭐 이렇게 실제로 했지만 진정한 고독은, 토마스 머튼은 어떤 장소에 있고 공간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공간을 초월해서 그리고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에 참여했을 때 

이제는 더이상 어떤 공간이나 어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배운 것 같애요.


예를 들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에 체험했다는 말은 다르게 표현하면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뭐라 그러셨어요?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 뜻대로 하소서 라고 하느님께 모든 걸 의탁하셨죠. 

그래서 그 고독에 참여함으로 인해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뿐만 아니라 부활의 삶으로 온 세상을 구원을 주셨잖아요. 그것처럼 토마스 머튼 신부님께서 깊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고독과 만남으로인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 또 다른 사람에게 부활의 기쁨의 소식을 널리 전할 수 있는, 그러니까 먼저 그리스도의 고독 속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 고독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은총을 받은 것 같애요.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독을 묵상하고, 

또 진정으로 그 고독에 함께 할 때,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도 역시 그런 삶으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남희 교수 : 근데 사실 신부님께서는 쉽게 말씀을 하시는데요, 평신도인 저희들에게는 그게 굉장히 추상적으로 다가오거든요. 그래서 제가 다시 여쭤보는데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이 없을까요?



박재찬 신부 : 어,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우선은 고요히 머무는 시간을 먼저, 외적인 시간을 가지는게 먼저 필요합니다. 

근데 그 시간을 갖고 난 다음에 나중에는 

그 고독의 시간이 더 확장이 되어서 사랑으로 변화된다는 그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드린겁니다. 

그래서 우선 구체적인 내가 고요히 그분 곁에 머무는, 그리고 또 제가 만난 많은 평신도 중에 실제로 진정으로 오랜시간 기도하고 수도자들보다 더 오랫동안 하느님 곁에 머물고 또 관상적인 기도를 하는 분들을 참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마지막에 한 이야기중의 하나는 우리 모두가 관상가라고 그랬어요. 근데 많은 사람들이 흔히들 관상이라고 하면은 그건 수도자들만 하는 거, 뭐 신비주의자들만 하는 거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실제로 우리가 아는 많은 평신도 중에서도 이미 관상의 깊은 영역에 도달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김남희 교수 : 그러면 신부님 제가 감히 제가 발견한, 그 침묵을 하기 위한 왜냐하면 그 침묵을 학생들에게 해봐도 수업시간에 잠까 뭐 성당이나 아니면 최소한 그 강의시간에 아무것도 하지말고 눈을 감고 5분만 있어보자 해도 5분을 못견디거든요. 그러니까 계속 눈을 떠요. 시각이 저희가 정보를 80% 이상 받아들이고 있는데 우리는 늘 눈을 뜨고 살았기 때문에 졸립지 않은 한, 눈으로 무언가를 계속 받아들일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5분 이상을 견디지를 못하는데 제가 이 토마스 머튼을 읽으면서 수업 때 해봐야 되겠다. 아니면 교육적인 뭔가 방법론을 찾았다 라고 혼자 제가 즐거워했던게  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일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토마스 머튼은 끊임없이 일기를 쓰고 있거든요. 그게 누군가에게 읽혀질 거라고 우선 생각하고 쓴 게 아니라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실은 일기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재찬 신부 : 좋은 지적입니다. 그 기도하는 방법가운데 글을 쓰는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객관화라 그러죠. 그냥 추상적으로 생각하는거 하고 글을 쓰면 명료화가 됩니다. 그리고 글을 쓰면 내가 본 것, 느낀 것, 체험한 것들이 조금 더 이제 구체적이 되죠. 근데 물론 토마스 머튼처럼 글쓰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은 그냥 술술술 쓰겠죠. 또 교수님처럼 말씀을 잘 하시는 분들은 술술술 말씀을 잘 하시겠지만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요즘 이제 청소년들이나 학생들은 가만히 있는 걸 하기를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뭔가를 항상 해야되고, 놀면서도 뭔가를 해야지 논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정말 진정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고 또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일단 멈추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음악을 하셔서 아시겠지만 쉼표도 우리 음악의 일부이잖아요. 쉼표가 없으면 음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영성생활이나 하느님을 쫓아가는 찾아가는 삶의 여정에서도 일단 멈추어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간, 하느님을 생각하는 시간, 또 하느님께 사랑을 드리는 시간을 가지는 것, 이게 훈련의 기초적인 방법이죠. 그리고 난 다음에 점점 이제 영적으로 더 깊어지면 나에게 맞는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아갈 수 있는거죠. 일기를 쓴다든지 또 고요히 머무는 것도 좋고 또 산책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단순한 일을 하는 것도 때론 도움이 되요.


그 틱낫한 스님같은 경우에는 설거지를 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노동, 또 단순한 작업들,  또 토마스 머튼은 숲속에 살면서 단순한 일과를 보낼려고 굉장히 애썼어요. 심지어 글쓰는 것도 나중에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글쓰는 것도 이건 나한텐 방해가 된다. 글쓰지 말자 다짐을 하고 막 그렇게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글쓰기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표현까지 씁니다. 그래서 각자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나름대로 하느님을 찾아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내가 찾은 방법이 전부가 아니고 시간이 흐르고 단계 단계 높아지고 또 깊어지면 또다른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가야 되고 또 훈련해 나가야 되는거죠.  일생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런 표현을 썼어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찾는 이 여정에 있어서 초보자다.' 초보자인 겁니다.



김남희 교수 : 네, 그렇죠. 제가 거기에 조금 덧붙이고 제 의견을 보충한다면 토마스 머튼이 뭐라고 했냐면  '내가 쓴 책은 나의 내면이고 양심의 거울이다.'라고 얘기를 했거든요,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쓰지말아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썼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라는 생각이 들구요, 음 왜냐면 저는 현대인들도 토마스 머튼만큼은 아니지만 일기를 쓰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쓰고 있어요, 어떻게 쓰고 있는지 아시나요?


박재찬 신부 : 페이스북이나 이런거 말씀하시는 거 아니예요?



김남희 교수 : 네, 그래서 저는 페이스 북 일기, 카톡 일기, 그 다음에 인스타 일기, 그렇게 현대인들도 끊임없이 SNS를 통해서 일기를 쓰고 있는데 그 일기가 누구를 위한 일기냐 하는 방향성이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토마스 머튼이나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신자들도 다 기록을 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확인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양심의 거울을 들여다 볼려고들 하는데 사실 그 양심의 거울이 어느 순간에 타인에게 맞춰져 있고, 그 타인을 위해서 쓰고 있다라는 느낌이 들어서 저는 그냥 상상으로 생각해 봤는데 토마스 머튼을 통한  교육 방법론, 일기 쓰기 이렇게 단순히 생각해 봤습니다.


왜냐하면은 페북이나 카톡이나 인스타 이런 SNS의 소통이 갖고 있는 이런 문제점 때문에 저는 그 토마스 머튼이 마지막 얘기한 그 '침묵'과 연결된다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현대인들이 가장 못하고 있는게 이 '침묵'이예요. 어, 그렇다 라고 한다면 왜 이 침묵을 현대인들이 못하고 있는가?


현대인들이 고독해지기를 두려워 한다 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학생들에게 질문을 해봐도 고독이 무엇인가 라고 한다면 혼자 있는 것, 물리적으로 혼자 있는 것, 그 다음에 그 고독과 연관되어 있는 연상어들을 물었을 때 대부분은 '외로움'이예요. 그러니까 '고독' 하면 '외로움'이라는 부정적이라는 단어들을 연상을 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그런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이 그런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거에 대해서 혹시 토마스 머튼의 말을 빌어서 신부님께서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박재찬 신부 : 물론 그렇죠. 현대인들이 외롭다 고독하다 라는 이런 표현을 쓸 때, 실제로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 외롭다. 고독하다.' 그 이면에는 '아, 사랑받고 싶다. 관심받고 싶다.' 그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무엇무엇으로부터의 고독이죠 외로움이.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은데 관심을 받지 못하니까 외롭고 고독하고 힘들고, 또 현대인들이 여러가지 조명받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특히 옛날에는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가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한 순간에 누가 어디서 뭘하는지를 관심을 받기 때문에 이젠 특히 칭찬이나 긍정적인 관심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또 부러움이 생기니까 ;나는 뭔가!; 이런 생각이 들고 상대적인 더 이제 고독감, 외로움, 박탈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고독은 무엇무엇 안에서의 고독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고독이라고 볼 수 있을거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고독에 깊이 참여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나게 되는거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났을 때, 우리는 단순히 내가 홀로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사랑 자체이신 그분과 함께 있게 되는거고 더 충만함으로 나아가게 되는거죠.  그래서 고독이란 표현은 사실 외로움, 쓸쓸함이지만 영적인 의미에서의 고독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도구입니다.


내가 고요히 머물면서 하느님 곁에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진정한 참된 사랑의 영역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는거죠. 그래서 나를 끊임없이 비워내고 그리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들어올 수 있도록 내가 하느님께 나를 내어맡기는 시간, 그 시간이 바로 고독의 시간이고, 또 그 시간,  외로움의 시간, 또 광야의  시간, 사막과 같은 시간을 거쳤을 때 우리는 또다른  차원에서의 그 깊은 사랑을 체험하게 되고, 그 사랑이 바로 세상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누릴 수 있는 영적인 그런 참된 기쁨, 평화로 인도해주는 거겠죠.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거겠죠. 다른 차원에서의 어떤 영적인 세상을 만나게 되는 거겠죠.



김남희 교수 :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고독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현대인들이 하느님과의 침묵속에 대화를 하고 그것을 통해서 신앙생활도, 사실 저희가 신앙생활도 사실 'information'을 많이 주쟎아요. 그 'information'은 하나의 틀을 제공하는건데 그 'information'이 아니라 'transformation'으로 가야된다. 그래서 그 'transformation'은 결국 'self transformation'이 되어야 된다. 자기변형으로 갈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된다. 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박재찬 신부 : 네, 그럼요. 그리고 'self transcendence'(자기초월), 자기변형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나'를 넘어가야 됩니다.


김남희 교수 : 그러기 위해서 토마스 머튼처럼 열심히 일기를 써야할 것 같아요. 하하하하



박재찬 신부 : 글쓰기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럴 수 있겠지만 저는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글쓰기도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글쓰기의 도구, 뭐 각 사람마다 맞는 도구들 찾아가시면 좋겠고 결국은 이 글쓰기도 내려 놓는게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끊임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오히려  하느님께 집중하는 거, 이런 시간들을 자주 갖는게 저는 좋다고 봅니다.



김남희 교수 : 어, 그런 의미에서 그 칠층산 같은 경우에는 사실은 토마스 머튼이 수도생활을 하면서 초반에 쓴 책이잖아요.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칠층산을 버려야된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칠층산 이외에 그래도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생애를 마무리를 하면서 읽어볼 수 있을만한 참고될 만한 자료가 있을까요?



박재찬 신부 : 그렇죠. 많은 사람들이 이제 토마스 머튼이 전기 머튼, 후기 머튼으로 구분되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냥 아무책이나 집으면 그 책이 토마스 머튼의 모든 사상이 담겨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게 되는거죠. 오해를 하게 됩니다.


런데 실제로 토마스 머튼이 전기에 쓴 어떤 책들하고 후기에 썼던 책들을 이렇게 분류해서 본다면은,  또 중간에 쓴 책도 있죠. 과도기에 썼던 책들, 그러면  토마스 머튼의 생애에서 오는 그런 영성에서 오는 것들을 잘 구분해서 읽을 수 있고, 또 그 내용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토마스 머튼의 초기 생애 젊은시절, 그 다음에 수도원에 들어와서의 초기시절을 알고 싶으면 '칠층산'을 읽으면 좋구요, 또 전체를 한 눈에  이제 보고싶다. 인간 토마스 머튼을 만나고 싶다 이러면 번역된 책중에 '토마스 머튼의 시간'이라는 책을 읽으시면 도움이 되실거구요 그 다음에 중기, 그러니까 토마스 머튼이 전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그 과도기의 시간을 좀 알고싶다 그러면 'The Sign of jonas' 한국말로는 '영적일기'로 번역되었을 겁니다. 그 '영적일기'를 읽으면 도움이 될 거구요,


그 다음에 토마스 머튼의 이제 후기의 사상을, 제대로 영성을 이해하고 싶다 그러면은 한국말로는 '토마스 머튼의 단상'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을 겁니다. 'Conjectures of a Guilty Bystander'라고 '죄많은 방관자의 억측'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책을 읽어보시면 토마스 머튼의 후기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한국말로 번역된 것 중에 토마스 머튼의 이제 기도에 대한 것, 관상에 대한 것을 이해하고 싶다면 '새 명상의 씨'라고 한국말로 번역되어 있어요. 실제로 이 '명상'이라는 단어는 'contemplation' 관상에서 옮겨온 건데 '새 관상의 씨'라고 그 책에서 나오는 명상을 읽으시면서 아, 관상이라고 염두에 두시고 읽으시면 될 겁니다.


그래서 고정도의 책을 읽어보시면 아마 토마스 머튼의 전기, 중기, 후기, 영성 그리고 후기 관상에 대한 걸 좀 더 깊이 보고 싶으면 '마음의 기도'이라는 책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기도'라는 책을 보시면 관상적 기도라고 번역을 했어야 되는데 마음의 기도로 번역되어 있는데, 그 책을 읽어보시면 전체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조금 더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런데 단상이라는 책, '토마스 머튼의 단상'이라는 책은 조금 어렵습니다. 내용도 두껍고 그래서 마지막에 읽으시면, 처음에 그걸 읽으시면 어, 토마스 머튼이 너무 어렵다고 매력을 못느낄지도 모르겠어요.



김남희 교수 : 좋은 정보 감사드리고 말씀들으면서 제가 마지막으로 신부님과 다음에 할 주제들이 여러가지 떠올랐어요. 다음 대담때 또 명상과 관상과 그 차이점도 같이 나눠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신부님 다음 강의주제는 어떤건가요?



박재찬 신부 : 네, 다음 강의주제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토마스 머튼이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또 우리가 명상과 관상, 아까도 그 책도 한국말로 다르게 표현을 했는데 명상은 또 뭐고 관상은 또 무엇인지, 또 토마스 머튼이 왜 그렇게 일생을 거쳐서 관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답을 하고자 했는지, 또 토마스 머튼이 체험한 그런 관상적인 체험은 어떤 것이 있는지 그래서 기도, 명상, 관상을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중심으로, 또 가르침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김남희 교수 : 네, 말씀 감사합니다. 2주 뒤에 있을 토마스 머튼의 이야기가 점점 더 흥미로와지는데요 이 시간을 마무리하면서 오늘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박재찬 신부 :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