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9회 토마스 머튼의 관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 2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17. 12:17


† 찬미 예수님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의 박 안셀모 신부입니다. 

지난 한 주간 여러분들 기도 가운데 주님을 많이 바라보셨는지요?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게 제가 관상적인 기도라고 그랬잖아요. 그죠? 

사랑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또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과 하나 되어 사랑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한 기도의 삶이고 또 기도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토마스 머튼은 기도의 깊은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났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그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들과 나눌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래서 기도는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한 일부분이 아니라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전체에 해당되는 겁니다. 사실은! 그러니까 매일 매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또 새롭게 기도를 통해서 발견해 나간다고 그랬잖아요. 그죠? 


늘 같은 기도를 반복해서 기도를 하지만 기도를 통해서 영혼이 준비되어 있을 때 

하느님의 은총이 또 주어지게 되고, 그 은총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또 새로운 차원의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는 내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의 

영역이 더 커지겠죠. 그러면 그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또 다른 사랑의 실천을 

나눌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고 있는 여러가지 신앙생활 안에서 뭐 단순히 미사 따로, 기도 따로, 

로사리오 기도 따로, 성체조배 따로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모든 우리의 삶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 또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주님을 발견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사실 그 자체로 신비 그 자체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 속에 신비로우신 주님께서 

개입하시고 계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것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으로부터 

깨어나게 되는 겁니다. 토마스 머튼은 무엇보다도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주님에 대해서 

강조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을 복습하는 의미에서 토마스 머튼이 기도에 대해서 

한 이야기를 한번 더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무엇인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러분의 존재, 그리고 여러분이 '이미' 가지고 있는 자신의 깊은 곳에서 그리고 

여러분이 '이미' 그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곳에서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리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고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이미'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벌써 이 내용 안에 '이미'라는 단어가 엄청나게 많이 들어 와 있습니다. 

이 강좌 오늘 시간에는 이 단어만 기억해도 훌륭한 강좌가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그 씨앗이 우리 안에 심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씨앗이 자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아직도 그냥 내 가슴 

속에 묻혀 있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시는 또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현대인들은 내 안에 와 있는, '이미' 와 계신 주님이 깨어나기 위해서는 

다림의 시간, 마치 병아리가 부화하기 위해서 어미닭이 품고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거쳐 약속된 땅에 들어갔던 것처럼 그렇게 기다림의 시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깨어나기 위해서는 내 나름대로 각자가 준비해야 될 

시간이 있는데, 너무 서둘러 생활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도 뭔가 딱 이렇게 우리가 수학 공식처럼 1+1=2 같이 뭔가 명확하게 

탁 나오길 바라고 금방 배우면 기도를 깨우치길 바라는데 기도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절대 제대로 깨우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현대인들의 삶이 너무 합리적인 것들을 추구하다 보니까 신비적인 영역에 

대해서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토마스 머튼도 우리가, 현대인들이 

너무 서둘면서 기도에 대해서 뭔가 당장 결과를 바라는 그런 마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또 기도를 통해서 주님을 깨우치지 못한다고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순간은 하느님의 때이며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모든 것은, 결국 우리가 찾는 것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다는 알아차릴 기회는 

기도 안에서 우리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후에 우리는 서둘 필요가 없습니다."


서둘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고 바로 그 순간 

하느님의 때가 되었을 때 우리는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리고 

준비하는 삶 가운데 우리는 주님께로 더 깊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랑이 없는 기도는 정말 울리는 징에 불과하고 또 하느님 안에서 기도를 통해서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할 때, 그 기도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기도가 아닐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여러가지 모양으로 이제 제가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데, 수님께

서도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을 보라 그랬습니다. 토마스 머튼이 뿌린 이 여러가지 저서

들을 통한 것들, 그리고 또 그분이 하신 여러가지 활동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실천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깨우쳐 가고 있습니다. 


래서 그것만으로도 토마스 머튼의 영성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도의 영성을 통해서, 

관상의 영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있고, 그것이 사랑으로 열매 맺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우리가, 기도의 열매는 사랑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 중에 하나는 

많은 분들이 질문하는 것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신부님, 제가 요즘 기도를 하고 있는데 분심이 너무 많이 듭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때로는 또 졸기도 하고 그래도 계속 기도를 해야됩니까?" 


물론입니다. 기도를 해야 되죠. 그러면 이 분심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 시간에는 여러분들에게 분심이 무엇이고, 또 분심이 어떤 역할을 하고, 또 

분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분심이 일어나는 건 당연합니다. 

그것을 먼저 받아들이십시오. 

우리가 오랜 수행생활을 통해서 훈련하지 않은 한, 

또 훈련을 했다 하더라도 분심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 분심은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고 또 유혹합니다. 


마스 머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도가 불가능 해지고 마음이 돌 같이 될 때, 

그러니까 여러가지 분심도 일어나고 또 '더 이상 기도할 수 없어. 

또 기도해도 뭔가 기도가 되는 것 같지 않아.' 

이런 느낌이 들 때 있잖아요. 

그럴 때, 

"마음이 돌같이 될 때 기도와 사랑을 진정으로 배우게 될 것입니다." 

<새 명상의 씨>란 책에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분심이 든 적이 없다, 그런 사람이 과연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마스 머튼은 '분심이 든 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분심은 피할 수 없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분심으로

부터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분심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이런 비유를 

드는데 제가 그림으로 표현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이렇게 설명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걸 강이라고 생각합시다. 

이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겠죠. 그런데 기도하는 동안에는 뗏목을 타고 이렇게, 이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가겠죠.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에 이제 

바다는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래서 기도하는 동안에 우리가 이제 

강물이 흘러서 흘러서, 내가 가만히 있어도 이 뗏목은 흘러갑니다, 바다를 향해서. 


그래서 기도하는 동안에 뭐 여러가지 분심이 들거나 하는 것들은, 이 강물 주변에 이제 

집도 있을 거고,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거고, 여러가지 나무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 이 기도하는 동안에 내가 분심이 드는 것은 주변에 있는 그 강의 배경을 보는 

거라고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래서 내가 설령 이 배경들을 바라본다 하더라도 

강물은 점점점 흘러서 바다로 흘러갈 겁니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흘러가는 거죠. 

그래서 기도하는 동안은 내가 뭔가를 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 맡겨진 것이라는 생각을 먼저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분심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면 다시금 이제 앞으로 새롭게 바라보면 되겠죠. 

그래서 분심이 들었을 때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또 내가 분심을 막 하고 있는데 혹시 이 앞에 큰 바위가 있을 수 있겠죠. 

바위가 있으면 가다가 부딪히겠죠.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만트라'라고 그러는데 같은 단어를 계속 반복하는 겁니다. 

이건 뗏목의 노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노를 저어가면서 하나, 둘 같은 단어를 계속 반복하는 '만트라'를 하면서 

이 바위가 나타났을 때는 피해서 갈 수 있겠죠. 


그래서 이렇게 비유를 든다면 

이 분심은 그냥 주변에 있는 겁니다. 

래서 이 주변을 본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분심에 대해서 너무 신경 쓸 거 없습니다. 

아, 분심이 들었다면 다시금 원위치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또 같은 단어를 계속 반복하는 이제 '만트라'라고 그럽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에 다 있습니다, 

관상적인 기도를 하는 데에서는. 

그리고 이 '만트라'를 되뇌이면서 이제 같은 단어를 계속 반복하는 거죠. 


뭐 예를 들면,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소서!" 이런 '만트라'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에 

내가 뭔가를 하지 않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릴 인도해 주신다라는 거, 

하느님이 계시는 이 바다로 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또 이제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많은 무의식 중에 일어나는 

그런 분심들 가운데는 또 다른 측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뭐냐하면 

우리 인간의 마음의 영역 안에는 '의식'(consciousness)의 차원이 있고 

'무의식'(unconsciousness)의 차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무의식 안에는 집단 무의식, 개인 무의식, 뭐 이런 것들이 있겠죠. 

구체적인 설명은 심리학 시간이 아니니까 영적인 면에서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우리가 일상 안에서 오늘 뭐 예를 들면 우리 자매님들 같은 경우에는 '오늘 저녁에는 

우리 남편을 위해서, 우리 아들을 위해서, 딸을 위해서 반찬을 뭐하지~?' 뭐 이런 것들을 

기도 시간에 계속 궁리하고 있다면 이건 분명히 원위치로 돌아가야 됩니다. 근데 분심의 

또 다른 역할 가운데 하나는 이 무의식의 깨어남이 있습니다. 


그 무의식은 내가 억눌러 놨던 거죠. 내가 부모님한테 아주 꾸중을 많이 들었다면 

'난 이래선 안돼, 이래선 안돼.' 하고 자기 감정 속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제 억압을 

시켜 놓은 거죠. 근데 이런 기도를 통한 명상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눌러 놨던 무의식이 이제 의식화, 의식화 된다는 말은 알아차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 그런게 있었지.' 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것들이 이제 의식 속으로 

올라올 때, 뭔가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또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일어났다면 기도를 마치고 그런 내 분심들을 

한번 기록해 보는 것도, 여러분들이 이제 이 분심을 통해서 내 안에 있는 무의식이 깨어나게 

하는 또 새롭게 발견하게 하고, 또 알아차려서 치료하고 또 새롭게 과거의 시간들, 내 마음 

속에 있는 그런 아픔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고 또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다시금 

식별할 수 있고 또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분심에는 내 무의식이 새롭게 솟아나는 그런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분심을 

잘 분석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부차적인 것이구요, 

결국은 기도하는 시간은 정말 봉헌된 시간이고 그 자체로 중요합니다. 

내가 10분, 20분 기도한다면 그 시간은 그냥 주님께 내어맡기는, 드리는 시간입니다. 


내가 이 기도의 뗏목 위에서 설령 잠을 잔다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물론 이제 의식적으로 '이 기도 시간은 잠 자야지.' 한다면 그것은 기도하는 게 아니겠죠. 그렇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 품에서 잠들 수도 있는 거고 또 주님께 내 모든 것을 내어맡겨 드릴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무의식이 깨어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모든 시간들은 봉헌된 시간이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먼저 기억하신다면은 

기도에 있어서의 분심, 뭐 졸음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를, 뭐 로사리오 기도를 뭐 몇십 단 이렇게 바치면서 정작 내가 정성을 

다해서 지금 주님 앞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이 만큼을 해야한다는 것에 

얽매이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이 만큼을 해야, 주님이 이 만큼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조금만 하느님 곁에 머문다고 하더라도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분이시고 또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걸 

다시금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제 대략 이런 기도에 대한 설명들을 마치고, 그 다음에는 토마스 머튼의 묵상에 

대한 것, 그리고 명상에 대한 것들을 한번 다뤄보고 싶습니다. 


우선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meditation'이죠. 

이 'meditation'은 서양에서는 이제 대개 '묵상'이라고 번역을 하고 

동양적인 면에서는 '명상'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앞서 앞 시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초세기에는 이 기도는, 가슴으로 하는 것, 또 

주님을 바라보는 것, 서로 친밀함을 나누는 것, 또 친구 혹은 어머니 품에 있는 것 뭐 이런 

것들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안식, 고요함, 그런데 점점 이제 현대에 들어서면서 머리로 추리하는 것, 상상하는 것, 

이쪽으로 많이 흘러갔습니다. 그 다음 서구의 사고에서는 우리가 흔히 한자의 마음 심(心)

자를 'mind'라고 그러는데 제가 서양 사람들한테 'mind'를, 우리가 보통 마음 하면은 

동양사람들은 마음이 '여기(가슴)'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서양사람들은 마음을 

'여기(머리)'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을 이야기할 

때는 'heart', 가슴을 가리킬 때는 다른 단어를 씁니다. 


아마 그래서 이제 'meditation'을 묵상과 명상으로 이야기할 때, 서양 사람들은 머리로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동양 사람들은 가슴으로 하는 것, 우리가 이야기하는 마음, 

여기에 해당되는 거겠죠. 그래서 조금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meditation' 하면은 굉장히 묵상(默想), 명상(冥想) 무엇으로 설명을 해야될 지 혼선이 

되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meditation' 할 때, 서구 사람들이 생각할 때 이 'meditation'은 

'묵상'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meditation' 생각하면 동양 사람들은 '명상'이라고 

생각하죠. 그렇다면 서구 사람들이 이 동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명상'에 대해서 서구 

사람들이 해당되는 단어는 없는가? 그게 바로 '단상'(斷想)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토마스 머튼도 초기에는 '묵상'이라는 거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근데 나중에 동양의 '명상'을 접하면서 점점 '아, 서구의 '관상'이라는 개념하고 이 '명상'

이라는 개념이 서로 유사하구나.'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동양의 이 '명상'에 

대해서 많이 배울려고 하고 이 배움을 통해서 서양의 '관상'의 개념을 더 풍성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런 개념을 바탕으로 토마스 머튼의 '명상'에 대해서 혹은 '묵상'에 대해서 이해를 

하면 더 좋을 겁니다.


그래서 좀 표를 나눠서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관상'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묵상'이라고 하면 추리하는 거, 머리로 하는 걸로 볼 수 있을 

겁니다. '관상'은 가슴으로, 마음으로 하는 것, 동양에서 말하는 마음입니다. 


그 다음에 '묵상'은 좀 더 능동적인 거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가 앞 시간에 

설명해 드린 것처럼 '묵상'은 뭔가 추리하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거기 때문에 인간, 사람

이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근데 이제 이 '관상'은 수동적인 겁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 '관상'은 좀 더 

수동적인 형태를 띠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이 '묵상'과 '관상'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다시금 생각해야 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추리하는 이런 모든 과정들은 '관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관상'이란 무엇인가 다시금 질문하게 되죠. '묵상'을 통해서 '관상'을 준비한다면 

과연 이 '관상'은 무엇인가, 토마스 머튼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것을 제가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토마스 머튼이 '관상' 대해서 어떻게 이해했고 또 '관상'을 어떻게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지 이 시간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관상'이란 용어부터 설명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굉장히 좀 낯선 용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마 이 

한자말의 '관상'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흔히 얼굴을 보고 미래를 운명을 점치는 그 단어와 

한글로는 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관상이라고 한자로 이렇게 쓰죠. '觀相', 요기까지 쓰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얼굴로 이제 

운명을 이야기하는 관상에 대한 겁니다. 서로 '상(相)'자를 쓰면은, 그런데 여기에 마음 '심(心)'

이 들어가면은 '관상(觀想)'이라는 것이 'contemplation'이 됩니다. 라틴어로는 'contemplatio'

죠. 그래서 이제 이 볼 '견(見)'자만 있으면 '그냥 보다'이지만 전체의 뜻(觀)은 '자세히 본다'는 

뜻입니다. 자세히 본다. 그리고 '상(想)'자는 서로(相)가 마음(心)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가 

자세히 바라보는 것, 제가 앞 시간에 말씀드렸죠. 하트 뿅뿅! 사랑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관상'의 의미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또 예수님께서 사랑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고 나도 그분을 응시하는 거죠그래서 

서로 마음이 통하고 서로 사랑하는, 그래서 이제 말이 필요 없습니다, '관상' 안에서는, 

온전히 일치를 이루는 그런 사랑의 체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단어, 라틴어 안에서도 이 '관상'의 의미가 더 깊이 드러나는데요. 

라틴어에서는 'contemplatio'라고 그러죠. 'con'은 함께 한다는 뜻이고, 'templatio'는 

'templum' 'templus'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무슨 뜻인지 아세요? 네.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이제 성전은 보통 하느님이 거하시는 장소를 성전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하느님이 

거하시는 그 성전에 함께 있는 것, 함께 머무는 것, 그것을 이제 '관상'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께서는 뭐라고 그러셨어요?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성전'이라고 그랬죠. 

그래서 우리가 바로 성전이니까 우리 안에 예수님과 내가 함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관상'이라는 그런 의미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관상'은 사랑의 마음으로 보는 것,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 그분 곁에 머무는 것, 그분과 일치하는 것, 그분과 하나 

되는 것, 이것을 다 '관상'이라는 용어로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좀 더 더 깊이 관상을 바라보게 되면 '관상'은 내가 그분과 하나 되어 내가 그분과 

온전히 일치하는 거잖아요.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목표이고 우리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어떤 나아가야 될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그걸 이제 '지복직관'(至福直觀)이라고 그러죠. 

고린토 전서 13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보듯이 희미하게 바라보지만 

나중에는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될 거라는 그 말씀처럼 

우리가 지금 이미 와 계신 주님을 만나고 바라보는 것, 

그래서 온전히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을 준비하는 것, 

또 바라보는 그 상태에 있는 것, 

이것이 바로 '관상'이기 때문에 

'관상'은 사실 말이 좀 어려워서 그렇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에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최종 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관상'의 삶을 살아야 되고, 

'관상'에 도달하는 걸 목표로 삼아야 됩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 

그게 하느님 나라인거죠, 

하느님 나라! 토마스 머튼이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주님과 함께 시작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이 '관상'의 삶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니까 

나그네의 삶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잖아요. 


이 하느님이 함께 하는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이미 미리 여기서부터 하는 것,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고 그랬잖아요.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상'이 얼마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꼭 

필요한지 다시금 느끼게 해줍니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관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그랬습니다. 

하느님의 선물! 

'새 관상의 씨'(New seeds of Contemplation) 책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관상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입니다. 

관상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그분을 알고 사랑하며 

우리의 본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깊고 생생한 체험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창조의 목적에 다다른 모든 사람들은 다 천국에서 관상가가 될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 이게 무슨 말일까요? 

야훼 하느님께서 6일간 세상을 창조하고 난 다음에 마지막 날 뭘 하셨습니까? 

쉬셨죠.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이거랑 제가 앞서 토마스 머튼이 관상의 책이란 책에서 표현했던 것, 

하느님 안에서 편히 쉬는 것과 연결이 되죠. 


'관상'은 야훼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쉬셨던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통해서 그분 안에서 고요히 머물며 그분 안에 쉬는 것, 

그것이 바로 '관상'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이제 이 '관상'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제가 아까 수동적

이라고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천국에 

가야 됩니다. 그죠? 

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관상적인 삶, 관상적인 기도의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또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또 특별히 수도자들이든지 갈멜이라든지 이런 수도회, 혹은 트라피스트 수도회, 가말

돌리회, 베네딕도회 같은 관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수도자들만의 기도가 아니라 그 삶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 또 모든 사람들은 이 관상적인 삶으로 불리움을 받은 거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또 이렇게 이어서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직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이런 초자연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환경을 맛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미 이 초자연적인 영역, 

하느님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관상'의 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관상'의 의미를 통해서 이 토마스 머튼은 이미 이제 와 계신 그분 안에서 

쉬는 것, 그분 안에서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창조의 최종 완성이고 목표라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토마스 머튼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이 자연 안에서 이미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그랬잖아요. 네, 그래서 하느님의 

선물로서 이 자연의 세상과 또 창조적인 세상, 이 세상에 서로 그 안에서 머물면서 함께 

이미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과 초자연적은 이원론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초자연에 계신 분이 자연 속으로 들어오심으로써 

이 세상은 이미 하느님의 세상과 연결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우리는 

관상적인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초자연에 계신 하느님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관상적인 삶을 통해서 천국을 미리 맛보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굉장히 토마스 머튼이 어떤 혁신적인 그런 가르침을 주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1963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에게 있어 관상적 삶이란 진리와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창조물 안에서 올바른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제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창조물 안에서 올바른 자리를 

찾는 것, 이것이 바로 관상적인 삶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또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또 예수님의 친구로서 본래의 자리, 그 본래의 자리를 회복

하는 것,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 안식과 휴식과 편안함을 맛보는 것, 이것이 바로 '관상'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 관상적인 삶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고, 또 

진정으로 참다운 나, 자기 자신, 인간으로서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며 

그리고 세상과 자연과 또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금 재발견하는 것이 바로 관상의 길

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관상의 길은 요약하자면 

토마스 머튼은 세상과 뚝 떨어져서, 동떨어진 그런 

신비로운 영역, 뭐 황홀경을 체험하고 이런 것들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이미 와 계신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을 발견함을 통해서 사람들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또 자연과의 

관계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어서 참다운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 인간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 그것을 '관상'이라고 보았습니다. 


'관상'을 통해서 토마스 머튼은 우리 인간의 의식이 변화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또 변화되어 가는 도구로서 관상의 어떤 역할이 있다고 봤습니다. 우리가 흔히들 

표면적이고 외적인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관상생활로 깊이 들어감으로 인해서 

우리는 내적이고 또 영적인 측면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인간의 삶을 바라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인간을 전인적으로 

보게 되는 겁니다. 


어떤 표면적인 외적인 이런 육신이 있고 또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

에겐 영이 있습니다. 이 몸과 마음과 영혼이 다 하느님께로 들여 높여 올려지는 것들을 

'관상'을 통해서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또 다른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관상'에 대한 이야기 중에 하나는 관상생활은 하느님을 찾는 생활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이 숨바꼭질 하시는 것처럼 숨어 계시고, 우리가 찾는 그런 게 아닙니다. 

토마스 머튼의 재미난 일화가 하나 있는데 토마스 머튼이 1967년 12월에 그 주변에 있는 

여러 봉쇄수녀원에 관상수녀원의 수녀님께서 토마스 머튼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얻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하느님과의 어떤 일치, 관상에 도달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 게 

좋습니까?" 하고 토마스 머튼에게 한 말씀을 청했죠. 


그럴 때 토마스 머튼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이미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꼭 말해야 합니다." 

특이하죠. "어떻게 하면 하느님과 일치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답합니다. "이미 우리가 주님과 일치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이제 

이야기 하십니다. "관상적인 기도는 우리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의식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매우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렇게 그 수녀님께 답을 합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 주님과 함께 하는 삶, 그것이 바로 이제 관상의 삶이고, 

 그렇게 하느님을 발견하고 찾아가면서 하느님으로부터 깨어나는 삶이 바로 또한 

'관상'으로부터의 삶입니다.

그래서 이 깨어난 사람들의 삶은 새로운 관계로,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하느님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또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또 자연들, 우주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관상'으로 깨어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참자아를 발견한 사람이기도 하고, 

또한 그 참자아를 찾음으로 인해서 하느님을 보다 더 깊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제 이 강좌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정말 하느님을 새롭게 바라보고 또 내 안에 

'이미' 와 계신 주님을 찾고 발견하는 그런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시고 또 '이미' 와 계신 그 주님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거,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달라집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내 안에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나와 함께 

살아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님으로부터 깨어나서 그 깨어난 그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주님을, 또 세상을 바라보는 은총의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그런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