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8회 토마스 머튼의 관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 1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16. 12:55


† 찬미 예수님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 박재찬 안셀모 신부입니다. 

오늘은 제가 옷이 좀 바뀌었지요. 흰 옷으로 갈아 입었습니다. 검은 수도복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속을 상징한다면, 흰 수도복은 부활한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토마스 머튼 영성을 배우면서 점점 더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고 또 변화되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토마스 머튼의 생애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생애를 통해서 우리의 생애를 되돌아보고, 또 우리의 시간들 안에서 어두웠던 

시간들, 또 감사로웠던 시간들, 또 사랑하지 못했던 시간들, 또 사랑해야 할 시간들, 은총의 

시간들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또 주님에 대한 갈망으로 더 깊은 하느님의 체험을 이룬 분이셨습니다.


오늘은 토마스 머튼의 영성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토마스 머튼은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었고 하느님을 갈망했고 그래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토마스 머튼이 하느님을 만나고 또 체험했는지를 다루는 기도에 

대한 것, 그리고 관상에 대한 것, 그리고 명상에 대한 것, 묵상에 대한 것들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런 새로운 주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토론토에서 공부할 때 가끔씩 한인본당에서 미사 강론을 하곤 했었는데 그때에도 강론 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번 들려드리고 하니까 많은 분들이 좋아하셨어요. 그리고 또 이 전체인 

주제를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하던 한 부인이, 자매님께서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니 갑자기 왜 우는 거요, 여보?" 아내가 서럽게 대답

했다고 합니다. "나이가 드니 내 얼굴이 쭈글쭈글해지고 말이 아니군요. 이렇게 징그럽게 늙어

가는 걸 보니 슬퍼서 눈물이 나요." 그러자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야 거울을 

볼 때만 당신 얼굴을 보지만 그 얼굴을 늘 보는 나는 어떻겠소! 참고 있는 나를 생각해서라도 

당신이 참구료."


그렇죠. 사실 자신의 얼굴은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남편이 더 많이 보게 됩니다. 

남편도 참고 바라보는데 아내가 슬퍼할 것은 없겠지요. 젊은 시절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 쭈글

쭈글해진 모습은 아내뿐만 아니라 그 남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러한 

외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혹은 내적으로, 영적으로 우리는 변화를 겪게 됩니다.


쭈글쭈글해진 외모와는 달리 노년에 이르러 우리는 심리적으로, 또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안정을 찾고 내적으로는 더욱 더 튼튼해지고 유연해져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살아

가는 삶, 또 영적으로는 더욱 성숙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의 쭈글쭈글한 

외모가 아니라 우리의 따뜻한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더욱 기뻐하실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더 영적으로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가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을 가꾸기 위해서는 기도와 묵상, 관상에 

대해서 좀 더 배워 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토마스 머튼이 어떻게 이 기도에 대해서 생각했는지 또 토마스 머튼이 생각한 묵상은 

무엇인지, 또 묵상과 관상의 관계는 무엇인지, 또 이 관상이라는 것은 수도자들만 하는 

것인지, 또 기도에서 우리가 나오는 여러가지 분심들은 어떻게 설명해 낼 수 있고, 또 

분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한 번 다루어보고 싶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이제 두 시간, 혹은 세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여러분들은 기도에 대해서 

좀 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토마스 머튼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기도

와는 또다른 측면의 기도를 발견했고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의 이 배움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기도생활, 또 관상생활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토마스 머튼은 무엇보다도 기도는 하느님 안에서 진정 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기도는 또 관상은, 창조의 완성이고 또 구원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지금 미리 

맛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또 이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함께 이 시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부터는 쭈글쭈글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신세한탄하기보다는 사랑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옹졸해진 내 마음, 또 속 좁은 내 모습들, 쭈글쭈글해진 나의 지난 시간

들을 모두 주님께 열어 보여드리며, 사랑으로 우리를 나보다 더 많이 바라보시는, 남편이 

아내 얼굴을 더 많이 바라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또 우리의 모습을 더 많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시는, 또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께, 주님과 

하나 되는 그런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말을 

하면서 기도를 하지 않고 시작하는 건 모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의 기도를 

통해서 함께 이 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저의 주님, 

저는 지금 어느 길을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 앞에 놓여 있는 길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 길이 언제나 끝날지 모르고 있습니다.

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나의 소망이 

실제도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리고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모든 일에 있어서 늘 이 소망을 갖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 자신이 이 길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길을 잃고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해도

저는 당신을 깊이 신뢰하며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늘 저와 함께 계시고, 저를  위험 속에 혼자 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도와 관상에 대해서 나누려는 저희 모두에게 당신의 특별한 영을 부어주시어 

희가 진리로 깨어나고 사랑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선 기도와 명상과 관상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기 위해서 하나의 표로써 제가 조금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흔히들 기도의 여러가지 방법들 가운데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라는 것도 있죠, 그죠? 이 가운데 기도(prayer)하는 것, 묵상(meditation), 혹은 

이제 명상이라고도 하죠. 근데 이런 모든 기도 방법들, 뭐 여러가지~기도에는 염경기도, 

여러가지 기도가 있습니다. 


나중에 설명해 드릴텐데 이 모든 것들은 관상(contemplation)에 들기위한 준비 작업

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가 없으면 관상은 무엇이고 또 기도는 무엇이고 또 묵상은 

무엇이고 헷갈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선 모든 여러가지 기도 방법들은 '관상에 들기 위한 

방법이다, 도구이다, 준비 단계이다.' 이것을 먼저 명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제 관상이 무엇입니까. 이 부분을 제가 오늘 설명해 드릴 겁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더 미리 설명해 드리고 싶은 것은 이제 우리가 기도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제 기도의 종류에는 보통 세 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


첫 번째는 소리 기도라고도 하죠. 염경기도. 그 다음 두 번째는 기도의 종류에 또 뭐가 있죠? 

보통 흔히들 묵상 기도라고 그러죠. 묵상기도라는 게 있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로 관상적 

기도, 관상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거고, 관상적 기도는 관상에 들어가기 위한 그런 수동적인 

기도 방법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염경기도는 쉽게 말하면 소리를 내서 기도하는 겁니다. 그죠? 그 다음에 

묵상기도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자면 생각하면서 뭔가 추리하거나 상상, 이런 방법을 

통해 가지고 기도하는 그래서 머리로 하는 기도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나중에 우리가 

'meditation'(묵상)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그런데 관상적 기도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면 제가 재미난 이모티콘을 하나 발견을 했는데 

요런 사람 얼굴이 있으면 이모티콘이 하트 모양,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하트! 이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말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응시하는 것, 

이것이 관상기도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아주 좋은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설명을 드리겠지만 우선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

하는 이 관상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제가 볼 때는 이 관상적 기도란 대목에 나오는 

이 부분인 것 같은데 제가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묵상과 관상 기도는 하느님을 발견하는 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이미 발견한 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분,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시는 분 

안에서 편히 휴식하는 길입니다." 


아마 이 기도에 대한 관상에 대한 설명을 한마디로 요약해 준 아주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이미 와 계신 분, 그래서 그 안에서 편히 휴식하는 것, 이게 무슨 의미

인지 이제 나중에 이 기도에 대한 강의가 끝나고 난 다음에 여러분들은 이해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뭐 소리 기도, 묵상 기도, 관상 기도 이렇게 제가 나누어서 설명을 했지만 결국 모두가 

다 이 모든 것이 다 관상으로 가기 위한, 하느님과의 만남이죠, 관상은. 지복직(至福直觀)

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하느님과 온전히 만나고 일치하는 도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기도가 더 낫고, 어느 기도가 더 훌륭하고 더 빨리, 이런 차별이 있는게 아닙니다. 또 차등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결국은 하느님과의 만남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시 기도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서방교회에서 여러가지 기도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이 설명이 필요한 이유는 

토마스 머튼이 그 기도에 대해서 어떠한, 또 관상에 대해서 어떠한 설명을 했는지를 미리 

앞에 했던 것들을 먼저 이해하고 나면 '아, 토마스 머튼이 왜 새로운지'를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초기교회하고 또 사막교부들은 기도에 대해서 중세 때하고는 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17세기, 18세기 신비신학의 암흑기라고 하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 관상에 대해서는 좀더 더 사람들이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근데 다시 예전의 것들을 다시 회복해 준 것이 토마스 머튼일 수 있을 겁니다.


사막 교부들 중에 성 안토니오 아시죠? 안토니오 성인께서는 "기도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우정

관계다."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에바그리우스 폰티꾸스라는 교부께서는 "기도는 개념이 

아니라 안식이다."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제가 아까 토마스 머튼이 기도는 "하느님안에서 편히 

휴식하는 길이다." 이렇게 설명을 드렸잖아요. 비슷하죠.


그리고 요한 가시아노 성인께서는 단순한 기도를 반복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오소서, 저를 도우소서!" 시편 구절을 단순하게 계속 반복하는 것을 

기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제 여러 수도회들이 생겨나면서 공동기도가 성장되고 또 전례가 발전

하면서 함께 기도하는 것들이 점점 확대되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개인기도와 공동기도의 

조화를 꿈꾸었죠. 그리고 요한 클리마꾸스라는 성인께서는 "기도의 가장 근본적인 자리는 

고요함이다. 고요히 주님 곁에 머무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쓰십니다. 그리고 성 베르나르도

께서는 "기도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쥴리안 성녀께서는 "기도는 어머니와 같은 하느님 품에 안기는 것이다."


뭔가 이렇게 기도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과의 대화이다, 혹은 하느님과의 만남이다, 

혹은 그런 정의를 내리는데 그 정의와 좀 다르게 쉬는 것, 안식, 어머니품, 고요함, 또 친밀한 

친구관계 이런 것들이 기도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또 실용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이 신비신학이라든지 또 관상적인 생활을 하는 이런 

삶들이 무가치한 것, 쓸데없는 것이라고 치부되기 시작하는 것이 이제 17세기, 19세기입니다.


그리고 또 16세기에 접어들어서 이성주의가 성행하면서 기도를 자꾸 추리하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 상상하는 것, 뭐 이런 것 쪽으로 흘러가다 보니까 점점 기도가 마음으로부터 

있던 기도가 이렇게 머리로 올라가는 경향을 띠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심지어 기도는 

쓸데 없는 거다, 이렇게 실용적이지 않고 가치롭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뭐 다른 여러가지 과학의 영향으로 인해 가지고 기도 그 자체가 별로 부질 없는 거다 

라는, 그냥 뭐 기복적인 기도, 뭔가 바라는 거, 청하는 것 정도로만 기도가 여겨졌죠.


그런데 이제 토마스 머튼 신부님께서는 초기 그런 교부들, 또 위대한 성인들의 그런 기도에 

대한 여러가지 설명들을 받아들이면서 또 배우면서, 또 자신의 기도에 대한 체험과 함께 또 

동양의 여러 종교의 기도에  대한 그런 설명들을 함께 가져 와서 예전에 아주 귀중했던, 그런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재발견하고 그것을 현대인들에게 쉽게 설명을 해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과거를 회복해 주었고 또 그것을 현대화 했다는 측면에서, 기도에 대해서 또 관상에 

대해서 어떤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는 '토마스 키팅' 신부님이라든지 '존 메인' 신부님의 영향으로 이제 

관상적인 기도가, 예를 들면 'Centering Prayer' '향심기도(向心祈禱)' 와 같은 그런 기도들이, 

관상적인 기도가 새롭게 관심을 일으키기 시작을 했고 또 요즘은 개신교에서도 이런 가톨릭의 

관상적인 기도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토마스 머튼이 과연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했는지 한 번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기도에 대해서 제가 두 가지 이야기할텐데 주의해서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는 토마스 머튼은 '기도는 하느님께 정신과 마음을 들어 높이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두 번째가 중요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신비속으로 들어가 그분을 발견

하는 것이다."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토마스 머튼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실제로 그렇고, 그죠? 이미 우리안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을 내가 발견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discovery'(발견) 발견하는 것이 

기도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듣던 기도의 정의하곤 조금 많이 다르죠. 이제 이 기도에 대해서 설명하기 전에 

다시 토마스 머튼의 삶속으로 들어가서, 토마스 머튼이 어떻게 해서 이런 기도에 대한 정의를 

내리게 되었는지 하나 둘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머튼도 지난 시간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와 별반 다름없이 처음부터 기도에 

대해서 그렇게 뭐 중요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고, 또 기도에 대해서 점점점 기도함으로써 배운 

분이시지 처음부터 뚝딱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그렇게 기도에 대해서 아신 분이 아니셨

습니다. 나중에 또 설명하겠지만 토마스 머튼은 마지막까지 당신은 초보자라고 설명을 합니다. 


우선 제가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생애를 우리가 복습하는 의미에서 토마스 머튼이 처음으로 기도한 때가 

언제였습니까? 네, 기억나시는 분도 계시고 기억 안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토마스 머튼이 처음으로 기도했다는 대목은 토마스 머튼이 로마에서 성지순례 했을 때, 

기억나시죠? 성 고스마와 다미안 성당에서 토마스 머튼이 그 비쟌틴 모자이크를 바라보면서 

뭔가 압도되는 체험을 했죠. 그래서 과연 '저 모자이크에 그려져 있는 저 분,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은 과연 누구일까.'라고 궁금해 했고 그래서 어떻게 했죠? 네, 신약성서를 사서 읽고 그 

다음에 처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토마스 머튼이 처음 기도에 대한 걸 시작했지만 그때의 기도는 그냥 그저 

초보적인 기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토마스 머튼이 좀 더 본격적으로 기도에 

대해서 뭔가 새로움을 주었던 부분은 또다른 하느님 체험이 있었는데 그때는 자기 자신을 

봉헌하게 됩니다. 이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이 먼저 아까 제가 앞서 이야기해 드린 그 쭈글

쭈글한 이야기에서 보면 하느님이 먼저 토마스 머튼을 바라보신 거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거기에 응시해서 예수님을 같이 바라보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토마스 머튼이 쿠바 하바나에서 하느님을 체험했죠.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미사하는 중에 'heaven is in front of me.'  '하늘이 바로 여기 있다.'

라고 생각을 하면서 깨닫게 되면서 그 안에서 깊은 하느님의 체험으로 모든 것이 압도되어서 

'마치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는 거였다.'라는 그런 표현을 썼던 기억이 나실 겁니다. 


이때 토마스 머튼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 예수님께 자기 자신을 

어떻게? 네, 봉헌했다, 그러죠. '제가 이제는 사제로 살아가겠습니다.'라고 봉헌을 하고 또 

그 첫미사는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다짐했죠. 기억나시죠? 그래서 자기 봉헌의 기도를 이때 

드렸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토마스 머튼은 1941년에 수도원에 입회를 해서 전통적인 그런 수도원의 기도 방법

들을 배워나가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무일도를 매일 바쳤죠. 그리고 묵상기도, 렉시오 

디비나, 뭐 여러가지 관상적인 기도도 배웠을 거고 또 철저한 그런 고행생활도 배웠을 겁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한 여러가지 이론적인 것 뿐만 아니라 실제로 기도하는 분이셨죠. 실제로 

기도하지 않을 때에는 기도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해도 기도에 대해서 이해한다는건 참 

어렵습니다. 기도는 이 머리로 하는 기도뿐 아니라 마음으로, 온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튼 토마스 머튼은 그렇게 삶을 통해서 기도의 삶, 특별히 관상적인 기도의 삶을 살아가는 

수도원 삶의 전통적인 그런 기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근데 토마스 머튼은 단순히 그런 형식

주의적인 뭐 전례적인 거, 그 다음에 몇 시에 뭘 하고, 관상적인 그런 개인기도 뿐만 아니라 

어떤 수도원 안에서 일과에 따라 하는 그런 형식적인 기도의 틀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기도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토마스 머튼은 물론 전례에 대한 기도도 굉장히 

사랑했고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르는 것도 너무너무 사랑했구요, 그렇지만 토마스 머튼은 이런 

구분된 기도, 예를 들면 아까 제가 설명한 것처럼 소리 기도, 묵상 기도, 관상적인 기도 이렇게 

처음에는 그런 구분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토마스 머튼은 관상적인 기도가 처음에는 

굉장히 우월한 기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런 형식적인 틀들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토마스 머튼이 1964년 12월 12일에 쓴 편지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저는 믿음과 단순성 안에서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는 자유와 평화를 그들이(수련자들)

사랑하게 되도록 힘쓸 것입니다. 또한 모든 쓸모 없는 자신의 힘으로 얻으려는 수고와 모든 

형식주의에 대한 노력이나 집중을 줄이고, 모든 불필요한 구분을 없애고자 합니다. 그릇된 

방법 안에서 공식적인 기도의 삶의 장치들에 대해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여러가지 형식주의적인 그런 기도를 구분하는 거, 그 자체가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거, 또 하느님을 발견하는 거, 또 기도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깨어나는 거,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만이 하느님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는게 아니라, 모든 기도 방법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사실 이런 비슷한 체험을 한적이 

있습니다. 제가 수도원 입회한 지 얼마 안되서 몇 년후에 관상기도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고 

그 다음에 이제 군대 제대하고 와서 그런 관상기도에 대해 맛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함께 입회한 동료 수사님 가운데 한 분께서는 묵상시간에 우리가 관상기도를 바치고 

있는데 그 분은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겁니다 혼자서 마음 속으로. 그래서 그때 당시에 

혼자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아, 우리가 이제 수도자가 되었으니까 로사리오 기도는 평신도

들이 하는 기도니까 그런 기도보다는 좀 더 고차원적인 이런 관상기도를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하는 이런 생각을 했고, 또 그 수사님에게도 직접 그런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참 교만했다는 것을 이제사 깨닫게 됩니다. 사실 그런게 있는게 아니죠. 

우리가 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뭐 관상적인 기도, 향심기도라든지 이런 

기도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더 고차원적인 기도가 있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뭐 소리 기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그런 염경기도를 하더라도 우린 관상으로 들어갈 수 있고, 또 그런 기도를 

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심지어 우리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할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보는 그 자체가 하나의 큰 교만이고 또 그 자체가 하나의 모순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도 똑같이 말합니다. 

어떤 형식적인 틀에 얽매이지 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기도에는 어떤 우월적인 

것이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약하고 고요히 기도하는, 또 약한 모습들 이 안에서도 우리

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온전히 나를 내어놓는거, 이거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을 비워내고 전적인 가난함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앞에 주님의 종이라고 

겸손되이 고백할 수 있는 것도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무엇보다도 

뭔가를 내가 뭔가를 주님께 말씀드려서 뭔가를 성취해 내려는 거, 흔히 우리가 생각할 때 내가 

뭔가 바라는 것을 아뢰고 내가 바라는 것을 아뢰서 주님의 뜻을 바꿀려고 하는 것, 그래서 

주님의 뜻을 바꾸어서 내가 이루려는 것, 뭔가를 성취하려고 하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안이 잘 되게 해주시고, 

자녀들이 직장을 잘 얻게 해 주십시오. 부모님을 낫게 해주십시오.' 뭔가 청하는 것, 물론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청하라, 받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좀 더 깊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준비하기 위해서 주님의 뜻이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거, 그게 더 주님께 합당하고 주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뭔가를 성취하려고 하기보다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더 성숙된 자세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것이 이제 눈앞에 보일 때는 고통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보다 더 큰 분이시잖아요. 그래서 더 큰 손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그분의 뜻에 따라서 뭔가 청할 때는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청하는게 좋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좀더 더 주님과 더 나아갈 때는 바라는 것들을 주님이 다 아시기 때문에 

더이상 말로 기도를 표현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이제 어느것이 더 좋다 나쁘다는 

표현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가운데에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토마스 머튼이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토마스 머튼의 여러가지 책들을 읽어보면요, 토마스 

머튼은 어떻게 기도했다는 그런 대목을 참 찾기 어렵습니다. 근데 물론 이제 수도원안에서 

기본적인 성무일도를 바쳤겠죠. 근데 토마스 머튼이 압둘 아지즈라는 분에게 보낸 편지부분

에 이런 표현을 합니다. 


"저는 기도에 관한 매우 단순한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의지와 하느님의 사랑에 전적으로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명상은 예언자에 의해 묘사된 다음의 내용과 유사합니다. 

'마치 당신이 하느님을 뵙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 앞에 있어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 현존앞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 토마스 머튼이 했던 기도방법인 겁니다.


그리고 기도는 몰랐던 하느님을 새롭게 내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나중에 또 좀더 더 영적인 성장부분에서 설명해 드릴텐데, 기도는 지금까지 내가 

몰랐던 내 안에 이미 있는 하느님을 발견하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그죠? 그래서 지금까지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통해서 더 새로운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발견하게 되고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신비속에서 내 자신이 다시 깨어나고 하느님으로

부터 다시 새롭게 변화되는, 또 하느님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그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알아가고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과 하나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하느님은 마지막까지 우리가 알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또 체험한다 하더라도 

그 체험은 한정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고, 또 기도를 통해서 

더 깊이 하느님을 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또 기도를 통해서 준비된 그 영혼안에 하느님의 은총이 

내릴 때, 더 깊은 하느님과의 충만한 일치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기도함

으로써 기도를 배운다고 했습니다. 오늘부터 여러분들이 새로운 방법으로 나에게 맞는 기도

방법들을 찾아나가십시오. 지금 기도가 좀 무미건조하고 힘들고 또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기 힘들다면 또 다른 기도방법들을 한 번 찾아보십시오. 그래서 나에게 맞는 기도 방법을 

찾아가는 것, 또 실제로 조용히 10분이나 20분 기도를 통해서 주님께 나를 봉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거.



이거 명심하십시오. 

기도는 자기 만족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느님께 그 시간을 봉헌하는 시간입니다. 


다음 시간에 제가 이제 기도의 분심에 대해서도 설명해 드리겠지만 기도 때 내가 좀 분심

하거나 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도 이미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고 또 봉헌된 시간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많은 다양한 기술을 배우는 것이, 기도에 대한 요령을 배우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나의 삶을 봉헌하고 나 자신을 봉헌하고 또 그분 곁에 머물며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기도라는 생각을 먼저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오늘부터 이제는 내 안에 이미 와 계신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그분을 만나러 

가도록 합시다. 또 그분을 발견하러 조용히 그분 곁에 머무는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먼저 바라보고 계시고, 내가 거울을 보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자주 주님께서는 나를 바라보고 계시고 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만 

바라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정말 사랑의 눈으로, 아까 제가 '하트 뿅뿅' 그렸잖아요, 그죠? 

그것처럼 사랑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랑하도록 합시다. 

다음 시간에 또 기도에 대해서 설명을 드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