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만남/18회 머튼의 신앙 성장과 나의 영적 성장 1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27. 11:22


+ 찬미예수님,

성 베네닉토 왜관수도회 소속 박재찬 안셀모 신부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주님 축복속에서 평안하셨는지요? 오늘은 토마스 머튼이 어떻게 영적으로 성장해 나갔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이 나눔을 시작할려고 합니다. 우선 먼저 기도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토마스 머튼이 <고독속의 명상>에서 나눈 말씀입니다.


아버지, 제가 알지 못하는 당신을 저는 사랑합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당신을 껴안습니다.

제가 마음을 상하게 해드린 당신께 저 자신을 맡깁니다.

당신은 제 안에서 당신의 외아들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제 안에서 그이를 보십니다.

당신은 제 안에서 그이를 껴안으십니다.

왜냐하면 그이는 저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간

그 사랑으로 저와 완전히 하나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T.M)


하느님, 당신 아드님의 마음 닮은 모습으로 저희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하느님, 저희가 당신 아드님의 사랑과 같은 모습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하느님, 저희 안에 있는 당신 아드님이 깨어나 저희가 당신 아드님과 같은 모습으로 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제가 특별히 이 토마스 머튼의 고독속의 명상에서 나오는 대목을 따온 이유는 이 안에 우리가 어떻게 영적인 성장을 해야하는지가 잘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안에 있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랑받으시고, 또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 그러니까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이미 일치해 있다는 것을 이 말씀은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토마스 머튼은 이 고독속의 사색을 통해서 여러가지 영적으로 깊이 나아가는데, 특별히 더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이미 체험하신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적인 성장한 사람의 요소중에 하나가 개방성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또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들의 모습중의 하나는 분리된 게 없다 그랬죠! 

통합 된 신앙을 갖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자유로워지고 또 영적으로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그런 힘도 생기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게 뭐라고 그랬죠? 네, 자비로운 사랑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영적으로 성장해 있는 사람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님 잘 아시죠? 이분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20살에 사람은 신이 주신 얼굴을 갖고 있으며, 40살에는 삶이 준 얼굴을, 그리고 60살에는 스스로가 얻는 얼굴을 갖고 있다."


제가 나름대로 이것을 고쳐서 이야기를 좀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10대에는 하느님이 주신 얼굴을 갖고 있으며, 20대 30대에는 성형외과 의사가 준 얼굴을 갖고 있으며, 40살에는 화장품 회사가 준 얼굴을, 50살에는 삶이 준 얼굴을, 그리고 60살 이상은 하느님께서 주신 마음의 얼굴을 가져야 한다.' 제가 나름대로 그냥 이렇게 생각나는대로 몇 가지 적어봤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60살 이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나이에 상관없이 영적으로 깨어날 때, 우리 마음의 얼굴은 예수님의 얼굴이 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영적으로 깨어나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얼굴, 예수님의 영적인 얼굴을 갖게 될까요? 앞으로 이 영적성장에 대한 이 나눔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그 해답을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우선 영적인 성장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여러가지 제가 디딤돌, 걸림돌 이야기를 드렸었죠?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여러가지 장애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장애물들이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하나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걸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영적인 생활에 충만한 성숙은 필연적으로 영적 죽음의 내적 위기를 동반하는 불안, 번민, 갈등, 공포를 통과하지 않고는 달성할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영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 여러가지 고통, 번민, 실연, 또 어두운 그림자 같은 부분들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죠. 그래서 땀을 흘리고 나름대로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을 때 우리는 더 새롭게 성장해 나가기 때문에, 지금 내가 고통속에 있거나 혹은 불안 또 힘들거나 혹은 또 어떤 번민이나 갈등이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도 지금 어려움 중에 있다 하더라도 좌절하지 마시고, 이 성장은 계속해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제 토마스 머튼이 그러면 어떻게 영적으로 성장해 나아갔는지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객관화의 작업이 필요하겠죠. 토마스 머튼이 처음부터 어떤 영적으로 어떤 보편적인 신앙의 그런 단계에 들어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그런 개방성의 단계, 또 자비로운 사랑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게 아니었죠.  처음에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도 몰랐고 또 하느님을 거부하고 거절하기도 했죠.


그래서 어떤 하나의 단계를 이렇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잣대가 필요한데, 저는 그 잣대로써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신학자인 제임스 파울러(James Fouler)라는 분의 이론을, 신앙발달의 단계라는 그런 이론을 개발해 내신 분인데, 이분의 단계를 통해가지고 이 단계에 토마스 머튼을 한 번 맞춰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토마스 머튼을 혹은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떤 틀에다가 맞추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꼭 맞지도 않구요, 하지만 대체적으로 신앙이 이렇게 성장해 나가는데 그러면 토마스 머튼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떻게 성장해 나갔고 어느 정도 부합하는가, 이것을 살펴본다면 토마스 머튼의 어떤 영적인 성장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제임스 파울러(James Fouler)라는 분은 누구냐 하면, 1840년에 태어나가지고 최근에 1915년에 별세한 분이신데 교육 심리학자인 장 피아제(Jean Piaget ) 아시죠? 그분의 이론을 기초로 해서 일반 이론들을, 심리학적인 여러 이론, 예를 들면 로렌스 콜버그(L.Kohlberg)라는 분, 또 에릭 에릭슨(E. Erickson) 아시죠? 에릭 에릭슨은 이제 그 심리, 마음 심리발달의 인격성장의 단계를 나누신 분이시죠. 이런 분들 여러 심리학자들의 이론을 토대로 해가지고 신학자로서, 우리 신앙도 처음부터 이렇게 완성된 신앙이 아니라 하나, 둘 성장해 나가는데 이 연령대별로 하나, 둘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여러 이론을 바탕으로 해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이 제임스 파울러의 이 이론에 비추어서 토마스 머튼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 제임스 파울러의 이론도 뭐 절대적인게 아닙니다. 여기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한계도 제가 나중에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제임스 파울러가 이야기한 신앙의 발달단계 첫 번째 단계는 0단계로서 영아기와 미분화된 신앙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는 0세 태아때 부터 해가지고  2세때까지의 과정을 영아기로 표현을 했는데 미분화된 신앙의 단계다.


그래서 이 단계는 어머니 뱃속에 태아때부터 받은 어떤 태교로부터 해가지고 태어나서 특별히 어머니와의 어떤 신뢰된 관계,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어머니가 안아주고 했던 그 어머니와의 어떤 굳건한 신뢰를 갖는 관계, 이게 친밀하면 친밀할 수록 신앙도 나중에 더 발달되어 나가고 또 성장해 나갈 수 있다. 그런 이론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말도 잘 못하고 여러가지 언어라든지 이런게 없고 어떤 무의식의 단계라고 볼 수 있겠죠.


저도 예전에 어머니께서 제가 어머니 뱃속에 태아로 있을 때 어머니께서 쓴 육아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근데 어머니께서 그 당시에 육아일기를 적으면서 제 이름을 안셀모라고 정하셨어요. 그래서 그 육아일기에 보면 안셀모가 이제 내 배를 발로 찬다. 이런 내용도 있고, 뭐 지금 막 애기가 안셀모가 나올 것 같은데 아빠를 불러야할까, 이런 것도 글로 적어놓았던 걸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저는 모르겠지만 무의식중에 어머니로부터의 아주 그런 친밀한 관계, 이런 것들이 제가 신앙생활을 하고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어머니의 그 육아일기를 보면서 굉장히 감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아마 여러분들도 영아기때, 태아때 그 어머니와 태아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한번 어머니한테 여쭤보시고, 또 어머니들은 내 자녀들이 어떠했는지 한번 살펴보시는 것도 신앙의 성장에서  단계를 보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기는 모든 앞으로의 영적인 그런 성장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신뢰관계, 친밀한 어머니와의 신뢰관계가 중요한 시기입니다. 토마스 머튼도 이 시기를 살펴본다면,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이 다 화가였죠. 그래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했다는걸 보면 그만큼 토마스 머튼이 태어났을 때, 그 첫 번째 아기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어머니도 그 아기를 굉장히 소중하게 여겼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아마 토마스 머튼은 계속해서 성모님에 대한 그런 갈망, 또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그런 신뢰, 이런 것들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이 시기에 어머니의 그런 따뜻한 신뢰관계가 기초가 되지 않았나, 굳건한 신뢰관계가 기초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아마 이 미분화된 신앙은 아주 잘 갖추어졌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또 어머니가 굉장히 엄격하고 또 굉장히 세심했다고 그럽니다. 또 섬세하기도 했구요. 그래서 그런 어머니의 어떤 엄격함과 섬세함도 토마스 머튼에게 어떤 무의식의 영향을 미쳤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사실 뭐 유아세례를 받긴 했어요. 토마스 머튼은 아버지가 성공회 신자였는데, 잘 아시다시피 유럽에는 태어나서 세례받고, 그 다음에 결혼할 때, 또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미사 하러 성당에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냥 의무적인 그런 하나의 행사로써 유아세례를 받았던 것 같애요. 그래서 어린 시절에 토마스 머튼은 제대로 된 종교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퀘커 교도였는데 그 퀘커 교도 모임에도 잠깐 가기도 했지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그러고 또 어머니도 아버지도 이 신앙교육에 대해서 관심도 없었다고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선 토마스 머튼의 미분화된 신앙은 어느 정도 그대로 어머니의 굳건한 신뢰관계로 인해서 잘 다져졌다라고 평가될 수 있을 겁니다.


두 번째 제1단계죠. 앞 부분은 제임스 파울러가 0단계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단계 3세부터 7세의 단계는 제1단계로 표현했는데, 제1단계는 직관적.투사적인 신앙이라고 토마스 머튼이 표현을 했습니다. 이 3세부터 7세는 보통 유아기라 그러죠.  유아기에는 대개 다 모방하는 단계입니다. 그죠. 아버지 어머니, 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그런 말이라든지 표현이라든지 또 습관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모방하는 단계, 또 환상을 통해서 서로 배우는 단계, 뭐 환상의 차이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어떤 신앙의 영향도 많이 받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그러는데 자기 손주가 있는데 자기는 신앙생활을 굉장히 열심히 하는데 열심히 하는 자기 자신을 보고는 그 손주가 아멘할매, 아멘할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그런 어머니의 할머니의 어떤, 그 다음에 이제 다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냥 따라하는 그런 신앙의 단계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신앙의 시기라고 볼 수 있다고도 합니다. 어린애들이 다 대개 다 자기 중심적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내 뜻대로 안 되면 소위 말해서 땡깡부리고 울고 불고 하죠. 그래서 안 되면 드러눕기도 하고 그러는 것처럼 신앙도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라 그냥 자기 중심으로 하느님을 바라보고 자기 중심의 어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또 한편으로는 엄격한 도덕률에 대해서 강조를 많이 받게 됩니다.


특히 부모님들이 이건 해도 돼, 이건 안 해도 돼, 이런 것들을 교육을 많이 합니다. 이걸 해서는 안 되는 걸 하면 어머님들이나 아버지가 꾸중을 하거나 막 그렇게 하죠. 그래서 도덕적인 그런 금기 이런거에 대한 어떤 강박관념 같은 게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신앙심은 어떤거냐 하면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하고,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살아야 되고, 그래서 벌하시는 하느님, 착한 사람은 상주시는 하느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시기도 바로 이 시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사실 이 시기는 3세부터 7세 동안에 직관적인 투사적인 신앙은 거의 받지 못했다고 보여집니다. 어머니가 특히 6살 때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죠. 그래서 어머니와 사별하는 그런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신앙의 개발뿐만 아니라 인격의 개발이라든지 뭐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아서 정지된 상태에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암울한 시기, 절망의 시기 또 나아가서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더 큰 충격을 받게 되죠.


그래서 따뜻한 하느님, 나를 보살펴주는 하느님, 내 곁에 계시는 하느님, 이런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나중에 개발되게 됩니다. 지금 이 시기에는 개발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항상 어머니 아버지가, 특히 어머니가 곁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의 부재가 토마스 머튼의 직관적 투사적 신앙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많이 미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 세 번째이지만 2단계 입니다. 신화적. 문자적 신앙단계라고 합니다. 이 단계는 8세부터 12세, 우리 초등학교 보내는 시기죠. 이 때 글을 깨치고 물론 요즘은 더 이른 시기에 글을 깨치기도 합니다. 요즘 영어를 하는 애들도 많구요. 아무튼 신화적이고 문자적인 신앙을 갖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어떤 하느님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그런 신화적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인간의 어떤 형상으로, 이걸 이제 성경학자들은 '신인동형설'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가지 어떤 하느님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하느님을 자꾸 그리기도 하고 또 글로 나타난 하느님, 성경을 통해서 배우는 하느님, 그리고 여러가지 좋은 책들을 통해서 배우는 하느님 등, 여러가지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을 배우기도 하고 이 시기에도 많은 아이들이 책에서 나오는 여러가지 사실들을 통해서 하나, 둘 배워나가는 것처럼, 신앙도 마찬가지로 그림을 통해서 배우기도 하고, 그런 이 시기가 바로 신화적 문자적 단계의 신앙이라고 표현 합니다.


그리고 이 단계는 좀 더, 예전에는 자기 중심적이었다면 조금 더 타인의 관점으로 사람들을 볼려고 하고 또 하느님을 볼려고 하는 그런 신앙이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타인을 생각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속한 집단에 국한됩니다. 예를 들면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은 좀 더 더 우리 집단이 아니라 다른 집단, 나와 다른 집단에 대해서 혹은 나와 다른 종교까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직 미숙한 신앙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가족, 혹은 우리 교회, 우리 집안, 여기에만 마음을 쓰게 되죠. 그래서 아직 좀 미숙한 단계의 신앙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토마스 머튼의 초등학교 시절, 8세부터 12세 이 시기에는 토마스 머튼의 문자적 신화적 신앙이 그렇게 개발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 시기를 그냥 쓸쓸하고 외롭게 많이 보냈습니다. 아버지도 여행을 자주 다니시고, 그림 그리는 화가였기 때문에 그랬다 그랬죠. 그래서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았고 또 친척집에 있는 시간도 많았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 자신이 <칠층산>에서 유일한 종교적인 시기였다 표현하는 그 시기는 바로 몸이 안 좋아서 프라빌 부부의 가정에서 머물던 시기가 있었죠. 그 부부가 토마스 머튼을 좀 돌봐주었습니다. 그때 이 부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그래서 토마스 머튼에게 신앙을 권유하기도 하고, 또 토마스 머튼도 아, 신앙을 갖는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라는 그런, 자기 자신은 신앙이 없음에 대해서 한번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었던 거죠. 그렇지만 나중에 이 반항아적인 기질을 가졌던 머튼은 내심 신앙에 대해서 부러워하면서도, 밖으로는 겉으로는 신앙을 가진거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막 거부하고, 또 반박하기도 하고 막 그랬던 기억이 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때, 이 시기에 토마스 머튼이 짧게나마 그런 종교적인 생각을 가졌지만 이내 사라지고 맙니다.  근데 이제 토마스 머튼은 그 다음 단계에 이르러서는 복합적으로 앞 단계를 같이 함께 배우게 되는데, 그 다음 단계가 뭐냐면 제3단계인 종합적.관습적 신앙단계입니다. 종합적.관습적 신앙단계!이 단계는 청소년 시기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어떤 형식적이고 조직적인 조작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신앙 공동체에 순응하는 법도 배우게 되고, 그리고 또 인간의 어떤 상호적인 인간에 대한 어떤 관점, 나와 너를 볼 수 있는 그런 능력, 그리고 또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믿는 신앙에 대해서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능력, 그리고 그런 보편적인 신앙안에 순응할 수 있는 능력도 이제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 자율성이 부족하죠. 그러니까 아직 진정한 나의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 종합적.관습적인 신앙의 단계에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봅니다.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고 평가하는데 여기에 지나치게 의식해서 좀 더 능동적인 그런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청소년기이기 때문에 이 부모의 신앙과 자신의 신앙이 충돌하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어릴 때는 우리 자녀들 보셔서 아시겠지만 말 잘 듣습니다.


성당에 가자 그러면 성당에 억지로라도 가고, 기도하자 하면 억지로라도 기도합니다. 그렇지만 청소년기 지나면 기도하는 시간, 성당에 가는 시간들을 부모님에 대해서 반항하는 기질이 생깁니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해서 거부하기도 하고, 또 논리적으로 나름대로 반박도 하죠. 하느님은 계시지 않아, 또 부모가 믿는 하느님을 또 거절하는 경우도 있죠. 그래서 이 사이에는 충돌이 일어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토마스 머튼은 어떠했는가? 토마스 머튼은 이 시기에 청소년기 시기에 신화적.문자적인 신앙과 그 다음에 종합적.관습적인 신앙을 함께 갖게 됩니다. 물론 16살때 아버지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 점점 이제 특별히 로마에서 어떤 하느님 체험을 했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처음으로 모자이크 그림을 보면서 신화적인 신앙이 형성된 거죠. 그리고 처음으로 뭘 했다 그랬죠? 네, 처음으로 신약성서를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표현을 제가 드렸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문자적인 신앙이 점점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특별히 토마스 머튼은 미국으로 이주를 하면서 로마로부터 이제 성지순례 돌아와가지고는 반항아적인 그런 기질을 계속 가졌고 방탕한 생활을 했죠. 그렇지만 결국은 미국으로 이주를 하면서 거기에서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좋은 사람들, 또 좋은 책들, 또 여러가지 종교적인 체험을 통해가지고 머튼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었다고 제가 말씀을 드렸죠.


그래서 이 시기에 진정 나의 하느님을 만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좋은 책들을 통해서, 문자적인 신앙이 형성되어 가고, 또 점점 좋은 사람들을 통해서 어떤 그런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은 신앙들을 갖게 되는거죠. 사랑의 체험을 통해서 또 갖게 되기도 하구요.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 시기에 굉장히 신앙이 빨리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결국은 미사에 가라, 미사에 가라는 그런 음성을 듣고는 가톨릭으로 세례를 받게 되죠. 1938년에 그죠! 기억나실 겁니다.


그래서 이 종합적.관습적인 신앙을 넘어서서 

그 다음 단계는 바로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을 만나는 단계, 

이 단계를 제임스 파울러는 개별적.반성적 신앙, 영어로는 'Individual-reflective faith'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진정으로 나의 하느님을 만나는 때가 됩니다. 

이 시기에 도달하는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사실! 토마스 머튼은 이 시기를 통해서 진정 나의 하느님을 만나고 

그 이후로 바로 수도원에 입회를 할 수 있게 되었죠.


그래서 이 시기를 제임스 파울러는 비신화화된 신앙이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뭐 하느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마치 그런 분, 수염이 달리신 분, 

혹은 늘 착하고 항상 전지전능하시고 인간을 좌지우지하시고 마치 염라대왕과 같은 그런 모습의 

어떤 신화적인 모습, 기적을 일으키시고 막 이런 분으로 하느님을 이렇게 상상하게 되죠. 

그런데 탈신화 하는거죠. 비신화화 하는거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볼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보통 제임스 파울러는 20대에 있는 사람들이 대개 이 신앙을 이룬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하고 안 맞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20대에 이루면 좋겠지만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대부분의 성인들은 20~30대에, 30~40대에 나의 하느님을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린 시절에 만나는 사람도 있구요.


저 같은 경우에는 10대 때, 고등학교 2학년, 3학년 이 즈음에 하느님을 처음으로 이제 제대로 만나게 되었고 그래서 수도원에 들어갈 수 있는 힘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나이하고 좀 안 맞는 경향도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좀 더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네, 이 단계는 아직도 계속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게 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아직도 나의 하느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자신의 관점에서 그 다음에 자신의 세계관으로 다른 사람들을 통합시킬려는 그런 경향을 가진다고 제임스 파울러가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자기 신앙의 정체성, 아까 말씀드린 나의 하느님 이야기, 그리고 자기 비판적인 반성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이 시기에 갖게 된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 시기는 굉장히 신앙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입니다.


근데 이 시기가 3단계가 아까 종합적.관습적 신앙이라고 그랬는데 이 4단계 개별적.반성적 신앙으로의 전이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 전이가 어려운 이유를 제임스 파울러는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교회의 많은 청년이나 대학생들이 신앙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갖거나 교회를 떠나게 되고, 아니면 다른 집단의 신앙생활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것도 바로 이 3단계로부터 이 단계로의 전이가 힘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리차드 니버라는 분이 신앙의 성장에서 이야기할 때, 영원한 정신과 마음의 혁명이며 신앙의 성장은 끊임없는 삶의 혁명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이 시기에 많이 갈등하고 또 고민을 해야 됩니다. 갈등하고 고민이 없는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니라 죽은 신앙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3단계에서 4단계로 전이가 일어나기 위해서 많은 고민도 하고 또 의심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의심은 죄가 아닙니다. 불신이 죄죠. 믿지 못하는 게 죄죠.


그래서 의심하면 의심할 수록 더 많이 공부하게 되고 더 찾게 되고, 자신의 힘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날 때, 토마 사도처럼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또 못자국을 볼 때, 그 하느님을 알아보았던 것처럼, 그리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진정으로 고민하고 갈등하는 그런 단계가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이 4단계로의 전이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이렇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신앙의 모습을 우선 갖게 됩니다. 그리고 또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의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부모님의 하느님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 하느님을 거부하는게 아니라  부모님을 거부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떠나게 되죠.


그래서 많은 부모님들께서 어릴 때는 우리 자녀들이 복사단도 열심히 하고, 뭐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는데 요즘은 성당에 안 나와요. 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 아이들이 하느님의 때가 되면 의심을 버리고 토마 사도처럼 나의 하느님을 만나게 되면 새롭게 하느님을 또 만나러 올 겁니다.


그리고 신앙의 경직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나의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 어린 시절의 그 하느님에 고착되어 가지고 그 관점으로만 다른 신앙을 보기 때문에 더 성숙한 신앙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하고 계속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봐서, 진정한 신앙의 성장에 어떤 다른 경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부정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고, 이성적인 논리로만 신앙을 보기 때문에 믿음의 눈을 갖지 못하게 되는거죠.


그리고 계속해서 이분법적인 사고, 이것 아니면 저것, 혹은 또 성당 아니면 교회, 성당 아니면 가정, 혹은 직장, 이렇게 성당 아니면 또 세상, 세속적인 것, 이렇게 구분하는 그런 논리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또 이 시기에 필요한 것은 어느 시기보다도 진정으로 비신화, 

그러니까 하느님을 넘어서서 어떤 이념적이고 

혹은 어떤 신화화된 그런 하느님을 넘어서서 진정으로 나의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좀 더 공부하고 기도하고 하는 그런 시간들도 필요합니다. 

리고 따뜻한 사랑의 체험, 신앙의 체험도 필요할 겁니다.


오늘 4단계까지 봤는데 앞으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서 살펴볼텐데 그 전에 토마스 머튼이 어떻게 또 개별적인 신앙의 단계, 반성적인 나의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토마스 머튼은 두 번 만난 것 같애요. 그래서 이 부분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제일 중요한 그 요소중의 하나는 나의 하느님을 만나는 겁니다. 자녀들이 설령 아직 부모님의 하느님의 단계에 머물러 있더라 하더라도 좀 더 기다려주는 자세도 또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나는 지금 나의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가. 또 다른 사람들이 말해주는 하느님이 아니라 나의 주님께 진정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지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