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하다(Doing)와 되다(Becoming)? / 20회 대담: 영적 성장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29. 11:33



김남희 교수 : 찬미예수님, 다시 인사드립니다. 지난 시간에 토마스 머튼의 영적성장에 대해서 안셀모 신부님께서 깊이 있는 강의를 해주셨는데요, 오늘 시간에는 그 깊이 있는 내용을 좀 더 신부님과 나누어 보면서 저희가 몰랐던 이야기, 그 다음에 저희가 잘 모르고 있는 단어들, 개념들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다시 인사드립니다.


박재찬 신부 :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김남희 교수 :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어머니의 사랑, 성모마리아의 사랑!  네, 하루하루 잘 체험할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음~! 그 토마스 머튼 영성의 핵심이 신부님께서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라. 라는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하셨거든요.


박재찬 신부 : 네, 훌륭한 학생이십니다.^^


김남희 교수 : 네, 공부 많이 했으니까요. 그런데 과연 어떻게 하면 내 안에서 예수님께서 살 수 있게 할 수 있나. 방법이 뭘까요 신부님?


박재찬 신부 : 네, 참 좋은 질문이면서도 또 굉장히 어려운 답변이기도 합니다. 이게 우리가 우리 안에 내가 온전히 사라지고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내 힘으로는, 제가 거듭거듭 강조하지만 토마스 머튼의 영성에서 핵심도 하느님의 은총이잖아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셔야지만 가능한 것 같습니다.


근데 우리가 필요한 것은 지난 시간에 우리가 대담때도 말씀 나눈 것처럼 나를 비워내는 것, 이 공간이 있어야 들어오시죠. 어떤 뭐 영적인 그런 들어옴은 다른 공간이 필요없이 빛과 같이 스며들면 그 빛이 비추면 모든 것이 다 환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 안에 이제 열려진 마음, 하느님 은총의 마음, 믿음의 마음 또 순종의 마음, 그리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려고 하는 마음, 이런 마음들이 우리 안에 자리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은총으로써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을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수님을 보고 누군가가 교수님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치 성모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잖아요. 그러면 이제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산다는 것이 다른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거죠.


그래서 작은 예수님이 되어간다. 이런 표현들을 우리가 많이 씁니다 그죠?  뭐 비움의 영성, 나눔의 영성도 쓰지만 결국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일치하는 것, 일치하기 위해서 정말 많은 내가 붙들고 있는 것, 나 자신에 대한 집착, 재물에 대한 집착, 또 뭔가 어떤 자리에 대한 집착 이런 것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이제 하나, 둘 주님을 더 우선시하면서 포기되어지고, 그래서 정말 주님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갈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비워져 있는 내 마음, 그 안에 채워져 있는 충만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게 되는거죠.


김남희 교수 : 아,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갑자기 떠올랐는데 그 헨리 나우웬이 결국 내가 예수님이 되어가는거다 라고 하셨는데 거기서 신부님께서 사랑에 관한 것을 'becomin'g '되다'와 'doing' '하다' 라고 했는데 그 차이점이 뭔가요? 신부님.


박재찬 신부 : 네, 그건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고 토마스 머튼 영성에 있어서 핵심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토마스 머튼의 책을, 원서를 읽으면 be 동사를 많이 써요.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도,   'becoming love' 혹은 그렇게  'doing' 하고 'becoming'을 비교를 많이 하더라구요. 근데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었어요. 왜 사랑이 된다고 표현할까? 사랑은 하는건데 그죠.


근데 사랑이 된다는 거 앞서 질문한 것하고 연관이 됩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산다 그랬잖아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마음이 될 때,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있고, 그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마주오는 여러가지 사건들도 그때 그 마음으로 할 수 있는거죠. 

근데 사랑하는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죠?  

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사랑을 실천하잖아요. 

근데 그리스도인으로써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될 때

예수 그리스도가 될 때 내가 진정으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거죠.


그러니까 하느님의 하늘사랑을 하는거죠. 

그냥 인간적인 사랑도 물론 사랑이예요. 

근데 사랑도 등급이 있는 것 같애요.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 예수님께서 해 주신 그 자기 희생적인 사랑, 

그런 사랑들은 보통 사랑하고 다르잖아요 그죠?  

그래서 그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랑이 된다라는거, 

그래서 사랑이 되었을 때 'doing'은 뭐 저절로 되는거죠. 딸려오는거죠 그냥 그죠. 네.


김남희 교수 : 사랑하기의 전제조건은 사랑되기가 되어야 한다.


박재찬 신부 : 이 표현은 말 장난이 아니라 정말 깊이 묵상하시다 보면, 

아! 이게 바로 예수님의 그 사랑이 된다는게 바로 이런거구나! 하는 걸 깨달으실 겁니다.


김남희 교수 : 네, 지난 시간에 신부님께서 해 준 강의가 사실은 토마스 머튼의 영적성장의 종합을 얘기해 주셔서 그게  키워드(keyword)고,  그 키워드가 저희에겐 무겁지만 먼저 시작을 했는데요.  그 영적성장의 과정 가운데 신부님께서 참 자아가 있고 거짓 자아가 있고 그 다음에 초월된 자아가 있다. 스쳐지나가듯 해주시고 끝내셨기 때문에 그 세 가지 자아의 차이점, 무엇인가요?


박재찬 신부 : 거짓 자아라는 것은 결국은 표면적인 자아, 예를 들면 교수님이 가톨릭 대학교에 교수님으로 계시고 뭐 여러가지 많은 외적으로 활동도 하시고 강의도 하시고, 누구 누구의 딸이고 또 누구 누구에 관계되는 여러가지 자기 신분이 있을거잖아요. 그런 것처럼 그런 표면적인 자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경험적인 자아, 그동안 살아온 나의 자아의 모습, 그런데 참 자아라고 하는 것은 외적인 자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준 자아, 본래의 나의 모습인거죠.


제가 지난 시간에 영적성장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계속해서 토마스 머튼이 강조한 것중에 하나가 본래의 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 그 본래의 나의 모습이 참 자아이고, 그 본래의 나의 모습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거예요. 그런데 이게 여러가지 거짓 자아, 표면적인 자아에 의해서 가리워져 있는 거죠. 그래서 이 거짓 자아로부터 이제 자유로워져서 참된 자아를 성장시켜 나가는 거죠. 그래서 참된 자아, 하느님께서 본래 주신 그 자아를 회복한 자아, 이 자아를 'transcendent self' 초월된 자아, 이렇게 표현을 하는거죠.


나중에 불교에 대해서 다루면서도 이제 두 종교에 속해있는 이야기를 많이하죠 그죠. 불자이면서도 동시에 크리스찬이다 뭐 이런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죠. 그런데 토마스 머튼을 그쪽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토마스 머튼은 그런 쪽이 아닌거죠.


토마스 머튼은 불자도 아니었고 철저하게 그리스도교인으로써 가톨릭 수도승으로써 트라피스트회에 사셨던 수도승이셨어요. 왜 토마스 머튼이 '나는 불자입니다.' 라고 표현했을 때, 그 근본에 깔려있는 것은 바로 초월된 자아를 간직한 거죠. 하느님이 준 본래의 자아를 회복했기 때문에 경계가 사라지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토마스 머튼의 정체성은  'transcendent self'를 얻었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그건 맛배기로 조금 보여드렸고,  나중에 종교간 대화를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김남희 교수 : 네, 다음 시간에 다루겠지만 그 신부님께서 불교와의 종교간의 대화를 말씀하셔서 하나만 더 질문을 드린다면, 제가 어떤 인터뷰 기사에서 신부님께서 스승님과 2016년에 한 번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제 사찰을 방문을 했다고 들었었거든요. 그러면 그때도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 나누셨던 건가요?


박재찬 신부 : 아, 예. 그때 이제 제 지도교수님이랑 2016년이었죠. 지도교수님이랑 또 미국에 있는 윌리암 F 벤들리 신부님인데 그 신부님은 국제 수도승간 종교간 대화의 전체 대표이신 사무총장님 이십니다. 그래서 3명이서 직지사도 방문하고  운문사,  통도사, 계태사 라고 속초에 있는 절인데 제 지도신부님이 불교 미술에 관심이 있으셔가지고, 저희 지도교수님은 미학에 관심이 많으세요. 그래서 그쪽 관련해서 그분을 섭외해서 같이 만나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특별히 인상깊었던 곳은 직지사에서 '템플 스테이'(temple stay)를 같이 했어요. 저희는 물론 수도승이니까 그냥 수도복을 입고 참여했는데, 저희 교수님은 평신도이시기 때문에 절에서 주는 수행복을 입고 같이 참여를 했어요.


마침 또 그때,  다른 체코하고 동유럽에서 세 명의 외국 젊은이들이 왔어요. 마침 공교롭게도 그래서 같이 영어를 다 쓸 수 있으니까 같이 스님이랑 같이해서 템플 스테이를 같이 했어요. 그 세 청년들은 한국에 온 이유가 오직 이 템플 스테이에 참여하기 위해서 왔대요. 그만큼 이제 서양에서도 한국의 불교에 대해서 관심도 가지시고, 이런 동양의 어떤 종교에 대한 명상에 대한 이런 관심도 많이 있다는거죠.


근데 우리가 거기 주지스님도 만나고 교수님과 같이 대화도 나누고  또 계태사에서는 혜담스님이랑도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했는데~ 그 가운데 여러가지 대화를 많이 나누었는데, 많은 것중에 하나가 수행방법에 대한 거, 그 다음에 어떤 참 자아를 찾아가는 방법, 그리고 또 여러가지, 불교의 예를 들면 '십우도'(十牛圖)에 대한 거, 여러가지 불교의 수행생활의 방법들, 이런 것들을 서로 나누고 또 직접 우리도 해보고 체험도 하고 그런 좋은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김남희 교수 : 그럼 분명히 불교가, 불교에서 얘기하는 진아(眞我), 그러니까  참 자아라고 하는 것과 그리스도교의 참 자아, 그 다음에 더 나아가서 초월된 자아하고는 비슷하면서도 또 구분이 될 게 있을 것 같거든요.


박재찬 신부 : 굉장히 어려운 교수님다운 질문을 하셨습니다.


김남희 교수 : 그 이야기는 신부님 다음 시간에 불교와의 종교간의 대화에서 저희가 한 번 귀기울여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저희가 신부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한 번쯤은 저희가 또 알아야 될 부분이 있어서 여쭈어 보는데요, 그 부정신학과 긍정신학이 있는데 부정신학과 긍정신학의 구분을 좀 해 주시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길을 가는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통합된 길은 무엇일지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재찬 신부 : 아, 이걸 먼저 설명해드리면 좋을 것 같애요. 제가 이 칠판을 좀 사용하겠습니다. 우리가 절에 가면 '십우도'(十牛圖)에 여덟 번째 그림에 이렇게 원이 하나 그려져 있습니다. 보통 절에 가면 다 있어요. 이게 이제 무(無)를 상징합니다. 영어로는 'nothingness'겠죠. 없음을 뜻하는데 사실 없음이 아닙니다.


이 공간이 비어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채워져 있기도 해요. 이 비움과 채움 (가득함), 이게 너무 충만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비움. 이게 이제 십자가의 성 요한이 이야기하는 어두운 밤과도 연결이 됩니다. 부정신학이겠죠.


너무 어두운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뭔가 충만해져 있는 상태인거죠. 그래서 이 'nothingness' 동시에 'fullness' 충만함. 같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무 개념 안에는 공(空)사상과  연결되어 있어요. 불교의 공(空) 사상. 그러니까 충만하지만 한편으론 비어있고, 또 비어있지만 충만함을 같이 표현하는게 바로 불교의 공(空) 사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선 이해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자면 그 부정신학에서도 하느님이 너무 충만하기 때문에 내가 몰랐던 하느님이기 때문에 단지 아니 계시는 것 같고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은 더 충만히 계신거죠. 그리고 몰랐던 하느님을 내가 체험하고 나면 내 하느님관이 더 확장되어 가는거죠. 이게 또 다른 의미로써 영적인 성장이 될 수도 있는 거겠죠. 


그리고 뭐 다른 종교의, 우리가 불교 이야기를 잠깐 했지만 불교에서는 참 자아를 찾고, 진아를 찾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에서의 참 자아를 찾고 진아를 찾고 하는 것하고 비슷한 것 같지만, 또 마지막까지 달라요. 그게 뭐냐하면 마지막에는 토마스 머튼도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굉장히 비슷한데 마지막에 가면 그 인격적인 관계를 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참 자아는 하느님이 주신 자아예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아까 처음 질문하셨잖아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산다. 그게 바로 인격적인 그런 관계안에서 내가 사라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사라진게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내가 더 충만해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라짐, 무(無)와 또 충만해짐, 이게 같이 있는 겁니다. 이게 그래서 부정신학, 긍정신학, 아까 말씀드린 참 자아, 거짓 자아 이야기할 때 그리스도교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면 우리는 이야기가 될 수 없는거죠.


그러니까 주체와 객체의 일치 이야기를 제가 드렸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 무아(無我)라는 것은 온전히 자기가 소멸되고 진짜 진아(眞我)  회복하는 거잖아요. 근데 이 과정에는 어떤 인격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그냥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된 나를 회복하는거죠. 그런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하지만 참 자아를 깨닫고 발견해 나아가는 그러 과정들은 유사한 면이 없지않아 있죠.




김남희 교수 : 미리 강의를 들었는데요 신부님, 그리고 또 하나 궁금한 점은 토마스 머튼의 영적인 성장과정을 심리학자인 제임스 파울러와 연관을 지어서 설명해 주셨는데요, 저도 심리학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제임스 파울러와 그 토마스 머튼의 그 과정을 대입해서 연결한 걸 본 적이 없거든요. 신부님의 논문이신거죠. 


박재찬 신부 : 논문은 아니고 제가 박사과정할 때, 그 '심리학과 믿음의 발달'이라는 그런 과목이 있었어요. 제 석사학위 논문 지도교수님이 하시던 수업이었는데, 제가 아직 토마스 머튼으로 정하기 전까지는 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을려고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수업을 들을 때 이미 토마스 머튼도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둘을 접목을 시킨거예요.


그 가운데 수업 듣는데 이 제임스 파울러의 신앙발달단계에 대해서 배웠어요. 어, 이걸 보니까 토마스 머튼에 이걸 한 번 비교해 보면 좋겠다 해서 비교를 해서 페이퍼를 냈더니 교수님께서 참 잘했다고 평가를 해주셨는데, 사실 이 제임스 파울러의 그 이론은 뭐 여러사람들이 교육학자라든지 또 신앙 교리교사 하시는 분들이 많이 활용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근데 이 분은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토마스 머튼을 접목시키면서도 토마스 머튼의 나이에 따라서 된 것도 아니었고, 또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회개를 통해서, 갑자기 하느님 체험했을 때 그런 거, 그리고 또 지나치게 플라토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구요, 또 그 서구사상들은 항상 체계적이고 논리적이기를 원해요. 이 단계, 다음 단계, 다음 단계. 근데 신앙의 발달은 껑충 뛰어가는 단계도 있을 수 있어요. 그리고 또 굉장히 긴 시간을 요하는 경우도 있고, 하느님의 때는 우리가 언제 어느 때 어떻게 올 지 모르기 때문에 뭐 나이를 통해서  단순한 단계를 통해서 정리하기는 굉장히 힘든 것 같습니다.


근데 이 파울러의 이론이 그래도 도움이 되는 것중에 하나는, 아. 이렇게 이렇게 흘러간다. 이걸 잘 보여준 것 같애요. 마지막 단계 특히 그 보편화된 신앙  'Universalizing faith'에 대한 그 이야기는 정말 우리가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은 자비로운 사랑, 내가 모르는 타인을 향해서 나를 희생할 수 있는 사랑, 뭐 이런 사랑!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이런 사랑이 탁월한 사랑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죠. 우리 모든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잖아요 그죠?


김남희 교수 : 그럼 파울러가 놓친 한계점은 무엇인가요 신부님? 그 연령대별로 구분했다 라는 그 부분인가요?


박재찬 신부 : 아니요. 파울러가 놓친 것은 그게 아니구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연령대별로 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연령대별로 잘 안 된다는 거죠. 예를 들면 파울러는 20대에는 종합적이고 관습적인 신앙의 단계에 도달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안 도달한 사람도 많구요. 그리고 또 그 신앙의 단계는 여러가지 변수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걸 하나의 어떤 틀에 맞춘다는거는 사실 좀 무리가 있는거죠.




김남희 교수 : 네, 맞습니다. 파울러의 한계인거죠. 음,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토마스 머튼에 관한 주제로 논문을 쓰기 전에 심리학을 하고 싶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요, 정말 필요한 학문이 오늘날의 심리학이기도 했거든요. 또 지금 맞기도 하구요. 그런면에서 신부님께서는 왜 신학이 아니라 심리학을 박사학위로 할려고 하셨는지, 왜 전공할려고 하셨나요?


박재찬 신부 : 아, 사실 제가 심리적으로 문제가 좀 많습니다. 여러가지 이제 혼자 지내던 시간이 많다 보니까 자기 자아에 대한 관심, 또 영적인 치유, 또 영적인 변화 성장 이런거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저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방법중에 처음에는 심리학을 통해서 뭔가 내 안에 있는, 내 마음의 상태 또 내가 어떻게 발전해나가야 되는지 이런 것들을 살펴보고자 했었고, 또 가서도 공부 시작으로 심리학을 했었어요.  


그래서 석사학위때는 그 영적인 치유와 그 다음에 성장에 대한거를, 수도생활을 통해서 어떻게 영적인 성장과 치유를 이룰 수 있는가, 제가 궁금해서 논문을 썼었습니다.  근데 또 너무 재미나는 일화중에 하나는 논문을 검색하면은 구글에 나와요. 어떤 베트남 수사님께서 제 논문을 보셨나봐요. 그러고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저한테 메일이 왔어요. 신부님 논문이 너무 좋은데 이 논문을 베트남 말로 번역을 하고 싶대요.


그래서 저는 No 할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요. 나누면 좋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하십시오. 했더니 몇 달후에 정말 베트남어로 번역을 하셔가지고 출판을 허락해 달라고, 그래서 영어로 썼는데 이미 한국말로 나오기 전에 벌써 베트남어로 출판 되어 나와 있습니다. 근데 이 심리학을 하는 중에 보면 특히 북미는 사회학과 심리학이 많이 발달되어 있잖아요. 근데 최근, 옛날에는 여러가지 통계를 통해서 심리학을 많이 했었잖아요 그죠.? 아마 그 심리학에 익숙해져 계실 것 같애요.



김남희 교수 : 네, 저도 그래서 통계학을 배우긴 했었죠. 네네.


박재찬 신부 : 근데 요즘에서는, 옛날에는 심리학이 처음 '프로이드'나 유물 이야기할 때는 신학에 대해서 영적인 것 이런거에 관심을 안 가졌어요. 왜냐하면 이런 건 과학이 아니다. 심리학은 과학이다. 정확한 데이타를 통해서 또 실험을 통해서 나온 과학이라고 생각했었죠.


근데 요즘은 달라졌어요. 요즘은 그 영적인 것의 가치, 그 다음에 심리학이 점점점 뭐 초월 심리학이든지 또 여러가지 어떤 명상이라든지 어떤 영성에 대한 관심, 이런 것들을 많이 갖게 되었어요. 종교활동, 특히 내담자들 가운에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 많아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심리치료를 할 건가, 종교를 가진 사람, 갖지 않은 사람, 또 그리스도인, 뭐 불자들, 혹은 이슬람, 이 차이도 있어요.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제 심리치료를 해 줄 건가에 대한 그런 여러가지 연구들도 하고 있구요.


그리고 이제는 정확한 데이타는 아니지만 어떤 케이스를 통해가지고 어떤 교회에서 하는 여러가지, 성당에서 하는 여러가지 활동들, 또 영적인 그런 훈련들, 이런 것들이 심리치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들을 하고 있어요. 오히려 요즘은 심리학이 이 영성신학이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추세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김남희 교수 : 그런 점에서 신부님의 학문분야는 영성신학과 심리학이 전공이시잖아요. 딱 지금 현대사회에서,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거라는 생각이 들고, 이제 또 계속하시게 될 강의가 점점  더 기대가 됩니다.


박재찬 신부 : 저도 그러길 빕니다. 저도 부족한게 많아서요.


김남희 교수 :  아닙니다. 신부님! 그런 면에서 또 하나 여쭙고 싶은게 지금 심리학이 영성과 관련된 관심이 많다 라고 했는데 저희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는 표현들이 있어요. 또 거기에서요.  심리치료, 그 다음에 영적치유, 그 다음에 영적지도 이렇게 하고 있는데, 이 세 개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인지?


박재찬 신부 : 아, 예.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요즘 여러가지 심리치료에 대한 '사이코테라피'(Psychotherapy) 같은 것도 많이 나오구요, 근데 일단은 '심리'자가 들어가면 마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심리치료라고 그러면 마음이 비정상적인 마음이 정상적인 마음, 그러니까 어떤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 또 사람들과의 대인관계에서 원만해지고 뭐 그런게 어떤 심리적인 치유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근데 이 영적지도라든지 영적치유는 좀 다른 차원입니다. 

우선 영적치유는 사람이 하는게 아니고, 영적지도도 사람이 하는게 아니고 성령께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에 이걸 몰랐을 때는 심리학적인 어떤 그런 기교라든지 상담기법, 이런 걸 많이 알면 영적지도를 잘 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했어요. 물론 영향은 미쳐요.


영적지도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기본적으로 심리적인 그런 상담기법들을 알고 있을 필요가 있구요, 근데 결국은 제가 거기가서 배운 것중에 하나는 그리고 제 마음이 이걸 배우고 난 다음에는 굉장히 편해졌어요. 결국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또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라는 겁니다.


영적지도자는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거죠. 이쪽으로 가십시오. 이쪽으로 갑니다. 아, 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는거죠. 근데 그 역할도 그 심리적으로 많은 부분이 필요하겠지만 결국은 영적치유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이구요, 그리고 요즘은 전인적인 치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내가 영적으로 편안해지고 하느님안에 충만해 있을 때 몸이 아프더라도 극복할 수 있어요. 그리고 너무 아프더라도 마음이 편안해요. 근데 내가 지금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러면 어떤 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영적으로도 영향을 미치죠.


그래서 영적인 안정된 생활,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거죠. 

그래서 그 영적인 치유나 그 다음에 영적지도나 뭐 사목상담도 마찬가지고 

이런 것들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는 그런 역할이 있는거구요, 

그리고 또 어떤 마음의 안정이나 이런 걸 넘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거, 이걸 지향하는게 아니라 또 영적인 삶, 초월된 삶,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 관상적인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도해주고 이끌어주는 것, 이게 바로 영적인 지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영적지도 이 부분을 배우고 난 다음에는 굉장히 마음이 편해졌어요. 아, 내가 하는게 아니고 성령께서 하시는 거니까. 전에는 감정이입이 되어 가지고 특히 고해소에서 나오면 온 몸이 다 지쳐요. 왜냐하면 그 사람의 너무 힘든 이야기를 듣고 나면 거기에 나도 힘들고, 어떻게 도와줄 수 없을까 이렇게 했는데, 그게 아니고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맡겨드리는 그런 마음이 생겨나서 굉장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김남희 교수 : 그러면 한국에서도 이런 영적지도와 그 다음 영적치유를 할 수 있는 이런 공간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 추세인가요? 어떻게 보세요?


박재찬 신부 : 그러기를 바라는데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제가 파악을 못했습니다. 제가 아직 한국에 온 지 얼마 안되서. 아, 근데 여기서 좀 부연설명 해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무엇보다도 뭐 피정이라든지 어떤 특별한 기회를 통해가지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면담도 하고, 또 영적인 치유도 받고, 고해소를 잘 활용할 수 있는거, 물론 판공성사라든지 이런 시간에 면담성사를 청하는거는 뒤에 사람들한테도 그렇고 신부님한테도 힘든 걸겁니다.


식별이 필요합니다. 근데 평소에 시간나실 때 그런 기회를 통해 가지고 고해성사는 직접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도 고해소는 세탁소가 아닙니다. 고해소는 예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김남희 교수 : 네, 정말 와닿는 말씀인데요.


박재찬 신부 : 우리 흔히들 고해소 가서 죄를 씻고 온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고해소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이고, 예수님께 치유받는 자리이고, 또 예수님께로부터 영적인 성장을 위한 어떤 가르침을 받는 그런 장소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특별한 기회에 잘 활용하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김남희 교수 : 네, 저도 꼭 해 봐야 되겠습니다. 신부님!  마지막 질문인데요, 신부님 자신에게 있어서 영적인 성장이나 어떤 치유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분이나 아니면 무엇이 있었다면 무엇일까요?


박재찬 신부 : 네, 물론 토마스 머튼처럼 저도 영적으로 높은 레벨에 있는 그런 사람도 아니고,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또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하고 기다리고 있는 그런 사람중의 한 명입니다. 저도 지난 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부족한게 참 많고 또 예전에는 미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거기에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그런 시간도 있었고, 근데 저한테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중에 하나는 쓰러지는 체험이랄까요! 아,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그리고 정말 어두운 밤처럼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잃었을 때, 그 때 누군가가 저를 이끌어주었고, 그 이끔에 큰 역할을 한 게 토마스 머튼 신부님이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 신부님을 통해서 그분도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아, 나도 그렇게 쓰러지고 나도 그렇게 다시 일어날 수 있구나! 하는 그런 용기를 갖게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 신부님이 제가 완벽해서 좋아하는게 아니라 그분도 우리와 똑같이 부족하고 또 쓰러지고 일어나고 하는 그런 과정을 겪으셨기 때문에 제가 토마스 머튼 신부님을 좋아하고, 그렇지만 토마스 신부님이 절대 전부가 아닙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기 위해서 이 신앙의 여정을 걷는 거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할 때 앞에 설명한 영적성장이라든지 또 영적인 그런 완성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거죠. 그리고 토마스 머튼 신부님이 말년에 쓴 책 가운데  'Contemplative Prayer'라는 책이 있는데 마음의 기도라고 번역되어 있을 겁니다.


그 기도에서도 이런 표현을 해요. "정말 저는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저는 아직도 신앙에 있어서 초보자입니다." 이런 표현을 써요. 그래서 정말 우리는 끝까지 하느님 앞에 어린 아기이고, 끝까지 하느님 앞에 누구도 완성되었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부족하지만 계속해서 하느님께 의탁하고, 오늘 쓰러졌지만 다시금 일어나서 주님께 죄를 고백하고 다시 주님과 사랑을 속삭이고 또 무미건조한 듯한 그런 사막을 걸어가고, 그리고 또 좋은 사람 만나서 그 안에서 또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The gate of heaven is everywhere'라는 표현을 제가 썼잖아요. 하느님의 천국으로 가는 문은, 하느님을 만나는 문은 모든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 또 고통의 시간을 통해서 다가온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 저 역시 그런 여러가지 방법들로 하느님께서 저에게 말씀해 주셨구요,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싶은 거는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거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하느님 때가 옵니다. 교수님도 아마 하느님 때를 많이 경험하셨을거란 생각이 드는데, 하느님의 때가 오면 그분이 또 우리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항상 깨어 준비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와 함께 하심을 다시금 또 깨닫게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구요, 넘어지고 일어나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그러고 있습니다.


김남희 교수 : 네, 맞습니다. 음, 사실 신부님과 대담을 나누면서 질문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더 많은 그 질문들이 신부님을 통해서 제가 저를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 같고, 아마도 시청자분들도 같은 심정일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 시간이 단순히 강의가 아니라, 단순히 대담이 아니라 하나의 피정의 시간이라는 생각을 많이 갖게 됩니다.


박재찬 신부 : 네, 좋은 지적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표현이세요.


김남희 교수 : 시청자분들도 많이 그럴거라 생각하면서 먼저 인사부터 하겠습니다. 제임스 파울러가 저희에게 제시한 것은 매 시기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관습적인 신앙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문자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하느님께 투사시켜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거든요. 선생님들은 어떠신가요?


저는 저를 돌아보면서 하나는 믿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바로 토마스 머튼이 있기 때문인거죠. 그 토마스 머튼이 갔었던 길을 저희도 같이 가면서 결국 하느님을 향한 길로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마치구요 신부님께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오늘 대담 감사드립니다.


박재찬 신부 : 좋은 피정이었습니다.

김남희 교수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