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초연함 /21회 머튼의 하느님 이해와 영적 치유 1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30. 12:23


+ 찬미예수님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 신부입니다지난 한 주간도 주님 축복 속에서 다들 평화로우셨는지요우린 지금까지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배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주제로 다루어 왔었습니다처음에는 생애를 중심으로 해서 머튼이 한 하느님의 체험에 대한 것 , 그리고 기도와 관상 그리고 영적인 성장에 대한 것들 그리고 고독과 침묵 그리고 성모님의 영성에 대해서도 살펴봤었죠.

 

오늘은 뭐에 대해서 다루어 보면 좋을까요제가 준비한 내용이 어떤 것일지 여러분들이 한번 맞춰보시면 좋겠습니다우선 여러분들에게 재미난 에피소드를 하나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사랑하는 사이에, 사랑하는 경우하고 집착하는 경우는 조금 차이가 난다 그럽니다예를 들면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서로 전화통화를 하는데 전화가 안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는 사랑하는 사이에는 왜 전화가 안되지?’  하고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본다 그럽니다.


그런데 집착하는 경우에는 지금 전화 통화 안 한지 벌써 4시간 24분 34초째야도대체 뭘하고 있는거지?’ 하고는 시간을 재고 있는 답니다집착하고 있는거죠그리고 사랑하는 사이에는 서로 전화할 때에는 상대방에게 집중합니다그래서 전화가 오면 오늘은 뭐했어? 그리고 오늘 어떻게 지냈어 아픈데는 없어?’ 이렇게 상대방에게 집중해서 전화 통화를 하는데집착하는 경우에는 상대방보다는 주변의 소리에 더 집착한다고 그럽니다그리고 주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릴 때에 주변 소리에 집착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고 그럽니다. ‘지금 옆에 있는 여자 누구야?’

 

물론 오늘 제가 이제 집착에 대해서 다루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하지만 살면서 우리는 참 많은 부분에 집착하며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예를 들면 연인 사이에도 서로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그런 집착들그리고 사람에 대한 집착, 또  재물에 대한 집착 그리고 어떤 분들은 자기 자리에 대한 집착또 어떤 분들은 자기 재주능력에 대한 그런 집착들도 있구요그죠?


여러 가지 집착에 대한 것들이 있습니다. 또 그 가운데 가장 우리가 뿌리 뽑기 힘든 집착은 아마 자아에 대한 집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집착이 계속 이어질 때에 그것이 고착화 되고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럴 때 삶이 더 힘들어지고 그리고 더 불행해지는 것 같습니다.


집착 혹은 애착에 대해서 '조시무스 아빠스'라는 분은 이렇게 말을 하셨습니다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것이 해로운 것이 아니다그 무엇인가에 애착심을 갖게 될 때 그것이 해롭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집착,  집착에 반대되는게 뭘까요저는 집착에 반대되는 것은 바로 초연함이라고 생각합니다. 'Detachment'  집착은 애착, 'attachment'라고 볼 수 있겠죠.


오늘 이 시간에는 제가 초연함 'Detachment'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토마스 머튼도 이 초연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굉장한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혹은 은총이 필요하다이런 말씀을 하셨는데이 초연함이 과연 토마스 머튼의 영성에서 왜 이렇게 중요하고, 또 왜 그렇게 머튼이 강조를 했는지 오늘 이 시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그래서 머튼의 초연함에 대해서 가장 잘 알려줄 수 있는 그런 기도문을 함께 준비했습니다함께 기도를 바치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 저는 평화에 대한 집착을

관상생활과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현존이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감미로움에 대한 집착을 포기합니다.

저는 당신의 의지와 당신의 영광만을 사랑하기 위해 저 자신을 당신께 드립니다.

만약 당신이 제가 당신을 갈망하는 제 나름의 방식을 포기하기를 원하신다면,

그것은 오직 저로 하여금 당신을 확실하게 차지하고

당신과 결합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


저는 이제부터 당신의 은총에 힘입어 관상상태를 누리는 것에 대해,

저 자신을 위해 그런 완전함을 누리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조급하게 애태우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에 저는 오직 당신만을관상이나 완전함이 아니라 당신만을 찾겠습니다.


그러면 아마 저는 당신이 제게서 원하시는 단순한 일들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평화와 침묵 가운데 

저만의 자아를 감추고 유해한 자만심을 벗어나

눈에 띄지 않게 완벽하고 순수한 의도로 잘 해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 기도에서 여러분들은 이해하셨는지 모르겠어요토마스 머튼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저는 평화에 대한 집착을관상생활과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현존이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감미로움에 대한 집착을 포기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평화현존에 대한 감미로움기쁨 이거는 우리가  추구해야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대부분일 겁니다저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요그런데 토마스 머튼은 이것도 집착이라고 이야기하면서 포기해야 한다고 그럽니다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요오늘 이 시간 이 나눔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이것을 이해하고 더 성숙한 더 깊은 영성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선 초연함은 'seperation' 분리를 뜻합니다

그 영적인 여정에서 초연함은 이 창조물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외적인 뭐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이 있죠

특히 아까 제가 앞에서 집착에 대해 이야기 했던 것처럼 

집착하고 있는 모든 많은 것들은 다 외적인 것들입니다.  

외적인 창조물로부터 분리되어서 오직 참된 행복을 하느님께로부터 찾는 것! 

이것이 바로 초연함입니다.


그래서 초연함은 물질적인 소유 혹은 또 어떤 심리적인 안정감, 혹은 또 평화를 추구하는 그런 마음뭐 유명세혹은 권력에 대한 마음들건강요즘은 건강에 대한 것도 많죠

이런 외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서 진정한 행복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주님께로 온전히 들어가기 위해서 초연함을 추구한다

이렇게 토마스 머튼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초연함은 우선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물러나는 것에서 시작되어 집니다.

그리고 초연함은 창조물에 대한 애착, 집착 

그리고 심지어 하느님의 선물에서도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 이것이 초연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론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이 바로 초연함입니다. 



그런데 사실 뭐 창조물자아 또 그리고 외적인 여러가지 자리지위건강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사실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그래서 토마스 머튼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한 두명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고 우주의 붕괴를 막는 사람들입니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초연함을 온전한 하느님으로부터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우주의 붕괴를 막는 사람이다

이렇게 굉장히 토마스 머튼은 이런 분들이 위대함을 높이 세우지만 

사실 또 이런 사람들은 몇 명 안된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만큼 초연함에 도달하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사실 뭐 그냥 단순히 이제 우리가 침묵하거나 무관심한 것, 이것하고는 다릅니다

초연함은 깊은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아주 깊은 그런 영적 덕목 중에 하나입니다

아마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저도 아마 이 초연함에 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저도 잘 알고 있고, 

또 정말 이 덕목에 도달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간절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정말 이기심과 애착,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 힘으로 넘을 수 없는 이 산을 우리가 어떻게 넘어가고 어떻게 

이 초연함에 도달할 수 있는지

또 이 초연함이 도대체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선 초연함은 그리스도교 영성 안에서 사막 교부들로부터 해가지고 계속 이어져 내려온 영성 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덕목 중에 핵심 덕목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초연함은 사랑을 품고 진실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이다라고 토마스 머튼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초연함은 단순히 어떠한 세상 살아가는 지혜라든지 뭐 그런 것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있을 때 진정으로 가능해지는 영적인 아주 깊은 단계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리고 초연함은 진실로 사람을 사랑하고 또 섬길 수 있게 해주는, 

그래서 진정으로 영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게 해주는 그런 힘입니다. 

그래서 이 초연함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크나큰 하느님의 은총이기도 하면서도

또 계속해서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덕목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런 초연함에 도달할 수 없는 이유를 융통성 없는 경직성 때문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명상의 시간> 책에 보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적순결과 섬세한 양심의 초연함과 정화에도 

진정으로 거룩한 사람들조차 대부분 전혀 알지 못하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가장 엄격한 수도원에서도 완덕을 닦으려고 있는 힘을 다하는 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도 모르는 이기심에 얼마나 지배를 받고 있는지 

그들의 덕행이라고 하는 것들이 편협하고 인간적인 이기심에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는지 

생각조차 못합니다진정으로 사람이 초연해지지 못하는 것은 

사실 흔히 열심하다는 사람들의 이런 융통성 없는 경직성 때문입니다.”


통성 없는 경직성! 

그러니까 하느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실 때, 

그 은총에 맞춰서 자기 자신의 뜻을 숙이고 ’ 라고 할 수 있어야 되는데 

자기가 생각하는 그 하느님자기가 생각하는 그 예수님 혹은 자기가 생각하는 그 성덕, 

거기에 고착화되어 있을 때 융통성 없는 경직성을 갖게 되고, 

그래서 변화할 수 없고 그래서 부드러워질 수 없고 그래서 자유로워질 수 없는 거겠죠.

    



그런데 이 초연함에는 다양한 레벨이 있습니다

제가  세 가지 레벨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외적인 레벨이 있습니다

외적인 초연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움입니다

뭐 여러 가지 외적인 게 많죠창조물도 있고, 심지어 자기가 기르는 강아지에 대한 애착도 있을 수 있겠죠 집착. 그래서 물질적인 것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게 초연함에서의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내적인 레벨이 있습니다

이 내적인 레벨이 뭐냐하면심리적이고 그리고 감각적인 것들! 

자 우리가 어느 누구, 제가 초반부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말 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며 사랑해야 되는데 집착하는거죠이 사람은 내꺼야혹은 이 사람은 내 생각대로 움직여야 돼혹은 이 사람은 나만 사랑해야 돼물론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물론 그렇게 서로 사랑하고 서로 소유하고 서로 함께하고 결혼해서 사는 거겠죠.


그렇지만 집착할 때 그 사랑의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해주지 못하고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때 내적으로는 그 사람과 진정한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거죠미숙한 사랑을 하는거죠그래서 내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것은 상대방의 심리혹은 또 내 자신의 감정에 대한 것들로부터 좀더 자유로워 지는거죠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고착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나 아픔아버지가 나한테 했던 말또 그 사람이 했던 말그 말 때문에 계속해서 벌써 10년 20년 전에 한 말인데 그거 가지고 계속 지금까지도 거기에 붙들려서 자유롭지 못하고 거기에 집착하고 그래서 그 잣대로 그 사람을 끊임없이그 사람은 이미 많이 변하고 성장하고 심지어 세상을 떠난 사람인데도 그 사람에 대해서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욕하고 혹은 또 마음속으로 그 사람에 대해서 저주하고 있는  어떻게 나한테 감히 그럴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면 내적으로 아직 자유롭지 못한거겠죠그래서 감각적 혹은 감성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적으로 좀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과거라든지 그 사람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 사건그 사람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그런 시간들을 많이 가지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과거에 나에게 힘든 말을 했던 사람, 또 나에게 굉장히 무거운 여러 가지 외적인 또 내적인 어려움을 주었던 사람들이 떠오를 때, 그 사람을 마음속으로 이렇게 떠올리면서 주님께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말씀드리십시오.


그리고 나중에 그 모든 이야기들을  모든 내 안에 있는 힘겨움과 고통의 시간들을  주님 그 시간 제가 그 사람 때무에 너무너무 어려웠습니다하지만 이제 그 사람을 당신께 맡겨드립니다.’  이렇게 하늘로 올려드리는거죠그렇게 나 스스로가 그 시간들을 하느님 안에서 봉헌할 때, 그 시간들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실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이런 영적인 치유문제는 다음 시간에 영적 치유에 대해서 다루면서 조금 더 깊이 이야기 해드리겠습니다.

 


이제 내적인 레벨이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우선은 초연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외적인 물질적인 것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말합니다여러 가지 좀 더 가볍게 살아가는 거죠가볍게 좀 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소유하는 것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소유해서 내가 그 소유물의 노예가 되는 거하고,  그 소유물을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그런데 그것을 집착없이 그것을 자유롭게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때 그것은 사랑이 되는 거죠.


그래서 물건을 가지고 있는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거기에 따라서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외적으로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것이 아니라 누가하느님께서 나에게 잠시 사용하라고 주신거죠

그런데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나의 자유를 통해서 보다 큰 사랑을 위해서 사용해 나가면 여러분들은 더 큰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이 초연함에 첫 발을 내딛게 되는 거겠죠.

 


내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외적내적인 초연함을 갖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데 

토마스 머튼은 여기에 더 힘든 영적인 레벨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레벨이 뭐냐하면 기도에서 오는 기쁨,  혹은 하느님 현존,  또 기도하면서 우리가 얻은 내적인 평화,  이런 것들도 집착이 될 수 있다 그럽니다

집착그래서 이것도 과감하게 이 레벨에서는 포기하라.  

여기에 얽매이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좀 이해가 잘 안되죠?


왜 기도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지거나 기뻐질 수 있잖아요너무 감사하고 좋지 않나요그런데 왜 이렇게 이런 걸 하느님 현존에 대한 것, 평화에 대한 것, 이런 것들이 왜 집착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 했을까요토마스 머튼은 이것이 또다른 측면에서 하느님과의 사이에서 어떤 그런 관계 안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이 기쁨하느님 현존에서 오는 평화, 이것도 온전히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 하느님의 창조물피조물입니다그래서 이것도 역시 피조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기도의 초기 단계에서 올 수 있는 그런 단순한 기쁨, 혹은 이런 것들이 찾아 올 수는 있지만 이것도 이제 그 기쁨에 감사하고 바로 이어서 버리라고 그럽니다

왜냐하면 이 기쁨, 이 평화, 자기가 초기에 느꼈던 이 기쁨이 평화에 집착하게 되면 

하느님상이 고착됩니다. 그래서 그것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제가 하느님 체험편에서 잠깐 이야기 해드렸던 것처럼하느님은 이런 분이라고 자기 나름대로 만들어 놓아버리는 거죠그러다보니까 하느님은 그거보다 더 크신 분이고또 우리가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분이신데 자기가 처음에 체험했던 그 하느님

그래서 계속해서 그 하느님을 갈망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다른 하느님더 깊이 있는 하느님더 나보다 크신 하느님을 만날 수 없게 되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오는 기쁨으로 다시 되돌아갈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그때 열심히 했었고 기도할 때 뜨거운 체험을 갖었었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메마르고 건조하고 기도도 안되고 왜 이렇게 힘듭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당연합니다그래야 되구요그래야지 사막을 건너서 그 다음 단계인 또 다른 가나안 약속된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거죠.


근데 오아시스, 이건 오아시스라고 볼 수 있겠죠. 오아시스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우린 약속된 땅에 들어갈 수 없을 겁니다그래서 이 오아시스를 포기하는 것

이게 바로 영적인 레벨에서의 초연함에 이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런 표현을 씁니다.


영적인 레벨  "현세의 쾌락과 욕망은 포기했습니다그러나 보다 고차원적이고 신비하고 영적인 쾌락과 욕망을 얻었습니다예를 들면 때때로는 수도승이 기도나 단식신심활동이나 봉사어떤 외적인 고행, 또는 책이나 영성체계에 몰입하거나 묵상방법 혹은 관상자체기도와 관련된 크나큰 은총덕행그 자체로 영웅적이거나 높은 성덕인 것들에 마음을 쏟을 수 있습니다성인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그런 것에 대한 거룩한 것에 대한 무절제한 욕심 때문에 판단력을 잃게 되고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겁니다.”

 

거룩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느님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 평화나 관상기도 중에 오는 평화와 내적인 그런 기쁨에 대해서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관상이라는 것도 결국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적 평화에 대한 느낌 역시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포도주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적 의식은 맥주와도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피조물일 따름입니다.”

 

재미있게 와인이라던지 맥주에 비유를 해서 하는데 토마스 머튼이 맥주를 좋아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토마스 머튼 사진을 보면, 옛날에 찾아온 손님들과 맥주 마시는 장면들이 있는데 이 토마스 머튼이 이제 내적인 평화라던지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의식이라든지 체험 그 자체도 하나의 피조물이라는 겁니다그래서 이것도 아까 제가 이야기했죠

창조물과 피조물과 하느님 사이에서 창조물로부터도 분리 되는 것. 이것이 초연함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영적인 쾌락 역시 집착이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아 사실이런 표현을 쓰기에는 아직 우리가 너무 좀 기초적인 단계에저를 포함해서모든 분들이 그렇게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그런데 그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사실 성당에 있으면 너무 좋아요성당에 있으면 기도하면 좋고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영적인 담화를 나누면 참 좋습니다그리고 또 선행을 베풀거나 할 때도 좋구요근데거기에 너무 중독 되어서 나의 일상을 못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도를 하루 종일 열심히 하고 묵주기도도 몇 십단씩하고 그리고 성체조배도 하고 매일 미사도 하고 하지만, 정작 가사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열매 없는 기도입니다한쪽으로 치우친 기도이지요영적인 쾌락, 그냥 가만히 있는게 좋은거죠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가만히 있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왜냐하면 영적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실제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또 실제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겠죠.


토마스 머튼은 영적인 쾌락도 영적인 집착이라고 본 겁니다이렇게 표현합니다

명상과 내적평화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느낌은 영성의 쾌락이고 다른 것들은 물질의 쾌락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것에 대한 집착은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과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하느님의 무한한 기쁨에 절대 깊이 빠져들지 못한다

관상의 초보자들에게나 주어지는 보잘 것 없는 위로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그냥 달콤한, 예를 들면 우리가 사탕을 계속 먹게 되면 치아가 썩죠우리는 밥을 먹어야 됩니다영적인 쾌락은 바로 그런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그 순간 내가 행복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계속해서 그 순간만 있는게  아닙니다무미건조하고 맛이 없는 맹물과 같은 그런 시간들도 필요하구요또 구체적으로 여러 반찬들이 어울려서 우리 식사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기도하는 시간봉사하는 시간 또 하느님께 나 자신을 헌신하는 시간들, 또 여러 가지 독서하는 시간공부하는 시간 이렇게 방송보시면서 하느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 영적인 것들에서 배우는 시간이성적인 것감성적인 것의지적인 것이 모든 것들이 조화롭게 이루어질 때 우리 신앙이 하나로 통합되어 갈 수 있는 거겠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제가 이렇게, 특히 영적인 쾌락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예전에 저희 선배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영성생활은 수도생활은 맹물과 같은 삶이다."  맛이 없다는 겁니다

그치만 우리가 물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죠

그것처럼 우리가 영적인 생활

이런 영적인 여러 가지 수행들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느님께로 갈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또 오시는 하느님을 잘 받아들이고 준비하기 위해서 맹물과 같이 아무 맛이 없지만 

그 물을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것처럼 

영적인 삶에서도 기도와 모든 영적인 것들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요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달콤한 사탕물이 아니라 

맹물이지만 그 맹물을 통해서 우리가 건강해지는 것처럼, 

또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영적인 삶을 영성생활을 이해하시면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나아가서 토마스 머튼은 이제 그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찾아오는 평화

이 평화도 집착이라고 그럽니다

참~ 집착이 아닌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그죠

머튼은 평화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도 경계합니다이렇게 말합니다.

 

그 평화는 영혼의 하위기능에 넘쳐 흘러 체험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 체험이나 평화스런 느낌은 항상 관상이 가져오는 뜻밖의 결과입니다."  

우연한 결과라는 겁니다.  

"그런 느낌이 없다고 해서 하느님과의 만남이 끝났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 느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평화로울 수도 있고 너무도 감미로울 수도 있고또 너무 뜨거울 수도 있고,  

잔잔한 그런 호숫가에 앉아서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면서 

그 안에서 어떤 하느님의 영적인 평화로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연히 주어지는 은총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없는 것그게 오히려 더 하느님과 더 깊은 일치의 표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평화나 하느님의 현존을 전혀 느끼지 못할 때에 

하느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 참으로 현존하신다.”

 

전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우리가 평화나 하느님의 현존을 전혀 느끼지 못할 때에,  하느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 참으로 현존하신다황홀한 마음이라든지 그런 느낌이라든지 그런 체험을 기대하지 마십시오오히려 그렇지 않을 때에 하느님이 더 깊이 현존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또 토마스 머튼은 활동이 활동에는 기도도 포함됩니다

이 여러 가지 분주한 활동뿐만 아니라 기도 안에서 집착하는 것도 포기해야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러 가지 우리현대인들은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위말해서 먹고 살기 힘들죠

그런 세상에 우린 살고 있습니다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또 퇴근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야 되고, 또 가기싫은 곳도 가야 되고 하기 싫은 것도 해야 되고, 가장으로서 또 자녀로서 해야 될 본분도 있구요여러 가지 우리는 많은 관계속에 얽매여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이 모든 관계를 제대로 잘 해 나가기 위해서 

그리고 또 내 모든 삶을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토마스 머튼은 

그 관계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그 관계로부터 집착으로부터 초연할 것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사실 우리가 그렇게 분주한 활동 속에서 진정으로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찾지 않을 때, 

우리는 곧바로 소진되고 말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은 결국 내적 힘이 소진하여 산산 조각나고 말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말을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왜냐하면 제가 그런 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예저에 제가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었죠장상협의회 일을 하면서 거의 4년의 마지만 해 때쯤 돼서는 거의 번 아웃 (Burn Out )되는  산산조각나는 그런 체험을 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리가 제 안에 없다는 것제 안에 저만 가득한일 중심으로 살아온 그런 모습을 통해서 완전히 산산조각나는 체험을 해서 이 말씀은 굉장히 저한테는 뼛속깊이 느껴지는 그런 말씀이기도 합니다.


토마스 머튼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이 채 피어오르기 전에 장작을 쌓아 관상의 불씨를 꺼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바라시는 것이라곤 

잠잠히 평화롭게 지내며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이루시기 시작하는 비밀스런 역사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뿐인데

그들은 마음속으로 하는 기도의 열기에 흥분하여 온 세상을 가르치고 회개시킬 

야심 찬 계획에 착수하고 맙니다.”

 

우리가 불을 지필려면 처음에는 잘 타는 것부터 시작해야합니다그렇게 해서 하나 둘 장작에 불을 지피고 활활 타오를 때, 장작을 넣어서 불을 지펴야 되는데 너무 많은 일들많은 계획들을 통해가지고 불이 채 타오르기도 전에 불이 꺼져버리지 않을까 이렇게 염려하는 마음,  그리고 또 관상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토마스머튼이 하고 있습니다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와 묵상에 대한 욕망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완벽한 내적평화와 묵상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기쁨에 대해서도 초연하지 않으면 

완전한 기도에 절대로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이 "New seeds of Contemplation" <새 명상의 씨>에서 이런 표현을 씁니다사실 우리가 기도하지도 않는데 이런 기도에서 오는 기쁨도 초연해지라 표현한다면 너무 앞서 나가는 걸수도 있겠지만, 아마 이 방송을 보시는 대부분의 많은 분들은 정말 기도생활 열심히 하시는 분들일 것입니다그래서 기도에서 오는 그 기쁨이 없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고,  또 기도에서 오는 그 기쁨이 찾아올 때 그 기쁨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또 지나가도록 흘려보낼 수 있도록 하면 좀 더 깊은 하느님 체험으로 나아가고 또 초연함으로 나아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가장 힘든 것은 바로 집착 가운데 자아에 대한 집착입니다

영적인 레벨에서의 집착뿐만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집착에서부터 이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재물에 집착하는 것, 내적인 심리에 대한 어떤 것과거에 대한 집착자기 삶에 대한 집착사람에 대한 집착또 영적인 그런 쾌락에 대한 집착이 집착 그 모든 뿌리에는 바로 자아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내가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행복하기를 바라는데 사실은 나를 버리지 않을 때 하느님이 주신 행복을 맛볼 수 없게 됩니다그래서 진정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모든 영성의 출발점이 바로 거짓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참 자아를 발견하는 것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제가 이제 초연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을 많이 드렸습니다

사실 이 초연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유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 믿음에 온전히 의탁하며 외적인 것들마주오는 것들  

여러 가지 어려운 것들로부터 초연해지고 또 좀 더 자유로워지고 좀 더 그분께 의탁해지는 것.


그래서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히려 세상의 것들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수단으로 도구로 쓸 수 있는 것

그리고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내 자신이 하느님께 봉헌되고 하느님을 위한 도구로 쓰여지는 것

이게 바로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초연함의 어떤 궁극적인 설명이고 또 궁극적인 이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러면 초연함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초연함을 넘어서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과의 깊은 내적인 일치를 위해서 이 초연함을 통해서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진정으로 우리가 자유로울 때,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유 속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지금 내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집착하고 있는 것붙들고 있는 것, 또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방해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한 주간 되시기를 빕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