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27회 대담: 머튼의 하느님과 영적 치유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4. 5. 12:18



김남희 교수 : 찬미예수님! 오랫만에 다시 인사드립니다. 지난 시간까지 저희가 토마스 머튼의 하느님에 대한 강의를 들었는데요, 오늘 이 시간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심지어 만져지지도 않는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서 저희의 삶과 어떻게 연결을 시켜서 내면화를 잘 시킬 수 있을지 그에 대한 고민들을 신부님과 이야기로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는지요?


박재찬 신부 : 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김남희 교수 :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강의를 듣고 저도 그렇게 살아볼려고 노력을 하는데 사실은 쉽지가 안잖아요. 왜냐하면 그 하느님이 전혀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보이지도 않고 또 하다보면 잊어버리고 그러다보니까 또 들리지도 않고 심지어 이제 저희가 감각적으로 만져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보니까 많이 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대한 반성을 저도 하면서 오늘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토마스 머튼의 하느님관에 대한 설명중에 제가 가장 인상깊게 들었던거는 하느님과의 그 변화였었거든요. 그 머리로 알던 하느님을 넘어서 가슴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기까지 아마 토마스 머튼은 많은 여정을 겪었었던것 같은데요, 그 가운데 혹시 토마스 머튼이 고민을 했었던 시간들이 있었을지, 또 있었다면 언제였는지 좀 설명해주실 수 있을런지요?



박재찬 신부 : 네, 그렇죠. 특별히 토마스 머튼은 하느님에 대해서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이었죠.

오히려 하느님을 거부하는, 하느님을 존재하지 않는다 . 이렇게 생각하는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나중에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미사에 나가면서 하느님을 알게 되고, 점점 전통적인 그런 하느님에 대한 어떤 공부를 하면서 이성적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면서 아, 이성적인 하느님, 머리로 아는

하느님이 전부가 아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토마스 머튼이 수도원에서 했던 매일 기도하고, 또 단순한 노동을 하고 또 성경을 읽고 그러는 과정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죠. 일단은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과 깊이 일치하는 그런 체험, 또 한편으로는 루이빌에서의 그 체험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사람들안에 계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때 비로소 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왔다고 저는 보여집니다.


그래서 아, 살아계신 하느님,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하느님, 그리고 자기 자신도 저 사람들 가운데

한 일부이고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아니 오히려 모든 이가 다 특별한 존재라는 것,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또 하느님을 가슴에 모시고 살아가는 신성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가 구약 성서에도 보면 '이마고 데이'( Imago dei) 해서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대목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  또 하느님의 신성을 씨앗처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죠.

근데 토마스 머튼의 삶에서는 처음에는 그 이성적인 하느님, 머리로 아는 하느님, 특별히 나만 알 수 있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모든 사람을 향한 하느님에게 건너가기 위해서, 건너가는

과정에서 토마스 머튼도 고민을 했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 있었죠. 그죠?


하느님의 체험은 내가 원한다고 뭐 주님, 보여주십시오 해서 만나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은총으로 준비된 영혼에게, 제가 예전에 관상과 기도에 대한 설명 드리면서 기름 이야기한 것 생각나시죠?

열 처녀 가운데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기름은 바로 하느님을 만나고 신랑이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깨어 준비하는 그런 작업으로써 우리가 영적인 생활들, 수행생활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셨을 때 우리가 금방 알아뵈올 수 있는 그런 눈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준비단계로써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토마스 머튼도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는 여정 가운데 그런 수행생활을 하는 가운데 은총으로 선물로 그 하느님의 체험을 하게 된거죠.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해서 하느님께서 다가오셨고 또 그러는 과정에서 특별히 불상 앞에서도 하느님을 만나는 그런 체험을 했습니다.


결국은 토마스 머튼이 하느님을 하나 둘 알아가고 체험하고 또 하느님의 신비속으로 들어갔지만 토마스 머튼이 하느님을 다 알았을까요? 다 체험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다 체험할 수도 없고, 다 알 수도 없고 또 맞습니다. 아까 만질 수도 없고, 근데 느낄 수는 있어요. 직접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가시적으로 여러 가지 환시를 봤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하나의

어떤 비유적인 표현으로 나타나는거죠.


빛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강렬한 뜨거운 어떤 그런 것들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엘리야같은 경우에는 기억나시죠? 산들바람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했다 이런 구절도 나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을 체험한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다가오시는데 그것이 또 하느님의 전부도 아니예요. 그죠? 그리고 또 체험한 그 하느님도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이 부분은 중요한데, 그 불교와 또 다른 아시아의 종교와 대화할 때도 이 부분이 큰  Key가

됩니다. 하느님은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언어, 인간의 감각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항상 비유를 통해서, 혹은 또 그 문화안에서 이해 된 언어를 통해서 혹은 감각을 통해서 묘사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아시아인들은 아시아인의 방법으로, 아시아의 언어로! 또 유럽인들은 서구인들은 서구인들이 알고 있는 그런 개념으로 설명하지만 그게 충분하지 않다는거죠. 그래서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그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더 충만해진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도 다양한 방법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만났고, 또 때로는 하느님이 다가왔지만 못알아 봤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분명히 그죠? 토마스 머튼이라고 해가지고 뭐 어떤 하느님과의 어떤 깊은 친교를 나눴지만 또 하느님을 전부 아시는 분도 , 전부 체험한 분도 아니니까요.


김남희 교수 : 네, 맞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토마스 머튼은 우리들에게 하느님을 찾을려고 하는 그 의지, 그 다음에 그 의지가 결국 또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으로 돌아온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무엇보다도 그 하느님을 찾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이 또 수도하시는 분들이어서 저는 토마스 머튼의 그 영적 변화과정에서 그래도 가장 감명을 받으셨기 때문에 신부님께서도 공부를 하셨구요,

그런 면에서 신부님께서는  어떠한 그 하느님 체험의 변화과정이 있었을까!  저도 개인적으로 궁금하구 시청자분들도 궁금할 것 같거든요.


박재찬 신부 :  제가 예전에 기도와 관상 부분을 이야기하면서 제가 만난 하느님, 또 저의 기도에

이야기를 쭈욱 한 번 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뭐 했던 걸 이 시간에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중요한 것은 저한테도 처음에는, 물론 모든 사람들이 대개 그런 시간을  겪을 겁니다. 특히 유아세례를 받고 커 온 사람들은 처음에는 하느님은 나를 귀찮게 하는 분이었죠.


아버지, 어머니가 '안셀모야, 기도하러 오너라' 그러면 무릎꿇고 앉아가지고 20분 30분 기도하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긴지 다리를 비비꼬고 했던 기억도 나구요, 그리고 거기 가기 싫어서, 왜냐하면 친구들은 놀고 있는데 그 놀고 있는 친구들이랑 같이 놀아야 되는데 기도해야 하고, 막 그런 것들이

좀 나를 귀찮게 하는 하느님, 힘들게 하는 하느님이었죠.


근데 나중에 제가 자취하면서 대구에 홀로 나와가지고 자취하고 또 친척집에 살고 하면서 그때는

조금 혼자 있는게 외롭고 힘들었어요. 근데 성당에 갔을 때 좋은 친구들이 있었어요. 교리교사 했던 선생님도 저에게 참 잘해주셨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아마 그때는 하느님께서 저에게 친구로

다가오신 것 같애요.


그리고 수도원에 들어와서는 제가 아버지에 대한 아주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요. 아버지는 항상 저한테, 저를 지지해 주시고 네 인생은 네거니까 네가 알아서 살아라! 항상 그러시면서 저는 아버지 하면 항상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분, 늘 변함없으신 분, 늘 묵묵히 자기 일을 하시는 분,

그런 분으로 이미지가 저한테는 있어요. 항상.


그래서 

제가 기도할 때, 

관상적인 기도를 할 때에도 제가 만트라 중에 하나도 '아버지'라는게 있습니다. 

호흡을 맞춰서 '아버지' 이렇게 계속 반복을 하는데 그러면 되게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만나면서 더 하느님께 대한 깊은 제 마음이 생겼고, 

그 다음에 수도원에 들어와서는 하느님은 저의 형제였어요.


그러니까 또 수사님들이, 제가 지금은 조금 덜 귀여운데 그때 갓 20살이 되어서 입학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수사님들이 보시기에는 어린 나이에 입회하는 사람은 드물잖아요. 그러니까 저를 굉장히 '셀모야, 셀모야' 하면서 되게 귀여워해 주시고 사랑을 많이 베풀어 주셨어요.


그래서 아, 그때 굉장히 따뜻한 하느님의 사랑, 형제애, 그리고 나를 돌보아주시고, 그 전에는 홀로 있어야 되고, 또 혼자 공부하고 혼자 밥 먹고 이랬어야 했는데 이제 수도원에 들어와서는 주는 밥을 먹고 좋은 형제들의 사랑을 받고 하니까, 아! 하느님이 사는 곳은  형제들이 함께 있는 곳, 또 형제들 안에 있는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고 그랬던 것 같애요. 혹시 교수님은 그런, 교수님에 대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김남희 교수 : 저도 어렸을 때 항상 친구들하고 놀다가도 6시 되면 들어오라고 하셔가지고, 기도방이 있었어요. 한 구석에 아주 조용한 곳에, 거기에 성모상이랑 예수님상이랑 십자고상이 있으면서 늘 거기에서 기도했어야 되는데 마찬가지예요.


신부님하고 똑같은데 그때 당시에 정말 묵주기도가 너무 긴 거예요. 어린 마음에 아주 길어서 똑같이 조금 귀찮게 하는 하느님이기도 했는데 어릴 때부터 성당에서 많이 놀았거든요.  놀아서 오랫동안

친구같은 하느님이었는데 아마 저같이 어린 생활 신앙생활을 많이 하다가 대학을 이제 타지로 가게 되고,  그러면서 타지에서 부모님하고 떨어져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친구같은 하느님이 아예 느끼지 못하는 하느님으로, 그러니까 사라져 버리는 하느님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라는 걸 저는 제 신앙체험을 통해서도 느끼구요, 아마 많은 형제님들이 그렇게 느낄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가 사실 신부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라고 말씀을 하시기도 했고,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가 어느 순간에는 권위적인, 한참 반항하는 시기에는 권위적으로 나올 때 오히려 또 저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이라는 표현도 더 많이 쓰고 있거든요. 그래서 신자분들이나 저나 어떨때는 하느님 아버지가 되고,  어떨때는 예수님이 되고,  어떨 때는 '성령님, 도와주소서.' 이러는데 저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각 위격으로 호칭을 부르면서 할 때, 어떨때는 맞나? 이런 고민이 들 때도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신부님의 강의를 지난 시간에 들으면서 나에게 예수님은 도대체 뭔가?   하느님 아버지 대신인가?  아니면 무서운 하느님 아버지 대신에 그냥 만만한가? 아니면 정말 친구같이 만만하고

편안하기만 할까? 이런 생각이 가끔 들기도 했거든요. 그렇다라고 한다면 토마스 머튼에게 예수님은 어떠한 존재였을까요? 관상에서요.


박재찬 신부 : 네, 질문이 몇 가지가 같이 함께 하셔가지고. 

우선은 제가 지금 느끼고 있는 어떤 하느님, 그리고 예수님, 성령님 

이것이 아마 마지막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어질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질문을 드리면서, 아까 제가 이야기를 하다 말았었는데 

하느님을 형제라고 느끼면서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부재를 느끼는 시기도 있어요. 분명히!


하느님이 아니 계시는 것 같고, 제가 예전에 저의 어떤 그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하느님이 사라지고 내 안에 저만 저 자신만 가득한, 그런 소진(burn out)되는 그런 체험을 한 적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이후로 유학을 가면서 토마스 머튼을 만났었죠.


그래서 저 스스로도 오늘날 현대인들처럼 정말 하느님을 어릴 때 많이 만나고 했지만, 부모님의

하느님을 떠나서 이제는 나의 하느님을 만나고, 또 나의 하느님을 만나는데 정작 나는 그 안에 가득하고 하느님은 사라지고 하는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하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한테 있어서의 이 하느님의 부재는 긍정적인 의미의 부재였던 것 같애요.  왜냐하면 내가 하느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했지, 하느님은 나와 함께 하셨거든요. 그래서 하느님은 지금까지 네가

알고 있던, 안셀모 네가 알고 있는 하느님을 넘어서 더 큰 나를 알고 더 사랑을 충만하게 할 수 있게 되어라. 이런 뜻인거 같애요.


예전에 어떤 청년이 저한테 이런 질문을 했어요. 하느님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을 생각하는 인간의 뇌가 먼저입니까?  그런 질문을 했어요. 그러니까 하느님을 인간이 만들어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하느님이 존재한다. 이렇게 판단을 한 것 같애요.


근데 제가 그에 대한 답을 안하고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아직 하느님을 만난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의 뇌하고 하느님하고 이걸 비교할 수 있는 질문 자체가 오류가 있고 그리고 또 단순하게 답을 하자면 '더 많이 사랑해라. 그러면 더 많이 하느님을 만날겁니다.'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다보면 그 안에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더 많이  더 깊은 차원에서, 단순히 이기적인 사랑, 나를 위한 사랑을 넘어서 나 아닌 다른 사람들 또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을 넘어서나를 모르는 사람들까지, 어떤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 또 자기를 내어놓는 사랑, 이런 사랑들을 해 나갈때 인간의 뇌라든지, 인간이 생각해 낸 하느님이 아니라 정말 사랑이신 하느님이 우리 삶 가운데 늘 함께 하심을 알게 될 겁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을 우리가 뭐 때때로 부르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이예요 그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 그 아들 성자, 그 다음에 성부와 성자의 그 사랑의 유대관계인 성령, 이 성령의 관계를 하나로 봐야 됩니다. 사랑의 관계! 사랑으로 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항상 기도할 때 우리 어떻게 해요? 이 모든 기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그러니까 아버지 하느님께 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의 은총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청하면서 기도하는거죠. 그래서 우리가 때로는 하느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성령님, 또

때로는 예수님 이렇게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결국은 한 하느님을 다른 측면에서, 다른 위격에서 바라보는 거지만 결국은 우리가 성령님~하고 부르면서도 성부, 성자를 생각할 수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부르면서도 그 안에 함께 활동하시는 아버지의 축복과 그 다음에 성령의 그런 협력 협조하시는 또 도와주시는 도움의 은총을 주시는 그분을 생각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한 가지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사 때  본기도 할 때에도 이렇게 기도해요. 본기도 할 때 앞에 뭐 기도문을 쭈욱 하고 난 다음에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으로써 그리스도~ 이렇게 기도를 해요.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은 늘 함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특별히 아버지에 대한 어떤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분들은 하느님 아버지 하면 무서운 분,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무서운 분, 두려운 분, 벌하시는 분, 이렇게 되어있는데 만약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아마 어린 시절에 아버지한테 받았던 그런 교육 방식, 또 아버지 상(像)하고 연관이 많이 되어 있을 겁니다.


또 그런 분이라면 그 아버지와 화해하는 시간들, 아버지를 내적으로 용서하는 시간들, 혹은 또 아버지와 그 당시에 나의 어떤 부족했던 면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시간들, 이런 시간들을 가지면서 내적인 치유가 필요할 겁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아버지이시면서 동시에 어머니시잖아요. 그러니까 아버지, 어머니 성이 없다고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어머니라고 불러도 됩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니면 그냥 하느님으로 불러도 되구요, 그리고 예수님께도 좀 더 더 가까이 친근한 마음으로, 지금 저한테는 성령의 작용으로 굉장히 강하게 많이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지금 부산  명상의 집에서 제가 만난 분도 명상의 집에서 토마스 머튼의 여러 가지 영성을 나누기 위한 모임들을 하고 있는데 그 모임들이 시작 될 때에 처음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 지 정말 상상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저희 매일미사에도 많은 분들이 명상의 집에 와서 미사를 하시는데 그 가운데에 제가 느껴지는 것은 아, 성령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구나!  성령이 불고 싶은 대로 부신다고 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영적인 갈망을 하고 있구나. 이런 영적인 갈망은 성령께서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걸 통해서 하시는구나!


제가 방송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제 나름대로 준비는 하지만 실제로 와서 하는 거는 저도 모르는 말들을 많이 하게 되고, 저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을 하게 되고, 또 고해소에 들어가서도 그런 걸 느낍니다. 제가 생각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았던 그 많은 것들을 성령께서 저를 통해서 하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나누어서 볼 게 아니라, 

항상 어떤 성령이 작용할 때에도 성부 또 성자가 함께 하고 계시고 또 마찬가지겠죠. 

다른 위격들도.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을 함께 보시면 좋겠구요 또 ]

저한테 있어서 지금은 늘 예수님이 저와 함께 하신다,

저와 함께 늘 하루하루 아침부터 기도하는 가운데 늘 저와 함께 하시는 그런 분, 

변하지 않는, 저와 함께 하는 그런 분으로 

지금 저한테는 와 닿아 있고 또 그렇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김남희 교수 : 네, 말씀을 들어보니까 결국 머튼이 얘기한 것처럼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야 되는 문제인 것 같애요


박재찬 신부 : 네,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도 그랬죠. 처음에는 이렇게,  나중에는 예수님이 내 안에 있으니까 예수님의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또 다른 종교, 그것을 나중에 'transcultural maturity '(초문화적 성숙) 종교간 대화할 때 깊이 나눌텐데, 자기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고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으니까 그 예수님의 그 열려진 마음, 예수님의 사랑하는 마음, 예수님의 비워진 마음, 그 마음으로 이웃들에게 다른 종교들에게 다가가게 되니까 그 종교와 문화를 초월해서 성숙에 도달하게 되고, 그런 의식으로 보편적인 의식을 갖게 되는 거죠.


김남희 교수 :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이 여전히 사실은 예수님의 존재는 굉장히 더 중요하잖아요.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에만 있는 신관이기도 하고 그 신관안에 예수님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어떤 초자연적인 하느님과 그 다음에 자연속에 인간을 이어주는 하나의 다리역할을 하는 게 바로 예수님이시잖아요.


그래서 그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우리 삶 안에서 키워내고 또 실천해 내고 살아가는게 중요한데 그게 사실 자신의 눈으로 봐야만 믿는 현대인들한테는 얼마나 그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아니면 정말 신자들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사실 어려울 것 같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을 삶 속에서 잘 만나지 못하는 그 현대인들에게 신부님께서 조언해 주신다면 어떨까요?


박재찬 신부 : 네, 좋은 질문인 것 같애요. 많은 분들이 그런 내 삶 속에서 직접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싶은데 또 실제로 내 삶 속에는 뭔가 늘 공허하고 기도하러 가서 앉아있는데 때로는 마음이 충만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공허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내 삶 속에 뭔가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정말 예수님이 나타나든지 아니면 뭔가 치유가 일어나서 정말 그러면 주님 믿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싶어하는 그런 분들도 계실지도 몰라요.


근데 제가 작은 일화를 하나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예전에 제가 토론토에서 공부를 하는 중에

한인성당에 가끔씩, 거기는 한인 신부들이 귀하기 때문에 신부님들이 휴가가시거나 하시면 저한테 학생이니까 전화가 옵니다. 신부님, 이번주에 어디 휴가가기 때문에 대신 미사를 좀 해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그러면 제가 가곤 했었는데 그때 토요일날 특전미사를 부탁받아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전날 전화가 왔어요.


어떤 자매님이신데 한 70대 정도 된 자매님이셨어요. 근데 그분께서 신부님, 내일 저희 성당에 미사 오시죠? 미사 후에 저의 남편 병자성사 좀 주십시오. 왜냐하면 저희 남편이 다음 주에 허리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허리가 많이 안 좋으시니까, 허리 수술을 받아야 되는데 마음도 불안하고 하니까

신부님이 병자성사를 주시면 좋겠다고. 그래서 네, 그러죠. 하고 그 다음날 미사 후에 제의를 그냥

입은채로 몇 몇  교우들과 같이 함께 정성을 다해서 병자성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 안수도 해 드리고

기도 해드리고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한 일주일 쯤 지났죠. 지나고 난 다음에 전화가 왔어요, 그 자매님한테. '신부님,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합니까'  '우리 남편이 병원에 갔는데 수술하러 갔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아니 도대체 일주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지금 다시 보니까 다 나았다고, 수술할 필요 없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신부님 감사합니다.'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자매님, 그건 제가 한 게 아니고 병자성사를 통해서 성령께서 형제님을 치유해 준 것 같다고,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도

어쨌던간에 신부님을 통해서 되었으니까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러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아, 그러신가부다. 그렇지만 저한테 하지 말고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라고 그랬어요. 그리고는 그분은 아주 건강하게 잘 지내셨어요. 같이 그 다음 얼마 후에 성지순례도 같이 가는데

너무 신나게 잘 지내시고 성지순례도 잘 하시고 했어요. 근데 그분 형제님은 내적인 변화는 없었어요.


그분이 신자였지만 그분이 치유의 기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정말 나의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사람들이 하는, 신앙인들이 하는 행동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거죠.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거였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 기간이 이어졌고 자매님은 형제님이 계속 같이 기도하고,  미사도 같이 가고,  함께 영적인 생활을 나누고 싶어 했지만, 그 형제님은 눈에 보이는 그런 기적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믿지 못했던 거죠. 이건 하느님이 하신 게 아니고 우연히 되었다고 볼 수도 있었었겠죠.

자세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상황이었는데 제가 토론토를 떠나오기 얼마전에 그 자매님이 다시 전화가 왔어요.

'신부님, 감사합니다.' 무슨 제가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아닙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이래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자매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 제가 어디 나갈 일이 있어서 남편한테 신부님이 마지막 했던 그 강론',  저는 강론할 때 지난 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말을 잘 못해가지고 항상

강론할 때는 원고를 씁니다. 지금 거의 사제가 된 지 18해가 되었는데 한 번도 원고없이 강론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강론을 쓰는데 강론을 쓰면 그것을 한인본당에서 교우들한테 프린터해서. 사무실에 주면 직원들이 원하는 분들한테 나누어 줬어요. 그래서 그 강론 원고를 자기 남편한테 '여보 내가 지금 준비를 해야 되니까 기다리는 동안에 이거나 읽어보고 있어.' 그리고 줬대요. 그러고는 단장을 다

하시고 방문을 탁 열었는데 그 남편분께서 그 강론집을 읽으면서 주루룩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더래요. '내가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이제껏 몰랐던가!'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래요.


그래서 제가 볼 때는 어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은 아니었지만 그 형제님은 진정 살아계신 하느님을 그 글을 통해서 만난거죠. 만나서 아, 내 마음의 눈물을 통해서 정화를 하시고 온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회개의 삶, 하느님을 진짜 믿는 삶을 살게 된 거죠. 그게 아주 긴 세월이었어요. 그죠. 우리가 볼 때에는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에 하느님을 믿지 못 하던 시간이었죠.


그렇지만 그분은 생애 마지막 즈음에 정말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난거죠. 그래서 하느님이 그분한테 무슨 흰 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나타나신 게 아니었어요. 근데 그분 내면속에 정말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굉장히 과학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시대에 살고 있지만 또 반면에 제가 지난 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또 다른 신비적이고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어요. 그죠.


합리적인 생각을 넘어서 어떤 다른 것들을 추구하며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이성적인 생각을 넘어서 현대인들도 각자가 또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때가 되면 신비로운 방법으로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을 드러내보여 주십니다.


때로는 말씀을 통해서 때로는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서, 때로는 조금 힘들지만 고통을 통해서, 또

때로는 따뜻한 사랑의 체험을 통해서 정말 나를 위해서 온갖 것을 다 내어주는, 죽을 때까지 정말 어머니의 기도처럼, 편지처럼 그렇게 어머니가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사랑을 통해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어떤 형제님은 어머니가 매일 내가 들어올 때 늦게 들어오지만 기도하다가 내가 들어오면 불을 끄고 방에 들어가 주무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그 어머니가, 늦게 들어왔는데 어머니가 안 계신 거예요.


아,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해 주셨구나. 그래서 어머니가 그렇게 바라던 하느님을 믿겠습니다. 하고 어머니의 그 따뜻한 사랑으로 변화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변화되는 그런 형제님도 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또 체험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김남희 교수 : 네, 그 표징들을 저희가 잘 읽어내는 게 중요한 거네요. 신부님!


박재찬 신부 : 네, 그래서 제가 그 기름 이야기 했잖아요. 항상 준비하고 그래서 깨어 준비하라. 이런 말씀도 예수님께서 많이 하신거죠. 언제 어떻게 오실 지 모르니까, 근데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하느님께서 필요할 때는 그렇게 우리가 비록 나태하고 좀 때로는 게으르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내 것만, 나 중심으로 살기도 하지만 어떠한 방법으로든지간에 도움을 주시는 것 같애요.


제가 오늘 이번 시간에 시간이 없어서 말씀을 못 드리겠지만 그 어떤 분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그

체험 때문에 온전히 또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가오시기 때문에

항상 준비하는 자세, 또 우리가 하고 있는 이런 여러 가지 뭐 기도하는 거, 또 여러 가지 영적인 생활, 종교생활하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한테 다양하게 작용하시고  또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신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믿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 이게 중요합니다.


김남희 교수 : 네, 그러다보면 사실 어떤 표징들이 저희에게 읽혀지거나 하면 참 좋을텐데 그 오랜 기간 늘 자신이  불행하다 라고 생각하고,  또 오랜 기간 그런 표징들을 못 읽어낼 때, 예를 들어서

지난 번에 신부님께서 그 사제들이 바라는 교우상이랑  또 교우들이 바라는 사제상을 보고 굉장히 재미있었는데요.  


특히 이제 교우들이 바라는 사제상에 있었던 사제중에 힘없고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이들을 따뜻한

눈과 말씀으로 다독거려 주는 사제, 아버지같이 자상하고 너그러운 사제, 이런 너그러운 아버지와

같은 그런 모습을 사실 하느님의 모습을 이제 사제를 통해서 받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근데 사실 잘 안 되잖아요. 또 반대로 사제들이 바라는 교우상에 흥미로웠던 그 신자가 있었는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제를 사랑하는 신자, 근데 그 다음이 더 재미있어요. 사제들을 비교하지 않고 뒤에서 뒷담화를 하지 않는 신자. 이런 서로 바라는 상들을 여전히 요구한다라고 하는 것, 또 지난 시간에 부부관계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왜냐하면 포기해야 되겠다.


그러니까 사실 무언가를 바란다라고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사랑이 있다란 생각이 들고, 근데 오히려 더 무관심하거나 아예 포기해 버리는게 더 심각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그 오랜 동안의 그 침체, 아니면 좌절을 겪은 신자들에게 혹시 신부님께서 해 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박재찬 신부 : 네, 오늘 이렇게 시간이 지금 거의 다 되어서 길게 설명 못 해 드리겠는데 결국은 남녀나 부부도 마찬가지, 아내나 남편 또 사제나 교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서로가 마주보는 상황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예수님을 바라봐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제가 교우들을 대하고, 또 교우들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제를 대할 때 그 안에서 서로가 성장해 나가는 거죠.


서로 지금 자기 주장만 하면서 살아요. 네가 바뀌어라. 네가 바뀌어라. 그렇지만 함께 예수님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남희 교수 : 네, 오늘 해 주신 말씀 정말 감사드리구요, 그분들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을 예를 들어서 아마 그냥 추상적으로 다가왔었던 하느님 체험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제 자기 삶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 지 고민을 많이 해보는 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박재찬 신부 : 네, 감사합니다.


김남희 교수 : 네, 오늘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분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김수환 추기경인데요. 김수환 추기경께서 말년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나 걸렸다. 아마도 그러한 사랑의 실천은 한 평생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실천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