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29회 머튼의 영성요약 1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4. 7. 00:21





† 찬미예수님!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 신부입니다.



지난 한 주간도 주님 안에서 평화로우셨는지요?

오늘 여러분들이 제 배경이 좀 바뀐 걸 보고 좀 놀라셨죠?

여기 이렇게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그림도 있고 또 성전 안에서 이렇게 여러분들 만나고 있는데 이곳은 제가 거주하고 있는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 소속의 부산 분원인데 부산 <분도 명상의 집>입니다.


이 명상의 집에서 최근 여러가지 토마스 머튼에 대한 모임도 많이 갖고 있고요.

또 이 모임을 통해서 많은 분들이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배우고 있는 중이고 또 이곳에서 어떤 영적인 힘을 얻어가고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들을 하나 둘 익혀가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지난 4월부터 이곳에서 모임을 하면서 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보람있을 때에는 다녀간 분들이 "신부님~그 강의를 듣고 난 다음에 제 삶이 많이 바뀌었어요.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 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또 가족들을, 이웃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많이 바꼈어요.

특별히 더 많이 또 어떻게 사랑해야 되는지를 깨닫게 되었어요~." 라고 이렇게 고백해 줄 때 아 정말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이 <분도 명상의 집>에서 당신의 크신 사랑을 나누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내년에도 <분도 명상의 집>에서 토마스 머튼 배우기 영성 피정을 계속 해나갈 겁니다. 월요일 모임도 있고 또 멀리서 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토, 일해서 1박2일 모임도 있습니다.

1박2일 모임은 피정에 가깝기 때문에 강의도 듣고 실제 명상기도, 관상기도도 해보고 성무일도도 같이 바치면서 또 자기 자신의 삶을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통해서 재조명해 보면서 점점 더 예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또 예수님과 하나될 수 있는 또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신 예수님과 일치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이 강의를 통해서 배우시고 또 직접 명상의 집에 오셔서 티비에서 볼 수 없었고 또 티비에서 들을 수 없는 내용들을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그럼 오늘 또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의를 하기 전에 먼저 기도를 통해서 시작하겠습니다. 시작기도 함께 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랑하는 하느님,

저는 수도승처럼 관상가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필수적인 요소가  빠져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믿는다고 말만 할 뿐입니다.

저의 행동은 제가 믿는 것이 바로 저 자신이라는 것을, 제가 여전히 당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끝내 저의 생명을 당신의 손에 받아들이소서, 그 생명을 당신이 원하시는대로 하소서.

저는 당신의 사랑에 저 자신을 바칩니다.

이 말은 제가 당신이 저를 위해 마련하신 힘든 일들도 즐거운 일들도 거부하지 않으면서 계속 당신의 사랑에 저 자신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당신께서 찬미를 받으시는 것으로 제게는 충분합니다.

당신이 계획하신 일은 모두 좋은 것입니다. 모두가 사랑인 것을~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방금 토마스 머튼이 바친 이 기도를 우리가 함께 바쳤는데 이 기도문 안에는 토마스 머튼이 이제는 특별한 어떤 관상가라든지, 수도승이라든지 그런 존재를 넘어서 자신의 외적인 그런 자아를 넘어서 진정으로 하느님과의 일치를 갈망하고 있고 또 그 모든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 그래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봉헌하겠다는 그런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모두가 사랑인 것을 그리고 당신이 계획하신 것은 모든 것이 선으로 인도될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제가 여러분들과 나누게 될 내용은 지금까지 저희가 여러 영성들을 많이 배웠습니다. 토마스 머튼과 관련돼서 토마스 머튼의 하느님 체험, 토마스 머튼의 영적인 여정을 제임스 파울로에 비추어서 영적 성장에 대해서 알아봤었구요. 무엇보다도 기도와 관상에 대해서 토마스 머튼이 새롭게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또 현대화 시켰던 것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기억나세요? 고독과 침묵에 대해서도 또 말씀을 드렸었고요. 그리고 성모님의 영성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었구 또 초연함과 하느님관에 대한 것도 말씀드렸고 또 성부와 성자 성령에 대한 것, 영적인 치유에 대한 것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다음 시간부터는 토마스 머튼의 종교간 대화에 대해서 다룰건데 종교간 대화를 다루기 전에 앞에 지금 오래전부터 했던 많은 얘기를 잊어버리신 분들도 계시고 또 새롭게 이 방송을 보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서 한 번에 이 모든 것들을 한번쯤 요약해 드리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토마스 머튼의 영성에 대한 어떤 골격을 세우고 난 다음에 종교간 대화를 다루면은 좀 더 종교간 대화를 풀어 나가는데 더 수월할거구 또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제대로 더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수 있지 않겠나 생각이 듭니다.


우선 이제 토마스 머튼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가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한 가족이 차를 타고 놀러가는데 아들이 갑자기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자동차 바퀴는 어떻게 돌아가는거야?" 그러자 아빠는 배운대로 아주 복잡하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어, 연료가 연소가 되면 발생하는 열 에너지를 기계 에너지로 바꾸어서 자동차가 움직이는데 필요한 동력을 얻어 후륜의 경우에는 클러치, 변속기, 추진축, 차동기, 엑셀축 후 차륜 순서로 동력이 전달되어서 자동차를 움직인단다." 하고 설명을 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 아들이 좀 뭔가 답답했던지 좀 못 알아들었던지 이번에는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자동차 바퀴는 어떻게 돌아가는거야? 엄마는 단 한마디로 끝내 버렸습니다. "응, 빙글빙글."


그래요, 제가 지금까지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여러가지 많은 말들을 했습니다. 뭐 이론들에 비추어서도 이야기 하고 또 좀 어려운 부분들 특히 관상에 대한 부분들 또 성부에 대한 것, 계시에 대한 것, 구원론에 대한 거 그리스도론에 대한 거 여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근데 오늘은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좀 빙글빙글 쉽게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쉽게 말한다고 하고선 또 제가 조금 어려운 여러분들에게 좀 모호한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근데 이 모호한 이야기는 모호하지 않고 오히려 여러분이 더 잘 아는 내용일 겁니다. 우선 영어로 제가 뭘 하나 써 보겠습니다. God is everywhere and Nowhere! 뭐 많은 사람들이 이제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그러나 아무 곳에도 없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아마 대개 많은 분들은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이거에 관해서는 이해를 하실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무 곳에도 안 계신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하느님은 아무 곳에도 안 계신다. 이 하느님은 아무 곳에도 계시지 않는다는 이 내용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은 토마스 머튼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영적인 성장을 해 나가고 또 토마스 머튼이 어떻게 점점 발전해서 정말 보편적인 신앙으로 이어갈 수 있었는지 그 과정들을 제대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우선 왜 하느님은 아무데도 안 계신다라고 표현을 했을까요? 자 제가 전에 안셀모라는 본명을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었죠? 근데 제가 처음에 알고 있었던 하느님, 이 하느님은 그저 그냥 부모님이 알려주신 하느님, 제가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께서 제 종교적인 자유를 박탈했다 이런 말까지 표현을 하고 성당에 나가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 했었는데 나중에 점점 하느님의 새로운 것들을 많이 알게 되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린 시절에 제가 알고 있던 하느님, 그 하느님을 지금 생각하면은 정말 아주 아주 일부분 하느님의 부분일 뿐이었는데 그 하느님을 저는 전부로 생각을 했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몰랐던 다른 하느님이 다가왔어요. 그럴 때는 하느님이 이런 하느님이 아니신데 하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고통의 하느님, 십자가를 지신 하느님, 나를 힘들게 하는 여러 사람들, 하느님이 전지전능 하신다면 왜 이 세상에 이런 고통을 가져오시고 왜 이 세상이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 분쟁하고 싸우고 다투게 허락하셨을까 처음에는 이런 부분에서의 하느님을 믿지 못했었습니다. 그럴 때 이런 고통의 하느님, 십자가의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다  N0~내가 알고 있는 하느님은 선하시고 좋으신 분이고 복을 베풀어 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그런 좋은 분만 생각했었는데 내 인간적인 면에서 고통이 다가왔을 때 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 또 제 나름대로 여러가지 작은 고통의 시간들을 체험하면서 또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묵상하면서 아~하느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고통이 인간이 볼 때는 고통스런 모습이지만 결국 그것도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래서 제가 그동안 알고 있던 하느님이 더 확장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nowhere를 이해하신다면은 nowhere는 단순히 내가 하느님이 안 계신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 그런데 누구? 바로 내가 지금 아직 그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바로 이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해서 더 하느님을 더 알게 되고 더 깨닫게 되고 더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하느님의 그 마음을 닮아가게 되는가 이걸 여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 내 곁에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더 깊게 깨닫게 될 겁니다. 그래서 영적인 성장은 또 새로운 하느님이 다가오면은 전에는 몰랐지만 또 더 많이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점점 확장되어 가는거죠. 이것이 바로 영적인 성장인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의 영성에 있어서 영적인 성장의 과정을 토마스 머튼이 아주 잘 보여 줬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미 여기에 이미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것, 이것에서부터 출발해서 점점 더 내 안에 지금 계시는 주님에 대한 확신이 더욱 더 커졌죠. 그래서 그 주님의 마음을 내 마음과 같게 사랑이 되어 간다는 거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은 이 nowhere라는 단어를 nowhere가 아니고 여기를 끊어보면 now here가 됩니다. 지금 여기에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그것을 토마스 머튼이 깨달은거죠. 지금 여기에서 이미 와 계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법들을 많은 글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겁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토마스 머튼이 이런 깨달음을 얻은걸까요? 아니었죠. 계속해서 그런 과정들을 겪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처음엔 쓰러지기도 하고 처음에는 하느님이 누구신지 모르기도 하고 나중에는 점점 하느님과 하나되어 가는 과정에서 또 많은 갈등을 겪기도 하고 그랬죠.


그래서 이런 과정들을 우리 함께 조금 더 정리 하면서 저 뿐만 아니라 여러분 이 영상을 보고 계신 모두도 함께 내 인생에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다가와 계시고 또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통해서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가야 되고 또 이미 와 계신 그분을 어떻게 발견해 나가야 되는지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아까 제가 금방 지워버렸는데 하느님을 모든 곳에서 알 수 있다. 모든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것을 긍정신학이라고 합니다. 긍정신학은 부활한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곳에 지금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근데 하느님은 우리가 알 수 없다.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 하는 것은 하느님은 초월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자연을 넘어서 계시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지막까지 다 알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하느님이지만 그분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열어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조금씩 조금씩 깨닫고 알고 체험해 나갈 수 있다는 거 이것을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어두운 밤이고 막다른 골목이고 알 수 없는 분, 마치 이제 성토요일 날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셨죠? 네 예수님께서 사도신경에 나오잖아요~저승에 가시어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지금 우리 눈에는 저승에 가셨기 때문에 안 보이는 거 계시지 않는 것 같지만 실제로 안 계신게 아니죠. 계셨죠. 저승에 가시어 우리보다 앞서 살아가셨던 많은 분들을 구원해 주셨고 하늘로 불러 올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정신학, 긍정신학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오늘부터 이해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대체적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은 어떠한가, 처음에는 이제 선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선이해, 하느님에 대해서 뭐 책에서 봤던지 혹은 뭐 주변에 어떤 여러가지 활동들을 통해서 봤던지 부모님을 통해서 알았던지 이런 어느 정도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 점점 성당에 나오고 세례를 받고 하면서 하느님에 대해서 조금 더 앎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앎1) 혹은 깨달음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혹은 체험, 여러 가지 표현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전에는 몰랐는데 새로운 앎이 생겨날 수 있을 겁니다. 전에는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자비의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으로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깨달음1, 체험1) 


한데 이제 전혀 다른 새로운 하느님이 다가왔어요. 모름~이런 하느님은 안 계셔~ 모름.(모름1) 근데 또 시간이 지나면서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온, 배움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앎이 또 생길 수 있죠. 이건 2라고 할 수 있겠네요.(앎2) 또 새로운 전혀 다른 몰랐던. 그리고 또 모르는 하느님 다가올 수 있겠죠.(모름2) 어떤 자연 속에 계시는 하느님, 우리를 창조해주신 하느님, 또 때때로는 이웃안에 계시는 하느님, 내가 미운 사람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또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아까 모름1이었다면 모름2이겠죠.


그래서 이제 우리의 영적인 성장의 과정은 대체로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 같습니다. 모르는 하느님, 또 아는 하느님, 모르는 하느님. 또 아는 하느님 이렇게 해서 계속 점진적으로 또 어떤 때에는 갑자기 모르는 하느님을 거치지 않고 또 갑자기 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런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에 수도원에 입회했을 때, 수도원에 입회하면은 한 한 달 정도 기간 동안에 오리엔테이션 기간이 있습니다. 그 때 연로하신 선배 수사님들이 오셔 가지고 수도원의 오랜 수도생활의 체험들을 나눠주곤 하시는데 그분께서 저희 수업하는 교실에 들어오셔서 제일 먼저 이렇게 칠판에다가 이런 나선형의 그림을 쫙 그리셨어요. 이렇게 쫙 그리시더니만 가운데에 예수님이라고 적으셨어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수도생활은 매일 늘 똑같은 생활인 거 같지만 계속 반복되어서 나중에는 이런 예수그리스도를 만날거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지금 지루하고 때때로 힘든 시간인 것 같지만 참고 견디어 내라 말씀하셨어요.


근데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항상 앞으로만 가는 것 같지 않더라구요. 때때로는 뒤로 가기도 하고 때때로는 멈추기도 하고 때때로는 정말 여기에서 그만 두고 싶은 그런 마음이 생겨 나기도 하고 그런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나선형의 그림이라기 보다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뒤로 갔다가 앞으로 갔다가 멈췄다 하는 그런 여정을 계속 거치는 것이 바로 수도생활의 여정이고 영적인 성장의 여정이고 또 신앙생활의 여정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설령 뒤로 갔다하더라도 그것이 퇴보가 아니라 다음 단계로 건너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신다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좀더 항구하게 계속해서 묵묵히 길을 걸어가시는 그런 은총도 받으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토마스 머튼의 여정도 마찬가지였죠. 토마스 머튼의 여정을 쭉 살펴보면은 제가 처음에 토마스 머튼 생애 하면서 한번 언급도 해 드렸었는데 토마스 머튼은 처음에는 무신론자였다가 나중에 세례를 받고 그 다음에 또 수도원에 입회하고 그러면서 영적인 여러 체험들도 하고 또 나중에 루이빌에서 또 플룬나누와에서 점점 이렇게 성장해 나가는 그런 과정을 겪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토마스 머튼은 우리의 어떤 영적인 삶은 지속적인 회개의 과정이다~이런 표현을 많이 쓰셨습니다.


나의 신앙의 여정은 단지 가톨릭 신자로 세례를 받은 거 그것에서 완성된 게 아니다. 나의 회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겁니다~이런 표현을 쓰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끊임없이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느님 아닌 다른 것, 뭐 자아라던지 재물이라던지 또 여러 가지 많은 것들에 집착하는 그런 마음들 그것을 따르려는 그런 마음들이 우리 안에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하느님이냐 자기 자아냐 이 선택의 과정에서 때때로는 죄를 짓기도 하고 심지어 사도 바오로도 이런 말씀을 하셨죠. 내가 그것이 좋고 선한 것인지 알면서도 나는 지금 죄를 짓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악이 내 옆에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쓰셨죠.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쫓고 싶어하지만 그 안에서 여러 가지 갈등과 시련 또 사막과 같은 그런 시간들을 겪게 되는 것 같습니다.


토마스 머튼도 처음에는 무신론자였죠. 그래서 하느님에 대해서 전혀 알지도 못했고 또 하느님을 거부하고 그렇게 생활을 했었습니다. 근데 이제 청년기가 되어서 하느님을 조금씩 알게되기 시작하였고 어디에서 그랬죠? 미국에서 그랬죠. 미국에서 대학 다니면서 좋은 사람들 좋은 친구들을 만나면서 또 좋은 책들을 읽으면서 토마스 머튼은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생겨났고 그런 과정에서 하바나에서 1940년에 어떤 깊은 영적인 체험을 했죠. 기억나시나요?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Heaven, Heaven is In front of me! 천국이 바로 여기다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는 것 같았다 이런 표현을 쓰셨는데 암튼 이때 토마스 머튼은 굉장한 하느님에 대한 강한 체험을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내려가는 골짜기의 시간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수도원에 입회해서 이 체험 이후로 자기가 사제가 되겠다는 결심을 더 확고하게 하게 되고 수도원에 입회한 이후에 사제가 되고 그러는 과정에서 굉장히 내적인 힘겨운 갈등의 시간이 있었죠. 그게 뭐였나요? 두 가지 제가 말씀 드렸었는데 그죠, 작가가 되겠다는 거 관상가가 되겠다는 거 그 사이에서 갈등을 했죠. 그래서 나중에 결론을 내리게 되죠. 작가가 되는 것, 관상가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그리고 또 카르투시오회라든지 가말돌리오회 같은 은둔생활을 하는 그런 수도회로 옮기고 싶어 했었죠. 그런데 결국은 허락을 얻지 못하게 되고 수도원에 머물게 되는데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머물면서도 이제는 깨닫게 되었죠. 어떤 장소적인 고독이 아니라 완벽한 고독을 위한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완벽한 고독이 있을 뿐이다. 이런 표현을 쓰면서 이제 자기 자신은 하느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것, 아까 제가 바친 기도문에서도 여러가지 외적인 것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해야 될 몫이고 그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 나가는 것이라는 것이었죠.


근데 그 사랑이 예전에는 하늘로만 향했습니다. 근데 이 체험 이후로는 달라졌죠. 이 체험이 뭐였죠? 기억나실 겁니다. 루이빌에서. 제가 그랬죠. 이 루이빌 체험을 모르면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이 루이빌은 토마스 머튼의 영성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많은 토마스 머튼 학자들이 이 루이빌의 체험을 굉장히 강조를 많이 합니다. 이 체험은 1958년에 있었죠.


이 체험 이후로 사람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이 사랑이 수도원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도원을 넘어서 모든 곳에 우리가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그런 열려 있고 또 내가 그 사람들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 루이빌 체험 이후에 토마스 머튼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죠. 물론 그 전에도 여러 가지 갈등이 있었지만 그 갈등의 어떤 정점을, 그 갈등을 해결하는 그 정점의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루이빌 체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토마스 머튼은 1960년대에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죠. 피스 메이커로써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으로써 여러 가지 사회운동,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 인종차별에 대한 그런 운동들, 그 당시에 냉전시대였기에 핵전쟁을 반대하거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그런 운동도 하게 됩니다.


이런 체험이 있고 난 다음에 토마스 머튼이 이제 또 여러 가지 갈등이 많이 있었죠. 특히 여러분들이 굉장히 호기심을 갖고 들었던 M과의 그런 사랑 이야기 또 장상과의 갈등도 있었습니다. 아빠스님과 갈등을 하면서 자기는 여러 책들을 글들을 많이 쓰고 싶었는데 장상은 수도승이 쉽게 말해서 기도나 관상 뭐 이런 영적인 글을 쓰지 왜 그런 사회운동에 대한 글을 쓰느냐 하면서 반대도 많이 하고 검열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순명에 대한 갈등도 있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계곡과 같은 시간들을 거쳐서 토마스 머튼이 아시아에 가서 플룬나누와라는 곳에서 불상 앞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그런 시간이 있었죠. 그래서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선명해졌고 마치 뭔가가 나를 끌어 당겨서 내가 소멸되는 것 같았었고 그래서 내가 완전히 사라져서 이제는 하느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표현을 쓰셨습니다. 그래서 이 플룬나누와 체험을 통해서 토마스 머튼은 또 새로운 시작을 한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며칠 후에 1968년 12월 10일, 당신이 입회했던 1941년 12월 10일 딱 27년간의 수도생활을 하고는 이제 하느님 품으로 가게 됩니다.


이런 토마스 머튼의 여정에서 볼 때도 산을 오르고 내리고 하는 과정들이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도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여정에서 여러 가지 이런 계곡과 같이 어둠의 시간이 있을 때에는 다른 산들에 가리워서 여기 계신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죠?  그치만 우리가 그 여정의 길을 꾸준히 걸아갈 때 토마스 머튼이 보다 더 하느님 가까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제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또 이 여정을 제가 제임스 파울러의 이론을 통해서도 설명을 좀 드렸었었죠.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임스 파울러가 여러 가지 이론을 통해서 토마스 머튼의 어떤, 제임스 파울로의 신앙성장의 이론을 통해 가지고 제가 어떻게 하면은 우리도 영적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단계별로 어떤 과정들을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그 설명을 잠깐 말씀 드리도록 하곘습니다.


토마스 머튼이 처음에는 무신론자였죠? 무신론자. 점점 갈수록 하나 둘 신앙이 느껴지고 깨달아질려고 했었지만은 그 기간이 굉장히 길었었지요? 1938년 11월에 세례를 받기 전까지 토마스 머튼은 가정적으로, 학교에서 학창시절은 굉장히 불행하고 불우한 시기, 우울하고 좌절되고 외롭고 그래서 반항아적인 기질이 있어 가지고 여러 가지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하고 그랬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단계, 태아, 영아기의 단계, 미분화된 신앙이라고 했었죠. 이 미분화된 신앙에서는 토마스 머튼이 제가 볼 때는 굉장히 태교를 잘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님이 굉장히 꼼꼼하시고 자상하시고 또 때때로 엄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첫 아들에 대한 그런 기대로 토마스 머튼은 이 시간은 잘 보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직관적이고 투사적인 신앙,  7살까지의 신앙 그 과정에서 어머니가 떠나는 사별의 슬픔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12살까지 신화적인, 문자적인 신앙이 이루어졌어야 되는데 그 신앙의 단계도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 기간에 종교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종합적이고 관습적인 신앙의 단계에 도달했어야 되는데 이 시간에도 또 아버지가 16살 때 세상을 떠남으로 인해서 이 기간에도 특별히 어떤 영적인 신종교적인 또 믿음에 대한 발전은 크게 없었습니다.


근데 토마스 머튼이 이 청년기를 끝내면서 미국으로 건너와서 계속 다른 친구들, 교수님들 또 여러 책들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의 하느님을 만나기 시작하게 되고 그래서 미사에 가라 미사에 가라~라는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난 다음에 성령의 음성을 듣고 난 다음에는 나의 하느님을 조금씩 만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제 수도원에 입회를 하면서 점점 더 신앙이 성장해 나가고, 그런 과정에서 많은 시간 기도와 묵상과 관상적인 삶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되죠.


래서 이제 토마스 머튼은 루이빌에서 다섯번 째 단계에 있는 결합적인 신앙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전에는 문자적인 신앙, 말씀에 갇혀지게 되고 또 관습적인 신앙, 수도원의 어떤 규칙에 얽매이는 신앙이었다면, 루이빌을 통해서는 어떤 결합적인 신앙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플룬나누와 체험 이전에 1965년에 무슨 일이 있었죠. 기억 안 나세요? 처음으로 은든처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되었죠. 이 은든처에 들어가면서 토마스 머튼은 아주 보편적인 신앙에 도달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래서 홀로 있지만 홀로 있지 아니하고 더 세상과 유대, 연대할 수 있는 힘을 여기에서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토마스 머튼의 이런 신앙의 단계를 쭉 살펴볼 때 지금 나는 어떤 신앙의 단계에 와 있는가, 지금 나는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와 있는가, 문자적인 신앙의 단계에 와 있는가, 아니면 통합적인 신앙, 예전에는 성당 따로 가정 따로 나 홀로 있을 때 따로였지만 이제는 모든 곳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가, 인제는 보다 더 내가 아닌 다른 사람, 타인들에게도 나아갈 수 있는가 이런 것들도 한 번 되돌아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신앙이 나 중심에서 성장한 사람, 너를 생각하게 되죠. 그리고 우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더 성장한 사람들은 타인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 나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 나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때 타인이 어떻게 되죠? 또 더 넓은 확장된 우리가 되는 겁니다. 이 우리의 개념이 점점 더 확장되어서 나중에 하나의 통합으로 이루어지게 되는거죠.


이런 통합의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그랬습니까? 토마스 머튼의 영성에서도 제일 중요한 거 결국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거죠. 이미 와 계신. 그래서 오늘 여러 가지 토마스 머튼의 생애에 대한 얘기를 나눠 드리면서 우리의 신앙의 성장도 함께 나눠 드렸습니다.


지금 내 안에 내가 가득한 사람, 아직 미숙한 신앙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내 안에 타인에 대한 사랑, 예수님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가득 있을 때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 내 마음 속에 있는 이 사랑이 더 성장해 나아가서 진정으로 예수님과 하나되는 일치의 그런 영성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죠.


다음 시간에도 계속해서 이어서 토마스 머튼의 영성에 대해서 좀 더 종합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