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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위무위신부님의 강론 모음

은가루리나 2020. 4. 20. 22:04



주님 승천 대축일 (2011,6,5) ▣ 주일강론


제자들에게 있어서의 예수님의 승천은 커다란 아픔이었다.
그러나 그 아픔은 '더 좋은 변화를 위한 아픔'이었던 것이다.
'보다 큰 성장을 위한 아픔'이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그 어떤 무엇'이 더 좋게 변화되기를 원하셨기에,
제자들의 '어떤 무엇'의 큰 성장을 바라셨기에
제자들에게 '이별의 아픔'을 선사하며 그들의 곁을 떠나셔야만 하셨던가?

그 어떤 무엇은 다름아닌 '믿음'이었다.
제자들에겐 무엇보다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제자들의 '믿음'을 더 좋게 하고 더욱 성장시키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실체를 믿는 믿음은
'육적인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으로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영적인 인간이 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도저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 강림 대축일(2011,6,12) ▣ 주일강론


오늘은 교회가 탄생한 우리 교회 4대축일의 하나인
'성령 강림 대축일'이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강림하신 날을 교회의 탄생일로 여기는 것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 설교를 통하여
여러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교회가 공적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신앙생활은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는데,
신앙생활을 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인 것이다.  

거룩한 신앙생활이란 조용하고 무기력한 생활이 아니라
진실로 역동적이고 활기있고 즐겁고 재미난 생활인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그 옛날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듯이
오늘의 우리도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셨는가?"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만이
역동적인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도 거룩하게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을 받을 수 있겠는가?
견진성사를 통해서?
성령 세미나를 통해서?  

교리적으로 견진성사를 통해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받은 성령을 언제까지 오랜 동안 아니 죽을 때까지 영원히
내 안에 간직할 수 있는가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성령세미나를 통해서
'성령의 은사'나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받은 성령을 언제까지 오랜 동안 아니 죽을 때까지
내 안에 간직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견진성사나 성령세미나를 통해
성령의 은사나 성령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 못 가서 그 은사나 성령을 떠나보내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느님 뜻대로 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대로 산다면 절대로 성령이 떠나시지 않는다.

하느님의 뜻은 '사람들이 거룩하게 사는 것'이요(1테살4,3)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는 일(1베드1,2)이 '성령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떠나보내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내맡겨 드리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겠다.





주님 승천 대축일(2012,5,20) ▣ 주일강론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을 굴뚝같이 믿고 따랐던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마치 자신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임사체험'을 하는 것보다도
아마 더 엄청나게 놀라운 사건이었을 것이다.

전능하다고 믿었던 하느님이 인간의 손에 죽으심에
기겁하여 놀라 도망갔고,
도망갔던 그들 앞에 다시 살아나신 그 모습에
유령인 줄 알고 또 놀랬었다.

다시 살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당신의 가르침을 재확인시켜 주시다가
40일 동안 제자 재교육을 마치시고 오늘 하늘에 오르신 것이다.


부활하신 스승님의 '제자 재교육'을 받은 제자들은
이제 전과는 무척 달라졌다.

그러나,
아직 한가지 가장 중요한 '핵심'만은 전수받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고가의 제품이라도
거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부품을 제거하면
그 제품은 그만 그 가치를 잃고 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진국이 후진국에다 최첨단의 기술을 전수해 줄 때에도
겉으론 인심쓰는 척하며 모든 기술은 다 전수해 주어도
단 '핵심기술이나 핵심부품' 만은 절대 'No'이다.

핵심기술은 그 첨단 제품의 '전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핵심기술은 곧 핵심부품이요
그것이 곧 '돈, 달라($)'이기 때문인 것이다.

세상에 밑지는 장사 없다는 말같이
그것이 인간 세상의 경제 논리인 것이다,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떠나가시는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그런 인간적 경제 논리를 적용하셨겠는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시려면 아예 당신 목숨을 내놓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오히려 밑지는 장사를 택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핵심'을 전수하지 않으셨던 것은,
당신의 가르침을 '완성'시켜 주실
훌륭한 '개인교수'를 붙여주시기 위함이었고,
그 개인교수 자체가 곧 '핵심이며 핵심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제품은 아무리 뛰어난 제품이라 하여도
핵심제품을 제작할 핵심기술을 가르쳐 줄
'박사 선생님'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핵심은 곧 '부품이며 기술 그 자체'이기에
제자들에게 핵심만 전수해 주면 그만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그 핵심이 바로 "성령" 인 것이다.


성자 예수님의 협조자이신 성령이 곧 핵심이요,
핵심은 제자들의 개인교수이며,
개인교수가 핵심부품과 기술 그 자체라는 말은
저~엉말 교우 여러분들께 대단히 중요한 말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최첨단 제품에 핵심부품이 안치되기만 하면그 제품이 그냥 움직이듯이,
누구나 성령을 전수받기만 하면
신앙생활은 저절로 굴어가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여 큰 감동을 받아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만일, 성령을 전수받지 못했다면 분명 다시 과거로 돌아갔을 것이다.

견진성사를 받으신 뒤 성사의 은사를 받고
그전보다 더욱 큰 영적 열매를 맺는 거룩한 생활을 해 나가지 못하시다면,
저는 감히 말씀드린다.

그러한 분은 분명,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해도 "성령" 은 받지 못한 것이다.


제가 지금 이 이야기는 교리에 어긋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에 맞는 아주 올바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聖事는 그 자체로 효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성사의 事效性" 이라 한다.

견진성사를 받음으로 실지로 성령이 찾아오신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찾아오시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성사의 人效性" 인 것이다.

거룩하신 성령께서는 아무리 대주교님이 아니라
교황님의 할아버지께서 견진성사를 주셨다 해도
수령자의 자격이 미달이라면 그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크신 은총은 그 자체로서 엄청난 은총을 발휘하신다.
그러나
그 은총을 받을 그릇을 가진 자 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 그릇이란,
진정한 회개와 진실한 믿음으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굳게 믿어 고백하고,
그래서 하느님 뜻대로 거룩히 살아갈 것을 굳게 결심하여
그 결심을 하느님께 봉헌한 그 사람만이 은총을,
아니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쉬운 말로 '그릇을 완전히 비워놓아야 한다(빈 그릇)'는 말이다.
그것은 '사제서품자'나 '수도서원자'에게 있어서나 다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다 하느님께 내맡겨 드림으로,
그릇을 완전히 깨끗이 비워놓은 사람만이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야말로 이 시대의 또다른 "성령운동" 인 것이다.


"성령의 은사" 를 받은 것과 "성령" 을 받은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도 성령 하느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선물이지만,
성령 본체는 아니다.

성령의 은사란
성령께서 그 은사를 통하여 성령 본체를 찾아얻으라는,
그야말로 성령을 찾아얻기 위한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성령 본체를 선물로 받으면,
그때부터 내 안에 찾아오신 그분께서 본격적으로 나를 정화해 주시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이끌어 주신다.


놀랍도록 이끌어 주시며 그 이끄심에 놀라 자빠지게 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내 안에서 빠져 나가지 않으신다.

아니, 내가 절대로 성령께서 빠져나가지 못하시도록
붙들어 잡게 모시게 된다.

70명의 견진자 여러분!
견진성사를 통해서 부디, 신앙인의 핵심부품인 성령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하느님의 뜻대로 저절로 굴어갈 것입니다.





신앙의 해, 성령 강림 대축일(2013, 05,19) ▣ 주일강론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이다.

견진자들은
받은 견진교리의 내용을 다시 마음에 깊이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지막 견진교리 시간에 들었던 강의 내용 그대로
앞으로는 모두가 "성숙한 신앙인의 삶" 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성숙한 신앙인의 삶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견진성사를 받았다고
누구나 다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더 잘 아실 것이다.


견진성사 받은 이들이 모두 "성숙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아마도 이 세상엔 벌써 "하느님의 나라" 가 완성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누구나 견진성사를 받았다고,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 을 받았다고
성숙된 신앙인의 삶이 저절로 살아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성숙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견진성사 때 받은 성령의 "이끄심" 에 충실히 이끌려 드려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이끄심에 충실히 이끌려 사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 인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8장 14절>에서 그 사실을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라고!

하느님의 영의 인도,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
견진자는 말이다.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을 받고도 성령의 이끄심 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라기 보다 "하느님의 불효자" 일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 이 성령의 이끄심에 충실히 이끌려 드리는 삶인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하느님 뜻대로 사는 삶" 이다.

하느님 뜻대로 사는 삶이란 "어떤 삶" 을 말하는것인가?
하느님 뜻대로 사는 삶이란 "거룩하게 사는 것" 을 말하는 것이다.

왜?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그 거룩하신 분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 그 목적이
우리 인간들도 당신처럼 거룩하게 살라고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도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창조하신 뜻대로 거룩히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당신의 협조자 빠라끌리도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 주신 뜻, 그 이유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거룩히 살도록 이끌어 주시기 위함이시다.

따라서,
"거룩히 살지 않는 것" 은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며,
성령을 거스르는 것은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거스르는 것이며,
예수님을 거스르는 것은
그분의 거룩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며,
아버지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은
"천지창조의 목적" 을 전적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오늘 제2독서 코린토 1서의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다."
하셨다.

이 말씀은 곧 성령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자신의 모든 것의 주인" 이라고 증언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이 말하는 예수님" 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체험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다른 이에게 증언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이며
그것이 곧 "성숙된 신앙인으로서의 삶" 인 것이다.





두 번째 신앙의 해, 부활 제6주일(2014, 05, 25) ▣ 주일강론


신약성경에는 "성령"이라는 말이 무려 196번 등장한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잉태하시게 된 것도,
단식하러 광야에 나가신 것도,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도,
군중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실 때에도
모두 성령에 이끌려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오순절에 예수님의 그 말씀대로 성령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의 한 패턴
"들음 즉 말씀을 받아들임 -세례 - 성령 받음" 이라는 공식(형식)이
성립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을 통하여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세례를 받았다고 누구나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오늘 제1독서 <사도8,16>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보더라도 그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세례성사를 통해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이
"견진성사"를 받으면 저절로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저는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제가 그동안 30여년 동안 사제생활의 경험에서 나온 대답이다.


제가 동경한인성당에 부임해서도 두 차례의 견진성사가 있었으나
그후의 견진성사를 받은 신자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성령을 받으려면 "성령께서 내려오셔야(사도8,16)" 한다.

성령은 아무에게나 내려가지 않으신다.
성령께서 내려가고 싶은 사람에게만 내려가신다.


한 번 생각해 보시라!
"성령께서 내려가신다", 즉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느님과 일치한다" , "하느님을 체험한다"는 말과 같은 말인데,
여러분같으면 아무 사람하고나 일치, 하나되기를 바라시는가?

나를 사랑하고 나의 말을 알아듣고 이해하는 사람외에는
서로 하나, 일치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있다면? 크~

따라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과는 다르다.

달라도 보통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차이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오늘 제2독서의 말씀대로
자신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주님 즉, "주인님"으로 모시고 살아간다.

다른 말로 "하느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말귀를 잘 알아듣고 잘 따른다.

그러하기에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것도 "죽도록 뜨겁게 사랑"하며,
그러하기에 또 자연히 예수님의 계명을 잘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지 중요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는 말씀인 것이다.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주신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은 사람의 증거는,
즉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의 증거는 자신 안에만 갖혀 있지 않고
자신을 벗어나서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신앙의 해, 성령강림대축일(2014, 06, 08) ▣ 주일강론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이다.
지난 두 주일의 주일미사 강론에 걸쳐서 저는 "성령"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의 한 패턴
"들음 즉 말씀을 받아들임 -세례 - 성령 받음" 이라는 공식(형식)이
성립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성령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신앙생활은 참으로 재미 없는 생활이다.

성령을 받기 위한 성령운동은 원래
원래 18세기에 유럽의 개신교에서 시작되었고
20세기에 미국으로 들어와
1960년대부터 미국 가톨릭에서도 받아들이게 되었고
한국 가톨릭에서는 제가 신학생 시절인 1970년 중반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우리 가톨릭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감히 성령운동이라는 말조차 사용할 수도
이해하지도 못했을 용어였던 것이다.

신자들은 매일미사 참례 열심히 잘하고, 성당에서 봉사활동 잘하고
아침, 저녁기도, 삼종기도, 묵주기도 빼먹지 않고
교무금 잘바치는 신자를 소위 "열심한 신자"로 불러왔고
또 그렇게 여겨왔던 것이다.

그러면서 "성령운동"은 개신교에서나 하는 운동이며
점잖은 가톨릭 신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운동으로 생각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저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개신교에서나 가톨릭에서나 성장해 나가면서
잘못된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은사주의의 흐름"이었다.

어떤 치유의 기적이나 은사에 매달리던 시절이 있었고
제가 보기에는 아직도 그 흐름이 사라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본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강의에 초대되어 나갔던 모임의 대부분이 성령기도회였고
저는 거기서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는 그곳에서 강의할 때도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 가까이 나가기 위한
디딤돌이니 은사만 붙잡고 부르스 땡기지 말라고 그대로 말씀드렸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그대로 
디딤돌 위에서 성령의 은사를 붙잡고 부르스 땡기던 사람들이
큰물이 밀려와 떼밀려 가는 모습을 제 눈으로 보아왔다.
지금 한국의 최 대형 교회인 오순절 순복음 교회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굉장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한국 가톨릭 성령운동의 역사를 돌아보면
적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반대의 잘못된 모습도 적지 않았음이 사실이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말씀 그대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지
성령의 은사를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지 
은사를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을 체험하면
하느님께서 당신 뜻대로 각자에게 알맞는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저의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화살기도를 통하여
"거룩한 위탁, 내맡김의 영성"을 전하는 은사,
즉 영혼구원의 은사를 받았다.

그리고,
지금 그 은사를 통하여 구원받는 영혼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동경한인성당 교우 여러분!
또다시 말씀드리자면 성령을 체험하는 것,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은 절대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하느님의 이름만 열심히 불러보시기 바란다.

그 옛날 오순절 다락방에서만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리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원하기만 하면
지금 이 성당 안에서도 뜨거운 성령의 불이 쏟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