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교회헌장 - 35회 종교간 대화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2-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박재찬 신부 해설 (약 34분)

은가루리나 2020. 4. 25. 15:26

 

 

+ 찬미예수님

지난 한 주간 동안 다들 주님 사랑안에서 평안하셨는지요?

저는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 신부입니다.

 

여러분들과 이제 종교간 대화에 관해서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시간으로 큰 서론 부분을 이야기 했는데요 그때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나요?

그쵸, 네! 예수님의 마음으로~ 종교간 대화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해야 한다.

이런 말씀을 결론부터 드렸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서 재미있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있어 들려드리겠습니다.

 

<노인이 되지 말고 어르신이 되라.>

 이런 내용의 글이 있어서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노인은 늙은 사람이고 어르신은 존경받는 사람이다.

노인은 몸과 마음이 세월이 가니 자연히 늙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자신을  가꾸고 젊어지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노인은 자기 생각과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상대에게 이해와 아량을 베풀 줄 아는 사람입니다.

 

노인은 상대를 자기 기준에 맞추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좋은 덕담을 해 주고 긍정적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입니다.

 

노인은 상대에게 간섭하고 잘난체 하며 지배하려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스스로를 절제할 줄 알고 알아도 모르는 척 겸손하며

느긋하게 생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노인은 댓가없이 받기만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어르시는 상대에게 베풀어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노인은 고독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주변에 좋은 친구들을 두고 활발한 모습을 가진 사람입니다.

 

노인은 이제 배울 것이 없어 자기가 최고인양 생각하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언제나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노인과 어르신의 차이에 대해서 아주 잘 묘사해 놓은 글인 것 같습니다.

근데 사실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도 이 노인과 어르신 이 차이를 이렇게 제가 읽으면서

이런 부분이 필요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미숙함과 성숙함 결국은 그거겠죠.

우아한 노년기를 보내는 분들은 아마 어르신 분들 일거고

이 강좌를 듣고 계시는 어르신 분들도 참 많으시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어르신이 된다는 것은 더 성숙하게 자기 중심이 아니라 타인을 중심으로

우리는 좀 더 나아가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어르신이면서

또 동시에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써가 아니라 삶으로써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시는 그런 분들이시겠죠.

 

그래서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도 내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이 어르신이 되어서 서로에게 배울려고 하고 또 서로에게 나눌려고 하고

또 서로에게 내가 옳다, 네가 옳다, 이런 교리적인 부분보다는 사랑과 자비안에

있는 그런 하느님의 모습을 삶으로써 나눌려고 하는 그런 부분들이 오늘 날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 하나의 추세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많은 시간동안 이 서양 사람들의 가치 기준으로 지적인 대화, 신학적인 대화를

많이 나누었는데 좀 한계를 많이 느끼고 있는 즈음입니다.

 

그래서 이 노인과 어르신이라는 이야기를 읽는 순간에 아, 이것들이 바로 종교간 대화

에서도 꼭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나누었습니다.

 

종교간 대화 뿐만 아니겠죠.

우리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이제는 어르신이 되셔야 합니다.

어르신이 된다는 것은 결국은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그런 거겠죠.

 

자, 오늘은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나누기 보다는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나누기 전에 제가 꼭 해야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하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교회의 가르침!

 

제가 예전에 2015년에 토마스 머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서 루이빌에 있는 벨라르민

대학에서 거의 500명 정도 모였어요. 거기에서 토마스 머튼 학회가 있었고 그 학회에서 제가

토마스 머튼의 관상적인 삶과 불교와의 대화에 관한 발표도 한 번 했었습니다.

 

4박 5일 정도의 그 컴퍼런스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마지막 파견미사를 했는데

그때 주교님이 오셔가지고 미사를 주례를 하셨습니다.

주교님이 그때 강론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 모두는 토마스 머튼에 관계되는 신학자들이고 또 신학자들이 될

사람들입니다 . 그래서 여러분들은 신학자들로써 교회의 신학의 발전을 위해서 봉헌을

해야 되고 연구를 해야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들을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말씀하십시오.

교회에서 이렇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은 앞으로 이렇게 바라볼 수도 있을거고 또 이렇게 성장해 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라고 제안을 할 때, 여러분들은 더 이상 교리교사와는 차이가 날 겁니다.

 

교리교사는 교회에서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죠!

또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그런데 신학자들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 그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 시대를 분석하고 우리 시대의 징표를 읽고 또 초기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묵상하고 또 연구해서 우리 시대에 맞는 새로운 언어로 그 신학을 발전시켜 나가야 되는거죠.

 

그래서 지금 있는 우리 가톨릭 교회의 신학이 하루 아침에 된 게 아닙니다. 그죠!

2000여년 동안에 계속해서 아오스딩 성인이라든지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경우에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철학을 가지고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새롭게 체계를 만들었죠.

 

그리고 오늘 날  칼 라너라든지 뭐 여러 다양한 신학자들이 또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그런 신학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죠.

그래서 오늘 날은 2차 바티킨 공의회가 열린지도 벌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 아시아 안에서 또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서

전할건가 끊임없이 연구되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연구를 하고 또 발표를 나누기 전에 저는 먼저 그 주교님의 말씀대로,

그렇다면 교회에서 특히 우리 교회가 문을 활짝 연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른

종교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대하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먼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미 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가르침들을 많이 들어오셨기 때문에 이미 알고

계신 분들고 계실거고 또 처음 접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제가 예전에 어느 수녀원에 가서 종교간 대화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침을 나눴습니다.

근데 특별히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대해서 소개를 해 줬을 때 심지어

수녀님들도 여기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아시는데 어떤 분들은 잘 모르시는 분들도

참 많으시더라구요. 그래서 참 깜짝 놀랐습니다. 의외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올 해 종교간 대화가 있었어요. 네델란드의 윌리브로드 수도원에서

수도승간의 종교간 대화가 있어서 그 대화 때 한국의 실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제가 이런 종교간 대화에 대해서 공의회의 가르침을 신자들에게 또 수도자들에게

설명을 했는데 잘 못 알아듣고  또 그런 이해가 없더라~

 

이런 발표를 했더니 그 독일에서 오신 한 신부님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아직도 선교라든지 종교간 대화 이 사이에선 아직도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걱정할 것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교육이 먼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그 개념을 확실히 하지 않고서는 공의회에서 어떻게 가르쳤는지 이 교회의

가르침을 확실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나눔을 통해서, 이 강좌를 통해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어떻게

종교간 대화에 대해서 또 공의회가 열리고 난 다음에 벌써 한 60년 정도 흘렀죠. 그죠!

근데 50년? 50년 정도 흘렀습니다. 55년 정도 되네요!

 

이 시간 동안에 또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지침들, 또 선언문들, 또 어떤 다른 기구를

만들면서 종교간 대화에 대해서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여정들을 오늘 이 시간에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 그러면 공의회를 기준으로 해서 공의회 이전에는 교회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보도록 할께요.

 

2차 바티칸 공의회 여기는 이건, 하나는 과돋기라고 볼 수 있겠죠. 과도기.

그 다음에 이후. 공의회에서 무엇을 가르치는지 살펴볼 겁니다.

 

자,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이것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하느님 나라이고 수도원도 예전에 끌리니 수도원 같은 경우에도 수도원이 다

하느님 나라, 천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믿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고  교회 안에 구원이 있다.

그래서 우리 교회로 와야 된다.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 우월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었고 그리고 배타주의라고 그럽니다.

 'Exclusive' 배타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배타주의, 네.

근데 이 배타주의의 가장 핵심이 되는 원리는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 되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또

하느님 나라를 우리에게 성취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구원 받을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쵸! 가톨릭의 세례를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선교를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 받아야 되니까.

여러 신대륙이 발견되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줬죠.

그리고 처음에 로마에서 로마 국교화가 되면서도 구원을 받아야 되니까 막 세례를

물 뿌리듯이 이렇게 줬죠.

 

그러다보니까 교회가 점점 부패해지고 타락해지는 그런 또 역사도 있었죠.

그래서 하여튼 그 당시에는,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 받는다. 이렇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종교간 대화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죠.

왜냐하면 우리 종교를 믿지 않으면, 가톨릭을 믿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으니까.

다른 종교는 이교도였죠. 이교도. 그죠! 그래서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근데 과도기가 접어들게 된 이유 ,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생겨난 이유 중에 하나는

특별히 신대륙의 발견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낯선 다른 종교들, 타종교,

신대륙을 발견하니까 인디언들이 믿는 그런 종교들도 있었고 불교도 있었고 다른

여러 가지 원주민들의 종교, 또 인도에서의 어떤 그런 거, 뭐 그 전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특별히 많은 다른 인식을 갖게 되었죠. 아, 저네들은 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다른 문화를 접하였습니다.

 

유럽의 문화들이 점점 확장되어 가면서 아시아의 문화들, 아시아의 종교들도 접하면서

유럽인들이 어떻게 우리 문화가, 그 전에는 유일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종교들, 특히

아시아의 문화들을 많이 접하면서 굉장히 고등한 그런 문화를 만나면서 좀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래서 단순히 처음에는 서구의 문명을 아시아에의 문명에 그냥 이식시킬려고 했죠.

그렇지만 실패했죠. 왜냐하면 아시아 사람들 나름대로 어떤 문화적인 세상의 영역이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이식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죠!

 

그래서 그런 오류도 많이 범합니다. 예를 들자면 남아메리카 이쪽 남미쪽으로 가서선교사들이 앞에는 총을 들고 뒤에는 십자가를 들고, 쉽게 이야기하면 영화 '미션' 보면나오죠. 미개하다고 생각했고 그 남미 사람들을 학대하고 또 때로는 심지어 많은 학살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도 그때 교회의 어떤 잘못된 점에 대해서 사과도 하시고 그러셨죠.그리고 그때는 잘못 알고 있었던 거죠. 그때는 너무 정치와 종교가 일치되어 있었기 때문에그런 오류를 범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자체가 잘못했다가 보다는 그것을 그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 인식하고있었죠.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 겁니다.많은 경우에 흔히들 우리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이 있기도 합니다.사람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 문제가 없는 공동체는 없습니다.그 어떤 완벽한 공동체는 없죠. 그죠!
그런데 많은 경우에 교회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교회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는데그것은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이 듭니다.교회 자체는 잘못 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소속된 사람들이 잘못 된 거죠.그래서 사람과 교회를 같이 연결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저도 부족하고 또 여러분들도 부족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부족함이있는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부족함에서 또 새롭게 시작하시죠.그래서 사람들이 잘못 되었을 때 교회 전체를 비판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아무튼 그리고 또 타종교  특히 아시아의 유교, 불교 이런 것들을 만나면서 교회가, 힌두교도 있죠.힌두교를 만나면서 또 다르게 이해하기 시작했구요 그리고 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다른 문화에들어갔는데 서구의 문화가 접목이 안 되는 거죠.
왜냐하면 그네들 나름대로의 우수한 어떤 그런 문화의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그리고 또 어떤 비그리스도교에 대한 어떻게 이해할 건가? 이해 문제!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아시아에서 우리 선조들, 이순신 장군이나 뭐 세종대왕은 구원 받았을까? 그런 의문들도생기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비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간 사람들,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 이런 문제,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바라신다고하셨는데 보편된 구원의지와 또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그리스도교 안에 세례를 받아야지만 구원받는다는 이전의 입장하고 또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그 안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갈등들, 모순들,이런 것들을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가!
세상은 자꾸 발전하는데 교회는 예전의 사고만 할 수 없게 되는 그런 시기였죠.그리고 또 많은 다양한 종교들에 대한 정보들이 같이 들어오면서 그리스도교에서도 자기네 정체성,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혼란스럽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철학적인 배경들, 탈그리스도화 할려는 실존주의 철학이라든지 또 과학과 이성이발달하면서 이성주의적인 사고, 합리주의적인 사고 이런 것들이 영향을 미쳐서 이 교회가 새로운해석을 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23세께서 바티카 공의회 2를 여시게 된 거죠.이게 몇 년이었죠? 네, 1962년부터 해서 1965년 그 사이에 공의회가 개최됩니다.그래서 이전의 생각들이 공의회에서 점점 다른 해석이 나오는데 그 해석에는 여러 가지 영향들이많이 있었습니다.
근데 이 해석에서 교회가 포괄주의적인 그런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Inclusive'여기(공의회 이전)서는 'Exclusive' 였지만 'Inclusive' 포함, 이미 안에 있다는 뜻이죠. 포괄한다.받아들인다는 그런 뜻이 있는데  그럼 어떻게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 또받아들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제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공의회에서 1962년부터 65년까지 개최되었었는데 그 공의회는 굉장히,  지금까지 개최되었던역대 공의회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죠. 거의 한 2800명 가량이 모여서 같이  서로 논의를 했었고,그 결과 16개의 문헌이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 4개의 헌장,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문이 선포되었는데 이게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입니다. 한글로도 번역되어 있는데 이 문헌에 보면 특히 사목헌장이라든지 교회헌장, 교의헌장에서 타종교에 대한 이해, 어떻게 대할 건가, 특히 구원론에 대한 설명들이 많이 들어있구요,선언문 가운데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해서 우리시대라고 번역 되어있는데'노스트라 에따떼'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이 선언문에서 그 타종교를 어떻게 대할건가,다른 종교를 어떻게 대할건가 이게 나옵니다. 다른 종교, 그리고 뭐 이슬람교, 유대교, 이런종교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종교간 대화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공의회 문헌에 교회헌장이라든지 사목헌장이런 것들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 가운데 제가 조금 핵심되는 부분들을 좀 발췌해 왔습니다.그래서 이 구절들을 함께 읽으면서 설명을 제가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우선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핵심이 되었던~ 오늘은 꼭 수업하는 것 같습니다. 그죠!지금까지는 영적인 변화를 나누었는데 오늘은 학교 강의실에서 수업하는 느낌이 좀 듭니다.

 

 

 

< 좀 배워야 됩니다.

배워야지 새로운 것도 배우면 우리가 업그레이드 된다고 좋은 말로 표현하지만

오늘은 좀 배움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자, 포괄주의라 그랬죠. Inclusive라 그랬습니다. 네.

이 포괄주의를 강조한 이유, 배경중에 핵심이 되는 게 바로 이겁니다.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

독일 신학자인 칼 라너가 이 부분을 굉장히 강조를 했습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가톨릭 안에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께서는 그 구원의 보편성을 지니시고

모든 사람들을 당신 나라에 초대해 주시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

 

 


쉽게 생각해 보십시오.만약에 불교를 믿는 사람인데 하느님께서 너는 불교를 믿었기 때문에 나는 너를 구원하지 않겠다.이렇게 말씀하실까요?혹은 너는 이상한 개신교에 다녔기 때문에 너는 가톨릭이 아니기 때문에 너는 구원하지 않겠다.이렇게 표현하실까요?
힌두교, 이슬람, 마찬가지겠죠.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류를 모두 창조하셨잖아요 그죠!모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안에는 천지창조 때 우리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만들자, 그래서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모상이 담겨져 있죠. 그리고 우리 모두를 당신 나라에 초대해 주신 분입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우리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는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됩니다.근데 또 충돌이 일어나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받는다고 예수님께서 그랬어요.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다는 게 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요런 부분들이 차차 차차 설명이 되어 갈텐데 우선 요 부분을 기억하십시오.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 모든 사람들을 당신 나라에 하느님 나라에살게끔 초대해 주셨고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죠.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예수님께 감사드려야 됩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잖아요 그죠!그래서 예수님이 단지 유대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 대목을 먼저기억하신다면 이 포괄주의를 이해하게 됩니다. 포괄주의! 그죠!
여기에 제가 하나 읽어드릴께요. 교회헌장 16항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믿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교회헌장 16장)

 

 

 


여기에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그죠!자기 탓 없이, 예를 들면 우리 조선시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예수님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그죠!근데 그분들은 자기 탓 없이, 자기 탓이 없는 거죠.
그렇지만 그 안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뭐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찾진 않지만우리가 우리 어머니들이 뭔가 자녀들을 위해서 빌기도 하고,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기도 하고,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한 그런 분들이 참 많이 있을 겁니다. 그죠!
그런분들이 뭔가 하느님의 뜻을 자기는 뜻이라고 생각 안 했지만 그래도 사랑을 나누고 베풀려고했을 때 그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 "또한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사실 그들이 지닌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교회는 복음의 준비로 여기며 모든 사람이

마침내 생명을 얻도록 빛을 비추시는 분께서

구원을 주실거라고 생각한다." > (교회헌장 16장)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래서 모든 사람, 생명을 주신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뜻, 사랑을 알게 모르게 실천해 왔던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앞에서는 교회를 모르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이 가능하고 또 뒤에는 바른삶을 통해서 하느님을 직접 표시는 하진 않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이것을 칼 라너는 그것을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그리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역할을 했죠. 그렇게 되면 다른 종교인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겁니다. 그죠!
자, 그리고 이런 공의회가 열리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점점 타종교에 대해서 조금 더 개방되어야겠다는 그런 마음들을 갖게 됩니다.물론 공의회가 열리고 난 다음에 교회가 타락했다 해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그 당시에!
그렇지만 지금은 그 가르침이 옳았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고 그 공의회가 성령의 인도에 따라움직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공의회에서 이 비그리스도교적인 문화하고타종교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언급들을 합니다.
그래서 이 언급들을 통해서 더 발전되어 나가고 또 타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들도 계속해서형성되어 나가는데 그런 과정에서 토마스 머튼이 했던 많은 예언적인 말들, 표현들이 교회에대로 반영됩니다.그래서 나중에 토마스 머튼이 이 종교간 대화의 개척자라는 것이 더 확연히 드러나게 되죠.
그럼 계속해서 다른 문헌을 좀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그 현대 교회의 사목헌장 22항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성령 가운데

선한 의지를 갖는 모든 사람에게 진리로 통한다.

 

그리스도가 모든 이를 위해 죽었고,

인류의 궁극적 소명은 사실상 단 하나인 하느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만이 아는 성령이 부활의 신비와 관련된 가능성을

모든 이에게 열어주었음을 믿어야 한다."> (교회헌장 22장)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성령을 통해서 성령의 선한 의직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진리에로 인도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나중에 조금 더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그리고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16항에서 이어서 이런 말도 하십니다.

 

 

<"비록 자기 의지에 반하여 예수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신실하게 하느님을 구하고 은총의 영향을 받으며 양심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의 계시를 알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하느님의 섭리는 또한 아직 하느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지만

은총 덕분에 선한 삶을 살려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교의헌장 16항)

 

 

 

그죠! 이렇게 보면 계속해서 공의회는 하느님을 직접 예수님을 직접 표현하진 않더라도 그런사람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이 타종교에 어떤, 특별히 윤리 생활, 타종교의 어떤 그런 삶에 대해서 인정하고 존중,존경하라는 그런 표현도 합니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문 2항에 보면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제가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옛부터 오늘날까지 여러 민족들은 사물의 변천과 인생사에 들어 있는 심오한 힘을 어느 정도인식해 왔다. 때로는 최고의 신이나 아버지를 긍정하기도 하였다.이같은 인식과 긍정은 그들의 생활에 깊은 종교적 의미를 불어 넣는다.종교는 문화 발전에 따라 더욱 정교한 개념과 고상한 언어로 이러한 인생 문제에 해답을 주려고애써 왔다."
그렇죠. 우리가 그리스도교가 아니더라도 도교라든지 유교라든지 또 불교라든지 힌두교의가르침을 보면나름대로 우리 삶의 의미를 깨치기 위해서 인간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죽어가는가!대상의 고통은 왜 있고 우리는 이 삶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해 내야 되고 또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이런 것들을 오랫동안 많은 훌륭한 분들이, 선지자들이 혹은 종교 창시자들이 그런가르침을 줄려고 노력을 해 왔었죠.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입니다.

 

 

< "가톨릭은 힌두교 불교 등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양식과 행동방식뿐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한다."

 

굉장히 큰 차이가 나죠. 패러다임의 전환입니다.

그 전에는 불교, 힌두교, 도교, 이런 것들은 다 이교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더 유교에 어떤 그 신주단지를 신봉한다 그래가지고 많은 박해도 있었죠.

그렇지만 그것이 단순히 조상을 섬기는 거였고 신이 아니라는 거를 알기 때문에

교회에서 그것을 허용하게 되었죠. 그래서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근데 모든 것을 다 배척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옳고 거룩한 것, 이것을 배척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좋은 생활양식과 그런 계율들을 존중한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전에는 무조건 그런 것들은 나쁜거니까 폐기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지만

이제는 존중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교회가 이제 그만큼 성숙해진거죠.

교회가 이제는 노인이 아니라 어르신이 된 겁니다. 어르신. 그죠!

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거죠.

 

그래서 이젠 다른 종교 안에도 참 진리의 빛을 반영할 수 있다.

참 진리의 빛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어서 계속해서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비록 가톨릭 교회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 여러 가지로 다르더라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

 

 

 

 

 

그래서 종교간 대화하는 분들 중에 많은 공통언어 중에 하나가 진리입니다.다른 종교도 진리를 추구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뭐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어요?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래서 이 진리라는 것을 통해서 다른 종교도 진리를 찾는 거죠.
그러면 다른 종교도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진리안에 있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겁니다.그래서 서로 다른 종교가 지금 세상에는,  종교들 안에는 종교를 믿는 사람도 있지만 믿지 않는사람도 되게 많습니다. 그죠!
그래서 이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고 유대를 해서 세상에다른 평화를 건설해야 된다는, 그래서 세상에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서로 사랑의 유대, 협력의 유대를 해야된다는 것을 공의회에서 계속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지혜와 사랑으로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대화하고 협력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을 증언하는 한편 다른 종교인들의 정신적 도덕적 자산과 사회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보호하며 증진하도록 모든 자녀들에게 권고한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권고한다. 그렇게 하라고 다른 종교인들과 협력하라고 가르칩니다그렇지만 공의회에서 무조건 다 협력하고 받아들이라 이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 안에서 예수님의 역할은 없는 건가?아닙니다. 공의회에서 예수님의 역할을 그래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그래서 다른 종교 안에는 예수님의 어떤 역할이나  어떤 예수님의 그런 모습이 부분적으로그 다음에 혹은 일시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러니까 종교의 진실된 성취는 오직그리스도교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또한 이런 진리에 대한 부분적인 성취, 또 다른 종교안에 깃든 하느님의 임재와 성령의 활동이다른 종교안에 있지만 그것이 완전하지 않다. 라고 공의회는 또 가르칩니다.


그래서 공의회의 이런 가르침들을 우리가 오늘 배웠습니다.다음 이 시간에는 조금 더 그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제가 설명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 자, 이제 마무리를 하면서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공의회는 어르신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고 또 다른 종교를 통해서 배울려고 하고,

또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예수님을 만날려고 합니다.

 

나는 타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또 다른 종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공의회는 분명히 받아들이고 개방하고 존중하라고 그랬습니다.

 

나의 마음자세,

다른 종교를 대하는 태도,

오늘 새롭게 한 번 점검을 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다른 종교인들을 대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