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창에 찔린 예수 화살에 꽂힌 신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은가루리나 2020. 5. 18. 03:31


영성교육Re:산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 (우화 984) /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이해욱프란치스코위무위64추천 0조회 47319.07.08 22:20댓글 132





엑카르트는 하느님이 만물 안에 있음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모든 창조성의 놀라운 본성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주 안에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모든 피조물은 밖으로 흘러 나오되 안에 머무른다.
그는 또 다른 대목에서 이러한 창조 이해를 상세히 설명한다.


"아버지께서 모든 피조물을 낳으셨을 때, 그분은 나도 낳으셨습니다.
나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밖으로 나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이 내 안에서 싹트면, 나는 그 관념을 숙고하고,
그런 다음 그것을 표출하고, 여러분은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도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만유내재신론의 확실하고 정통적인 교리의 한 표현이다.

만유내재신론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한 교리는 이단적인 범신론과 다르다.


범신론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 하느님이고, 하느님이 모든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범신론은 하느님의 초월성beyondness을 무시한다.




실로, 엑카르트는 본 설교에서 특별히 고심하여

자신이 범신론에 빠져 있지 않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에게 가장 많이 붙여진 죄목은 그가 범신론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그는 피조물이 하느님에게 덧붙여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피조물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큰 분이다.
하느님에게 덧붙여진 만물은 하느님 한 분만 못하다.

엑카르트의 만유내재신론은 하느님을 우리의 밖에 있는,
혹은 창조계 밖에 있는 주체나 객체로 보기를 거부한다.
그는 만유내재신론을 재삼재사 발전시킨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하여 성서의 증거를 끌어댄다.



"만물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만물은 당신 안에만 있습니다'(토비 10,5);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그분을 통해서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로마 11, 36)",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 28).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이런 식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만물이 하느님의 밖에 서지 않도록,
만물이 하느님의 곁에 서지 않도록,
만물이 하느님을 넘어서지 않도록,
오히려 만물이 하느님 안으로 들어오도록,
만물이 하느님을 받아들이도록,
만물이 하느님 안에 둥지를 틀도록.




우리는 하느님에게로 올라갈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서,
"하느님이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두루 편재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에게로 올라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위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로 올라가고 있는 한,

우리는 그분에게 이르지 못할 것이다.
대양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대양에 푹 잠겨 있듯이, 우리도 하느님께 푹 젖어 있다.


"빛이 영혼의 능력을 온통 감싸고 있다.
(어떤 대가는) '천상의 빛이 그분을 온통 감싼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자기 속에 모든 존재를 지닌 존재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엑카르트는 창조를 만유내재신론적인 창조,
곧 하느님 안에서의 신적인 출산으로 기술한다.


무지한 자들이 잘못 상상하는 것과 달리,
하느님은 만물을 지으시되, 그분 자신을 벗어나지 않도록 지으셨습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

그분이 자신 안에서 행하거나 창조하신 모든 것은
그분 안에서 보고, 그분 안에서 알고, 그분 안에서 사랑합니다.


그분은 자신을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분 특유의 것입니다.



만유내재신론을 알지 못하는것,
곧 만물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무식한" 것이라고 엑카르트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물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이 사물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안과 밖에 있는 것은

바닷물이 물고기의 아가미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


그분은 사물 안에 있으면 있을수록,

사물의 바깥에 있다. 그분은 안에 있으면 있을수록, 바깥에 있다.


하느님에게 안과 밖은 대립되지 않는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을 수 있고,

이와 동시에 하느님도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다.



엑카르트는 하느님 안에 있는 삶의 의미를 얕잡아 보아선 안 된다고 경고한다.
하느님 안에 있는 삶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보다 훨씬 풍부한 삶이다.
이 점에서 하느님 안에 있는 삶은 친구 사이에 맺는 우정 관계보다 훨씬 깊다.

함께하는 삶에는 분리와 거리감이 자리하지만,

안에 있는 삶은 그러한 차이를 지워 버린다.
안에 있는 삶은 일치와 합일이다.


엑카르트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은 하느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레임스 공의회와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렇게 말했다.
하느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 가득 차 있으며,
하느님의 독생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다.


우리가 하느님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육화의 진정한 목적이다.


성육신은 하느님이 여러분을 독생자로 낳기 위해 일어난 사건이다.
우리는 하느님과 같고,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다.


"내가 너희의 뜻이 되리라"-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뜻이다.
우리의 목적은 하느님처럼 되는 것,
엑카르트가 또 다른 대목에서 말한 대로,

"하느님처럼 만물 안에서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하느님처럼 투명하고

만유내재신론적으로 될 수 있고, 에워싸고 에워싸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이 경험하는 것과 똑같은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다.


하느님은 스스로 그 자신이 된다.
그분은 스스로 하느님이 되었듯이 여러분에게도 하느님이 될 것이다.

이러한 만유내재신론은 우리네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은 신비로운 공동체the Mystical Body 안에서 일어나고,
새로운 창조에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일어난다.


네 모든 일을 하느님께 맞추어라.

그것은 말과 일을 결합할 때 일어난다.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고, 제시하고, 낳아라!

엑카르트가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성서 구절에서,
우리는 신비로운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는 자들에게 주는 다음과 같은 훈계를 읽을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듣기 싫어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은 자기네 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마음에 맞는 교사들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에 마음을 팔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내며
복음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그대의 사명을 완수하시오.(2디모 4, 2-5)



엑카르트는 가르치는 일과 우리 평생의 과제인 복음 전파에 본격적으로 손을 댄다.
그는 하느님과 피조물의 합일을 말하는 가장 신비로운 순간에도 입을 열어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신비에 빠진 사람들은 엑카르트의 통합적인 시각에 넋을 잃은 나머지,
엑카르트가 하느님과 함께 은밀하게 보내는 독신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엑카르트는 이런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해 이 설교에 큰 계명을 끼워넣어,
신비로운 공동체를 생기있게 하는 생활 방식에 적용한다.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이고,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 안에 있다면,
우리는 만물 안에서 하느님을 똑같이 사랑해야 할 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권고는 윤리를 넘어선다.


그것은 하나의 생활 방식으로서 계명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이자 선물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과 남을 객체 내지 주체로 본다면,

우리는 여전히 계명에 따라서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계와 그 거주자들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우리의 행위는 공동체 전체를 섬기는 길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웃의 아픔과 기쁨을 보고 응답하는 통전적인 관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붙잡은 진리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한 몸이고, 하느님의 유일한 말씀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붙잡은 진리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한다.
이는 우리의 이웃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이 이웃 안에 있기 때문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


실로 모든 피조물은 자신들의 근원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무른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분도 출판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