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103 pp.516-520 제3편 제14장 심령생활의 신비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은가루리나 2021. 6. 23. 02:49

 

 

★거룩한위탁
제14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신비적(神秘的)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3 절 관상(觀想)의 진보와 덕(德)의 진보

옴니아 추천 0 조회 232 13.12.12 06:22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②
 제4절 장소와 환경 ①②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①②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①②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
 ⑴
 ⑵
 ⑶
 ⑷

제8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실패와 과실 -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내적시련의 일반 -
 ①
 ②
 ③
 ④

제10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유혹 -①
 - 유혹 -②
 - 유혹 -③

제11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위안과 건조-①
 - 위안과 건조-②
 - 위안과 건조-③
 - 위안과 건조-④

제12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①②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①②

제13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①②
 제2절 각가지 공포 ①②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①②
 제4절 양심상의 小心 ①②

제14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①②③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①②③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①②③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제3편 위탁의 대상 ①②




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14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신비적(神秘的)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3절 관상(觀想)의 진보와 덕(德)의 진보 ①


p.516

우리는 신비적 길을 오르고, 또 올라 항상 오르기를 희망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달 몇 해가 지난 후에도 비록 후퇴하였다는 느낌을 없을지라도,
거의 같은 곳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하나의 쓰라린 시련이며,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실망, 낙담의 유혹,
아마 뒤를 돌아다 보려는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신비적 길에 있어 진보하려는 소망은, 
그 자체로서는 전연 정당한 것이며,
우리는 신뢰와 효애로부터의 기도로써 그것을 나타낼 수 있다.

천주와의 영적 친교(靈的親交)가 보다 높이 올라감에 따라,
우리에게 보다 커다란 광명과 힘을 초래하며,
사랑에 의한 일치를 더욱 굳게 하고,
덕의 실행을 보다 완전히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근거가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소망은 효애에서 우러나는 위탁에 의해서 조절돼야 한다.
천주께서는 어디까지나
우리에게 주시려는 은혜의 주인이 되시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우리를 종속(從屬)과 겸손 안에 간직하시기 위하여,
그럴 때와 분량은, 당신의 것으로서 이것을 보류하신다.

천주께서는 모든 선의의 영혼을 신비적 관상에 부르시지는 않으신다.

또한
부름을 받은 영혼도 같은 완덕의 정도에 불리고 있지 않는 것과 같이,
모두가 같은 묵상의 단계에 예정되어 있지도 않다.

이미 천주께서 그런 은총을 채우기 시작하신 후에,
아직도 보다 커다란 은총을 베푸실지,
종래의 것을 간직하게 하실지,
또는 그것을 제거하실지에 관해서는 전연 알 수 없다.


신비적 은혜의 어떤 것은 일시적인 것으로서 주어지고,
얼마 후 그것은 우리의 과실에 의하지 않고 제거된다.

묵상의 은총에 관해서마저
천주께서는 이와 같이 하실 수 있으리라.

p.517
그렇지만, 우리가 충실하다면,
천주께서 우리에게 그런 것을 계속하여 주시고,
또한 그런 은총이 더욱 풍요하게 돼 가리라는 희망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어디까지나 은혜의 주인이시다,
당신의 의향을 우리에게 알리지 않으시고,
아니 도리어 신중하게 그것을 우리의 눈에 감추신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만일 이 정적 상태(靜的狀態)와 감각의 암야(暗夜)안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어야 할 경우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이 몫에 만족하자.

대개 그것은 다른 많은 사람의 그것에 비하여 이미 탁월한,
그리고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 인자에 의한 축복을 내리신 천주를 간단 없이 찬미하고,
우리 안에 뿌리신 귀중한 씨앗에 열매를 맺도록 하는데
전력을 기울이자.

감사와 충실은 반드시
이 착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며,
두 팔을 펴시게 할 것이 틀림없다.

이에 반하여,
배은망덕과 태만은 그 인자하신 마음을 상해 드리고
아마 은혜를 주신 것을 후회하시게 하리라.



이제 말하는 소망은 인내로운 것이며,
은총이 주어지는 시기를 기다릴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저자에 의하면, 수동적 관상의 여러 단계란,
각기 영적인 노정(路程), 시기(時期), 나이를 가르킨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단계에 옮기기까지는
각 단계에 꽤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한다.

천주께서 그렇게 바라시는 것은
이런 각가지 묵상의 상태가
충분히 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단계에 나아가는 것을 서두르기보다는
현재의 상태에서 가능한 모든 이익을 이끌어 내도록 힘쓰자.

그리고,
영적 진보는 이런 은총에서 기대하여야 할 주요한 열매,
또한 바라신다면,
더욱 탁월한 단계에 오르기 위한 준비의 가장 확실한 수단이 아니겠는가.

특히 이 소망은 겸손한 것, 또한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보다 신속하게 보다 높이 오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의 항상 준비와 이에 응할 분발심의 결여에 기인한다.

p.518

성녀 대「데레사」는
(매우 열심한, 거룩한 방법으로 다스려지고 있던
성녀의 수도원에 관해서 말한것인데),

이 정적 묵상(靜的默想)의 영역에 도달한 영혼은 허다하지만,
거기를 넘어서 보다 높이 오르는 영혼들은 드물다.

나는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천주의 편에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천주께서 일단 그런 탁월한 은총을 주신 후에는
우리의 불충실함이 그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새로운 은총을 풍부히 채워주신다는 것은
나로서는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 내가 아는 바로 거기까지 도달하고,
또한 더욱 나아갈 수 있을 많은 영혼 안에 거기를 넘어,
보다 높이 오르는 이가 극히 적음을 보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며,
입에 담는 것마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영혼의 성」제 4. 3 장「자서전」15장)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성녀의 이 설을 승인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러므로,『테오띰』이여,
우리는 천주께 받고 있는 사랑에 나아가도록 힘쓰자.
왜냐 하면,
천주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지니시는 사랑은
우리가 결코 그것에 결여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신애론」2편 11장)



이 가르침은 우리를 크게 고무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또한 우리의 각가지 책임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

정적 묵상의 영역에 도달한 것을 자부하기보다는,
오히려 걱정하며,
왜 여기를 넘어 더욱 높이 오르지 못하는냐고
자문(自問)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이미 그 이상 조금도 진보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면,
겸손되이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항상 타당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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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의 과실에 의해서 은총의 흐름을 막았을 경우에는,
신속히 이 장해의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겸손된 신뢰로써 천주의 거룩한 의지를 흠숭하자.

섭리의 시기를 기다리면서, 이 시련을 성화(聖化)하고,
새로운 은총에 영혼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열심을 배가하자.


이처럼 충실히 실행하고 있는 동안,
묵상은 여전히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느끼리라.

그러나 실제로,
신앙은 광명을 더하고, 모든 덕은 증대하며,
특히 사랑과 신뢰와 위탁에 있어 특별한 이익을 거두리라.

그보다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이 진보에서 기대했던 이익은 바로 이것이다.


만일 목적을 벗어난다면,
보다 높은 묵상의 단계는
그것이 광명과 열정과 황홀함에 충만된 것이라도,
우리에게 있어 무슨 유익함이 되겠는가.

이에 반하여, 이 목적에 도달한다면, 
우리가 보다 통상적 길에 의해서,
비록 이런 광명, 열애, 환희를 
오랜 동안 빼앗기는 길에 의해서 목적에 인도될지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진실하고 커다란 진보, 
은총의 작용과 우리의 노력과의 목적인, 절대적으로 바라야할 진보란,
각가지 덕에 있어서의 진보,
특히 그 여왕(女王)인 애덕의 진보라는 것을 꿈에도 잊어서는 안된다.


아마 나의 견해를 보다 분명히 하는 것은 무익한 짓은 아니리라.
사랑의 옥좌는 의지 안에 있다.

끊임없이 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가끔 사랑은 거기에서 하급의 능력 위에 솟아나온다.

이렇게 하여
그것은 눈에 보이고 손에 닿을 수 있도록 분명히 나타나고,
때로는 참된 황홀 상태에까지 이르리라.

그것이 감각적일수록,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주며,
그리고 바랄 만한 것같이 생각된다.


그 때에는 모든 능력이 그 모든 정력을 거기에 집중하므로,
사랑은 완성되고, 그 힘은 증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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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로 바라야 할 것은
결코 이런 찬란한 광명, 이런 종류의 열정, 흥분이 아니다.

과연 이런 것은
영적(靈的)이라기보다 오히려 감각적이며,
또한 그런 찬란함에 비하여,
그토록 가치 있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사랑은 감각적 기능 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고,
순수히 영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 때 사랑이 발랄하게 힘에 넘치는 것일 수 있다 하드라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이리라.


그러나 사랑은
그 꽃에 의해서가 아니고, 열매에 의해서 판단돼야 한다.
즉 행위가 사랑의 증거가 되며, 척도가 되는 것이다.

견고한 깊은 사랑이란,
우리의 의지를 천주의 의지에 굳이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바라는 일에도 바라지 않는 일에도
온전히 천주의 의지와 하나가 되게 할 때, 완전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일체의 사물로부터의 이탈과, 자아에 대한 죽음과를 전제로 한다.



위에 말한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다.
관상에 있어서의 진보는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길에 불과하다.

관상의 진보는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고,
또한 그것만으로는 넉넉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