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105 pp.525-529 제3편 제14장 심령생활의 신비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4절 」①

은가루리나 2021. 7. 1. 02:05

 

★거룩한위탁
제14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신비적(神秘的)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4 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옴니아 추천 0조회 167 13.12.26 04:23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②
 제4절 장소와 환경 ①②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①②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①②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
 ⑴
 ⑵
 ⑶
 ⑷

제8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실패와 과실 -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내적시련의 일반 -
 ①
 ②
 ③
 ④

제10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유혹 -①
 - 유혹 -②
 - 유혹 -③

제11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위안과 건조-①
 - 위안과 건조-②
 - 위안과 건조-③
 - 위안과 건조-④

제12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①②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①②

제13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①②
 제2절 각가지 공포 ①②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①②
 제4절 양심상의 小心 ①②

제14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①②③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①②③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①②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①②③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제3편 위탁의 대상 ①②




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14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신비적(神秘的)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 4 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①


p.525

「천주께서 하시는대로 맡긴다는 것」은, 현대의 하나의 유행어다.
그것은 어느 정도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반정관주의(半靜觀主義)에 빠지기 때문이다.

거룩한 위탁의 개념을 설명하였을 때,
이에 대한 논거를 매우 상세히 말하여 위탁이 결코 조심,
개인적 노력을 제외하는 것이 아님을 제시해 두었다.(제1편5장 참조)


그러므로, 위탁은 순수한 의미로는,
단지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기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적 길에 있어 진실하지만,
신비적 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진실하다.

하나는 능동적 또 하나는 수동적이기 때문에,
천주께서 작용하시는 점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께서 하시는대로 맡긴다」라는 표어는
그 어느 것에 있어서도
우리의 모든 의무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p.526

일반적인 길에 있어서는,
천주의 작용은 우리의 자연적 방법에 적합하고,
행동의 선택과 실천을 우리의 자유에 맡기신다.

말하자면,
천주의 작용이 우리의 작용에 사용되는 대로 맡기신다.
이처럼 하늘에 계신 성부의 관대함은 감탄스러운 것이다.



먼저 묵상에 관해서 언급하고, 보기를 들어보자.
이것은 초자연적 행위이기 때문에,
은총이 우리에게 앞서고, 우리를 도울 필요가 있다.

은총은 우리의 모든 행위 안에 활동하며,
그것 없이는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은총은 묵상의 시간, 장소, 제목에 관해서 
결정의 자유를 우리에게 맡긴다.

그것은 또한,
마음대로 숙고(熟考)나 감정을 선택하고,
이런 순서, 길이 종류의 배당,
우리가 좋아하는 것에 따라 결심을 결정한다는 의미에 있어,
묵상을 우리의 뜻대로 진행하기를 허용하신다.


천주께서는 우리안에 우리와 함께 작용하시지만
우리가 활동하는 인간적 방식(人間的方式)에 따르시며,
감추인째로 머물러 계신다.

그러나 천주께서 원하시고 따라서
우리가 건조, 또는 위로, 평온 혹은 싸움 , 평화또는 내적 고뇌의
어느 상태에 두신다는 것도 역시 의심할 수 없다.

여기에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을 실행하여야 할 장소가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넓은 범위가 남겨져 있다.



신비적인 길에 들어갈 때, 사정은 일변한다.

정적 묵상(靜的默想)에 보기를 든다면,
성신의 은혜로써 활동하는 천주께서는
이미 이전과 같이 감추어 계시지 않으시며,
보통 그 현존(現存)과 활동을 영혼에 느끼게 하신다.

p.527
원하시는 대로 적당한 때와 장소에 있어,
성가대, 독서, 노동의 어느 것이나를 막론하고, 우리에게 작용하시지만,
그것은 반드시 언제나 우리가 대망하고 있는 때가 아니다.

천주께서는 이미 우리의 자연적인 방법에 응하시는 일 없이,
어느 정도까지 당신 자신의 방법을 우리에게 부과하신다.

원하실 때에는 우리의 묵상의 안내를 하시며,
이를 지도하신다.

천주께서는 고찰(考察)이 넓혀지는 것,
방법적 추리적으로 다양 복잡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막으시며,
점차로 사랑이 깃들인 단순한 응시 (凝示)를 우리 안에 형성하기 위하여,
상상, 기억, 오성(悟性)을 구속하신다.

천주 스스로 광명과 사랑을 만드시며,
때로는 넘칠만큼, 때로는 적당하게, 때로는 한 방울씩
이를 우리에게 주입하시고,
그 증감(增減)도 모두 원하시는 대로 이를 행하신다.

묵상의 주제(主題)에 관해서도
당신 자신의 신적 속성(神的屬性), 주의 수난하심, 유년시대,
그 밖에 원하시는 것을 주신다.

또는 우리 안에
감탄에 충만한 정온(靜穩)함, 
사랑에 넘치는 황홀상태,
평화에 충만한 대화(對話)를 자아내게 하시고,
또는 끝없는 사막의 쓰라린 건조에 도로 데려가신다.

그 활동을 증대시키고, 변화시키게 하는 것도,
물러가시는 것을 멈추게 하여, 회복시키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천주는 주시며, 그리고 그것을 잘 나타내신다.

그러나 간섭하심은 항상 자비에 충만한,
사랑과 그르칠 수 없는 예지와의 업(業)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께서는 보통 우리가 신심(信心)의 독서를 하고,
또한 형제들을 위하여 유익하고 풍요한 사상도 찾아낼 수 있는
용이성(容易性)을 남겨 두신다.

묵상을 행할 무력함 ...그것은 어떤 경우에는 전체적이 될 수 있는데...을
제외하고는,
이 점에 있어 신비적 영향은 우리의 능력을 온전히 구속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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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비적 영향을 받아들이는가, 물리치는가,
또한 신비적 영향이 우리에게 주는 묵상의 주제를 받는가, 다른 것을 택하는가,
또는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작용 안에 머무르는가,
이에 애정, 소원 등, 우리가 바라는 것을 첨가하는가는
항상 할 수 있는 일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정적 묵상(靜的默想)은, 수동적인 것과의 혼합이며,
즉 성녀 대「데레사」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적인 것이 초자연적인 것에 섞여 있다.」(「영혼의 성」제4.3장)

따라서 거기서는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우리 자신이 활동하는 것의 어느 것도 동시에 행해질 여지가 있다.



수동성(受動性)은
완전한 일치 및 탈혼상태에 있어 현저한 강도(强度)를 드러낸다.

그런 것이 최고도에 이를 때,
전자에게 있어서는 거의, 후자에게 있어서는 전연 
스스로의 활동이 없어진다.

그러나, 영적생활의 이 나이에 이르러도
묵상은 항상 이 강도(强度)의 최고점에 도달하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동일한 수업(修業)에 있어서도
그것은 혹은 오르고, 혹은 내린다.

따라서, 묵상은 대개의 경우,
단지 정적 상태(靜的狀態) 또한 수동적 정화(受動的淨化) 안에 이루어진다.


요컨대, 관상이 순수히 수동적이라는 것은 극히 드물다.

거기에는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
또한 극히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개인적 활동이 다소 행해질 수 있는 여지가 항상 있으리라.

그렇지만,
천주의 활동이 주요한 것이므로,
우리의 활동은 이에 종속(從屬)하며,
조화(調和)하여 융합하지 않으면 안된다.

「천주께서 행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는 것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하늘로부터의 감로(甘露)에 젖고,
태양 광선을 받는 들과 같이 전연 수동적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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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천주의 은총을 깨닫고,
조금도 잃는 일 없이,
이것을 받아 들이려고 전신(全身)을 그것에 향하게 하는,
지혜와 자유를 갖추고 있는 영혼의 태도다.

이 영혼은 그것에 승낙하고
반대하지 않으며, 사소한 장해를 두지 않을 뿐 아니라,
정신과 마음과 의지를 동원하여 자신을 온통 은총에 넘긴다.

따라서 신비적 영향을 느끼는 동안,
영혼은 끊임없이 다른 생각을 물리치며,
필요에 따라서 기도와 맞지 않은 행위를 피하도록 유의한다.


영혼은 계속되는 고찰(考察), 각양 각색이며 복잡한 감정,
그 밖에 모두
이런 작은 불꽃을 타오르게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소멸시키는 것을 구하며,
받아 들이는 것마저 피한다.

그러나
영혼은 천주의 활동을 존중과 복종, 신뢰와 감사로써 받아 들이며,
될수 있는 대로 잘 그것에 적합하도록 힘쓴다.


영혼은 이 활동을,
약하거나 강하드라도,
평온한 것이거나 기원적(祈願的)인 것이라도
따로 주제를 탐색하는 일 없이, 주어지는대로 받는다.

천주로부터 받은 것만으로 넉넉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사랑에 충만한 침묵 안에 천주를 관상하며,
또는 은총의 활동에 응하여 경건한 감정을 일으키는데 멈춘다.

만일 이것이 너무나 약한 것이라면,
천주의 활동에 적합한,
어떤 경건한 감정에 의해서 이것을 강요하도록 힘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영혼은 사랑이 깃들인 존경으로써 은총에 봉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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