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104 pp.520-525 제3편 제14장 심령생활의 신비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②

은가루리나 2021. 6. 24. 00:51

 

★거룩한위탁
제14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신비적(神秘的)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3 절 관상(觀想)의 진보와 덕(德)의 진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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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②
 제4절 장소와 환경 ①②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①②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①②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
 ⑴
 ⑵
 ⑶
 ⑷

제8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실패와 과실 -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내적시련의 일반 -
 ①
 ②
 ③
 ④

제10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유혹 -①
 - 유혹 -②
 - 유혹 -③

제11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위안과 건조-①
 - 위안과 건조-②
 - 위안과 건조-③
 - 위안과 건조-④

제12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①②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①②

제13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①②
 제2절 각가지 공포 ①②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①②
 제4절 양심상의 小心 ①②

제14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①②③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①②③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①②③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제3편 위탁의 대상 ①②




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14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신비적(神秘的)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3절 관상(觀想)의 진보와 덕(德)의 진보 ②


p.520

성「알퐁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수녀들은 신비적 저서를 읽었다.
그들은 저자의 소위
수동적인 이상한 일치에 온전히 마음을 빼았기고 말았다.

나는 오히려 그들이 능동적인 일치,
즉 성녀 대『데레사』가 말한 바
『영혼과 천주와의 참된 일치가 거기에 성립하는』
천주의 의지에의 완전한 적합을 바라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성녀는 능동적 일치만을 누리고 있는 영혼에 관해서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아마 그들은 보다 큰 공로를 세우고 있으리라.
왜냐 하면, 이 일치에는 그들 스스로 노고하지 않으면 안되며,
또한 천주께서 그들을 강한 영혼으로서 다루시기 때문이다』라고.

p.521
주입적 관상(注入的觀想)이 없드라도
일반적인 은총만으로 만일 끊임없이 노력을 계속해 나간다면,
자아를 멸하고, 그것을 온전히 천주 안에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추호의 의심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주께서 그 의지를 우리 안에 성취하시는 것만을 바라며,
또한 그것만을 기구해야 한다.
이것은 성덕의 전부다.」(「수도자의 성화」14장 2절의 6)



그러기에 성「알퐁소」에 의하면 목적은 오직 하나 뿐 이며,
그것은 즉 사랑에 의한 변화,
우리의 의지가 천주의 의지에 완전히 적합함에 있다.

그러나 거기에 도달하기에는 두가지 길,
즉 능동적, 및 수동적 혹은
수덕적(修德的) 및 신비적이라는 두가지 길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완전한 적합과 거룩한 위탁,
더구나 오직 그것만을 무조건 절대적으로 구해야 하다.
과연 그것은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두가지 길의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천주의 뜻에만 따른다.

그렇지만 원하신다면 이라는 조건으로
신비적 묵상과, 또한 그 진보를 바란다는 것은 충분히 허락돼 있다.
이 점에 관해서의 전통적 가르침은 확정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일에 관하여 다소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성「알퐁소」도,
이런 은총이 싹트기 시작했으면,
그 발육을 바랄 수 있다는 것을 적어도 승인하고 있다.



신비적 묵상에 대한 성녀 대「데레사」의 존경과 사랑을 모르는 이가 있겠는가.
그는 신비적 묵상의 정도가 높고, 빈번하면 할수록 그 유력한 효과를 찬양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것에 관해서 탁월한 관념을 주고,
평가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선익(善益)으로서 그것을 바라게 하며,
또한 천주께서 원하신다면,
어떤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그것을 획득하도록 격려하기 위해서다.

p.522
이 소망, 이 추구에서,
그는 완전한 일치, 탈혼상태에 있어서의 일치,
영적 혼인(靈的婚姻)까지도 제외하지 않는다.
이것을 성녀의 저술의 여러 곳에 의해서 입증할 수있다.
(쁠랑「묵상의 은총」25.17-19 참조)


이토록 일치의 묵상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 성녀도,
마치 사람이 길보다는 목적지를, 꽃보다는 열매를
더욱 깊이 바라는 것처럼,
의지의 일치를 보다 훌륭한 것으로 여겼다.

「그가 일생을 통하여 바라고 항상 기도한 것은, 이 의지에 의한 일치였다.」

「일치의 묵상」은 「지름길」이며,
우리를 의지의 일치에 인도하는데, 가장 빠른, 가장 유력한 수레이다.
(「묵상의 각가지 길」3편7장)

그러나, 그것은 여러가지 있는 길의 하나에 불과하며,
그리고 목적지는 아니다.


성녀는 말한다.

「나 거듭하여, 우리의 참된 보물은
깊은 겸손, 커다란 제욕(制慾),
그리고 장상 안에 천주를 보고, 그 명하는 모든 일에 복종하는 바
순명이라는 것임을 말합니다.

.....이런 것 안에 참된 영적 진보의 확실한 표시가 있는 것이며,
그것은 결코 묵상의 감미, 황홀상태, 현시(顯示),
그 밖에 천주께서 원하시는대로 베푸시는 은총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완덕의 길」19장, 「자서전」및「영혼의 성」)



성「비리버.네리」도 역시 같은 것을 말했다.

「수도자에게 있어서는 순명, 인내, 겸손이 탈혼상태보다도 훌륭한 것이다」
라고. (도르브 백작 부인 「동 성인전」27장)



성녀 대「데레사」, 성「비리버.네리」, 성「알퐁소」는
자신의 오랜 경험에 의해서
완전한 일치 및 탈혼상태의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천주의 이런 은혜의 가치를 무시하고 비난하는 망은(忘恩),
더구나 이런 것을 업신여겨
영혼을 거기에서 분리시키고 감히 성신께 충고하려는 막심한 착각은
그들이 모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망상(妄想), 착각에 대해서
경계하는 것만을 바랐다.

p.523
그리고 가장 혐오해야 할 망상은
의심 없이 이런 은총을 성덕 그 자체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런 은총이 천주에게서 오는 것인만큼 귀중한 은혜다.
그러나, 덕행이 묵상과 같은 영역에 높여지기 위하여
그런 것에서 최선의 이익을 이끌어내야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프란치스꼬.살레지오」역시,
비록 어느 영혼이 기도 중에 가끔 황홀상태에 드는 일이 있다 하드라도,
그 생활에 탈혼(脫魂)이 없다면,
즉 만일 자기포기와 단순함과 겸손과 특히
끊임없는 사랑에 의해서
세속의 욕망, 본성적인 욕구, 경향 위에 초탈(超脫)하는 일이 없다면,

「이런 모든 황홀상태는 매우 의심스럽고 또한 위험하다.
물론 그것은 사람들의 눈에는 감탄할 만한 것이겠지만,
그들의 성화에는 소용이 없다.

그것은 악마의 몹쓸 장난이거나 기만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묵상에 있어 자신을 잊고,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어도
초인간적, 탈혼적, 자기 위에 초탈한 생활을 영위하는 이는 복되도다!

천국에 있는 허다한 성인은 탈혼이나 관상의 황홀 상태를 경험하지 않았다.
..... 그러나 지상에 있어 자기를 극복하고, 본성의 경향을 억제하며,
생활과 행위에 있어
탈혼, 황홀의 영역에 도달하지 않았던 이는 한 사람도 없다.」
(신애론 7편6,7장)



이로써 우리는
「이 묵상이 있어 이 완덕이 있고, 이 완덕이 있어 이 묵상이 있다」라는
격언의 뜻을 깨닫으리라.

그것에는 하나의 참된 근거가 있다.
왜냐 하면,
일반적으로 영적 생활이 향상함에 따라 묵상도 높아지고,
묵상의 진보 역시 보다 커다란 덕의 진보를 자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p.524
그렇지만, 묵상의 진보가 정확하게, 또한 항상 
영적 생활의 향상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의 격언을 너무나 절대적으로 과장하여 알아들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는, 이것은 적어도 신비적 묵상에 관해서는 옳지 않다.
신비적 묵상은 어디까지나 천주의 은총이며,
천주께서는 이것을 반드시,
가장 충실한 영혼에까지도 주셔야만 한다는 까닭은 조금도 없다.

천주께서는 이것을 원하시는 이에게는, 바라시는 분량만큼 주신다.
그것은 아직 작업상(作業上)의 훌륭한 연장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용도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많은 영혼이,
마찬가지로 준비하고, 마찬가지로 협력하드라도,
천주께서는 원하시는대로
어떤 이에게는 이런 신비적 은총을 거절하시고,
어떤 이에게는 주신다.

그러므로, 오직 이것만으로는
각기의 완전성의 정도를 판단할 충분한 근거는 못된다.


성「요셉.꾸뻬르띠노」는 매우 빈번히 탈혼상태를 경험하였다.
그는 과연 그처럼 많은 탈혼상태를 경험하지 않았던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 또는 성「원선시오.아.바오로」보다
탁월한 성인이었을까.

근대에 있어서도,
천주께서는 성녀「젬마.갈가니」,「젤뜨루다.마리아」동정을
각가지 신비적 은총으로써 충만시키셨지만,
삼위 일체의 「엘리사벳」동정, 영해 예수의 성녀「데레사」에게는
그처럼 많이 주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후자가 전자만큼의 성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직 천주께서만 이것을 알으시리라.

그러나, 영해 예수의 성녀「데레사」가 현대의 위대한 성인이며,
그의 생애가 수도적 완덕의 전형(典型)임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신비적 관상에 관하여 이제까지 말한 것을
나의 저서인「묵상의 각가지 길」의 끝에 써 놓은 말로써 요약할 수 있다.

p.525

「가장 탁월한 묵상이란 가장 감미로운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가장 효과에 풍부하다는 것이란 의미다.

그것은
우리를 일반적인 길, 또는 신비적 길에 있어 높이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겸손하게 하며,
이탈시키고 순종하는 이로 하며,
모든 의무의 실행에 관대하고 또한 충실하게 하는 묵상이다.


관상은
우리의 의지를 천주의 의지에 일치시키고,
우리의 생활을 개선하며,
또는 적어도 덕에 진보시킨다는 조건 아래,
이것을 크게 존중해야 할 것임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덕의 절정에 이르기 위해서만 묵상의 진보를 원해야 한다.

천주와의 영적 친교(靈的親交)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는지를
호기심으로써 탐색하는 것을 그치며

오히려 자아에 죽고,
우리의 영혼 안에 신적 생명(神的生命)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그것에서 가능한 모든 이익을 이끌어 냈는지 어떤지에 관해서
살펴야 한다.」(「묵상의 각가지 길」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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