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117 pp.582-586 제 4 편 제2장 제4절 평화와 희열 ②

은가루리나 2021. 9. 7. 03:00

 

★거룩한위탁
제 4 편 거룩한 위탁의 우월성(優越性)과 효과(效果) 제2장 거룩한 위탁의 효과 제4절 평화(平和)와 희열(喜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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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편 거룩한 위탁의 우월성과 효과


제1장 거룩한 위탁의 우월성 ①②③

제2장 거룩한 위탁의 효과
 제1절 천주와의 친밀 ①②
 제2절 단순과 자유
 제3절 정신의 안정과 마음의 평온
제4절 평화와 희열 ①②
 제5절 거룩한 임종과 천주의 어전에 있어서의 힘 ①②

결론 ①②③

  역자 후기




제 4 편 거룩한 위탁의 우월성(優越性)과 효과(效果)

제 2 장
거룩한 위탁의 효과


제 4 절 평화(平和)와 희열(喜悅) ②


p.582

「게」주교는 말했다.

「이 희열이 감각적인 것임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 밖에는 더구나 가장 자주 그것은 순수히 영적인 것이다.」

여하튼 거룩한 위탁은 영혼의 기쁨을 낳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위탁이 자유를 확보하고 평화를 주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왜냐 하면 자유, 평화,
즉 진리와 사랑 안에 있는 자유와
이 자유에서 나오는 평화 때문이 아니라면,
사람은 무엇때문에 기뻐하겠는가.

그리고 이에 대하여, 자유와 평화 없이는,
어떤 기쁨을 맛보고 혹은 그 생각이라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대는 끊임없이 기쁨 안에 있을 비결을 원할 것이다.

나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왜냐 하면, 모든 사람들은 기쁨을 바라고 있지만,
그것을 찾아 얻는 이는 참으로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쁨을 찾아 얻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최상의 비결,
참으로 그르침이 없는 비결은 거룩한 위탁이다.

무엇 때문인가.
아직 많은 영혼은 신앙, 신뢰, 사랑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 적기 때문에,
고난에 임하여 기쁨을 맛볼 수 없다.

그러나, 천주의 의지와의 완전한 적합에 도달한 영혼은
발랄한 신앙, 견고한 망덕, 관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장 사소한 일 안에도, 오직 그들의 성성(成聖)에 활동하시는
천주 성부를, 구세주를, 벗을, 정배를,
지극한 사랑이신 분을 찾아 얻는 것을 배웠다.

p.583
그들은 천주께 남김 없이 신뢰와 사랑을 바쳤다.
천주야말로 모든 사건의 지상(至上)의 주가 아니신가.

그러므로,
그들이 효애에 충만한 순명 안에 머문다는 조건 아래,
만사는 모두 그들에게 있어 최선의 것이 된다.

이렇게 하여
그들이 기쁨을 맛보지 않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창조의 7일째 천주께서는 그 손의 업적을 바라보시고,
모든 것을 좋고 훌륭한 것으로 보셨다.
이것은 천주께서 깊은 기쁨으로써 그런 것을 바라보신 까닭이시다.


「천주께 맡겨 버린 영혼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즉 이 영혼 안에 형언할 수 없는 신적 기쁨이 넘쳐 흐르는 것이다.

과연, 이 영혼의 위탁의 바탕은, 바로
천주께서 바라시고, 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락하는 것이며,
그 원하시는 모든 것에 대하여 만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동서)


「이것은 옛 성인, 예를 들면
성『안또니오』, 성『도민고』, 『아씨지』의 성『프란치스꼬』에서 볼 수 있고,
용모에도 넘치며, 말이나 행동에도 표현된 완전한 정온(靜穩),
변함 없는 희열의 모든 비결이다.

같은 특전은 성『이냐시오.로욜라』에게도 부여돼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충실한 천주의 모든 종을 특징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런 성인들이
아마 인생의 모든 비참함을 면하고 있었다고도 말하리라.
아마 그들은 육체상의 나약함에 번민되지 않았다고도 말할지 모르겠다.
아마 싸워야 할 어떤 유혹도,
참아 견디어야 할 어떤 고통도 없었다고도 말하리라.

p.584
결국, 천주께서 그런 열심한 종들에게서
고뇌와 과실에 빠지는 모든 원인을 멀리 하셨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인들의 십자가는 다른 이의 그 것보다도 훨씬 무거운 것이다.
모든 고난, 고뇌, 치욕은 지상에 있어서의 그들의 몫이며,
그 관은 가시로 엮어져 있었다.

천주께서는
그 가장 사랑하시는 이들을 위하여 가장 혹심한 시련을 보류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의지를 천주의 의지에 온전히 적합시키고 있었다.

고통도, 고행도, 유혹까지도 모두 기쁨과 위안의 이유가 되었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런 모든 것이 천주의 의지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고,
이 천주의 의지 안에, 그들의 모든 복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적 완덕」8편4장)



그들은 이 가혹한 취급 안에서까지도,
천주를 찬양하고 신뢰와 기쁨으로써 이에 복종하려고
자신을 격려하기 위한 무수한 거룩한 이유를 발견하는데 능숙하였다.


「아르스」의 성인 사제「비안네」의 말을 듣자.

「세상에 평화를 준 것은 십자가다.
우리 마음 안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도 역시 십자가여야 한다.

우리의 비참함은 모두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는데서 일어난다.
십자가를 두려워 하는 것은, 십자가를 더하는 것이다.
단순히 십자가를 짊어질 때, 그것은 이미 고통이 되지 않는다.」



어느 거룩한 수도자는 다음과 같이 버릇처럼 말했다.

우리의 의지가 천주의 의지를 횡단할 적에는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를 만든다.

이에 반하여
우리의 의지가 천주의 의지에 적합할 경우에는,
그것은 두가지 병행하는 의지가 되어,
우리가 신속하게 그리고 쉽게 천국에 달음질해 나아가는 길이 된다」라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보다도 우리를 더욱 잘 주를 닮게하는 것은 없다.
주와 함께 고통을 당할 때, 모든 고뇌는 감미로운 것이 된다.

그리스도신자가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고,
그것을 피하려 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될 수 있는 일인지
도저히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p.585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분을
동시에 피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역경은 우리를 십자가의 발밑에 둔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를 천국의 입구에 둔다.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모욕을 당하며, 수치를 받고 바수어져야 한다.


고통!
아, 그것이 무엇이랴. 다만 순간적인 것이 아닌가.
만일 우리가 8일 동안 천국에서 지낼 수 있다면
이 순간적인 고통의 가치를 깨달을 것이다.

어떤 십자가도 그다지 무거운 것이 아니고,
어떤 시련도 그처럼 쓰라린 것이 아님을 알리라.

십자가는 천주께서 그 벗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십자가의 사랑을 구하여야 한다.
그러면 십자가는 감미로운 것이 된다.

나는 4,5년 동안 이것을 경험하였다.
나는 몹시 중상 되고 매우 반대를 받으며, 짓눌려졌다.

아, 허다한 십자가였다.
나는 거의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됐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의 사랑을 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나는 행복하게 되었다.
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실제 이것 이외에는 행복은 없다! 라고.


십자가가 어디에서 오는지 결코 탐색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천주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한 이 십자가를 주시는 분은 언제나 천주시다.

아, 심판의 날이 닥쳤을 때,
우리는 얼마나 현재의 불행을 행복으로 간주하고,
얼마나 치욕을 자랑하며, 얼마나 희생 때문에 부요하게 될 것인가!」
(모낭 「아르스의 성인 사제」3편 3장)



성녀 「젬마.갈가니」에게 있어, 고통이 없는 날은 잃어버린 날이었다.
성녀는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녁이 되어,
아무 것도 예수님께 바칠 수 없었던 날이 가끔 있었습니다.
아, 그 때 나는 얼마나 불행했던가!」라고.

오랜 고난이 계속되고 있었을 때,
주께서는 그에게 몹시 괴로왔는지 어떤지 물으시자,
그는 「당신과 함께라면 고통을 겪는 것도 매우 즐거운 일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제르망 「젬마.갈가니전」15장)

p.586

「젤뜨루다.마리아」동정은 지도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지금, 나를 고난의 도가니에 던져 넣으신 주께
감사의 매괴신공을 바치고 있었읍니다.

오늘 아침 영성체 후에 『마니피깟』을 노래하였읍니다.

예수님이 나의 고난을 즐겨 받으실 뜻이라면,
나에게 이미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 이외에 아무런 위안도 없읍니다.

괴로움을 당한다, 더욱 괴로움을 당한다, 더욱 더 괴로움을 당한다.
이것이 내가 되풀이 하고 있는 기도입니다.」(「현대의 한 신비자」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