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122 pp.600-603 결 론(結 論) ②

은가루리나 2021. 10. 27. 13:17

 

 

★거룩한위탁
결 론 (結論) (2)

옴니아 추천 0 조회 103 14.05.07 04:50



제4편 거룩한 위탁의 우월성과 효과


제1장 거룩한 위탁의 우월성 ①②③

제2장 거룩한 위탁의 효과
제1절 천주와의 친밀 ①②
제2절 단순과 자유
제3절 정신의 안정과 마음의 평온
제4절 평화와 희열 ①②③
제5절 거룩한 임종과 천주의 어전에 있어서의 힘 ①②

결론 ③④

 역자 후기




결 론(結 論) ②


p.600

이미 말한 것처럼
거룩한 위탁은 세가지의 예비조건을 요구한다.
보편적 이탈, 발랄한 신앙, 섭리에의 절대적 신뢰가
그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내적 제욕을 실천하고,
덕에 의한 거룩한 무관심을 다하자.

즉, 천주께서 원하시는대로
우리 편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우리를 처리할 수 있기 위하여,
행복, 불행, 건강, 질병, 위안, 건조,
천주와 그 거룩한 의지가 아닌 모든 일에,
덕인 무관심의 태도를 갖도록 힘쓰자.

우리의 본성이
가장 깊이 오만과 자립 안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므로
최대의 노력은 순명과 겸손에 향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루하루 섭리에 대한 신앙과 신뢰에 성장하도록 노력하자.

우연이란 그저 말에 불과하다.
세상의 대사변을 다스리시는 것도,
우리의 나날의 사소한 일을 이끄시는 것도 천주시다.

천주께서는 제2의 여러 원인을 사용하시지만,
그런 것은 천주에 의해서 활동력을 지니는 것이다.

바라거나 바라지 않거나 악인도 또한 선인과 마찬가지로
천주의 손에 있어 연장이 된다.

천주께서는 선인에게 보답하시고
악인을 벌하시는 것을 후에로 미루시지만,
그들의 덕이나, 그 결점은,
우리가 그것을 영적 진보에 이용하는 것을 바라신다.

죄라도 천주의 계획을 방해할 수 없다.
천주께서는
그런 것을 예견(豫見)하시고, 그것을 그 계획 안에 짜넣으셨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을 안배하시는 분,
사람과 사건과의 최고의 주가 되시는 분,
그것은 무한한 예지, 
지선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부여하신 구세주,
우리의 성화에 전력을 기울이시는 사랑의 신이시다.

p.601
더 말할 필요 없이, 천주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도모하신다.
그러나, 그 영광을, 우리로 하여금 착하고, 복된 이로 하신 것에 두신다.

특히, 천주께서는 우리의 영원에 관해서 배려하신다.
당신의 방법으로,
즉 참된 사랑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시는 천주께서는
우리에게 천주의 자녀로서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만,
우리 안에 있는 묵은 사람을 없애시고,
적어도 강하게 채찍질하실 때에도
그 손은 사랑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그 타격은 예지에 의해서 조절돼 있다.


아, 우리는 항상 이것을 깨닫지 않고,
때때로 섭리의 처리는 우리의 뜻에 거스르고, 마음을 어지럽힌다.

이 때 주께서는
성녀「젤뜨루다」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나는 나의 벗이 보다 부드럽게 나를 판단하기를 바란다.
그들에 대해서 엄격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그들의 선익,
보다 커다란 그들의 선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바란다.

나는 사랑에 의해서 그것을 행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치유하고 혹은 그 영복의 영광을 더하는데 필요하지 않으면
한 떼의 바람마저 그들에게 거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리라」고.


예수께서는 그 충실한 정배인 그에게 교훈하여,
「모든 것은 의인에게 있어 천주의 손에서 온다는 것,
고뇌와 치욕과는 비할 데 없이 귀중한 값어치를 지니고,
또한 섭리의 가장 훌륭한 선물이라는 것,
영적 나약함, 유혹, 과실까지도
은총에 의해서 성화의 유력한 연장이 된다는 것 등을
점차로 깨닫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당신이 그 벗의 기도를,
흔히 그들이 잊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까지
들어주신다는 것을,
당신의 어전에는
행위의 가치가 어떻게 의향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인지를,
일이 실패에 끝났더라도
그 착한 소망이 일을 대신하여 헤아려진다는 것을 드러내셨다.

p.602
예수께서는 또한 성의에의 완전한 위탁이 최고의 완덕이라는 것,
어떤 영혼이
그 섭리의 배려와 사랑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성심을 기쁘게 해드리는지 계시하셨다.」
(구로「성녀 젤뚜르다의 마음」9.2)



성녀「젤뜨루다」는 주의 이런 교훈을 깨닫고,
그것을 깊이 명심하였으므로,
어떤 경우에도 다만 주와 함께,
「성부여, 그러하외다. 대개 이와 같이 네게 의합함이니라」
(마태오 11.26)고 되풀이 할 뿐이었다.

우리도 또한
이 위탁의 찬미가를 끊임없이 읊으기 바란다면,
이 유익한 진리에 투철하고,
묵상에서도, 독서에서도, 거기에서 풍부히 영양분을 섭취하여,
그럼으로써
복음에 적합한 정신 상태에 서서히 도달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래도 이런 경우,
사건의 어두운 방면만을 보고
신앙의 이 광명에 눈을 닫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


이 주의는 특히 중요하다.
왜냐 하면, 오만과 육욕에 기울어져 있는 우리의 본성은,
반대나 치욕에 부딪치는 것, 안락이 방해되는 것,
향락을 빼앗기는 것, 고통에 싫증을 느낀다는 것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 본성은 반항한다.
즉, 고통감에 온전히 사로잡혀,
본성은 그 시련을 준 이를 불평하고,
이것을 보내신 천주를 잊으며,
천주께서 그것에서 기대하시는 성덕의 열매를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많은 혼란, 불안, 고뇌가 생긴다.
이 올바르지 않는 동요는 
우리의 눈이 어두어지고, 의지는 꺾이기 쉬운 것임을
깨닫게 할 것이리라.

아, 유쾌함이나 불쾌함을 막론하고, 
모든 사건 안에 성부의 손을 보고,
영원한 광명에 비추어 그런 것을 바라보는 지혜로운 이는 복되도다!



만일 보편적 이탈, 발랄한 신앙 및 신뢰심이 놀랄만큼 
우리를 거룩한 위탁에 준비한다면,
이 활동의 근원은 우리 안에 활동하시는 천주의 사랑이시다.

신애의 역할, 그것은
오직 우리의 의지를 천주의 의지에 융합시켜,
이 극히 밀접한 일치에,
거룩한 위탁을 특징 있게 하는
사랑에 충만한 친밀, 효애심에 충만한 신뢰라고 하는 특색을
부여하는 것이다.

p.603
그러나 신애는 우리의 의지의 이 변화를, 
자기 자신의 이 전체적인 봉헌을 마치 자연적인 것 같이 성취한다.

그것은
사랑의 경향이며, 사랑이 필연적으로 느끼는 요구이며
사랑은 그것에 의해서만 만족한다.

마음을 부여함과 동시에 사랑은 또한 의지도 부여하며,
모든 것을 넘겨주고, 아무 것도 남겨 두는 일은 없다.

적어도 사랑이 이미 힘을 얻었을 때에는, 반드시 그렇게 된다.
따라서 위탁의 학문은 거룩한 사랑의 학문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완전한 적합에 진보하기 위해서는
이 사랑에,
그러나 아직 그것은
자신을 찾아 구하는 자애심이 은연중 숨어 있는 불순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온전히 천주께 바치기 위하여,
현명하게 자신을 잊는 전연 순수한 사랑에 성장하도록
전심하여야 한다.

신앙과 신뢰와 사랑에 풍부한 우리는
이제야 천주의 뜻에 기인하는 모든 사건을,
그것이 야기함에 따라 존경과 복종으로써 받아들이고,
혹은 그것을 평온하게 평화스러운 정신으로써
신뢰에 충만한 평안 안에 기다려 받는 탁월한 상태에 도달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의 모든 것을 완수하고,
또한 현덕(賢德)이 요구하는 조심과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으며,
불안이나 근심을 쉬이 제거할 수 있고,
어머니 품에 안긴 유아처럼 섭리의 품안에 안식한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