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125 pp.610-616 역자 후기(後記)

은가루리나 2021. 11. 23. 16:57

 

역자 후기(後記)


p.610

거룩한 위탁에 관한
「동 · 비딸 · 러오디」(Dom Vital Lehodey) 신부의 저명한 저서가
한국의 가톨릭 독자에게 오늘 소개할 수 있음은,
나로서 커다란 기쁨이 아닐 수 없읍니다.

거룩한 위탁의 교의(敎義)는 매우 심원(深遠) 한 것이며,
영혼을 가장 높은 그리스도교적 완덕의 절정에 이르게 하기에
극히 적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저하지 않고서
본서에 저자 자신이 쓰고있는
「신심생활의 극치」라는 부제(副題)를 붙였읍니다.



사실상,
그리스도교적 인간에게 있어 —— 세속에서 생활하거나,
특히 서원(誓願)에 의하여 완덕에 도달함을 의무로 하여,
수도회의 회칙에 따라 생활하거나를 막론하고
천주의 가장 거룩한 의지(意志)에,
즉 결국
천주 자신에게 자기의 전존재(全存在)를 온전히 맡기는 것보다
더 완전한 것은 있을 수 없읍니다.

천주께서는 그 본질(本質)에 의해서 존재(存在) 그 자체심과 같이,
만들어질 수 없는, 실체적(實體的)인 성성(聖性) 그 자체십니다.

그러므로,
지성(知性)을 갖춘 피조물은
천주로부터 존재를 받은 한에 있어서만,
이를 가지고 있음과 같이,
무한히 거룩하시고, 모든 성성(聖性)의 근원이신
천주께 가까이 가는 정도에 따라서만,
인간에게 있어 성덕(聖德)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천주께 가까이 가는 것은 우선 인식(認識)에 의해서인데
그러나 의지(意志)의 행위에 의하여
더 한충 친밀하게 천주께 접근할 수 있읍니다.

바뀌 말하자면, 사람의 완덕은,
자신의 의지를 천주의 가장 거룩한 의지에 일치시킴으로써
이루어 집니다.

p.611

천주의 의지는 그것 자체에 있어 절대로 유일(唯一) 합니다.
그러나 신학자는 이것을 두 방면에서 고찰합니다.

즉 천주의 의지 안에, 명백히 드러난 의지와,
감추인 신비의 「베일」에 싸인, 절대의 의지와를
구분하고 있읍니다.

이 두가지 각기 의지는
성덕(聖德)을 향하여 걸으려는 이에게
각각 특별한 의무를 부과시키는 것입니다.

명백히 드러난 의지에 대한 의무는,
온전한 복종과 천주의 모든 뜻을,
그 가장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될 수 있는 한 이것을 완수한다는
보편적이고 정확한 충실성(忠實性) 안에 있읍니다.

모든 인간에 대한 천주의 이 의지는,
성경과 십계와 성교회의 법규에 있어,
그리고 수도자에 대해서는
그 수도회의 회칙과 장상(長上)의 명령에 있어,
더욱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이 천주의 명시된 의지의 수행은,
엄밀한 의미로는 위탁(委託)이라고는 말할 수 없읍니다.
오히려 그것은 순명(順命)이며, 천주의 뜻에의 복종입니다.

그리고
이 복종은 거룩한 위탁의 전제(前提)가 되고 있지만,
위탁의 역할은,
인간의 의지를 천주의 감추인 신묘한 의지에 적합시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천주의 절대적인 신비적인 의지는 자신 안에,
영원으로부터 그 전체(全體)와 그 가장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천지만유(天地萬有)의 주재통치(主宰統治)의 계획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즉 그것은 섭리(攝理)라고 불리웁니다.

이것은 거룩한 위탁이 정당하게도,
「천주의 섭리에 대한 신심」이라고 불리우는 까닭입니다.


거룩한 위탁은 말의 엄밀한 의미로는 특수한 덕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성 「토마스」가 말하는 것처럼
각기 선덕(善德)은
각각 극히 정확하게 규정된 고유(固有)의 대상(對象)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위탁은
위대한 「보수에」도 생각한 것과 같이,
최고도에 있어서의 제덕(諸德)의 실천에서 특히
(信), (望), (愛)의 세가지 대신덕(對神德)의 실천에서 생기는
영혼의 상태로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p.612

모든 신자가 성세에 의하여 받은 천주의 양자(養子) 로서의 생명이
특히 유감 없이 전개하는 것은,
이 세가지 대신덕의 실천에 있어서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다른 일체의 종교에 앞서,
천주를 무엇보다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서 생각할 것을 가르치며,
또한 그리스도 자신은 십자가상의 희생에 의하여
우리를 위하여, 우리 영혼 안에 성부와 성신과의 생명과 같은
당신의 신비적 생명을 머물게 하는 은총을 획득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의 자녀로서 행동시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생명 그 자체에 가장 친밀하게 일치시키는 것은,
바로 신, 망, 애의 대신덕이며,

위탁은 특히
이러한 세 대신덕의 고도의 실천에 의하여 생기는 영혼의 상태이므로,
그러한 위탁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는 쉬이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신앙의 덕은 이 온 우주에 있어,
또한 이른바 소우주 (小字雷)라고도 불리우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 생활에 있어,
일어나는 일체의 사상(事象)이 천주의 지성(至聖)한 의지,
바꿔 말한다면, 전적인 자부로서의 그 섭리에 
의존하고 있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읍니다.

우주의 모든 것도, 역사상의 모든 사건도,
천주께서 세계개벽 때에 정하신 목적에, 바꿔 말한다면,
천주의 무한한 인자의 발로와
그리스도의 영광과 간택된 영혼의 구령이라는
목적에 합치하고 있습니다.

신앙에서 생기는 이 확신(確信)에 서서,
그리스도 신자는 거룩한 위탁에 의하여
만사에 관하여 섭리의 계획에 자기 의지를 적합시켜,
그리고 단지 위로가 되는 일에 있어서 뿐 아니라,
특히 각가지 불행, 질병, 박해, 불의(不義), 부정(不正) 등에 있어서도
또한 적합시키는 것입니다.

「드 · 고사드」신부의 의미심장한 말에 따른다면,
천주께 위탁하고 있는 활발한 신앙에 의해서,
순간순간의 한가지 한가지 일에도
그 배후에 천주의 가장 흠숭해야 할 의지가 감추어 있는
하나의 「베일」을 보는 것입니다.

p.613

신앙의 다음에,
망덕은 신앙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위탁의 실천에 있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망덕의 대상은,
영원한 생명과 그것에 이르기에 필요한 은총입니다.

거룩한 위탁의 닻을 그 마음에 내리고 있는 영혼은
단지 모든 일이 천주의 흠숭하여야 할 섭리에 기인하고 있음을
믿을 뿐 아니라,

그 위에 이러한 일이 모두
자신의 선익(善益)과 영원한 구령에 협력하는 것임을,
굳게 희망하고 있읍니다.

모든 인간적인 사유(思惟)를 훨씬 초월하는
천국의 무한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확고한 희망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영혼은,
그것이 천주의 영광과 자기와 인인(隣人)의 구령과에 연관되어 있지 않는 한,
현세의 어떠한 일에도 무관심하게 됩니다.

이미 자기에게 의뢰하지 않고,
자신의 나약함을 자각하여 위탁에 진보한 영혼은
오직 한결같이 천주의 전능하신 도우심에만 기대를 걸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인생과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점점 실망(失望)을 품게하고 위협을 느끼게 할수록
더욱 더 위탁에 사는 영혼은,
사랑에 넘쳐 흐르는 천주의 의지의 최후적 승리(最後的勝利)를
굳게 희망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위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불가결의 선덕(善德)은
신적(神的) 사랑이라는 것은 재언할 필요가 없읍니다.

실제 위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모든 것을 바쳐 몸을 맡기는
천주의 자녀로서의 상태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천주의 명시(明示)된 의지에
될수 있는 한 충실하게 따르도록 재촉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애덕(愛德)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천주를 최선(最善)의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것도
역시 이 같은 애덕에 의한 것이며,

이 애덕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성부께서
그 사랑하는 자녀들의 최대의 선(善)과 행복 이외의 일은
결코 바라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며,
그 신비에 싸인, 감추인 의지에
자신을 맡기기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p.614

위에 말한 것은
위탁의 숭고한 상태를 성립시켜,
이것을 완벽한 것으로 하는
세가지 대신덕 (對神德)의 각기 역할이 뭣인지를
짧게 해설한 것입니다.

거룩한 위탁에 있어서의
이 천주의 자녀로서의 상태를
그 극치(極致)에까지 발휘하며 살으신 첫째 분은,
그 본성에 있어,
천주 성부의 유일한 아드님이신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이 지상(地上)에 있어서의 그 전생애(全生涯)는
현세에 들어오신 순간부터
십자가상의 최후의 「마쳤다 Fiat」에 이르기까지
성부께 대한 위탁의 행위의 끊임없는 하나의 연속(連續)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읍니다.

그리고
모든 제자들에게 있어 성덕(聖德)의 모범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모든 시대의 모든 성인들은
소란스러운 세속의 소용돌이 안에서 사는 사람이거나,
또는 수도원의 고요한 침묵 안에 사는 사람이거나 막론하고
은총에 의한 천주의 자녀로서의 상태로 살고,
또한 그들이 신, 망, 애라는 그리스도 신자의
세가지 기초적 선덕(基礎的善德) 안에 생장한 그 정도에 있어,
거룩한 위탁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저 영해 예수의 귀여운 소화 「데레사」성녀가
최근 온 세계의 신자에게 그처럼 탁월한 솜씨로 가르친
「영적 유아(靈的幼兒)의 길」
사실은 거룩한 위탁의 길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유아(幼兒)의 본성은 온전히 그리고 조금도 남김 없이
착한 어머니의 품안에 그 몸을 맡겨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자의 착한 어머니란, 바로 천주의 섭리입니다.

p.615
그러므로 본서는
단지 「리쥬」의 사랑스러운 성녀에 의하여
현대의 사람들에게 새로이 불러 일으켜진 길을
이론적 교의(理論的敎義)
다른 많은 성인들의 생활한 모범에 의해서
증명하는데 불과합니다.

이 길은 근본에 있어,
그리스도교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오래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그 영웅적인 모범과 그 숭고한 가르침에 의해서
제시하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본서와 거의 동시에 본서의 저자의 지도 밑에 생활하고,
같은 수도원에서 26세를 일기로,
성덕의 향기를 남기고 영원한 나라에 길을 떠난
젊은 「트라삐스트」의 「이브」수사의 전기(傳記)가
같은 출판소로부터 발간된 것은
본서의 독자에게 있어도 깊이 흥미를 느낄 일일 것 입니다.

이 수사의 영웅적인 성덕(聖德)에 관해서
결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물론 성교회 뿐이지만,
여하튼 그가 죽은 후 2주간에 이미
그의 전구 (傳求)로 말미암아 기적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읍니다.

그런데 이 「이브」 수사가,
그 소속 수도원의 원장이 저술한 본서에 설명되고 있는 교의를
특히 실천하면서 완덕에 도달하려고 노력했다는 이 사실은
또한 거룩한 위탁의 아름다운 교설을더욱 더 깊이 연구하고
아울러 될수 있는대로 충실히 그 실천에 노력하는데
격려도 될 것입니다.



끝으로 각별히 역설해 두고 싶은 것은
본서를 단지 수도자에게만 적합한 것이 아닌가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제거하기 위하여,
본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지(敎旨)의 전체는,
세속에서 생활 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도
수도생활에 있어 완덕에 도달하려는 사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응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p.616
왜냐 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는
두가지의 다른 성덕(聖德)은 없고,
다만
거기에 이르기 위한 두가지 다른 길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완덕은 
천주의 명시(明示)된 의지의 충실한 봉행(奉行)과
그 감추인 의지에의 완전한 위탁,
특히 신, 망, 애에 넘치는 생활에 기반을 둔 위탁으로
이루어지고 있읍니다.


본서에 나오는 회칙(會則)등의 문자를,
「신분상의 의무」라는 말로 바꿔 놓는다면,
세속 사람들도 쉬이, 수도자를 위하여 기록되어 있는 것을
자신에게 적응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거룩한 위탁이
참으로 영적 생활(靈的生活)의 극치(極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신, 망, 애의 대신덕에 관해서만 언급했는데,
거룩한 위탁을 고도의 단계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선, 겸손, 극기(克己), 억제(抑制), 자아포기(自我抽棄),
사물(事物)로부터의 이탈(離脫)과 같은
예비적(豫備的)인 다른 선덕(善德)도
수득(修得)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이 맺는 말이 너무 길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이러한 덕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멈추고
독자 자신들이 존경해야 할 저자의 그렇게도 깊은,
경건에 충만된 그렇게도 웅변적인 표현에 직접 접했을 줄 믿고
아울러 독자 여러분들이 언제까지나
마음에 위안과 완덕에의 갈망을 고이 간직하기 바랍니다.



1966년 2월 3일

성모 자헌 첨례

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