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6~19 (no.4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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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우주적인 힘으로서의 마야
41. 마야(Maya)*와 브라흐만(神)의 관계는
움직이는 뱀과 휴식하는 뱀의 관계와 같다.
행동으로 활성화되면 마야요, 잠재적인 힘으로 있으면 브라흐만이다.
42. 바닷물이 지금은 조용하지만 다음 순간 파도가 되어 부서진다.
브라흐만과 마야도 이와 같다.
조용한 상태의 바다는 브라흐만이요, 파도치는 상태에 있는 바다는 마야다.
43. 브라흐만과 샤크티(Sakti)**의 관계는
불과 불의 그 소각력(燒却力)의 관계와 같다.
44. 쉬바(Siva)와 샤크티(지성과 에너지)는 창조를 위해서 둘 다 필요한 것이다.
마른 흙으로는 오지그릇을 빚을 수 없다.
거기 물도 또한 필요하다.
그러므로 샤크티의 도움 없이 쉬바 혼자서는 절대로 이 만물을 창조해 낼 수 없다.
45. 마야를 직접 눈을 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다음과 같은 비전을 보았다.
___ 조그만 물방울이 점점 커지면서 소녀의 모습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소녀는 곧 여인이 되고, 여인은 아이를 배었다.
여인은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여인은 그 아이를 꿀꺽 삼켜버렸다. ___
이런 식으로 많은 아기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녀에게 도로 잡아먹혀 버렸다.
그 순간 그것이 마야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46. 뱀 자신은 자신의 독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 독이빨에 사람이 물리게 되면 죽는다.
이와 같이 신 속에 내재해 있는 마야는
신, 그 자신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 마야가 전 세상을 현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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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幻影. 신의 비전을 어둡게 하는 無知.
유열자가 무수한 개체처럼, 절대자가 상대자처럼 나타나 보임으로 하여 생기는 우주적 幻影.환영
**브라흐만(神)의 창조력, 즉 브라흐만의 방사력(放 身寸 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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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속력으로서의 마야
47. 한 사두(흰두교 승려)가 있었다.
그는 때때로 다크네슈알의 깔리 사원* 구석방에서 살곤 했다.
그는 누구하고도 얘기하는 일이 없이
오직 신에 대한 명상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하늘이 어두뤄지더니
조금 후 불바람이 그 구름을 몰아가 버렸다.
사두는 밖으로 나와 갑자기 깔깔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스승(라마크리슈나)은 그에게 물었다.
「친구여, 무슨 일인가?
온종일 방안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엇이 얼마나 기쁘기에 이렇게 춤을 추고 있는가?」
사두는 말했다.
「스승이여, 이 삶을 구속한 것은 바로 마야였습니다.
마야는 정체가 없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것입니다.
브라흐만의 저 청명한 하늘에서 전 우주가 창조되고,
브라흐만의 호홉에 의해서 전 우주가 흩어져(파괴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48. 마야의 환영이 옆으로 비켜서지 않는 동안은
창조물인 우리 인간은 결코 창조주인 신을 볼 수 없다.
49. 성자는 밤낮으로 샹들리에 - 프리즘을 보며 웃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프리즘을 통해서 여러 가지 색깔을 보았기 때문이다.
프리즘 속의 이런 색깔들이 거짓이듯이
이세상도 이와 마찬가지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50. 하리(Hari)* * 가 사자의 가면을 쓰자 아주 무섭게 보였다.
그는 그의 어린 누이동생을 놀려 주려고
누이동생에게 가서 사자소리를 내며 으르렁거렸다.
어린누이동생은 이 무시무시한 괴물을 보자 질겁을 하며 달아났다.
그러나 하리가 사자가면을 벗자
새파랗게 질린 누이동생은 그 괴물이 실은 오빠라는 것을 알았다.
누이동생을 오빠에게 달려와서 오빠를 때리며 말했다.
「바로 오빠였구나. 왜 사람을 놀라게 해. 미워, 오빠 미워.」
우리 모두의 경우도 꼭 이와 같다.
우리는 부라흐만,
그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이 마야의 불가해(不可解)한 힘에 의해서
끝없이 현혹당하고 있다.
갈등을 겪고 있다. 온갖 희비극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브라흐만의 얼굴로부터 마야의 베일이 벗겨지게 되면
우리는 더이상 무섭고 엄격한 감독자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
대신 거기에는 가장 사랑스러운 자아가 있다.
51. 신이 편재해 있다면 우리는 왜 신을 볼 수 없는가.
부초(浮草)의 물거품으로 덮여 있는 저 옛 연못을 보라.
부초와 물거품 때문에 물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물을 보고 싶으면 부초와 물거품을 걷어내야 한다.
두 눈이 마야의 필름으로 가려져 있으면서 신을 볼 수 없다고 너는 투덜댄다.
신을 보고 싶으면 네 두 눈으로부터 마야의 필름을 걷어내라.
52. 구름이 태양을 가리듯이 마야가 신을 가리고 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을 다시 볼 수 있듯이 마야를 걷어내면 신이 드러난다.
53. 마야의 정체를 발견했다면 마야는 발각된 도둑처럼 달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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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캘커타 부근 Belu에 있는 깔리 사원.
라마 크리슈나는 이 사원의 사원지기로 일생을 마쳤다.
* * 신의 유지의 속성을 인격화한 비슈누의 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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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탈력으로서의 마야
54. 신 속에는
비드야 마야(마야의 해탈력)와 아비드야 마야(마야의 구속력)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비드야 마야는 인간을 신에게 가까이 가게 하지만
아비드야 마야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등지게 한다.
지혜, 헌신, 자비, 이런 것들은 모두 비드야 마야의 표출이다.
비드야 마야의 도움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신에게 이를 수 있다.
55. 브라흐만을 알게 하는 것은 마야다.
마야가 없다면 누가 브라흐만을 알려주겠는가.
신의 구체화된 힘인 샤크티를 알지 못하고
신을 알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56. 높은 지혜의 성취와 저 영원한 결정을 우리들에게 가능케 하는 것은
오직 마야가 있기 때문이다.
마야가 없다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꿈이라도 꿀 수 있겠는가.
이중성(二重性}과 상호연관성은 마야로부터 샘솟는다.
마야를 넘어서면
거기에는 기쁨의 대상도 없고 기쁨을 느끼는 자도 없다.
57. 고양이가 그의 이빨로 새끼를 물 때는 조금도 상처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쥐를 물면 쥐는 죽는다.
이와 같이 마야는 모든 사람들을 파괴하지만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죽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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