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신부님 강론

무위 신부님 신앙의해 2013년 연중 제32주일 강론

은가루리나 2016. 11. 6. 10:59


< 신앙의해, 연중 제32주일 > 2013, 11, 10



같은 일이 반복되면 사람은 그 일에 대한 느낌이 무디어진다.


오늘 아침 컴퓨터 앞에,

아니 거룩한 무형의 성전 앞에 앉아 있는데 또 지진이 찾아왔다.

동경에 가까운 이바라기 현에서 강도 5의 지진이.


일본에 와서 地震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지신"이라고 발음하는 것에 묘한 느낌이 들었었다.

제 귀에는 地神, "땅의 神"이라는 뜻으로 들려왔던 것이다.



제가 일본에 온 이래 지난 1년 8개월 간 아주 여러 차례의 지진을 경험했다.


일본 대지진 이후에 각오하고 왔고 또 많이 무뎌졌다.

이제 지진이 오면 "아니, 이것밖에 더 안 흔들려?"가 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아예 그러려니~ 하고 산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사람이 사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 하루하루가 매일 찾아오기에

"산다는 것", 삶 자체에 많이 무뎌져 있다.


산다는 것에 무뎌져 있으니, 자연히 "죽음"에 대해서도 무뎌지는 것이 아닌가?

또 "부활에 대한 희망"에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망"에도 자연히

무뎌진 삶을, 아니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활에 대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강한 열망을 지니고 사는

신앙인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


바로 조금 전에 들었던 제1독서 마카베오 하권에 나오는

어떤 일곱 형제들의 모습이 그 모범이다.


그 형제들이 부활에 대한 강한 희망, 열망이 없었다면

과연 하느님의 법을 위하여 자신의 귀한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겠나?


더 나아가 일곱 아들들의 어머니는

한시적인 이 세상의 삶보다 영원히 무궁한 삶,

그것도 자신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함께 사는 가장 복된 삶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었기에 일곱 형제가 차례로 죽어갔고 또 참혹히 죽어가는

일곱 아들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격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용감한 아들들의 그 어미, 그 어미의 그 아들들이었다.



오늘 제1독서는 넷째 아들의 죽음까지만 언급되었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용감한 어미의 말을 들려드리지 않을 수 없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 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주인이 하느님 맞습니꺄?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의 것입니꺄?

여러분은 부활과 하느님 나라를 맞습니꺄?


여러분은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겼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 맞습니꺄?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여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삶을 내맡겼던

마리아가 여러분의 거룩한 어머니 맞습니꺄?


성부의 뜻에 따라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걸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 맞습니꺄?


맞는다면, 그분들처럼 자신의 뜻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바로 부활과 하느님 나라를 믿는 사람들이며,

그것들에 대한 강한 열망을 지닌 사람은 죽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