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신부님 강의록

1910년 3월 8일9권-29, "올바른 지향은 영혼의 빛이다."

은가루리나 2016. 11. 22. 17:47




제9권 1910년 3월 8일 일기 : 


“올바른 지향은 영혼의 빛이다.”


오늘 아침에는 복되신 예수님께서 아주 잠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올바른 지향은 영혼의 빛이다. 

그것이 영혼을 빛으로 변화시켜 신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게 한다. 

영혼은 어두컴컴한 방에 불과하지만, 

올바른 지향이 태양과도 같이 빛살을 보내어 방을 조명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올바른 활동은 모든 것을 빛으로 바꾸는 반면, 

태양은 방의 벽까지 빛으로 바꾸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몇 번이나 몇 십 번이나 이 문제로, 

이 지향의 문제로 되돌아오십니다.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려는 지향, 

신적인 방식으로 일하는 법을 그녀에게 알려주십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행하는 것이고, 

다른 것은 신적인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들을 모두 품어서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을 그냥 이 눈물의 골짜기에 다 남겨두려고, 

그냥 거기 같이 살려고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데려가려고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의 원 성소는 하느님의 모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아서 하느님의 모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모상이 된다, 그분과 닮는다는 것은 

그분 식으로, 하느님 식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 영성 신학들은 

성령께서 우리 영혼 안에서, 성령의 선물을 가지고 일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신비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움직여주셔서, 

감동시켜주셔서 우리가 행동을 하면 우리의 행동이 신적인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영성 신학은 사람을 두 시기로 구별합니다. 

영혼이 가는 길에서 수덕적인 부분과 신비적인 부분을 갈라서 이야기합니다.

 

수덕적인 단계에서는 영혼이 하느님의 영향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능력으로 자기 힘으로 일을 행합니다.

 

영혼이 신비적 단계에 도달하면 

성령이 당신의 선물을 통해서 영혼을 움직이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자신의 선물을 가지고 영혼을 움직이십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말할 수 없이 존중하시지만 성령이 영혼 안에서 주 활동자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신비적인 단계에서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내가 원해서 행동하는 것을, 

그래서 성령이 가르치시는 대로 감동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신적인 방법으로 일하는 것이라고 

영성 신학은 말합니다.

 

내가 돌리도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신부님이 주신 아름다운 예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수덕적인 단계는 작은 배, 노를 저어가는 작은 배입니다. 

영혼은 아주 힘들게 자기 힘으로 노를 저어서 갑니다. 

수덕적 단계에서는 그렇게 하는데 언제나 은총이 가르쳐 주는 대로 힘들게 노를 저어갑니다. 

신비적 단계에서는 작은 배가 있는데, 돛단배입니다. 

성령이 바람을 불어줘서 돛단배가 돛을 달아서 갑니다. 

그러면 영혼은 그렇게 할 일이 많지가 않습니다. 

바람을 불어서 배를 몰아가는 것은 주로 성령이 하시는 겁니다.

 

교회와 영성 신학은 지금까지는 이 상태를 

하느님 뜻대로, 그것이 신비적인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또 지향에 대해서 20권 어디에선가 말씀하십니다.

 “지향이 없는 행동은 시체와 같다. 시체이다.

 

왜, 이것을 하는지 목적도 없이, 지향도 없이 무슨 행동을 하면 

그것은 죽은 시체와 같습니다. 

지향이 우리 행위의 영혼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행위들 안에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영혼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그 목적에 따라서 우리 행위에 여러 가지 다른 영혼을 줄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목적이면, 내가 인간적인 목적으로 일하면 그 목적에 주는 영혼은 인간적입니다. 

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행동을 하면,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행동에게는 우리가 거기에 맞는 영혼을 주게 됩니다.

 

이렇게 지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바로 아침에 봉헌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봉헌입니다. 

수도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지향을 두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도 기도 생활을 좀 하는 사람이라면, 

하루가 끝나면서 그날 하루 잘못한 것을 용서하고, 감사하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아침에 바로 그날 할 모든 걸 봉헌하면서, 

그날 하루 자기가 할 일 안에, 할 일들에게 지향을 주어야됩니다.

 

평신도들이 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 

아침에 봉헌하는 것을 평신도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일상생활, 보통의 생활, 보통의 일들을 하느님께로 들어 올리는 것, 

하느님의 수준으로 들어 올려야 됩니다. 

그렇게 아침에 봉헌해야 합니다. 

이것은 평신도들에게 큰 도전입니다. 

이것은 평신도들에게 큰 도전이 되고 평신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인데,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수준으로 신비적인 수준으로 들어 높여야 합니다.

 

우리 사제들은 이미 벌써 아침에 미사 봉헌하고, 성무일도를 드리고, 기도 바치고 있고,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초자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이미 다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을 따로 들어 높일 필요는 없습니다. 

미사나 성무일도나 이런 것은 다 이미 초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우리가 하는 이런 모든 초자연적인 일들을 잘못하면 

자연적인 수준으로 내려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심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평신도도 성직자도 다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 

자기들의 모든 것을 영적인 초자연적인 수준으로 들어 올려야 되고, 

사제들은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인간적인 수준으로 낮춰버리지 않도록 

그것을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 교회 안의 두 부분에, 두 가지 도전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곳으로 가는 출발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지향의 순수함이 없이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가는지를 분명히 모른다면,

만약 우리가 순수한 지향이나,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올바른 의식이 없다면 

이런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말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제들의 중요한 의무는 

평신도들에게 자기들의 일상생활의 모든 것들을 초자연 수준으로 들어 올리는 것, 

그렇게 하도록 도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느님과 함께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느님 안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에게 보배를 주십니다.

또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첫째 독서(1코린 8, 1ㄷ-7. 11-13)에서는 지향의 순수함만 가지고도 넉넉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애덕이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코린토 전서의 이 부분에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에 관해서 가지고 있는 우리의 지식은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게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성 바오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뭔가 또 다른 것, 무엇을 더 하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의 양심을 존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지향은 순수하지만 그 순수한 지향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를 함께 잘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가 언제나 순수한 지향을 가질 수 있도록 청하고, 

또 동시에 우리 형제자매들에 대해서 사랑을 가지도록 청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자매들도 

주님께 대한 사랑과 지식에서 점점 더 자랄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성 바오로의 말씀으로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한 분뿐입니다. 

그리고 우상들에게 바쳐진 것들은 다 아무 뜻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자신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그 우상들에게 바쳐졌던 것을 먹을 수도 있고 쓸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형제자매들의 약함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자기는 해를 입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음 놓고 먹으면 

다른 약한 형제자매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와 비슷한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충실하고 우리 형제자매들을 존중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냥 자기 자신만의 순수한 지향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제자매들을 생각해주었습니다.

 

여기 시편 응송(시편 139(138),1-3.13-14ㄴ.23-24(◎ 24ㄴ))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우리의 길이 삐뚤어진 길이 아닌지를 알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복음(루카 6, 27-38)에서 우리 주 예수님은 

복음의 새로운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방인들의 세상에서도 그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서로 도와줍니다. 

좋아하는 사람끼리 서로 도와주고 사랑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고, 

지금 나를 반대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쇄신하기 위해서 

우리 복음이 가지고 있는 새로움은 

이렇게 반대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이런 새로움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도록 초대받았고, 

우리가 원래 이런 목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행동하라고 초대를 받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나빠질 수도 있고 좋아질 수도 있지만 

하느님은 항상 하느님 자신입니다. 

사랑 자체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영원한 신적인 존재이고 그것에 항상 충실하십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신성하십니다. 

하느님은 태양 같습니다. 

빛이고 열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태양처럼 주님은 언제나 삶을 주시고 열을 주십니다. 

태양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한테 달렸습니다. 

우리의 상태가 어떤지에 따라서, 그 정도에 따라서 태양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주님을 모방하는 것을, 닮는 것을 배웁니다. 

닮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아들들이요 딸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약에서 했던 대로 한다면, 

구약에서처럼 우리 형제자매만 사랑하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때 구약에서는 그게 탈리온 법이었답니다. 

나한테 좋은 것만 내가 좋아한다면, 

또 나한테 나쁜 말을 하는 사람한테 내가 나쁜 마음으로 대응한다면, 

그 좋은 말을 한 사람이나 나쁜 말을 한 사람이나 그 사람이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 사람한테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매이는 노예가 됩니다. 

그러니까 나의 성덕이나 내 인품은 그 사람들이 조종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 따라서 내 인품이나 성덕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주님께로부터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착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빛과 열을 주십니다. 

또 나쁜 사람에게도 선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지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 통제받습니다. 

말하자면 당신 자신이 사랑이니까 사랑, 사랑으로 행동하십니다.

 

우리의 성소는 하느님의 신성하심을 같이 소유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인간인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삶의 그 두 가지 차원이 드러나 있습니다. 

자연적인 차원, 즉 탈리온 법, 

구약의 법에 의해서 행동하려고 하는 그런 인간적인 차원이 있고, 

하느님의 아들 딸들로서의 초자연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이 초자연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하느님처럼 행동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모두 다 사랑하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도록,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동정 마리아 어머님의 전구를 청합니다.

지향의 순수함을 청합니다.

우리 영혼 안에 신성한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을 주시기를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니다.

이런 것들이 하느님의 뜻 안에 사는 삶의 기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