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섭리에내맡김

어둔 밤/제5장 -04 내맡김을 실천하고 사는 영혼들의 어두움과 하느님의 뜻에 대한 외적인 대립

은가루리나 2017. 4. 27. 21:23





제 5 장


완전하고 참된 신앙만 있으면, 

영혼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04 


내맡김을 실천하고 사는 영혼들의 어두움과 

하느님의 뜻에 대한 외적인 대립 





   하느님의 뜻만을 행하길 원하는 영혼에 있어서는 

더 이상 아무런 고통도 없지만,

그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영혼의 완덕을 향한 계획이 어떤것이었는지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영적 조명(靈的 照明)을 받았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완덕영혼의 모든 선입견과 그것이 느끼는 모든 것 

그리고 영혼이 배워 알고 있는 모든 것과는 반대로 영혼에게 제시됩니다.


완덕이제 

섭리에 따라 보내진 모든 고통의 형태로, 현순간의 의무들로, 

죄로 이끌지 않는다는 사실 외에는

그들에게 전혀 선한 것이 되지 못하는 여러 갈등 형식으로  

영혼에게 다가옵니다..


이는 온갖 숭고한 것과 특별한 성덕의 영광과는 

거리가 아주 먼 것처럼 보입니다.


가려지고 감추어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은총을 소하고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베풀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십자가를 지기에는 너무 허약하다는 것을 느끼고,

의무에 대해서는 싫증을 내며,

매우 평범한 영적 수업에만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화의 표상은  

영혼이 자신의 방법과 비열한 본성에 대해 질책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성인들의 생애를 그리는 모든 영혼이 

찬란한 성덕을 바라보기는하지만,

성덕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여의치 않다는 이유로 인해  비참해지며

하느님에 의해 있는 그대로 부과되는 대신, 

소심함으로 인해 함을 저지르게 됨을 의미합니다.


자신들의 공적(功績)으로 명성을 얻어 지적 수준이 높아진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그런 영혼을 경멸합니다.


그들은 "얼마나 괴상한 성인인가!" 라고 말하고,

불행한 영혼은 그들을 믿으며, 

그러한 상황을 피하기위해 시행해 왔던 모든 무익한 노력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이런 질책들에 깊이 빠져 들어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만족한 만한 해답을 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 빠져든 영혼은 아무런 이끄심도 없어 

을 잃었다고 여깁니다.

영혼은 용기를 주고 조명해 주던 영적 묵상에서

더 이상 도움은커녕 은총의 역사하심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영혼은 이런 상실을 통하여 모든 것을 도로 얻습니다.


그와 같은 은총은, 말하자면 다른 형태로 취해져서 

잃어버린 것보다 백배나 더해져 

겨진 단순함으로 영혼에게 되돌려지는 것입니다.



   이는 확실히 하느님 뜻의 시야를 벗어나는 것이기에

영혼에게는 치명타와 같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은 영혼에게서 물러나  

영혼 뒤편에서 영혼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미 영혼의 분명하고 명확한 대상이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주원인(主原因)입니다.


경험은  

이런 외적인 상실만큼이나 

강력하게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려는 갈망을 자극해 주는 것이 

아무것도 있을 수 음을 입증해 줍니다. 

혼의 탄식은 대단히 강렬하여 

그 어느 곳에서도 아무런 위로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만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하느님을 앗아가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사랑입니다!

이러한 방식에 있어서 위대한 점은 단지 그 길로써  

절대적인 믿음확실한 희망을 영혼 안에 단단히 굳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을 믿고,  

상상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희망을 둡니다.


오! 주체이면서 도구이기도 한 우리는

이러한 숨은 활동에 의해 어떻게 완덕에 이르게 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순전히 우연의 결과요, 

우리의 본성적인 경향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실제로 우리가 말하도록 영감을 받았을 때에도

우리는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만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결코 어떤 영이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가장 의심할 바 없는 신적인 영감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우리가 행하거나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

마치 우리의 전 생애에 금이 가고 흠결이 되듯, 

우리 자신을 끝임 없는 경멸로 꽉 채워 넣습니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찬양하고 

또 그들보다 훨씬 뒤지고 있음을 느끼며,

그들의 모든 행동은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어떤 통찰력도 믿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도 신뢰하지 못하만, 

다른 사람이 주는 사소한 충고도  

좋아 보이기만 하면 지나친 주의를 기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오로지 깊은 겸손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

덕스러운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우리를 지켜주시는 듯 합니다.

우리는 이 겸손을 덕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의 심판으로 바라봅니다.



   정말 깜짝 놀랄 만한 것은 진실한 상태의 일과 관련하여 

하느님께로부터 조명을 받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완고하고 순종하지 않으다루기 힘들고 남을 업신여기며 

노한 것같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는데,

거기에는 아무런 구제책도 없는 것처럼 겨집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들을 열심히 고치려 하면 할수록 잘못은화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로  

자애심(self-love)을 없애고

우리를 그분과 일치하도록 준비시키는 최상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내맡김의 상태는 이러한 시련들로부터 가장 큰 가치를 얻어냅니다.

현 순간의 의무들은 수행하는데 있어서 모든 것은  

우리를 사랑과 단순한 순종의 길로 인도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솔직하고 적극적인 믿음을 굳세게 지니고

또 은총 역시 함께 하는 노래에 신뢰심을 가지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위대한 사랑과 영웅적인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곡조에서는 다른 음조로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리는 기만당하고 타락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무 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으르렁대는 천둥소리와 번쩍이는 번개와 큰 폭풍우의 정을 

무시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매순간의 영광과 의무에 대한 순명과 사랑의 길을 따라 끊임없이 

앞으로 나간다면, 

우리는 수난 중에 있는 예수님과 닮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난 중에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성부를 위해 사랑의 길을 굳건히 걸어가셨습니다.


이런 사랑과 순명은

그토록 뛰어난 주님의 성덕의 위엄과는 완전히 상충되어 보이는 방식으로

주님을 행동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마리아의 성

밤의 가장 짙은 어둠 속에서 폭풍우의 격렬함을 곳곳에서 부수어 트립니다.

이분들의 감각은 

하느님의 계과는 완전히 상반되어 보이는 사건의 급류에 휘말렸으나

흔들림없이 사랑과 순명의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셨습니다.


분들은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전심적력 하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바를 행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안고 있는 거대한 사명의 짐을 모두 참아냈고 

그 무게 아래 신음하였으나 비틀거리지 않았고 

단 한순간도 마음이 흔들리거나 머뭇거리지도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이 두 분은 하느님의 길을 따라 계속 따라 걸으면서

만사를 하느님께 내맡기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섭내5장4번 영혼들의어둠과GW에대한대립2.m4a.a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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