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머리말|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은가루리나 2017. 12. 3. 14:45


김소영데레사51|등급변경|조회 71|추천 0|2017.12.01. 22:55




차례



머리말


1장 하느님


2장 방법

영원한 탄생. 집중과 잠심. 자기 비움과 사물을 버림.


3장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하느님의 자녀. 의로운 사람. 행복. 불의한 사람. 죄


4장 고통. 표상. 시간. 일치


5장 우리가 가진 자질

지혜. 선함. 지각. 진리. 지식. 자기 인식. 의지. 지성. 가난


6장 영혼

7장 완성

신성. 삼위일체. 죽음. 초탈. 기도. 은총. 평화 






머리말(2) - 마이스터 에카르트에 관해 

 

 

이스터 에카르트는 1260년 독일 라인란트의 호흐하임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5세에 에르푸르트에서 설교자들의 수도회곧 도미니코회에 입회했.서원을 한 다음 쾰른의 신학 전문 연구소(Studium Generale)로 공부하러 갔는데아마도 거기에서 위대한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성 대 알베르토를 만났을 것이다그리고 1293년에 처음으로 파리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1294년에는 에르푸르트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고1300년에는 다시 생 자크의 신학 전문 연구소에서 공부하는 큰 영예를 얻었으며1302년에 파리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303년에 작센 관구의 관구장으로 선출되었고1307년에는 보헤미아의 주교대리가 되었다1313년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신학교수원장영적 지도자설교자로 임명되었다그는 스트라스부르 주변의 도미니코 수도원을 맡았는데기서 설교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며 라틴어가 아니라 모국어로 설교를 하여 근대 독일어의 아버지'라는 평을 받았다1322년에는 이전에 성 대 알베르토가맡고 있던 쾰른 신학전문연구소의 평의원이 되었다.

1325년에는 베네치아의 도미니코회에서는 독일에 있는 그들의 형제 한 사람,곧 에카르트가 '대중에게 설교하면서 듣는 이들을 쉽게 오류에 빠트릴 수 있는 말을 하고 있다.'는 놀라운 소문을 듣게 되었다도미니코 회원들은 당시 교회 권위에 순종하려 하지 않는 신비주의 집단이 라인란트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에카르트는 이렇게 대답했다."무지한 이들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배우지 못할 것이며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무지한 이들은 가르치는 것은 그들을 무지에서 계몽시키려는 희망때문이다."

그러나 1327년 그는 프란치스코 회원인 쾰른의 대주교에게 소환되어 이단이라는 고발에 답변해야 했다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내가 오류를 범할 수는 있다그러나 나는 이단자는 아니다오류는 지성의 문제인 반면 이단은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Blakney, Harper and Row, 1941)


그는 그 당시에 언제나 그랬듯이 교회에 충실하고 순종하고 있었다그러나 그에 대한 고발은 취하되지 않았다.1327년 그는 로마에 항소했고교황청에 청원하기 위하여 아비뇽까지 800킬로미터를 걸어서 갔다그가 언제 어디서 사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교황이 1329년 3월 그의 일부 주장들이 이단이라는 칙서를 내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그러므로 그 자신은 이단자로 판결받은 일이 없는 것이다.





머리말(3) - 에카르트의 지금

 

 

 

나는 에카르트의 생애나 그의 인간성에 대해 알려진 바가 이렇게 적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학자들은 자유롭게 그가 '신비가'인지 그렇지 않은지-신비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든 그는 신비가라는 단어를 사용한 일이 없고 환상 체험에 대해 묘사한 일도 없다.-에 대해 논쟁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의 삶에 대한 심리적 접근이나, 실제적 또는 상상으로 그린 그의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것은 오히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많은 성인들의 모습을 아는 데 방해가 된다. 나는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를 중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말이지 그의 겉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마이스터 에카르트가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고, 경건하거나 점잔빼거나 하지 않고 삶과 하느님 찾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었다고 믿는다. 그는 고독하지도 않았고 망상에 빠지지도 않았다.그가 수도회에서 한 많은 일들은 행정에 관계된 것으로 그는 분명 바쁘고도 현실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내가 에카르트의 가르침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51년 음악가이자 저술가이며 등산가인 마르코 팔리스를 만나면서였다.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톨릭 신자였지만 15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신앙생활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6년 동안 불행하게 '림보'(지옥과 천당 사이에 있으며, 세례를 받지 않은 아이나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착한 사람의 넋이 머문다고 하는 곳- 역자 주)를 떠돌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는데, 내가 다가갔던 모든 종교인은 그 문제를 회피했다.

<절정과 라마>라는 티벳불교에 대한 책을 읽은 후에 나는 그 책을 쓴 마르코 팔리스에게, 어떻게 지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 물었다. 왜냐하면 당시 내 생각에 그리스도교는 질문의 여지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들은 대답은 언제나 집에 가서 기도하고 특히 믿음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의 신앙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 외에는 다 사라졌다. 그것은 내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마르코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 본래의 종교로 돌아가십시오. 성사생활로 돌아가십시오. 에카르트를 읽으십시오."

나는 그의 충고를 모두 따랐다. 

마이스터 에카르트를 처음 읽었을 때는 어리둥절 했지만 나는 에카르트의 글이 좋았고 또 이 사람이 내가 찾던 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에카르트가 마음에 들긴 했지만 그의 말을 단편적으로밖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고 계속 읽으라는 마르코의 조언을 따랐다. 그 결과 지금은 다시 읽을 때마다 점점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결코 에카르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만큼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계속 더 배워갈 것이다.
마르코 팔리스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지만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가르침에 대한 단죄를 철회하여 그의 글이 널리 읽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1980년 도미니코회의 사이몬 터그웰 신부는 충분한 증거를 마련할 수 있다면 발레부르크에서 열리는 도미니코 수도회 총회에 청원을 올리겠다고 했다. (그에게 감사하는 바이다.)



한편 영국과 아일랜드의 도미니코회 양성 책임자들,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구장들, 아일랜드 도미니코 수녀회 총장뿐 아니라 여러 종파의 저명한 수도자와 평신도도 함께 서명하여, 수도회 총회가 신앙교리성에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정통성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1329년 3월 27일의 교서 <도미니코의 땅에서 Inagro dominico>에 들어 있는 그의 가르침에 대한 단죄를 철회할 가능성을 검토해 줄 것을 청원하도록' 요청했다.



이를 요청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1) 현재 그의 가르침이 이단이 아니라는 데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2) 교회 안팎에서 에카르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3) 이 단죄는 그리스도인이든 다른 종교인이든 교회 밖에 있는 진실한 이들에게 논란을 일으켰다.
(4) 에카르트는 이미 그리스도인과 동양의 다른 종교들간의 대화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이제 교회가 그를 그리스도교 신학자요 영적 스승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따라서 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에카르트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의 저서들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총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이 청원에 동의했고 1983년 5월에 도미니코회 총장은 에카르트 위원회를 제정하여 유명한 학자들을 지명했다.


그들은 1986년에 연구 결과를 총장에게 보고했다.구체적으로 에카르트의 활동과 설교- 특히 관상 수녀들을 돌본 일-가 모범적인 것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그의 저술들 -특히 영적 저술과 설교-을 정통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표현이며 복음정신에 따라 신자생활을 하는 데 가치있는 안내서로 추천해 줄 것을 교황에게 청했다.




그러한 선언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첫째, 중세 신비주의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다.
둘째, 다른 종교의 신비주의 전통에 관한 전문가들간의 대화를 촉진할 것이다.
셋째, 도미니코 수도회의 많은 형제 자매들이 에카르트의 저술을 수도회의 다른 신비 전통 대표자들의 저술과 마찬가지로 읽고 연구하도록 장려할 것이다.
넷째, 많은 평신도들이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영적 저술들을 읽고 묵상하도록 촉진할 것이다.(실제로 1980년 발레부르크 총회에 제기된 이 청원은 에카르트와 라인란트 신비주의를 알게된 평신도들과 수도회 친구들의 발의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위원회는 '에카르트의 가르침과 저술에 대한 긍정적 선언을 청원하기 위해 총장이 교황에게 제출할 탄원서' 초안을 준비했다.1985년 9월에는 '아드리엔 폰 스파이어의 교회적 사명'세미나에 참석한 150명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했는데, 교황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이 한 일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목말라하는 인간 실존 안에서 그분이 행하시는 신비롭고 감명 깊은 활동들을 식별하려고 함께 노력했습니다. 아드리엔 폰 스파이어가 스위스인이기 때문에 저는 지금 이 말을 하면서 13세기와 특히 14세기 리노-플랑드르 신비주의의 놀라운 역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


제가 기뻐하는 마지막 이유는, 교회는 언제나 사회적.직업적 소명에 뿌리를 두는 동시에 하느님 안에 잠겨 있는 평신도들에게 모범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카르트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장 절박하게 요구하시는 것은 자신 밖으로 나가는 것... 그러면서 여러분 안에 계신 하느님이 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논문과 설교 Tracts and Sermons>참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신비가가 자신을 피조물과 분리시켜 놓기 때문에 그의 형제와 인류를 떠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 에카르트는, 신비가는 오직 진실로 형제들과 인류에게 도달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하느님 안에 존재하며 그들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L'Osservatore Romano, 1985년 10월 28일자에서 인용)


이렇게 하여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사실상 복권되었다. 물론 그를 공식적으로 복권시키려는 노력이 앞으로 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