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제2장] 19. 고요함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은가루리나 2018. 3. 29. 01:41

19. 고요함



전환과 변화로는 어디도 이르지 못한다. 

우리는 멈춤으로써 앞으로 나아간다. 

영혼은 하느님 안에 고요히 머물러야 한다. 


하느님이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실 수 없는 것은 

영혼 안에서는 모든 사물이 내적.외적 한계를 지닌 척도에 의해 다스려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일에는 한계가 없으며 무한하다. 

흐르는 물에는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없다. 

물이 맑고 고요해야 거기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다.



하느님의 가장 고귀한 첫번째 활동은 움직임이 없는 거룩한 쉼이다. 

쉼을 만드신 분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다. 

하느님이 움직이지 않는 분이 아니라면 움직임이 없는 것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움직이는 것은 쉼에서 시작하여 움직이며, 움직이는 사물은 반드시 쉬려고 한다"고 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가능한 한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언제 인간이 움직이지 않는가? 

어떤 것도 영혼을 혼란시키지 않을 때, 영혼이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으며 

기뻐할 수도 없고 슬퍼할 수도 없을 때 영혼은 움직이지 않는다. 


영혼은 어떤 피조물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을 때 조급해하지 않게 된다. 

그뿐 아니라 피조물의 형상에 머무는 것은 영혼에게 지옥과 같은 고통이다. 

하느님의 형상 없는 형상 외에 다른 것에서는 영혼이 쉼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것 안에서 안식을 추구하였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만든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안식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본성적으로 그렇게 열렬히 찾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또 안식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동요하는 영혼이 찾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다시 한번 안식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말씀은 영혼 안에 감추어져 있고 눈에 띄지 않으며 우리 시야 바깥에 있다. 

우리가 듣는 것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소리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소리는 멈추어야 하고 침묵이, 완전한 고요가 지배해야 한다. 

움직임의 마지막은 쉼이다.



지적 통찰력은 완전히 쉬는 일이 없다. 

정신적 작용에는 외부 사물에서 영혼으로 향하는 어떤 움직임이 있고, 

그러한 움직임 덕분에 이 사물의 형상이 영혼 안에 들어와 상을 이루게 된다. 


그러한 움직임은 영혼의 존재(is-ness)안에 정신적 운동을 일으키고 

사물의 실제 존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 움직임의 범위는 더이상 쉬지 않는 의지로 확대된다. 

쉼이란 무엇인가? 성

 아우구스티노는 움직임이 완전히 없는 것. 

곧 육신과 영혼이 자기 본성을 잃어버린 것이 쉼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