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주신부님

5 (수덕)하느님의 뜻 영성교육(이범주 바오로 신부님 강의) ☆ 이범주 신부님 ☆

은가루리나 2018. 11. 13. 12:06


먼저 교만에 대해서, 



“교만은 간이 하느님께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모욕이고, 

가장 무서운 배은망덕인 것이다. 


교만이라는 죄가 그들의 정신을 어둡게 하고, 

마음을 타락 시켜서 

절제 없고, 천박한 온갖 짓에 몸을 맡기게 하는 것이다. 


교만은 은총을 태워 버린다. 


더할 수 없이 불행하게도 교만의 지배를 받게 되면 

이는 흉측하고 악한 애비이므로 

영혼 안에 온갖 탕자들을 곧 다른 모든 죄를 낳기 마련이다.” 



우리 교회의 가르침에서 7죄종의 첫째가 교만이죠. 

그리고 그것이 모든 죄의 뿌리라고 그러죠.





불순결



“예수성심의 가장 큰 모욕과 고통을 미치는 죄는 바로 불순결의 죄이다. 

인간은 각각의 악습과 육정에 빠져 나를 모욕하고 있다.


[루이사의 말 ; 

나는 그 역겨운 의식이 인간의 의뢰임을 안다. 

그리고 마치 고약한 음식은 

사람들이 불안전하게 아무렇게나 해치우는 모든 선행이었다.]


"너의 음행으로 어찌나 나를 지겹게 만드는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너희가 나로 하여금 달아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나는 순결한 영혼들을 무척 사랑한다. 


불결한 영혼들에게서 달아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순결한 영혼들에게는 자석에 끌려 다가가서 머물러 있게 된다. 


모든 것 속에서 순결, 

사랑에 있어서나 일에 있어서나, 

혹은 영혼이건 육신이건 그 무엇에 있어서나 순결의 결핍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감싸여 흠집을 낸다.”


 



이기심에 대하여, 

조금 전에 메시지에서 이기심이 나왔죠.



“이기심이라는 독이 모든 마음 안에 들어  갔으니

그들은 마치 해면처럼 이 독을 빨아들인다.


전염성이 강한 이 독이 

수도원들과 사제들과 평신도들에게 침투한 것이다.


딸아, 진리의 빛과 덕행의 힘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저속한 미덕에 굴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 독 앞에서는 지극히 높고 고상한 덕행들도

부서지기 쉬운 유리처럼 산산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나의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지만 

그들은 내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나를 사랑한다면 단지 그들 자신의 이익 때문인 것이다.

(우리들이 반성해 보아야하는 그런 부분입니다.) 



기껏해야 그들이 좋아하는 어떤 것과 나를 함께 원할 따름이다. 

이는 내게 기쁨을 주지 않는다. 


참된 지배는 오직 홀로 다스리는 것이니까. 



각 사람에게 있어서 주된 일은 생각과 말과 활동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남들의 존경과 만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마음을 쓰는 것이다.



영혼이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쾌락비용이나 이익욕구 등 

다른 것으로 흩어져 버리기 시작하면, 

그때에는 신적인 숨결이 영혼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소극적인 사랑이 온 영혼에 두루 퍼지게 되면 

신적인 사랑은 텅 비기 마련이다. 


그런데 인간은 지극히 순수한 신적 사랑의 집합체가 되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다. 


그럴 경우 

연옥에 가서 그 불의 힘에 의해서 그것을 회복해야 하고, 

그런 다음 사랑이 넘쳐흐르는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연옥을 떠나게 된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원수는 쾌락과 재산과 명예에 대한 욕망이다. 


이 원수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교묘하게 파고들어 끊임없이 들볶아대기 때문에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


인간을 괴롭히고 우울하게 만들어 모든 행복을 잃게 하는 것이다.



나는 갈바리아에서 이 세 가지 원수를 쳐 이겼다. 


인간에게도 이를 정복할 수 있는 은총을 얻게 함으로써 

잃어버린 행동을 되돌려 주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은 

나의 은총을 배격하고 열광적으로 그 원수들을 사랑한다."




"자애심은 극도로 그 이상적이기에 

우선 그들을 넘어지게 하고 

다음에는 그들 안에 온갖 생각과 우려와 주저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숫한 의심과 두려움을 느끼며 

오늘 싫어하는 것에 내일 거듭 떨어지곤 함으로써 

그들의 삶은 

그것이 교묘하게 엮은 일들의 것에 언제나 걸려들어 있게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순명의 예리한 시각은 자애심을 죽인다

그것은 날카롭고 투명해서 옳지 못한 발걸음을 

즉시 예견하고 미리 피한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작은 자녀로서 거룩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근시안적인 자애심은 그런 영혼들을 짓누르면서 

참된 성덕의 길에서 조금도 진보하지 못하도록 가로 막기만 하니 말이다.


(자애심이 성덕의 일부를 방해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어떤 직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사 무욕의 정신이 지도자로서 그를 특징짓는 빛이 되어야한다.”





사제들에게 해당되는 성사, 

미사성제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오, 성사들이 그 자체로 거룩한 성사들이 

성의 없이 마구 집전되고 있으니 

그분의(루이사가 이야기 함)그분의 성심이 

얼마나 미어지는 아픔에 잠기시는지 


허울뿐인 거짓 경견함이나 신앙심이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 보다는 더한 모욕을 끼치는 것 같았다. 


렇다 그처럼 그릇되게 집전되는 성사들이야말로 

지극히 거룩하고 깨끗하고 올곧은 그분의 성심에 

역겨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심장을 가장 깊이 찌르는 것은 독성적인 미사와 위선이다.


(지향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올바른 지향 없이 습관이나 이득 때문에 행해지는 숫한 선행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심판 날에 그 자체로는 선행인 많은 일들이, 

그들의 지향 때문에 썩어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얼마나 부끄럽겠느냐. 


그들의 행위가 다른 많은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명예롭게 하기는커녕 수치스럽게 할 것이다.


나는 위대한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행해진 지향을 본다.


이 지향이야 말로 내가 주목하는 것이다.

너의 모든 활동이 나의 순수하고 거룩한 지향으로 빛나게 하여라.


그러면 내가 네 안에서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기에

내 은총의 힘을 아낌없이 쏟아 붓겠다.”




그리고 사랑에 대하여 굉장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잘해야 되는 부분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 너희의 전부이니 

너희에 대한 사랑과 같은 사랑으로 네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보라 너를 에워싸고 있는 이 작은 세계는 

피조물에 대한 생각과 애착과 망상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네가 벗어나지 않으면 

나는 온전히 네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따라서 네 마음을 영원히 차지할 수 없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의 전부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전부 요구하십니다.


‘그 시작과 과정과 끝맺음에 이르기 까지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하지 않은 일은 무엇이나 무미건조하고 

아무 공로도 없는 것임을 분명히 지적해 주셨다.’ (루이사의 말)



“사랑은 다른 모든 덕행에 광채를 주는 덕행이다. 

사랑이 없는 모든 일은 죽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오로지 그들 자신과 관계있는 것 

곧 그들의 만족과 열정 따위 그들의 마음에 드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행동한다. 


이 사람은 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려 할 때에도 

실제로는 다만 그들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사람이 그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설사 덕행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때마다 그 자신이 하느님의 생명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된다. 


반대로 영원히 오직 나만을 생각하면 

그 자신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직 그분만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온 생애에 걸쳐서 어떤 간격도 두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사랑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렇게 항상 사랑하지 않으면

이 사랑 안에 소홀(疏忽)했던 날과 시간과 순간의 수와 같은 수의 빈곳을 

자기 자신 안에 남기거니와

이 빈곳들을 다 채우지 않고서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는 여생동안 갑절로 나를 사랑하거나 죽기 전에 다 끝내지 못하면 

연옥 불의 힘으로 그렇게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매순간 끊임없이 그분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순교자들도 연옥에 가 있겠네.’(어느 신부님의 말)

‘하하하’(전체)


더 큰, 아주 큰사랑으로 우리가 사랑을 함으로써 

순교자들처럼 목숨을 바치는 그런 큰사랑으로 사랑을 함으로써 

과거에 사랑하지 못했던 부분을 다 채우거나, 

그렇지 않으면 연옥에 가서 정화되어 채워가지고, 

사랑이 넘치는 상태가 되어야 천국에 가는 거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할 때도 그냥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사랑은 단 한 가지뿐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되지 않은 이웃 사랑이라면 

나는 그것을 내게 속한 무엇으로 여기지 않는다.”



예수님께 대한 그런 사랑으로 변화되지 않은 이웃 사랑이라면, 

그건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사랑은 

오로지 나를 기쁘게 하기위한 목적으로 시행할 때만 완전하고, 

오로지 그때만 진실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일체를 비운 사람과는 사랑으로 인정한다.



‘사마리아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사랑 했을까요’(어느 신부님 질문)


‘그것은 모르겠지만’(답)


하느님과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거룩한 사랑은 삶의 서막을 이루는 반면에, 

악한 사랑은 삶의 멸망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아서 

그때 자기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을 택하고, 하느님의 뜻을 택하게 되면 

그때 선택이죠, 


나를 내 뜻을 완전히 하느님의 뜻에 봉헌하고, 

온전히 그분 뜻대로만 살면 완전히 정화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더 정화할 것이 없기 때문에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에 바로 가게 되는 것이다.


 



겸손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하시는데, 

루이사 피카레타가 쓴 책을 보면 겸손에 대하여 굉장히 많이 나온다. 

겸손에 대한 것 중에 몇 가지만 읽어 드리면 이렇습니다.



“겸손은 하늘의 은혜에 대한 보증이다.


겸손은 영혼을 안전하게 감싸주기 때문에

원수의 관계가 그 영혼 속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겸손은 하늘의 모든 은총을 안전하게 자리 잡게 하기에 

나는 겸손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하늘의 온갖 은혜가 풍성하게 흘러들게 한다. 


나는 무지하거나 가난할지라도 단순하고 겸손한 사람들과 통교한다. 


영혼이 단순해지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그만큼 더 진리에 다가 간다. 


오, 그렇다. 

겸손은 은총을 부르고 사슬을 끊어 버리며 

영혼과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는 장벽을 쳐부수어 

그를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한다. 


겸손은 

모든 덕행의 맛을 내며 죄의 부패로부터 영혼을 보존하는 소금이다.”


겸손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이게 지금 굉장히 많은데, 

결국 나중에 루이사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면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끝내지를 못하고 계속하게 되니까 하면서



“겸손은 하느님과 온 천국의 미소이고 온 지옥의 구름이다.” 


“가장 높은 겸손은 어떤 이치도 따지지 않는 것이니,

이런 저런 이유에 대하여 논하지 않고 너 자신의 무(無)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완전히 무(無)가 되는 것이 가장 큰 겸손이다.


“하느님을 가장 현양하는 덕행은 겸손이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인간을 가장 고상하게 높여주는 덕행 역시 겸손이다.”


그래서 겸손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고, 

인내도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인내는 순교를 능가하는 덕행이다.


인내는 순교자의 인도자 일뿐이 아니라

굳셈이라는 산으로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이기도 하다.


인내만이 덕행들의 보고를 열수 있는 비밀열쇠이다. 


인내하여라. 

매사에 있어서 너 자신을 나의 뜻에 맡겨라. 


잠시 동안만이 아니고 언제나 언제나 그렇게 하여라. 


선(善)에 항구 하는 것만이 

영혼이 참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항구함만이 모든 덕행을 함께 가져오고

이것만이 영혼을 하느님과 덕행과 은총에 결합시킨다 해도 무방하다.”


 


통회, 정개, 보속과 관련된 죄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계신데,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죄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대죄는 그 죄를 지은 영혼뿐만이 아니라 

그 영혼 안에 있는 덕행들도 모조리 헤치고 죽이는 죄이다. 


소죄는 영혼을 매우 약하고 상처 입게 한다. 

그러니 그가 쌓은 덕행들도 상처를 입는다. 


그러니 죄는 얼마나 치명적인 무기이냐. 

죄만이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죽일 수 있다. 

오, 죄라는 것은 얼마나 추하고 치명적인 것인가. 


정말이지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는 외에도, 

죄의 독성과 그 쓰디쓴 결과의 본질을 체험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러면 죄의 정체를 속속들이 알게 되겠기 때문에,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끔직한 괴물을 보듯 피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제 루이사는 자기가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기 전에 심판을, 

우리가 각각 성령의 빛을 받아서 나중에 삼 천년기의 절정에 가서 

하느님께서 우리자신을 볼 수 있게 해주신다고 하셨죠. 


루이사도 역시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기 전에, 

자기 자신의 그동안에 살았든 삶에 대한 그러한 빛을(소심판) 받아서 

판단을 받게 됩니다. 


또 그분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일단 나 자신의 허무 속으로 들어가자 


스스로의 모든 비참과 범한 죄들을 다 깨닫게 되었다. 


심판관이신 그리스도의 현존, 참된 현존 안에서 

나는 한낱 나뭇잎처럼 떨기 시작했으므로 

고백의 기도를 바칠 힘도 없을 지경이었다.’



자기 죄를 완전히 고백했을 때, 

통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강조하십니다.



내게 자기를 봉헌한 이들 마저도 

생활을 바꾸어 그 모욕을 근절하기는커녕 

어떤 점이 자기의 결점인가 하는 것을 따지는데 만 마음을 쏟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통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통회와 사랑은 매우 효과적인 두 가지 약과 같아서 

상호 협력적으로 치유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르면 영혼이 완전히 낳는 데도 말이다. 


죄는 영혼 전체를 중독 시키며 추하게 만들어 

그 영혼 안에 내 모상을 사라지게 하는 독이다. 


통회는 이 독을 없애버리고 나의 모상을 되찾게 한다. 

진정한 통회는 해독제인 것이다. 


그리고 통회는 독을 지우고, 영혼 안에 빈자리가 생기게 하기에 

이 빈자리를 나의 은총이 채우는 것이다. 


내가 그 수많은 고난을 당한 까닭을 생각해 보아라. 


그것은 바로 죄였으니 

아주 가벼운 결함도 네게는 무거운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인간이 천국을 얻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설사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신의 의지로 하느님을 모욕하는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끊임없이 다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모욕하는 짓이란

죄를 짓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루이사가 또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몸서리칠 정도로 지겨워해야 할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고해성사의 은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해성사는 

그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상처를 치유해주면서 덕행도 다시 활기차게 해준다. 


그리고 이일은 영혼의 준비정도에 따라서 크고 작은 차이가 생긴다. 

이것이 성사의 힘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칠성사의 인효성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은 너희의 과거 삶이나 죄, 

온갖 악행들을 잊어버릴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아라. 


나는 그 모든 것을 내 사랑의 불바다에 묻어 태워버리겠다. 

그런 다음 우리함께 새 삶을, 온전히 나의 뜻인 삶을 시작하기로 하자.”


 



금욕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금욕도 영혼 안에 모든 불완전과 갈증을 바싹 말려 없애 버릴 힘이 있다.


고행은 영혼의 악한 물질을 완전히 말리고 성화의 물이 넘쳐흐르게 한다. 

그리하여 지극히 아름다운 덕행들이 싹트게 한다.


눈이 육신의 시력인 것과 같이 극기는 영혼의 시력이다.

그러므로 극기는 영혼의 눈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적 생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휴식은 육신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영혼에는 훨씬 더 필요하다. 


사람은 자기중심에서 쉴 필요가 있는데, 

중심은 곧 하느님이다.


그러나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쉬려면 내적고요가 필요하다.



이 내적고요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격정들의 질서를 벗어나 고요해지는 것이니

하느님을 향해 있지 않는 모든 욕망과 성향과 애정의 침묵을 부과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뒤숭숭해지면 

이는 네가 하느님으로부터 그만큼 벗어나 있다는 표지이다. 


줄 곳 하느님 안에 있으면서도 완전한 평화를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적인 영혼 안에는 동요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그 영혼이 자기 자신 바깥에 나가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자기 이탈, 자기 뜻에서 이탈, 

무아(無我)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마음속에 은총을 부어 주려면 

네가 절대로 너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나의 뜻 앞에서 너의 뜻은 사라져야 된다.” 



내 마음속을 정화해야할 필요성과 나 자신의 무아에 관한 것으로써 

흔히 자기 자신의 정화의 필요성과 무아에 관한 말씀인데, 

거룩한 겸손의 덕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서 루이사에게 이러저러한 말씀을 주셨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의 뜻 안에는 나약과 격정과 비참이 들어 있어서 

나의 영원한 뜻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막이 되기 때문이다. 

(기쁜 소식 p74) 


너의 뜻은 나의 뜻 앞에 사라져야한다. 


필요한 것은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는 것, 

그래서 그들의 인간적인 뜻을 되찾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이 그들의 영혼 속에 숨을 불어 넣어 생명을 주시고,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삶의 효과와 가치도 함께 주실 것이다. 



내가 한 영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은혜는 그 자신을 알게 하는 것이다. 

자기 인식과 하느님의 인식은 서로 병행한다. 


바로 너 자신에 대한 집착을 없애야 한다. 


곧 네가 오로지 내 안에서만 살고자 한다면 

너 자신에 대하여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내가 나 자신의 생명을 네 안에 넣어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니 네가 내 안에서 그럴듯한 사람이 되려면, 

언제나 너 자신을 허무로 여겨야 한다. 


그렇게 참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을 보면 

흐뭇한 마음으로 나의 모든 것을 네 안에 쏟아 부어 주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의 생명으로 살려면, 

생명을 받아서 살려면 우리 자신을 무(無)화시켜야 된다. 


비워야 된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야 나를 비울 수 있다. 

그래야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서 살 수가 있는 것이죠.



“내가 한 영혼에게 주의해서 보는 것은 

그가 자신의 뜻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야 나의 뜻이 그 영혼을 옷 입히고 거룩하게 하여 

온전히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이 뜻 안에 들어오려면, 

단지 자신의 뜻이라는 돌을 치우기만 하면 된다. 


이 돌은 설사 나의 뜻 안에 있다 하더라도, 

내 뜻에 참여할 수도 그 효과를 누릴 수도 없다. 


「영혼도 나의 뜻 안에 묻혀 완전히 죽어야, 

나의 뜻 안에 그 자신의 뜻이 삭아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참된 거룩함을 지닌 그리스도의 모든 덕행이 되살아남과 더불어 

새로운 신적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나의 뜻이 너희 내면과 외면 전체에 드러나는 표가 되게 하여라. 


그러면 네 안에 다시 무엇이 나타날 때건 

너는 거기에서 참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 열망할 수 있는 모든 성덕 가운데서 가장 좋은 성덕이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33 1907년 1월 20일)」 



네가 너 자신 안에서 가장 먼저 없애야 하는 것은 너의 뜻이다. 


네 안에 있는 그 나라는 것은 

선(善)을 제외한 모든 것을 탐하므로 없애야 하는 것이다. 


그런즉 내 앞에 너의 뜻을 온전히 희생 제물로 바쳐야

너의 뜻과 나의 뜻이 하나가 될 수 있다.”


거듭거듭 자기 뜻을 없애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네가 너 자신을 죽이고 너의 허물을 알수록 

나의 인성이 더욱더 빛살을 내뿜으며 내 덕행들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자기포기는 

인간 본성상 고통스럽고 지긋지긋한 모든 것을 흡수하여 

감미로운 것으로 바꾼다.”



그래서 이제 자기가 완전히 소멸되면 

어떤 것들이 자기에게 와도, 

그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고 

고통도 기쁨으로 바꿀 수가 있게 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일치에 도달한 사람은 

또 하나의 경지인 자기 소멸의 경지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내 현존 안에서 영혼은 합당한 자리에 있게 된다. 


즉 자기 자신이 없어진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허무 안에 낮추어 진다 


그러면 신성이 강물 같은 은총을 그에게 쏟아 부어 그 안에 잠기게 한다. 


내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자기 자신을 상당한 인물로 여기는 자는 아무 가치가 없는 사람이고,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자로 여기는 사람은 모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자기를 무(無)화시키고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 맡기고 

그 분의 뜻을 주시도록 청하는 것이 여기 이제 나옵니다. 


그래서 여기 까지만 하고 끝냅시다.



“너희가 너희 뜻을 내게 준다면, 

모든 일을 내가 말한 대로 하는 셈이 된다.


‘우리 뜻을 달라는 것 이예요.’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해줌과 동시에 너희도 행복하게 된다. 


나는 나의 뜻이 너희 가운데서 다스리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면 하늘과 땅이 너희에게 미소를 지을 것이고, 

내 천상엄마께서 확실히 너의 어머니와 여왕님이 되실 것이다. 


그분은 내 뜻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져올 크나큰 선임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그분은 내 열망을 채우시며, 

내 눈물을 그치게 해 주시려고, 

게다가 너희를 참 자녀들로 여기며 사랑하기 때문에 

뭇 백성들 가운데로 다니시면서 그들을 준비시켜 

내 뜻의 나라의 통치를 받아들이시도록 하신다. 


그분은 내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갈 수 있도록 

사람들을 준비 시켰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처럼 큰 선물을 받아들이도록 

그들의 영혼을 준비 시키는 일을 

그분에게 그분의 어머니다운 사랑에 맡기고 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바로 하느님 뜻의 나라를 준비시켜 주시는 분임을,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시는 분이심을 

예수님께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이제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받기를 원하며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이 뜻을 선사하고자 하십니다. 


사람이 권리와 자기 뜻의 사용을 

모두 하느님께 맡기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루이사의 글에 다나오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나의 사랑은 매우 크기 때문에 

한 영혼이 그 자신을 내게 바치기로 결심하면 

나는 풍부한 은총으로 그를 감싸고 어루만져 주며 격려하고, 

그가 자기 내면(內面)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또한 그가 느낄 수 있는 은총을 주며, 

호의와 영감을 주고,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준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58 1916년 5월 25일)



그래서 이제 루이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 역시 감사해 마지않으면서 

내게 바라시는 모든 것에 순종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수님과 성모님께 나 자신을 봉헌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성모님께 대한 봉헌,

성모님을 통해서 예수님께 대한 봉헌 

이것은 여기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기 위해서 명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사람처럼 잠자코 너 자신을 내 팔에 맡겨 보아라, 


하느님을 온전히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바쳐야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일부터 시작해야한다.




「가장 아름답고 내 마음에 드는 행위는

내 뜻 안에 자신을 내맡기는 행위이다.


사람이 그 자신의 실재를 잊어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기억할 정도로 맡기는 행위 말이다.


나의 뜻 안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것은

그 자신의 실재를 없앰으로써 하느님의 실재를 되찾게 한다.


그러므로 그 영혼은 자신을 내게 맡김으로써

내가 그에게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는 셈이기에

나에게 그만큼 더 큰 영광을 안겨 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33 1907년 6월 23일) 


 


「중요한 것은 오직, 나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주고 

모든 것 속에서 내 뜻을 행하는 것임을 사람들은 알려고들 하지 않는다. 


자신을 온전히 내준 후에는 신적인 행동이 된다. 

곧 나의 것이 된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떠날 각오와 채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40 1912년 3월 20일)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테니까 

너는 그저 네 뜻을, 네 의지를 내게 주기만 하면 된다. 


네게 필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너는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네 의지력을 나의 뜻에 맡기기만 하면 

내가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 


「나의 첫 열매인 내 뜻의 자녀들이 

이제는 인간적인 분위기에 싸여 살지 않고 

신적인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을 보면서 

내 입술에 띠게 될 미소 말이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86 1921년 1월 7일) 


 


내 뜻의 자녀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겠지만, 

나의 피앗 안에서 모든 것을 내게 줄 것이다. 


얘야, 너의 마음을 내게 다오, 

것은 나의 순응(順應)이다. 


네 마음을 내게 주고자 한다면 

설사 사랑이 없는 냉정한 마음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 보답으로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그리고 나 자신을 주겠다. 


그 마음을 내 마음의 열기로 뜨겁게 타오르게 하여 

네 안에 있는 세속적인 애착을 모조리 잘라 버리게 해주겠다. 


나에 대한 신뢰와 맡김은 

영혼을 빛나게 하고 다른 모든 격정들을 바로 잡아준다.”




주님께 우리를 몽땅 맡기는 것, 

우리 뜻을 온전히 맡기는 봉헌, 

이것이 아주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자기를, 자기 뜻을 봉헌하고 주님의 뜻을 주시도록 청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는데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해서 조금 더 부언을 하고, 

그 다음에 

하느님 뜻 안에서 살기 위한 세 단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그런데 다만 맡기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다.


영혼 자신에게 가장 좋고

내게 영광을 돌리는데도 가장 좋은 방법은

항상 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


이 사실에 대한 확신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 뜻 안에서 행해지는 행위들은 

나의 뜻만큼이나 고상하고 신성하며 끝없고 무한하다. 


그러한 행위들은 나의 행위들과 유사한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무(無)를 발견한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기 때문에 

전부이신 존재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를 온전히 비운 채, 

나와 함께, 내 안에서, 나처럼 활동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공로나 이익을 보는 대신, 

나를 기쁘게 하는 일과 

자기의 모든 행위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권을 

내게 넘겨주는 일에 온전히 몰두하며, 


내가 그 행위들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지 따위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이 큰 영예를 간청할 때에도 오직 하나의 관심사밖에 없으니, 

바로 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69 1917년 12월 6일) 




그래서 우리가 봉헌을 하고 나서 

온전히 그분 뜻만 생각하면서 살도록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내 뜻 안에서 새로운 행위를 할 때마다 

영혼은 새로운 힘과 지혜와 사랑과 신적인 거룩함을 얻고, 


이와 같이 신적인 특성들을 획득함에 따라서 

그 자신의 특성을 깨끗이 포기하게 된다. 


영혼이 하느님 뜻 안에서 행동할 때면 

그 자신의 인성은 말하자면 정지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70 1918년 3월 26일) 



네가 언제나 나의 뜻을 행하면 빛을 먹으며 자라게 된다. 


너의 고행과 금욕과 고통이 

네 영혼을 위한 빛의 양분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뜻이 참 생명을 줄 수 있는 오직 하나인 본질적인 음식이기 때문이다. 


빛을, 계속 빛을 먹으며 자란다면 

네 영혼에 배여 있는 결점들이 끊임없이 정화된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뜻 안에서 하나하나 행위를 할 때마다, 

계속 우리가 정화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제물이 될 때 나의 뜻 안에 사는 영혼도, 

다만 한 번의 미사가 아니라 모든 미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함께 제물이 된다. 


나의 뜻 안에 살기 때문에 그는 모든 제병들 안에서 축성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나의 뜻을 떠나지 말아라.”


(하느님의 뜻이 군림하실 때에 p70 1918년 3월 27일) 




우리가 주님의 뜻 안에서 살 때, 

주님과 완전히 하나 되어 살 때, 

주님께서 각 미사에서 제물이 되시는 것처럼 우리도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즉 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은 성덕의 절정이며, 

영혼 안에 끊임없이 은총이 자라게 하는 것이다. 


은총들이 있는 영혼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하느님 자신이 황홀해 하실 정도이다. 


천사와 성인들도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경탄해 마지않는다.”


 


이런 하느님의 뜻 안에 사는 은총을 받고 싶죠(질문). 


예(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