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제4장] 3. 고통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은가루리나 2019. 2. 26. 23:53


3. 고통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외부로부터 악을 당하게 될 때 그가 평온하게 평화를 간직한다면 

그는 외적인 일들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불행한 일들에 동요한다면 하느님께서 그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의로운 척하며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지만 작은 것에도 흔들리기 때문이다.


깨끗한 대야에 맑은 물을 담고 흔들리지 않게 하면 

그 물에 그대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볼 수 있다. 

그 물에는 불순물이 없고 잔잔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평화와 고요 속에서 하느님을 뵙고 

또 어려움과 불안 속에서도 하느님을 뵐 수 있는 자유롭고 내적 평온을 지닌 사람에게는 

완전한 마음의 평정이 있다. 

그러나 어려움과 불안 속에서 즐겁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고 열심히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보내시든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참으로 그것은 최선의 것이며, 더 나은 것이 있을 수 없다. 

다른 것들이 더 좋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그대에게 좋은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다른 길이 아니라 이 길을 원하시기 때문에 이 길이 가장 좋은 길일 수 밖에 없다. 

병이나 가난, 배고픔이나 목마름 등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주시는 것이나 주시지 않는 것은, 

비록 그대가 그것에 대해 열성이나 내적 활기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그대에게 가장 좋은 것이다. 

그대가 가졌거나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받아들인다면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보내시는 것은 최선의 것이 된다.


아마 그대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병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그대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일이 하느님의 뜻임을 안다면 그대는 기뻐하고 만족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어떤 고통이라도 찌르는 뜻한 아픔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번민이나 고뇌를 느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을 하느님에게서 오는 가장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라. 

왜냐하면 그것이 당신에게는 가장 좋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든 것을 잘 이용하는 것은 

하느님을 곤궁할 때나 부유할 때나 한결같이 사랑하고,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그분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이다. 

물동이 2개가 있는데 하나는 무겁고 하나는 가볍다. 

이때 한쪽이 무거울수록 다른 하나는 가벼워진다. 

제거하면 할수록 제거하기가 더 쉬워진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마치 달걀 하나 내놓듯이 쉽게 끊어버린다. 

포기하면 할수록 포기하기가 쉬워진다.


이교 철학자 세네카는 고통과 불안 중에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그 고통을 마치 원하고 청했던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했다면 그대는 불평할 이유가 없다. 

한 이교 스승은 "주님,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 최고 하늘의 유일한 통치자시여, 

당신께서 무엇을 뜻하시든지 저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친절하게도 당신은 저에게 의지를 주시고 그 의지를 당신 의지에 일치시켜 주셨습니다."

라고 외쳤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것은 걱정을 버리고 영원한 기쁨이 그대의 마음을 지배하게 해야한다는 뜻이다. 

그럴 때 아기가 태어난다. 

그 아기가 내 안에서 태어날 때에 친구들과 아버지의 모습은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내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


지금 겪는 고통이 그대의 것인지 하느님의 것인지 분명히 알기를 원하는가? 

다음과 같이 말해 보겠다. 

어떤 식으로든 그대 자신 때문에 당하는 고통은 그대에게 상처를 주며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하느님을, 오직 하느님만을 위하여 당하는 고통은 

상처를 주지도 않고 부담이 되지도 않는다. 

하느님께서 그 짐을 지시기 때문이다.


내 말을 믿으라.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오직 하느님만을 위하여 고통을 받고자 한다면 

갑자기 온 세상의 고통을 모두 당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를 괴롭히거나 꺾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 짐을 지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 어깨에 지우는 짐이 수십 킬로그램이 넘는다 하더라도 

마치 몇 그램밖에 안 되는 것처럼 기꺼이 질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무겁거나 괴롭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을, 오직 하느님만을 위하여 지는 고통은 가볍고 즐겁다.



사람들은 거룩한 삶에 대하여, 

거룩한 사람들이 어떻게 고통을 받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우리 주님의 친구들이 겪은 고통을 이야기하자면 시간이 너무나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고통을 겪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느님 의식에 대한 일말의 의심이나 고통은 모두 잊혀질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육신 안에 있을 때에도 일어날 수 있다. 

또한 영혼은 아직 육신 안에 있으면서도 고통을 잊어버리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게 될 수 있다.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이 고통이 힘들고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은 

고통스럽지 않고,하느님 보시기에 그 고통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친구들이여, 하느님 안에서 죽고자 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든 고통은 육신과 그 하위 능력과 감각들에게 맡겨두고, 

영혼은 그 모든 능력들과 함께 자유롭게 하느님께로 올라가야 한다. 

감각과 하위능력들의 고통과 투쟁은 영혼을 괴롭히지 않는다. 

싸움이 길고 힘들수록 승리와 승리의 열매는 더욱 훌륭하고 영광스럽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는 슬픔도 고통도 번민도 없다. 

그대가 모든 역경과 고통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대의 모든 고통은 그대가 하느님을, 

하느님만을 향하지 않는 데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