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 교수 : 안녕하세요. 김남희 율리아 교수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번에 두 번째 대담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대담에서는 저희들에게는 위대해 보였던 토마스 머튼의 영성이 결국 우리들에게도 가질수가 있고 또 토마스 머튼이 우리와 같은 한 사람, 그리고 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대담에서는 토마스 머튼의 생애와 영적변화의 여정에 대해서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2주 만에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박재찬 신부 : 안녕하세요, 네 반갑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김남희 교수 : 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사실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저도 제의를 받고 얼만큼 내가 알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요, 하나씩 하나씩 읽어가면서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고 있어서 이번 시간도 기대하고 왔습니다. 신부님과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지지난주에 아주 예민한 문제를 다루셨더라구요. 어떤 주제인지 신부님께서도 잘 아시죠?
박재찬 신부 : 네, M과의 어떤 사랑이야기, 그리고 뭐 여러가지 종교간 대화 이야기가 나왔었죠.
김남희 교수 : 네 맞습니다. 사실 일주일만에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랬거든요, 지난번에 사랑이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게 한다. 이 해석을 들으면서 제가 떠올랐던 시가 있는데 아마 토마스 머튼도 굉장히 좋아했었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였었거든요. 이 시가 뭐였나하면 "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 알고 계신 시인가요? 워낙 유명한 시여서요.
박재찬 신부 : 그럼요, 토마스 머튼이 윌리엄 블레이크를 통해서 석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김남희 교수 : 네~ 맞습니다. 사실 이 시를 제가 초등학교 때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1학년 때 저에게 엽서를 그림을 그려서 보내주셨는데 이 시를 보내주셨어요 초등학교 1학년때요. 그래서 이 시가 도대체 뭘 뜻하지 했는데 2주 전에 하셨던 M과의 만남, 그리고 사랑, 그리고 영적인 성장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이 시가 저희가 얘기하는 단순히 자연에 대한 것, 그리고 초월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결국 이 땅에서의 그 만남이, 아주 작은 만남도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겠구나 라는 것으로 다시 한 번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좀 잘난 척을 해서 죄송합니다~ 신부님!
우선 여러가지 중에 제가 먼저 궁금했었던 점이 바로 이 공간에 관한 문제였었거든요. 왜냐하면 영적 성장에 대한 변화과정 안에는 토마스 머튼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공간성이 중요하다고 봤는데요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시간>에서 보면 그 뭐라고 표현이 되어있냐하면 '머튼의 전기에서 나타나는 사소해 보이지만 색다른 주제를 보여준다. 전형적인 예로 그의 일기에서 방이 차지하고 있는 역할이다.'
그래서 처음 이제 이 책에서는 맨해튼 거리 35번지에서 시작을 해서 뉴욕주에 있는 외할머니 집, 그 다음 그 외할머니의 방, 그 다음에 여행을 하면서 떠돌게 되는 다양한 호텔들, 그 다음에 이제 프란치스코회 입회를 거절당하면서 친구들과 뉴욕에 있는 오두막에 거처를 마련한거요, 그리고 나중에 보나벤투라 대학에 있는 자신의 방, 그곳에서 사실은 트라피스트 수도회 입회를 결심하게 되구요, 이제 1년 반동안 지내다가 1941년 12월 10일 겟세마니 수도원에 이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는 그 작은 방, 그 다음 이제 혼자 머물렀던 병실, 혼자 머물면서 글을 쓸 수 있게 해 준 둥근 천장이 있는 방, 그 다음에 은수자의 오두막, 그 다음에 나중에 은수자의 집, 간호실습생을 만났던 그 병실, 그 다음에 삶의 마지막이 된 방콕의 그 방갈로, 그 다음에 마지막 방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 방이 벨라르민 대학에 있는 토마스 머튼의 방이 있는데~ 이 방은 혹시 신부님께서 가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박재찬 신부 : 벨라르민 대학이 지금 토마스 머튼의 센터가 되어 있습니다. 그 방은 가 본 적은 없습니다. 사진으로만 봤는데 거기 가면 토마스 머튼이 유품으로 남긴 청자켓이랑 뭐 그런것들이 전시되어 있죠. 그리고 또 거기 벨라르민 대학에는 거기서 머물러서 컴퍼런스(conference)를 했었는데 거기에 토마스 머튼 센타가 있구요 그 다음에 토마스 머튼에 관한 자료가 거기 다 모여져 있습니다.
김남희 교수 : 아, 네 알겠습니다. 저는 거쳐 온 방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영적변화의 체험, 이런 것들이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박재찬 신부 : 이 질문을 통해서 아까 윌리엄 블레이크의 '한 알의 모래알 수'라는 그 이야기를 통해서도 다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토마스 머튼이 처음에 가졌던 공간의 개념하고 나중에 후기에 가졌던 공간의 개념, 처음에 가졌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그런 개념하고 후기에 가졌던 개념이 점점 확장되어 갑니다.
그리고 우선 공간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토마스 머튼이 처음에는 집이 없다는거에 대해서 굉장히 그리워하고 안정된 공간, 또 안정된 집, 또 안정된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마음이 안정된 트라피스트 수도원이라는 그런 공간으로 들어가게 했다는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토마스 머튼의 글을 읽어보면 토마스 머튼이 '집'(Home)이라는 '가정'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많이 씁니다. '여기가 제 집입니다.' 했다가 또 딱 읽어보면 '여긴 제 집이 아닙니다.' 뭐 심지어 처음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와서는 여기가 내 집이라고 했지만 나중에는 '이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나의 집이 아닙니다.' 뭐 이렇게 표현을 하고 또 아시아를 여행할 때도 '지금 나는 집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뭐 이런식으로 그런 표현을 씁니다.
근데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이 '집'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포괄적이면서도 함축적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제 집이 사라지는, 그러니까 집을 갈망했다가 그 집이 사라지고 또 집을 갈망했다가 또 그 집이 사라지고
마치 이제 방에서 방으로 이동되지만
단순한 공간적인 방이 아니라 어떤 영적인 의미에서의 그런 방으로 확장되어가는 것 같애요.
예를 들면 집이 없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수도원이 내 집이 되었쟎아요.
그런데 나중에는 '수도원은 내 집이 아닙니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왜 그랬을까요?
토마스 머튼이 생각하는 이 '집'은 하느님관하고 연결이 되어 있다고 봅니다.
처음에는 수도원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생각했죠.
근데 수도원에 살다보니까 하느님은 수도원에만 계신게 아니었던 거죠.
다른 곳에도 계신거예요.
그래서 '아, 수도원은 나의 집이 아닙니다.' 라고 표현을 해요.
그리고 처음에 또 아시아에 가면서 또 새로운 하느님을 만날거라는 그런 기대에 부풀어 있었죠. 나중에는 또 아시아라는 공간을 넘어서서 또다른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이 공간이라는 이 집이라는 개념이 점점점 더 확대되었다가 사라지고
그래서 나중에 '짐 포레스트'(Jim Forest)라는 토마스 머튼의 제자였죠,
그러다가 수도원에서 살다가 환속하셔서 토마스 머튼의 아주 대가가 되신 분이신데 이분이 쓴 책 중에 'Thomas Merton's path to the place of Nowhere''토마스 머튼이 있는 곳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표현을 쓰는데 이 표현은 뭐냐면
토마스 머튼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느님은 이곳에 계신다고 생각하지만 또 그곳에 없기도 해요.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 이 공간을 초월해 계시기 때문에.
토마스 머튼의 이 삶의 여정을 통해서 이 공간의 개념은 점점점 확대되어 가면서
하느님의 공간으로 이제 확장되어 가는거겠죠.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도 내가 알고 있는 하느님, 또 내가 안정적으로 생각했던 그것을 넘어서
또다른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지난 시간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광야의 시간처럼 또 하느님이 안계시는
듯한, 집이 없는 듯한, 그런 공간을 이동해야 되잖아요 그죠.
사막을 거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약속된 땅에 들어간 것처럼
그 집이 없는 상태가 또다른 집을 향한 어떤 과정이라는 것이 토마스 머튼의 삶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여정이 집으로 표현되었던거죠.
앞서 이야기 했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모래알 이야기에서처럼 토마스 머튼은 우리에게 어떤,
그 토마스 머튼이 오두막에서 은둔처에서 살던 그 작은 삶,
이 삶이 우주의 삶과 연결된다는 표현을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아요.
그 모래알 속에 있는 하느님을 본 거잖아요. 하늘을~!
그런데 이게 이제
'Macro Cosmic'(대우주)과 'Micro Cosmic'(소우주) 이 구분을 통해서 설명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소우주가 있고 대우주가 있어요.
그러니까 대우주는 전체 하느님이 관장하는 우주라고 볼 수가 있지만 또 하느님께서는 이 전 우주를 관장하기도 하지만 또 한 명 한 명의 소우주도 관장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밥먹고 일어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이 사람들 사이에서의 관계는 너무나 사소하고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우리가 느낄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라는거죠.
그래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할 때
이 대우주의 하느님의 사랑과 연결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자그만한 모래알 속에 있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는 것처럼 일상의 작은 일들, 내가 양보하고 배려하고 하느님 때문에 한 번 더 인내하고 참고하는 그런 모든 것들이 하늘의 큰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위대한 성인들, 뭐 그런 분들만 기억하시는게 아니라 우리 한 명, 한 명이 정말 당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아주시고 이끌어주신다는 것을 토마스 머튼의 이 삶의 여정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거죠. 이분도 오두막이라는 작은 곳에서 큰 우주의 하느님을 만나고 그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었던 것처럼
우리도 역시 우리 삶안에서 일상의 작은 것들에 충실할 때
큰 우주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김남희 교수 : 네, 사실 그런 점에서 토마스 머튼은 굉장히 감각적인 사람이었다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지금 감각이라고 하는 주제어와 그 다음에 제가 지금 말씀드렸던 공간이라는게 연결이 되는 것 같애요. 저는 토마스 머튼의 삶에 이동하는 과정들, 그 방이라는 주제어를 보면서 느꼈던 점이 Place(장소)와 space( 공간)의 차이인 것 같거든요.
그니까 우리는 모든 현대인들은 다 물리적 공간(space)안에서는 살고 있죠, space라고 하는 공간에서 살고 있는데 그 안에서 우선 첫 번째는 현대인들이라고 한다면 실존적으로, 그 다음에 신앙인들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의 체험 안에서 그 공간이 space가 아니라 place로 이제 넘어와야만 하는데 그 place는 결국 자기 삶안에서의 place를 만들어내는 거쟎아요, 그러니까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문제가 되는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사실 공간성이 중요하다라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서 공간성안에서 우리의 감각이 우선은 예민해 질 필요가 있다.
아까 신부님께서 눈도 멀고 귀도 멀고 한다고 하는데
그 1960년에 은수자의 집이 막 완성이 되었을 때 토마스 머튼이 묘사한 부분이 있는데요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머리 위 하늘에는 구름들이 현란하게 춤을 추고,
화덕에는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다.
방 안까지 소나무 타는 냄새가 난다. 침묵만이 흐른다."
저는 이 글귀가 굉장히 많이 와 닿았어요.
그러니까 저희가 은둔하고 침묵한다 라고 한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감각들도 사실은 무디어지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생각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하느님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 space라고 하는 공간안에 나의 감각을 열어서 place로 만들어가는 그 여정에서
첫 번째가 감각이어서 이 소리내는 것과 소나무 타는 냄새와 구름이라는 이 시각, 청각, 후각들을 다 활용을 하는데, 본인은 그 가운데 침묵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사실 저희가 토마스 머튼처럼 1일 피정이라고 하는 것도 있고 사실 수도원에 가서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일상안에서 이 하느님을 찾아야 되는데 신부님 보시기에 지금 현대인들이 특히 그리스도교 신자분들이 잘 찾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박재찬 신부 : 우선 이제 앞에 했던 이야기를 좀, 공간이라는 개념하고 이제 거기에 관계되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영성에서 어떤 핵심은 복음의 어떤 진리와 벗어나지 않습니다.
'지금여기'. 항상 이제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에서 지금여기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지금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지금 여기에서 깨어있어야 되잖아요.
말씀하시는 어떤 오감에 깨어있음,
그 다음에 영적인 깨어있음,
실제 지금 삶안에서 그분을 추구하는 것,
그런데 그런 영적인 의미에서 하느님을 찾는것은
단순히 내가 주님, 주님 한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냥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것안에 계신 하느님을 우리는 찾아야 하는데
그 가운데 아까 읽으신 대목은 자연안에서 숲속에서 들려오는 그 하느님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