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창에 찔린 예수 화살에 꽂힌 신

제1부 22 《 하섭내 》 5-4 하느님의 뜻에 내맡긴다고 하는 것은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입니다

은가루리나 2020. 5. 1. 02:24


제 4 장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따르는 것이 영성의 본질이다

 03 
내맡김의 적극적 실행




하느님께서 자아포기의 상태로 부른 영혼들은
능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수동적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적극적인 면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자아포기의 상태란 바로
일상적인 위탁의 덕이 보다 균형 있고 완전하게 실천되어 강화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의무가 실행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뜻을 능동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고,
둘째는 하느님의 뜻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내맡김의 상태란
하느님의 뜻대로 쓰시도록
하느님께 우리의 전 존재를 모두 내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그분은 우리에게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시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시게끔 하는 경우와
우리 안에서 당신 자신이 일하시는 경우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우리가 하느님의 분명하고 명백한 명령에 기쁘게 순종하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우리 영혼 안에서 그분이 행하시는 일에 온전히 유순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위탁, 내맡김이라는 것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그것은
여러 가지의 유형무형한 것이 순간순간 빚어지는 대로
하느님의 섭리를 거기서 바라보고
그것을 따르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떤 모양의 내맡김이 좋을까 라든지
아니면 매순간 어떠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일 중요한것은 조건 없이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일뿐입니다.




 04 
내맡김의 상태로 불림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러한 사람들은    
예수님, 성모님, 성 요셉의 생애를 닮은 삶을 사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삶은 하느님의 원하심에 완전히 의탁하여
그분의 뜻이 나타날 때 그 즉시 따를 마음 자세가 되어있습니다.


이러한 뜻에 대해 명시되어야 할 사항은
인간적인 표현으로는
하느님의 뜻이 작용할 때에는 그것이 뜻하지 않게
우연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나는 그것을
우리가 수행해야할 결정적인 의무들을 부과하는 하느님의 뜻의
다른 면과 구분하기 위해
순수한 섭리(攝理, Providentia)라 불리는 하느님의 뜻이라 부르고자 합니다.

여기서는 그러한 하느님의 명시된 뜻은 제쳐 놓고
대체로 하느님의 섭리적인 뜻에 의탁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합니다.


그들의 생애는 아주 특별한 것이지만,
밖에서 보면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종교상, 신분상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행하고 있는 것과 별반 차이점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가까이에서 들여다 볼 때
거기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삶은 평범해 보입니다.
도대체 다른 사람과 아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안배해 주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내맡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끊임없는 순종을 약속하기에
하느님의 뜻은 영혼에게 완전한 지상권을 행사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뜻에 의식적으로 협력하든지 아니면
그 일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든지 간에
그것들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쓰시는 가운데 
그들이 다른 영혼들을 도와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의 마음 상태는 고독하고 자유롭고 만사로부터 벗어나 있어
평화로운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또 그들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이 지금 바라시는 의무를 그 뜻대로 성실히 이루어 드리는 일에만
골몰합니다.

반성이나 회고, 결과에 대한 숙고 또는 원인과 이유에는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뜻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들의 명백한 의무를 진실되게 끊임없이 이행하는 것으로
만족해합니다.

지금이라는 이 순간은 마치 사막과도 같아
단순한 이 영혼들은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만을 즐기며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뜻하시는 것에만 마음을 씁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은 무시해 버리고 망각하며
주님의 섭리에 온전히 내맡깁니다.



이러한 영혼은
하느님이 하시고자 하는 목적에 수동적으로 이용되거나
아니면 하느님으로부터 지시 받는 외적인 활동에 따라 순응하거나
움직이는 도구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외적 활동에는 자유롭고 능동적인 협력이 뒤따르지만,
그것은 신비적이고 위로부터 주입되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이 이런 영혼 안에서 찾아보시는 것은
당신 자신의 활동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마음가짐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로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영혼을 대신해서
그 영혼이 자신의 힘과 선의로 이룩해야 할 것을 해 주십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자기 대신에 여행을 떠나려 준비하는 친구를 보고
그의 모습을 빌려 여행을 떠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실제 여행은 다른 이가 한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 친구가 한 일은 여행을 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 것뿐입니다.

이 여행은
여비와 노고를 감수해야 할 친구를 돕고자 자유로이 결정한 결과였기에
강제적인 여행이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걸어가는 것으로
(당시 여행은 대부분 도보로 하는 것이었음)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친구 쪽에서는 아무런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내적인 것이며,
걸음을 걷게 하는 힘이 사람 눈에 띄지 않고 숨겨져 있는 까닭에
그것은 신비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상적인 여행은
은총에 협력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예증이지만,
일상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경우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일상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경우에는
아무것도 신비적인 것이 없고 위에서 오는 힘에 저촉되는 일도 없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자유롭고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내맡긴다고 하는 것은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입니다.

우리 자신을 포기하여 하느님께 내맡길 때,
자신의 의지는 전혀 따르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바라면서도 자신은 행동하지 않는 도구와도 같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가짐을 계속해서 지니게 됩니다.

도구는 숙련공의 손에 들어가자마자
본래 지니고 있는 성능과 특징이 나타나 모든 것에 사용됩니다.


이와는 달리
분명히 정해져서 나타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일반적 경계, 주의, 신중, 분별력을 포함합니다.
은총이 우리를 도와주시니
우리는 현 순간에 해야 할 일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다른 일에 대해서는 일체 하느님이 하시는 대로 맡겨 드려야 합니다.


이 사랑은 아주 참다운 행동이고 피해서는 안 될 의무입니다.
영혼은 이 사랑을 끊임없이 간직하고
하느님의 권고하심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영혼이 능동적으로 행위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긴박한 의무에 대한 재빠른 응답 역시 행위입니다.
비록 우리가 외적인 상황들 안에서 특별한 것을 마주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 외적인 상황들과 사건들로 명백해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행하는 행위에 입각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이 영혼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은
모든 것에 대한 법이고 최고의 기준이며 분명하고 확실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장소와 시간, 상황에 구애받지 않으며 모든 곳에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우리는 똑바른 길을 용기와 충실성을 가지고 탈선하지 말고 따라가야만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지금 현재 요청받고 있는 모든 것을 능동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 외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수동적으로 내맡겨 드리고
하느님이 권고하시는 대로 평화 중에 때를 기다리면 됩니다.






★하느님섭리에내맡김(日)
장 피에르 꼬사드 신부님의 영적 권고(1)


댓글

moowee 13.02.28. 09:11


< 하느님의 뜻에 완전하게 일치하는 습관을 몸에 지니는 방법 > 중에서
가장 뛰어난 방법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 그대로
< 하느님을 " 죽기까지 " 사랑하는 것 > 입니다.

하느님을 < 죽기까지 > 사랑하지 못한다면,
하느님을 < 죽을 정도로, 죽을 만큼 > 사랑하다가 죽으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
모든 일을 <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 > 입니다,

< 無 爲 行 >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 이끌어주시는 대로(수동) > 이끌려 드려야(능동) 합니다.



드 코싸드 신부님의 윗글 2번의 기도,

< 어떠한 예외도 없이, 모든 것에 있어서, 어떤 때라도 >
주님께서 이끌어주시는 대로 이끌려 드려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 이끌어주심 >을 느끼려면,
< 느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

느낌을 느끼려면 느낌을 소중히 해야 합니다.

느낌을 소중히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 지식과 경험과 생각을 버려야만 > 합니다.


< 無 腦 人 間 > 이 되어야 합니다.

무뇌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 無 我 之 境 > 에 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아지경은 소수의 수도자(승)만이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개나 소도 다 이를 수 있는 경지입니다, < 내맡기면 > 말입니다.
개나 소는 < 自然 > 에 내맡기고, 인간은 < 하느님 > 께 내맡기면 됩니다.


하느님께 내맡기기 위해서는, <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해야만 합니다. >
아니, <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 > 만이 내맡길 수 있습니다,
완죤~~~히!





★하느님섭리에내맡김(韓)
Re:《서론 》 19-21쪽(정적주의)


댓글

moowee 13.02.01. 17:36


내맡김의 영성은 정적주의와는 전혀 다른 영성입니다.


인간의 의지를 최대로 억제할 뿐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하느님께 다 반납(내맡김)하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수동적인 삶인 동시에,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기에
하느님의 이끄심에 전적으로 이끌려 드리는(능동) 삶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