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95 pp.477-481 제 3 편 제13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계속) 제4절 양심상의 소심①

은가루리나 2021. 5. 23. 23:31

 

 

★거룩한위탁
제 3 편 제13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계속) 제4절 양심상(良心上)의 소심(小心)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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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②
 제4절 장소와 환경 ①②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①②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①②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
 ⑴
 ⑵
 ⑶
 ⑷

제8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실패와 과실 -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내적시련의 일반 -
 ①
 ②
 ③
 ④

제10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유혹 -①
 - 유혹 -②
 - 유혹 -③

제11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위안과 건조-①
 - 위안과 건조-②
 - 위안과 건조-③
 - 위안과 건조-④

제12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①②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①②

제13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①②
 제2절 각가지 공포 ①②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①②
 제4절 양심상의 小心 ①

제14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제3편 위탁의 대상




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13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계속)

제 4 절 양심상(良心上)의 소심(小心) ①


p.477


여기서 말하는 양심상의 소심이란,
섬세한 양심의 의미가 아니고, 그 가짜에 불과하다.

섬세하고, 잘 함양된 양심은,
결코 불완전한 죄와, 소죄를 대죄로 잘못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일에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그런 양심은 천주를 깊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그 뜻을 거스르기를 두려워 한다.

또한 완덕에 대하여 열심을 간직하고 있음은,
가장 경미한 죄까지 도피하려 할 정도다.

그러므로 그런 양심은 광명과 사랑과 관대함에 충만돼 있다.


이에 반하여,
소심(小心)은 무지, 착오 또는 판단의 오류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옥된 정신의 결과이며,
의무와 죄과를 과대시(誇大視)하고,
의무와 죄과가 없음에도 의무와 죄를 느낀다.

또한 반대로
가끔 실제의 의무와 죄과를 인식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참으로,
사람은 어떤 점에 관해서 어리석을 만큼 소심(小心)이면서도
다른 면에 있어서는 악한 표양이 될만큼 방종에 흐르기 쉬운 것이다.



이 소심은 내적 평화를 교란시키는 무서운 해독(害毒)이다.
이 불행을 당한 영혼은,
냉혹한 주인 밑에 있는 노예와도 같은 이며,
전연 평화를 찾아볼 수 없다.


「암브로시오.드.롱베스」신부는 말한다.

p.478
「그런 영혼에있어서는 극히 세세한 과실도 죄가 되며,
선행도 악행처럼 생각될 것이다.

자신의 의무가 완수됐다고 안심할 적은 없으며,
그리고 백번이고 천번이고 거듭한 후에도,
아직 이 평화를 앗아가는 폭군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조금도 만족하지 않는다.」


이 폭군은
묵상 중에는 사념(邪念)의 공포에 의해서,
영성체에서는 이런 치열한 싸움에는 따르기 마련인 건조에 의해서,

고해 때에는,
바르게 죄를 고백하지 않았다든가, 통회가 없었다든가 하는 근심에 의해서,

모든 신심업에 있어서는
올바르게 이것을 수행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에 의해서,
담화 중에는 남의 일을 화제로 삼았다는 불안에 의해서,

고독 안에서는,
남으로부터의 충고도 지지도 받는 일 없이,
자신의 생각에 압제자와 같이 지배되는 것에 의해서,
영혼을 어디까지나 쫓기를 멈추지 않는다.


「소심에 걸린 이는 천주를 두리지만,
이 두려움은 그들의 고문이 된다.

그들은
천주를 사랑하지만, 이 사랑은 위안은 되지 않으며,
천주를 섬기지만, 그것은 노예로서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천주의 다른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위안과 휴직과의 바탕이되는 그 멍에의 무거움에 짓눌리고 만다.」


요컨대 소심에 걸린 이는,
그 선덕이란 점에 있어 흔히 선망할 만한 의인이지만,
그러나 그 고뇌의 점에 있어 항상 동정해야 할 일이다.(「내적 평화」2편7장)



소심은 영적생할에 있어서의 최악의 불행의 하나지만,
그것에도 각가지 단계가 있다.

소심은 우선 기도를 방해한다.

자기에 관해서 지나치게 반성하는 습성이 있는 이는
자신의 일을 세세히 살피고,
시종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며 기도의 때를 보낸다.

그 동안 그는 흠숭도 하지 않으며, 감사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통회의 마음을 일으키고,
자기를 시정할 은총을 구하는 것마저 생각나지 않는다.
지나치게 자신의 일에 사로잡혀 천주와 담화할 틈을 가지지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기도라고 할지라도 극히 불완전 것에 불과하다.

왜냐 하면, 소심은
내적 평온과 기도에 있어서의 주의력을 빼앗는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며,
영혼을 비애나 불안 안에 던지고, 그럼으로써 신뢰와 사랑을 잃게 하며,
천주의 어전을 피하기에 이르게 할 두려움이 있으며,

또한 적어도 친히 심정을 토로하고,
천주와의 친밀한 영적 교제를 즐기는 것을 방해하고,

경건한 영혼에게 있어서는 힘도 기쁨도 되는
고해, 영성체, 묵상 등을 매우 쓰라린 것으로 여겨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것으로 하기 때문이다.

p.479

영적 생활은 기도 외에,
자기에 대한 경계와, 본성의 작용을 끊임없이 억제하여,
은총의 작용에 협력하기 위한 열심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처럼 힘드는, 또한 섬세한 두가지 일에 대해서
소심은 우리를 불편한 상태에 둔다.

즉,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교란시키고, 낙심케 하기 때문이다.
흩어진 정신은 이미 명확하게 사물을 판단할 수 없다.

어떤 의무에 지나치게 구애되어
아마 다른 의무를 소홀히 하기에까지 마음을 빼앗기리라.

많은 싸움에 피로한 의지는 유약하게 되어,
용기도 잃고, 제 자리를 버리며,
부당하게도 피조물 안에 위안과 휴식을 찾아 나갈수도 있으리라.



비록 소심이 완덕에 이르기 위한 노력을 정지하지 않드라도,
적어도 흔히 그 노력을 감소시키고, 항상 그것을 해롭게 한다.

천주의 자비에 눈을 감고, 그 정의만을 보려고 하며,
더구나 그 정의를 곡해하는 신앙은,
대체 완전한 신앙이겠는가.

그 가장 진지한 선의에도 불구하고
천국과 은총을 간신히 바라고
항상 신뢰가 결여되어 전전긍긍하는 망덕은
대체 완전한 망덕이겠는가.

천주를 사랑하면서도,
그 어전에 나가기를 두려워 하고, 진정으로 한마디도 말할 수 없으며,
지선하신 분이신 주께,
두려움을 지니는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줄 모르는 애덕은
대체 애덕이겠는가.

판단을 혼란케 하고, 용기가 꺾이며, 착한 영혼을 교란케 하는 통회는,
대체 올바른 통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p.480

아니다,
소심은 결코 열애의 증거, 섬세한 양심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에게만 마음이 빼앗기고,
충분히 천주께 마음을 향하려 하지 않는 교묘한 자애심, 영적 이기주의일까.
그것은 하나의 진지한 그러나 미혹한 의지일까.

여하튼, 그것은 영적 생활의 존재를 위험하고
그 영위함을 해롭게 하려는 두려운 참된 질병이다.


그러므로 다른 이가,
마음은 신뢰에 열리고
영혼은 평화 안에 꽃피어 완덕의 길을 걷고, 달리며, 날으는 동안에

가엽게도 소심에 걸린 이는
전자와 마찬가지로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그 관대함은 충분히 조정돼 있지 않기 때문에,
헛되이 피로하고, 추호도 진보하지 않으며, 아마 후퇴하고 번민하리라.

왜냐 하면,
「그는 자기 모든 의무에 번민하고,
이를테면 원자(原子)의 무게를 달며,
가장 하찮은 것도 괴물로 되게 하고
가장 보잘것 없는 것에 우죽거리며,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고해신부를 괴롭게 하고, 성신을 슬프게 하며,
자신의 건강을 해롭게 하고, 머리를 피로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일에도 착수할 용기가 없으며,
무엇 하나 남의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자기 병을 남에게 미치게 하며
때로는 신심(信心)을 불쾌한 것, 기괴(奇怪)한 것으로 여겨,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수도 있을 수 있다.
(암브로시오.드.롱베스「내적 평화」1편7장.16)

그러므로,
소심은 만일 우리가 그것에 굴복한다면, 다소를 막론하고,
영적 생활의 참된 불행이다.

p.481

그것이 초래하는 두려운 불행 때문에,
우리가 소심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임은 확실하다.

이 점에 관해서
모든 신학자, 영적 생활의 권위자 사이에 이론(異論)이 없다.
그들은 이에 대하여 취하여야 할 진로(進路)를 상세히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 두려워 해야 할 적을 정복하는 데는 많이 기도하고
유의적 원인(有意的原因)을 제거하며, 특히
지도자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취지를 말함으로써 넉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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