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114 pp.569-574 제 4 편 제2장 제2절 단순(單純)과 자유

은가루리나 2021. 8. 16.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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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편 거룩한 위탁의 우월성과 효과


제1장 거룩한 위탁의 우월성 ①②③

제2장 거룩한 위탁의 효과
 제1절 천주와의 친밀 ①②
 제2절 단순과 자유 
 제3절 정신의 안정과 마음의 평온
 제4절 평화와 희열 ①②③
 제5절 거룩한 임종과 천주의 어전에 있어서의 힘 ①②

결론 ①②③

 역자 후기




제 4 편 거룩한 위탁의 우월성(優越性)과 효과(效果)

제 2 장
거룩한 위탁의 효과


제 2 절 단순(單純)과 자유(自由) 


p.569

예수께서는 세상에 들어오셨을 때,
성부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주여, 보소서. 나 네뜻을 실행하기 위하여 왔나이다」
(헤브레아10.9) 라고.


「게」주교는 이것을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주께서 오신 것은
복음을 전하시고 일하시며,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시며,
악마를 정복하시고, 성교회를 설립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로써 세상을 구하시기 위함이 아니셨던가.
그렇다, 주의 사명은 참으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주께서 그런 모든 것을 바라신 것은,
그것이 성부의 영원한 의지셨기 때문이다.
단지, 이 천주 성부의 의지만이 주를 움직이고 결심케 하셨다.

다른 모든 일을 보시면서도
주께서 그 눈을 향하신 것은 이 의지 위에 뿐이며,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 의지에 관해서 뿐이고,
따르려고 하신 것도 이 의지 외에 다른 것이 아니셨다.

그리고 훗날 그처럼 허다한 사업,
그토록 탁월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초인간적인 업을
완수하셨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오직 이 하나의 극히 단순한 일,
즉 천주 성부의 의지를 성취한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신자의 생활과 덕」중「위탁」1)

p.570

거룩한 위탁을 실천하는 영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에는 수행하여야 할 많은 의무가 있다.

그러나 성가대, 노동, 경건한 독서의 어느 것에도,
또한 자신을 위하여 혹은 남을 위하여 일하는 것도
한가함 또는 다망함의 어느 것에도
하여야 할 일은 오직 한가지 뿐이며,
그것은 즉 자기의 임무,
천주의 거룩하신 의지를 실행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건강, 혹은 질병, 무감각 혹은 위로, 평온 혹은 유혹에 부딪치리라.
그러나 사건 가운데 있어 그가 거기에 발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일, 즉
그런 것을 다스리시고, 그것으로써 의지를 그에게 드러내시는
자기 마음의 천주 뿐이시다.

사람들은 그의 주위를 왕래하며, 떠들어대고 있다.
그들이 그를
혹은 시인하며, 혹은 비평하고, 또는 망각할 때에도,
기쁘게 하거나 혹은 괴롭힐 때에도
그는 눈을 보다 높이 하늘로 향하여 그들을 다스리시는 천주,
그들을 사용하시어 그 뜻을 드러내시는 천주를 우러러본다.


이렇게 하여
그는 모든 사물 안에 오직 천주와 그 흠숭하올 의지만을 본다.

그의 생활에
놀라운 단순함과 극히 탁월한 통일을 부여하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끊임없이 천주만을 보는 생활은,
스스로 다른 또 하나의 열매, 즉
지극히 훌륭한 의향의 순결이라고 하는
평가하기 어려운 귀중한 열매를 자아낸다는 것은
덧붙일 필요도 없으리라.


p.571

이 위탁의 생활은 또한, 천주의 자녀로서의 자유를 초래한다.

「만일
무엇인가 마음을 자유롭게, 차분히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주와 그 거룩한 의지에 대한 완전한 위탁이다」라고
「보수에」는 말하고 있다. (완전한 위탁)

그리고 위탁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실제,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사는 죄인에게 자유가 있겠는가.
그것은 불행한 노예의 처지에 있는 이며,
그들은 세상과 자기 사욕(邪慾)에 학대를 당하고 있다.

의무의 수행에 있어 아직 나약한 신자에게 자유가 있겠는가.
그들은 각가지 일에 마음이 빼앗기고 세상 평판에 굴복하고 있다.
선을 바라지만, 허다한 장해물에 방해되어 그것에서 멀어진다.
악을 증오하지만 그것에서 떠날만큼의 기력이 없다.

이미 어느 정도의 진보를 성취했어도,
아직도 자기나름의 신심을 중요시하고,
감각적 위로를 구하고 있는 이에게 자유가 있겠는가.
결국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애심이다.
속인(俗人)이 정욕의 노예가 돼 있는 것처럼
그들은 자애심의 노예다.

불안정하고 제멋대로이며,
시련에 부딪치면 즉시 당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욕(邪慾)이 약화되고, 자애심이 억제되며 오만이 짓눌림에 따라
영혼은 해방되고 자유롭게 된다.
내적 제욕(內的制慾)이 이 해방에 착수하고
또한 이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한 위탁만이 이것을 성취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즉,
위탁만이 보다 잘 우리를 온전히 무관심 안에 확립하고,
행, 불행을 오직 천주의 의지에만 비추어 보는 것을 배우게 하며,
우리가 품을 수 있는 모든 사랑과 신뢰로써,
이 거룩한 의지에 굳게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p.572

위탁은 우리를 
현세의 행복에서도 불행에서도, 역경에서나 순경에서도 
마음이 자유로운 이로 한다.

탐욕, 야망, 쾌락의 대상이 되는 어떤 것도
우리를 포로로 하지 않고,
치욕, 고난, 빈궁, 모든 종류의 십자가도
이미 우리에게 공포를 줄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천주께만 마음을 바쳤다.
그래서 그 흠숭하올 의지를 성취하는데는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각오가 돼 있다.


위탁은 또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우리를 자유로운 이로 한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사랑과 효심에 충만한 복종으로써
천주를 기쁘게 하여 드리는데 있으므로,
「그루」신부가 말하는 바와같이

「우리는 이미 세속 풍조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람들의 판단, 비평, 조소, 멸시 등도 보잘것 없는 것이 된다.
적어도 그런 것에는
우리를 정도(正道)에서 벗어나게 할 아무런 힘도 없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우리는 세상과 그 오류와 공포 위에 초월한다.
이것이 자유가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 자유가 있을까.」


위탁은 우리를 천주께 대해서까지도 자유로운 이로 한다.
그는 또한 말을 계속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고 싶다.
천주께서 이런 영혼을 어떻게 인도하시드라도,
즉 시련에 부딪치게 하시거나, 혹은 위로를 주시거나,
또는 그들에게 가까이 가시고, 또는 멀리하시드라도」,

조금도 그들의 마음을 산란시키거나 낙담시키지 않으시고,
온전히 당신 자신께 복종시키신다.

「천주께 대한 그들의 자유는,
천주께서 바라시는 모든 것을 바라고,
고의로 어느 쪽에도 기울이는 일 없이,
또한 자기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미리 그들 자신에게 있어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전부 승낙하고
자기 선택을 천주의 선택에 합치시켜,
천주 편에서 그들에게 초래되는 모든 일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에서 성립되고 있다.」
(「내적 영혼의 안내」중「천주의 자녀의 자유에 관해서」)라고.

p.573

위탁은 우리를 자기 자신에 대하여,
더구나 신심(信心)의 행위에 있어서까지 자유로운 이로 한다.

실제, 거룩한 위탁은,
천주의 뜻이 아닌 모든 일에 대하여
완전한 무관심 안에 우리를 확립한다.


그러므로,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가 가르치는 것과 같이,
「다만 천주의 의지만 성취된다면,
정신은 이미 그 밖의 일에 번민되지 않는다.」

따라서 마음은 자유가 돼 있다.


「그는 위로에 애착하지 않고,
또한 육신의 나약함이 허용하는 유화(柔和)로써
모든 고뇌를 감수한다.

나는 그가 위로를 좋아하지 않고,
또한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영적 수업(靈的修業)에 애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일 질병,
그 밖의 예기하지 않았던 일에 방해된다 하드라도,
그것을 조금도 한탄하지 않는다.

나는 또한
그가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에 애착하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그것이 천주의 뜻이라고 알려지지 않는 동안에는
그는 결코 신심업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필요하고
또는 애덕 혹은 순명에 의해서 천주의 뜻이라고 알았을 적에는,
조금도 꺼리지 않고, 온전히 자유로 그것을 중지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예컨대 묵상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될 귀찮은 사람을 만나드라도,
조금도 화를 내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의 소망은 다만 천주를 섬기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묵상을 하는 것도,  남이 귀찮게 하는 것을 인내하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로 천주께 대한 봉사임이 틀림 없지만,
그러나 남을 인내하는 것은 현재 천주의 그에 대한 소망이시다. 」


자기 취미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날 때에도,
그것에 의해서 성내는 일이 없다.
그는 자기 경향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다만 천주의 뜻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거룩한 위탁의 습관은
「천주의 지극히 사랑하시는 자녀들의 복된 자유,
즉 천주의 의지가 알려진다면,
이에 온전히 따를 마음의 완전한 해방을 그에게 획득시켰다」.
(프란치스꼬.살레시오 「서간」390) p.5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