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8
102. 신에 의해서 축복받지 않으면,
비(卑)금속이 현자의 돌에 의해서 황금으로 변질되지 않으면,
거기 언제나 「나는 행위자」라는 환각적인 비전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환각적인 비전이 멈출 때까지
「나는 좋은 일을 했다」「나는 나쁜 일을 했다」는
이 이원적(二元的)인 차별심이 계속될 것이다.
마야란 바로 이 이원적인 차별심이다.
이 세계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이 이원적 차별심 때문이다.
그러나 비드야 마야,
저 신성한 힘에 의지하는 사람은 신과 연결될 것이다.
그만이,
신을 체험한 사람만이, 홀로 이 마야의 바다를 건너간다.
「신만이 진정한 지배자다. 신과 연결되지 않고는 우리는 아무일도 할 수 없다.」
---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육체의 차원 속에서도 오히려 자유롭게 될 것이다
'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36 / 5. 학문의 속박 □ 학문을 위한 학문은 황무지와 같다 (0) | 2016.09.28 |
---|---|
산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34/ 4. 에고와 이기주의로서의 마야 □ 깨달은 사람의 에고 (0) | 2016.09.25 |
산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32 (0) | 2016.09.25 |
산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31 / 4. 에고와 이기주의로서의 마야 □ 에고를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0) | 2016.09.19 |
산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30 / 4. 에고와 이기주의로서의 마야 □ 에고를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0) | 2016.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