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산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31 / 4. 에고와 이기주의로서의 마야 □ 에고를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은가루리나 2016. 9. 19. 01:58


p.27



99. 신의 종으로서의 <나>인 사람의 느낌과 감정은 

그 질적인 면에서 어떻게 다른가.


이 확신이 진실하고 진지한 것이라면

거기 오직 그 이전의 느낌과 감정은 그 형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신의 종으로서의 에고, 신봉자로서의 에고가 남아 있다 하더라도 

신을 체험한 사람은 상처를 입지 않는다.


개적인(小我的인) 모든 고통은 그에게서 사라져 버린다.


칼은 <현자의 돌>**에 닿음으로써 황금으로 변한다.

에고는 이전의 형태만 남아 있을 뿐 그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100. 자부심을 느낀다면 

「나는 신의 아들이다」「나는 신의 종이다」라는 생각으로 자부심을 느껴라.


위대한 사람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신 앞에서 철부지 아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만심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의 모든 세력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다.

그것(그들의 세력)은 모두 신에게 속한 것이며 신으로부터 온다.



101. 신념과 확신에 찬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신의 의지에 의해서 행한다.

그 자신을 신의 손에 쥐어진 악기로 여긴다.

그는 이 삶 속에서 오히려 이 모든 속박으로부터 풀려난다.

「신이여, <나>라는 이 악기를 통해서 당신의 뜻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러나 신을 모르는 사람은 말한다.

「그것을 해 낸 것은 바로 나다.」



102. 신에 의해서 축복받지 않으면,

(卑)금속이 현자의 돌에 의해서 황금으로 변질되지 않으면,

거기 언제나 「나는 행위자」라는 환각적인 비전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환각적인 비전이 멈출 때까지 

「나는 좋은 일을 했다」「나는 나쁜 일을 했다」는 

이 이원적(二元的)인 차별심이 계속될 것이다.


마야란 바로 이 이원적인 차별심이다.

이 세계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이 이원적 차별심 때문이다.


그러나 비드야 마야, 

저 신성한 힘에 의지하는 사람은 신과 연결될 것이다.

그만이, 

신을 체험한 사람만이, 홀로 이 마야의 바다를 건너간다.


「신만이 진정한 지배자다. 신과 연결되지 않고는 우리는 아무일도 할 수 없다.」

---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육체의 차원 속에서도 오히려 자유롭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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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卑금속을 황금으로 변질시킨다는 전설상의 돌